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_철학.사회

[장자로 보는 삶] 살아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살아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담 연(수유너머104 장자세미나 튜터)

 




껍데기는 실질을 반영하지 못한다名也, 實之賓也

나는 취직 잘되는 과에 가야 한다는 어른과 고교 교사의 강요로 적성에 맞지 않는 과를 다니다 대학을 자퇴했다. 방황 끝에 23살이 돼서야 수능을 다시 보고 철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10년은 서양철학을, 그 뒤 10년은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박사를 마쳤다. 지금 사회적 시선은 나를 장자철학 박사라는 틀 안에 두고 이것이 내 정체성이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날 괴롭히는 문제를 풀기위해 공부했고 이를 계기로 만난 이들과 살아왔다. 고민이 바뀌면 공부 영역이 변했고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이 때문에 특정분야 학위라는 고정된 틀은 내 정체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그건 2년 전에 벗어버린 죽은 허물, 껍데기다. 지금도 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움

요즘은 적잖이 멍하다.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20년 간 물고 늘어졌던 문제는 박사논문을 쓰면서 풀었다. 처음 철학을 공부한 이유는 삶이 고통스러웠고 죽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런 것인지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교육학, 철학,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우연히 장자를 만났고 그를 통해 내가 변했고 어느덧 20년간 고민하던 문제가 풀렸다. 지금은 지향해야 할 목적이 사라져서 평온하고 행복하지만 왠지 공허하다. 이제는 뭘 해야할까? 유명해지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필요한 영웅이 되서 바쁘게 돌아다니며 쓰이는 것? 지나치면 병이 될 뿐 큰 관심사는 아니다. 그럼 이제 뭘 해야할까?

 

부조리와 절망

사실 나는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30대 초반에 박사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학기에 박사과정을 그만뒀다. 이유는 날 가르치는 몇 학자들 때문이었다. 약자의 인권, 타자의 권리를 옹호하라고 외치는 학자들이 멋진 이론으로 잘 꾸민 글을 쓰고 강의하며 돈을 벌면서 정작 일상에서는 가까운 약자의 인권을 유린하고 차별을 일삼았다. 앞서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은 연구비를 받는 조건으로 포섭되었고, 거부하면 조용히 제거됬다. 묵인하고 따르면 생계가 해결됐기에 여러 명이 문제를 보고도 외면했다. 말과 행동이 다른 학자는 어린 젊은이들을 절망시킨다. 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만뒀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결단해서 그만뒀다기보다는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 숨 쉬기가 어려워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죽을 것 같았다. 살기 위해 그 곳을 떠났다. 내 영혼을 지키고 싶었고 나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이후 몇 달 간 전국을 떠돌았다.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해결방법을 몰라 그 현실을 도피했다.

 


먼저 인간이 되라, 그러면 제대로 안다有眞人而後有眞知

방황 끝에 우연히 수유너머 연구실을 알게 됬고 몇 년간 이것 저것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박사를 마치고 싶어서 새로 들어간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수업을 듣던 중 참된 인간이 된 후에야 진정한 깨달음이 가능하다(有眞人而後有眞知)’는 장자 말을 들었다. 충격을 받았다. 말과 글로 사기를 치는 몇 인간들에게 받은 상처로 내가 하고 싶은 철학 공부마저 포기했는데 문제를 풀 방법이 장자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대로 사는 훈련을 하는 공부가 가능할 것 같아서 전공을 동양철학으로 바꿨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면 내 진심을 왜곡없이 살아내는 실천적 힘이 생길 것 같았다. 이후 10년은 동양철학 공부에 매진했다.

 

왜 믿는 대로 살지 않는가?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느낀 제도권 내 서양철학 연구자들의 문제 중 하나는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가 자기 믿음이 반영된 이론을 살아내려는 노력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연구비를 타기 위한 목적, 혹은 교수를 목표로 실적을 올리기 위한 논문 쓰기, 책 쓰기에 기를 쓰는 학자들은 정교한 이론의 칼을 갈고 다듬어 실적 채우고 연구비를 타는 데는 능숙해진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고 주장한 그 말들의 양만큼 스스로가 믿음을 실천하며 사는가의 문제는 쉽게 간과한다. 자기 주장이 실제 행동과 태도에 부합하는가의 문제는 연구비를 타거나 교수가 되기 위한 평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의 인권이나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라고 강의하고 글을 쓰는 학자가 실제 삶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 먹고살기 위한 일이라고 변명한다. 직업 철학자의 한계다. 모든 학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양심적인 삶을 사는 내가 존경하는 철학 연구자도 많다. 하지만 일부 이런 학자들이 서로의 잘못을 눈감아주며 사회 지도층을 점유하면서 한국 사회의 불신은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밑에서 이런 행위를 보고 배운 젊은이들은 문제가 있어도 침묵하면서 생계의 안정을 보장받는다. 한국 사회의 비윤리성이 확산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돈과 명성을 위해 진심과 양심을 버리는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이런 판에는 배운 이론을 앵무새처럼 전하는 직업 이론가가 있을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철학적 활동을 하는 철학자는 없다.

 


살아있는 철학적 활동, 철학적 삶

그렇다면 살아있는 철학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철학자들을 공부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철학적 활동이란 자신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이 속한 사회 문제를 자기 고민으로 느끼는 인간이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쓴 노력의 흔적이라는 점이다. 철학 이론이란 그렇게 나온 실천적 노력의 결과다. 이 때문에 문제 해결의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철학은 기본적으로 윤리적 행동이며 자기 시대를 고민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철학자는 시대의 자식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그 안에 내가 풀고 싶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면 그는 철학적 삶을 산다. 직업을 생계 해결 뿐 아니라 문제를 푸는 수양의 도구로 삼고, 실천적 노력을 기울여 나온 결과를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자는 이미 철학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철학자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이유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비판은 하면서도 자신이 그 문제를 풀려고 직접 뛰어들어 노력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철학자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철학적 활동을 하는 철학자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 이론을 십수년간 공부해서 수입해 전하는 앵무새 지식 전달자가 아니다. 그 외국 이론은 그 나라 문제 해결의 결과지 우리 실정에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라는 삶의 장에서 나만의 고유한 노력으로 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 그 노력의 결과인 이론으로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보는 자,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철학자의 탄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앞으로 장자와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실행의 궤적을 글로 정리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