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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칼 슈미트 입문 강의] 5강 네번째 부분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5강. ‘결단’ : ‘주권’과 ‘정치적인 것’



이어진 4장에서는 우선 그 어떤 대립이든 어떤 한도를 넘으면,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곳까지 가며, ‘정치적’ 대립이 된다는 아까의 논의를 반복한 뒤에, 34頁의 중반부에서 “맑스주의적 의미에서의 ‘계급’조차도, 그것이 이 결정적 단계에 도달하는 경우, 즉 그것이 계급 ‘투쟁’을 진지하게 행하고, 상대 계급을 실제의 적으로 취급하고, 국가 대 국가이든, 한 국가 내부의 내란이든, 그것과 싸우는 경우”에는 ‘정치적 세력’이 된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즉, 맑스주의의 계급투쟁론을, 맑스주의의 이론적 근거인 유물론, 하부구조 결정론과는 전혀 별개인, ‘정치적인 것’의 관점에서 반쯤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 이해대립 자체는 ‘친구/적’ 관계는 아니지만, 맑스주의자가 ‘계급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강도를 더욱 높인다면, 결과적으로, 세계적인 ‘친구/적’의 정치적 대립이 될 가능성은 있다는 것입니다. 『독재』나 정치신학』에서도 그렇지만, 슈미트는 «적»인 맑스주의자나 아나키스트가 싸우는 태도를 꽤 높은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6頁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 다른 영역에서의 대립이 강도를 높임으로써, ‘정치적인 것’을 산출한다는 논리의 정리로서, 재미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속은 그래서 항상 결정적인 인간의 결속이며, 그러므로 정치적 단위는 대체로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서는 항상, 결정적인 단위인 것이며, 또한 예외적 사태도 포함해 결정적 사태에 대한 결정권을 개념상 필연적으로 항상 쥐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주권을 가진’ 단위인 것이다. 

[홍 : 따라서 그 결집은 언제나 척도가 되는, 인간들의 결집이며 정치통일체는 그 때문에 언제나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고 척도가 되는 통일체이자 결정적인[척도가 되는] 경우에 대한, 그리고 또한 지금이 예외상태인가 여부에 대한 결정이 개념의 필연성에 따라 언제나 그에게 속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 ‘주권적’이다.]


‘결정적인’은 원어로 <maßgebend>입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Maß>의 원래 의미는 ‘척도’이며, ‘단위’를 써서 “단위를 규정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권을 가진다”는 원어로는 <souverän>이라는 형용사입니다. 아까 본 대목에서는, ‘정치적인 것’과 ‘예외상태’의 연결이 제시됐지만, 여기서 ‘주권’이나 ‘결정’과의 연결도 제시되고 있기에, 두 개의 텍스트의 연속성이 꽤 선명해집니다. 『정치신학』의 경우는 국가와 법질서의 존재를 전제로 한 뒤에 법질서에 규범으로서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궁극의 결정자로서 ‘주권자’를 정의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주권’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것’에 근거하여 결속하고 있는 ‘친구’는 ‘공적(公敵)’과 생존을 걸고 대치하는 ‘단위’이기에, ‘예외적 사태’에 있어서, 마음먹고 행위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결정의 심급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주권’입니다. ‘주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치적 단위’로서, 스스로의 ‘친구/적’ 관계를 정하고, 궁극의 ‘예외사태’로서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통일 행동을 취하기 위한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권’과 ‘정치적인 것’은 ‘결단’이라는 점에서 불가분하게 연결된 것입니다.



질의응답 


Q öffentlich는 politisch의 의미에 가깝습니까? 

A ‘정치적인 것’은 ‘공적(公敵)’인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정치적 politisch’과 ‘공적(公的) öffentlich’이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슈미트는, ‘공적(公的)’에 독자적인 정의는 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공법/사법’이라고 할 때의 ‘공(公)’의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법’란 ‘국가’의 활동에 관련된 법이라는 뜻이니까, ‘공적(公的)’이라는 것은 국가에 관련된 것이라고 이해해야 좋을지도 모릅니다. ‘국가’라는 개념을 사이에 두고, ‘정치적’과 ‘공적’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나 아렌트라면 ‘공개되어 있다’거나 ‘출현하고 있다’라는 뜻을 강하게 포함한 ‘공공적’과, ‘정치적’을 거의 등치시키며, ‘사적/사적·비밀적 privat’와 대치시키지만, 슈미트의 경우, ‘공적’에 그런 의미는 뚜렷한 형태로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Q 사소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친구/적’ 관계는 우선 적의 인정이 처음에 있고, 적이 아닌 것으로서 친구가 정의된다면, ‘적/친구’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이물질을 우선 인식하고, 그렇지 않은 것으로서 자기가 정의된다는 것이니까요. 

