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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가능성으로만 남은 세계 – 토머스 핀천, 『제49호 품목의 경매』 (김성곤 역, 2007, 민음사)

 

 

 

 

 

가능성으로만 남은 세계

 토머스 핀천, 49호 품목의 경매 (김성곤 옮김, 2007, 민음사)

 

 

 

박 남 희/수유너머 N 회원

 

 

 

 

나에게는 작품이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지금-여기를 예리하게 해부하여 낱낱이 보여주는 작품과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시공간을 상상적으로 구성해보는 작품. 그런데 내 구분법이 참 억지스럽다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토머스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는 두 종류 중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49호 품목의 경매또 다른 세계가 이 현세로 침입해 들어오는”(156) 경우를 보여준다. 핀천은 여타 유토피아 장르처럼 다른 세계를 지금-여기와 분리시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속에 다른 세계를 집어넣는다. 그런 이후에 주인공이 발 딛고 서있는 세계가 지금-여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세계도 아닌 경우를 만든다. 둘 다 아니거나 혹은 둘 다 인 세계. 49호 품목의 경매는 지금-여기 속에 감춰진 다른 세계를 찾아내려는 주인공 에디파 마스의 혼란스러운 추적을 보여준다.

 

 

 

 

어느 여름날 오후에 약간 취한 채로 집에 돌아오니 에디파에게 편지가 와 있었다. 에디파가 옛 애인 피어스 인버라리티의 유산관리인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편지. 그녀는 슬프기보다 차라리 당혹스럽다. 자신이 왜 유산관리인으로 지정되었는지 영문도 모르겠으며, 불현듯 떠오른 그와 함께한 기억은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다. “새로운 것을 향해 간다는 느낌도 없이”(25) 에디파는 피어스의 유산을 향해 떠난다. 피어스가 남겨놓은 유산들 속에서 에디파는 미국의 이면에 감추어진 어떤 거대한 조직이 있음을 직감하고, 이윽고 단서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에디파는 로스엔젤레스 근처에 있는 샌나르시소에 도착한다. 그곳엔 요요다인 우주공학 회사처럼 피어스의 유산들이 곳곳에 퍼져있다. 에디파는 요요다인 공장의 사람들이 자주가는 술집 스코프에서 매듭지어진 나팔모양의 기호와 ‘WASTE’라는 약어가 적혀있는 메시지를 보게 된다. 그것은 미국 공식 우편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메시지였으며, 그곳에서 미국 민간 우편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을 만난다. 이윽고 그녀는 인버라리티의 호수에 얽힌 이야기와 전령의 비극의 줄거리와의 연관성을 직감하며, 전령의 비극에 등장하는 트리스테로라는 단어와 모종의 연관성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녀는 이러한 연관성을 찾아서 관련된 흔적을 쫓게 되고, 자신이 발견한 것이 미국 공식 우편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W.A.S.T.E.라는 비공식 우편 제도를 사용하는 일종의 지하네트워크인 트리스테로임을 깨닫는다.

 

 

에디파는 트리스테로의 실체를 포착하기 위해 기호들을 모으고, 그 기호들의 흔적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녀가 기호들을 추적하면 할수록 트리스테로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트리스테로의 존재여부조차 희미해진다.

 

 

에디파는 이 모든 것의 마지막에(만일 마지막이 찾아온다면) 그녀 역시 수많은 실마리들과 공공연한 사실들, 어떤 암시만을 기억하게 될 것이며 중요한 진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 아닌지 걱정했다. 그 진실들은 그녀의 기억이 붙잡으려 할 때마다 어쩐지 너무나 투명해 보였고,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오면 언제나 과잉노출로 인한 공백을 남기며 그 자신의 메시지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해 버리는 것 같았다. (123)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에디파에게 주어지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중요한 무엇을 암시하는 것 같지만,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모르는 메시지들뿐이다. 그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트리스테로의 존재여부를 확신할 수 없기에) 트리스테로의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트리스테로와 관련된 여러 가능성들뿐이다. 에디파에게 남겨져 있는 가능성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에디파가 편집증 환자여서 그녀가 트리스테로라는 환상적 허구를 구성한 경우, 실제로 트리스테로라는 존재가 있는 경우, 인버라리티가 에디파를 속이려고 악의적으로 음모를 꾸민 경우, 마지막으로 인버라리티가 에디파에게 트리스테로의 존재를 알려주려고 하는 경우.

 

 

에디파는 트리스테로와 관련된 제49호 품목을 쫓아 경매장에 왔다. 트리스테로를 쫓는 추적 과정이 한참 고조된 순간, 트리스테로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의 직전에서 소설은 끝이 난다. 결국에 트리스테로라는 숨겨진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찾아내려는 시도와 그것의 좌절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핀천은 차라리 질서들을 전부 거두어 가버린다. 이렇게 세계의 모든 질서를 물러나게 해놓고, 에디파를 통해 온갖 가능한 경우들을 중구난방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제기된 가능한 경우들 중 어느 것도 현행화되지 않는다. 핀천은 세계를 가능성으로만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