A 알레르기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요,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에스포지토(1950~)가 ‘항체화[면역화] immunizzazione’를 통한 자기의 예방이라는 관점에서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를 재파악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네요. ― 고단샤의 메치에에서 오카다 아츠시 씨(1954~)의 번역으로 󰡔근대정치의 탈구축󰡕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슈미트가 친구/적이라고 말하면서, ‘친구’ 얘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주 지적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얘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의 적극적인 정의는 하지 않습니다. ‘적’과의 빼도 박도 못하는 대립관계를 강조하고, 그것으로부터의 반사로, 네거티브하게, ‘자기’=‘친구’를 규정한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친구’라는 순서로 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친구’와 ‘적’의 대립관계를 인식하는 ‘나’가 항상 ‘친구’ 편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중립적인 관찰자가 아니며, ‘적’에 직면해서, ‘친구’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한다. 


Q 방금 것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오늘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친구/적 관계가 완전히 소멸하는 세계에 관해 언급하셨고, 그 세계에서는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 아니라, ‘자기’도 성립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를 자각하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죠. 외부가 없으면 ‘나’도 뚜렷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친구/적 관계는 없어지진 않을 것 아닌가. 슈미트는 이 점을 파고들어 논의하지는 않습니까?

A 슈미트는 순수철학자가 아니기에, ‘자기’에 대해 그렇게 파고들어 논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이치를 파고들면, ‘나’에게 있어서 공존하기 어려운 ‘타자’가 이 지상에 있는 한, ‘정치적인 것’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되겠네요. 

   다만 30년대 후반 이후의 슈미트의 텍스트에서는, ‘친구/적’ 개념의 실존적·한계 개념적 측면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게 됩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대지의 노모스󰡕가 되면, 오히려 ‘친구/적’ 관계를 급상승시키지 않는, ‘유럽의 공법’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공적(公敵)’은 이 질서 속에 위치지어지는 ‘올바른 적’으로 변환됩니다. ‘올바른 적’으로서 인정함으로써 전쟁의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제 절대적인 ‘타자’가 아닙니다. 

   ‘유럽의 공법’이 있는 덕분에, ‘적’은 절대저인 위협을 주는 타자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유엔 같은 것이 «전쟁세력»을 범죄시하는 체제가 되면, «적»은 ‘공적(公敵)’이 아니게 되며, 완전히 타자화되며, 전쟁이 어디까지나 급상승해질 우려가 나옵니다. «범죄자»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파악할 수 없는 “타자”입니다. 슈미트는 순수한 적대 관계에 이르지 않기 위한 틀을 모색하게 됐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모두 없애려 한다면, 오히려 ‘친구/적’ 대결이 첨예화되기에, 오히려 ‘친구/적’을 대지의 노모스에 의해 억제하려고 했습니다. 

   포스트모던 좌파가 슈미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처럼 보편적 정의의 이름 하에 “적” 없는 세계를 만들려고 하자, «적»이 전면적으로 이질분자화[異分子化], 비인간화되며, 그에 대한 투쟁이 더욱 가혹해진다는 것을 그가 일찌감치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슈미트는 어떤 의미에서, 타자의 존재의 불가피성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좌파와 통합니다. 물론, 적대하는 것으로서의 ‘타자’를 인식한 뒤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포스트모던 좌파와 슈미트는 정반대 방향에서 사고하는 것입니다만. 


Q 전쟁을 완전히 없앤다는 생각이 최종적으로는 전쟁이 있어도 괜찮다는 사람들을 섬멸하는 최종 궁극 전쟁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A 슈미트에게 ‘적’란 자신과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명목이든, “우리는 너를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해버리면, 그 상대는 단적으로 “적”이 되어 버립니다. 현대사사에서 자주 말해지는 것입니다만, 이항대립도식을 해체하기 위해, 그 한쪽 극을 배제하려고 하면, 이항대립은 더욱 강화됩니다. 


Q hostis에 대해서. 어디선가 호스피탤리티의 어원이기도 하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의 인간을 맞아하는, 즉 hostis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의 환대 제도가 고대 그리스 등에서는 있었던 것 같아요. 공동체가 병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적’이 자리 매김된다는 것입니까? 

A hospitality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hostis>로까지 당도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이에, 손님을 환대하는 자, 호스트를 의미하는 <hospes>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 같군요. <hospes>는 <hostis>와, ‘주인’이라든가 ‘힘 있는 자’를 의미하는 <pot> 혹은 <pet>의 합성어입니다. <hostis>에는 ‘낯선 자’라는 의미도 있으므로 <hospes>은 ‘낯선 자를 맞이하는 주인’이라는 것도 됩니다. <hospes>가 맞아들이는 자이기 때문에 [낯선 자=손님=환대를 받는 자]라는 게 되죠. 현대사사예의 ‘환대’론은 ‘환대’를 받는 것은 본래 ‘타자’라는 게 강조되네요. 

   슈미트는 당연히 ‘손님’으로서의 ‘적=타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환대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생겨나지 않겠죠. <hostis>와 공동체의 관계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친구=우리’와 실존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니까, 구체적으로는 민족, 국민, 인종, 종파 같은 게 예상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죠. 

    슈미트에는 ‘민족’이든 ‘국민’이든 ‘인민’이든, 정치의 단위가 되는 공동체가 하나로 정리된 ‘삶’을 살고 있고, 거기에는 고유한 ‘라움’의 질서가 있다는 이미지를 가진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결정된 생존양식, 생태계를 유지해 온 집단 균질적인 공간에 다른 생태계, 이물질이 들어오면, 거부반응이 일어나고 불가피하게 ‘친구=적’ 대립이 일어난다. 아까의 표현으로 말하면 항체화 작용이 생긴다.


Q 확실히, ‘공적(公敵)"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꾸로 말살 등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대립‘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A 대립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대립’이라는 사실을 말소할 수밖에 없어진다. 즉, 대립하고 있는 «상대»의 존재를 말소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 때, 말소의 결단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대립의 한쪽 당사자가 아니라 더욱 높은 곳에 있어서 전체를 내다보며 판결을 내리는 법관의 위치하게 된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비판적으로 다시 보기 위한 심급도 없어집니다.


Q 친구/적이라는 개념이 있으면, 바로 대립하고 있는 당사자의 병존 상태를 허용할 수 있다. 

A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꼭 어느 한쪽의 당사자이며, 결코 ‘정치적인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어떤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한 어떠한 대립의 강도가 커지고, ‘친구/적’에까지 이를 가능성이 항상 있다. ‘친구/적’의 전쟁에서, ‘친구’가 이기면 좋겠지만, 저버려서 자신들이 섬멸될 우려도 있다.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살아남겠다고 한다면, 철저한 응징 등을 목표로 하지 않고 ‘적’과의 관계를 틀 잡는 쪽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친구’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끊임없이 위협으로서 부상하는 ‘적’과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과 거래하고 서로 손대지 않으려 하는 선택지도 있을 수 있다. 공존은 못하더라도, 말씀하신 것처럼 병존상태는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악성의 세균이 없는 세상이 있으면 좋겠지만, 악성 균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하면, 착한 세균도 죽일지도 모르고, 강력한 약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몸 자체까지도 파괴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적당한 곳에서 악당을 허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Q 경제적인 경쟁상대와 공적(公敵)은 구별돼야 한다는 말인데, 실제의 전쟁은 아마도 경제적 이해대립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A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지만, ‘정치적인 것’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생깁니다. 경제나 종교의 대립이 ‘정치적인 것’이 되며, ‘정치적인 것’이 ‘전쟁’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 대립이 일정한 강도를 넘어서, 생존을 건 대립이 된 시점에서 ‘적’이 되는 셈입니다. 슈미트는 분석철학처럼,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로부터 ‘전쟁’의 본질을 추출하는 것이지, 현실의 전쟁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Q ‘전쟁’의 존재방식은 상황에 따라 변화합니까?

A 이 시점에서는 뚜렷하지 않지만, 역사와 함께 변화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변모한 것 같아요. 몇 번인가 화제로 삼고 있는 『대지의 노모스』는 기술의 진보에 의한 전쟁의 양식의 변화가 꽤 자세히 논의되고 있으며, 『파르티잔의 이론』 등도 그렇습니다. 『파르티잔의 이론』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써졌으며, “정치적인 개념에 대한 중간 고찰”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뜻밖일지도 모르지만, 슈미트는 본래의 의미의 ‘파르티잔 partisan’을 높이 평가합니다. ‘파르티잔’은 “당파에 속해 있다(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partigiano>에서 파생된 말로, 정규군대에 속해 있지 않지만, 외국군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군에 저항한 스페인의 게릴라가 그 원형이라고 합니다. 토지와 결부된 생존양식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파르티잔’입니다. 슈미트에 따르면, 레닌 등의 맑스주의자가 ‘파르티잔’을 이용한 혁명 전략을 전개하게 됨으로써 의미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공산주의의 파르티잔은 세계 혁명을 목적으로 하여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기에, 토착성을 갖고 있지 않고, 어디서 나올지 모릅니다. 본래의 파르티잔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쟁을 하기 때문에, 토지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군사기술의 변화로, 투쟁 방식이 변화하고, 심리적 요인도 가미된 복합적인 요소를 띠게 됩니다. 

    ‘친구/적’의 대립이 가장 중심적인 부분에 있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형태로 현상하고 전개되느냐에 관해서는 변주(variation)가 있습니다. 국가가 결속의 초점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민족이나 계급이 그렇게 될 경우도 있다.


Q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라고 파악해도 좋습니까? 미국이 전 세계에 분쟁이나 인권 침해 등을 이유로 전쟁을 벌이는 전제에 있는 것은, 인간은 기본적으로는 함께 나눠 갖는=이해하는 것이라는 인간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간에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심하게 다투기도 합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서로 이해하지 않으며, 어떻게 부대낄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어떻게든 설득하고 뒤섞이려고 한다. 근본적으로 뒤섞일 수 없다고 상대를 인식하면, 공존이 아니라 어떻게 병립해 가느냐라는 전략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A 그 경우에도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죠. 병립하고 있을 뿐이라면, 언젠가 균형이 깨지고, 상대방이 쳐들어올지 몰라서 불안을 안은 채가 된다. 그래서 슈미트는 전쟁은 일어날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것을 장소적으로 한정하는 구조를 생각했던 것이죠. 

    덧붙여서, 서로 뒤섞이고, 타자들의 접촉에서 잡종적인(hybrid) 정체성이 산출된다는 것은, 포스트모던 좌파가 자주 말합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정체성의 변용 같은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Q 가라타니 고진(1941~)의 논문 「형식화의 문제들」(1981)의 문제설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것이나 미적인 것, 도덕 등을 형식화해서 생각하려는 사고방식을 문제로 삼은 논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정치의 근원을 처절하게 형식화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슈미트는 추구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A 법실증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형식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법실증주의의 전형인 켈젠의 순수법학은 수학의 공리계처럼 ‘근본규범’에서 모든 법규범을 도출시킨다는 식으로 ‘형식화’합니다. 슈미트는 오히려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의 존재를 제시한 뒤에, 이로부터 친구/적, 국가, 주권, 결정, 질서, 예외/통상, 법규범 등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도출하려고 하는 것 같군요. ‘정치적인 것’을 일단 형식적으로 정의하면, 그 정의에 충실하게, 전체의 논리를 구축해간다. 다만, 예전 강의에서 봤듯이, 슈미트의 ‘형식’은 이념을 현실로 매개하는 기능이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의 ‘법’의 동적 형식성을 탐구한 뒤에, (‘근본규범’을 산출하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에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그런 슈미트의 집착이 국제법으로 향하게 한 것이죠. 그의 사고의 토대는 헌법이라기보다는 국제법적 논의와 만난다고 생각했습니다.

A 국제법학자이기도 한 켈젠 등은 근본규범에서 모든 법규범이 도출되며, 그것이 현실의 법질서와 일치하는, 세계국가적 이미지로 묘사하려고 합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보편성 지향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보고 있던 것입니다. 그는 추상화된 ‘국제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유럽 공법’에 대해 말합니다. 상대를 ‘올바른 적’으로 인식하고, 자신들의 대지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투쟁의 방식을 ― 대지의 질서에 맞게 — 제한하기 위한 기법[作法]입니다.


Q 호이징가(1872-1945)가 『호모 루덴스』(1938)에서 “놀이의 한 형태로서의 전쟁”이라고 말했습니다. 놀이를 위한 규칙이 있고, 그 안에서는 열심히 하지만, 놀고 있을 때와 놀고 있지 않을 때를 구별한다. 그런 이미지에 가까운 것일까요?

A 슈미트는 어떤 대목에서, 중세에서의 기사 등의 투쟁을 그리스적인 ‘경합[闘技] agon’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호이징가도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을 ‘경합[闘技]=놀이’로 보고 있기에, 양자의 공통성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슈미트 연구자인 코가 케이타(古賀敬太) 씨가 이를 지적했습니다. 다만 코가 씨는 동시에 슈미트의 ‘친구/적’ 관계는, 본질에 있어서는 ‘유희’와 다르다고 말씀하시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그려진 ‘친구/적’ 관계가 베이스라고 하면, 가장 근본에 있는 것은 서로의 실존을 건 극도의 대립으로, ‘놀이’라는 요소는 그 적대 관계를 억누르기 위한 질서 형성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이징가는 인간의 본성에 ‘놀이’라는 요소가 있음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지만, 슈미트에게는 이런 인간본성론적인 전제는 없습니다. 굳이 말하면 드 메스트르나 코르테스 등을 평가하는 것부터,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죄’와 ‘놀이’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은 기독교 사상사의 관점에서 재미있는 것 같은데, 너무 허술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되니까, 향후의 과제로 해두죠.

   30년대 후반 이후의 슈미트는, 몇 번이나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이 절대전쟁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국지적인 구조에 대해 말하게 됩니다. 거기서 멸종의 위기가 당장 회피되면, 규칙에 근거한 싸움이라는 놀이적인 요소가 나온다.


Q 그런 사고방식은 헤이그 육전 조약(Hague Regulation land warfare) 안에 민간인이나 포로 취급 등에서 나오죠. 

A 슈미트는 오히려 헤이그 육전 조약 무렵부터 이상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전쟁을 ‘범죄’로 보는 사고방식이 대두하고, 제1차 대전 후에 빌헬름2세를 범죄인으로 기소[소추]한다는 얘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정의로운 전쟁”론이 현대적인 형태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슈미트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대지의 질서와 관계없이 보편주의적인 규범에 기초하여 전쟁 자체를 억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Q 적과 대립했을 때, 이질적인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든가, 무리하게 동일화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는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기반으로 하는 곳이 포스트모던의 사상과 매치하는 것입니다. 슈미트의 이름을 포스트모던 계열의 저작으로부터 알았으니까 그런 노선에서 읽으려고 합니다. 실제의 슈미트는 그런 독해방식을 거부합니까?

A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타자’를 직시하는 것이, 비주체화된 윤리를 산출하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보고, 슈미트를 재평가하는 낌새가 있는 포스트모던 좌파와는 다르며, 슈미트 자신은 꽤 무미건조하게 ‘타자’를 떼어 내는 것 같습니다. 슈미트는 일부러 비가시화된 타자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하지 않을 거예요.


Q 호스트와 hostis의 어원이 같다는 점에서 타자를 손님으로서 이질성을 존중하는 뉘앙스가 있을까라고, 그만 기대하게 됩니다. 

A 받아들일 수 없는, 위협을 주는 ‘타자’에 대해서, 경외심을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환영’은 하지 않겠죠.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를 ‘정치적인 것’에 자각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는 «환영»할지도 모르지만.


Q 타자의 눈높이에 맞춤으로써 협상 상대로서 인정하게 된다고나 할까. 

A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타자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지만, 타자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눈높이란 타자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생각한다는 것이니까요. ‘타자’ 그 자체라기보다는 ‘타자’와, 우리의 거리를 규정하고 있는 질서를 주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