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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 개 잡는 법 - 세월호와 언론

[이슈&리뷰]


개 잡는 법 -세월호와 언론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이태리 뉴ㅡ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JTBC 예능 중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각국의 정상이 아닌 민간인이 참여해 비(非) 정상회담이라는 컨셉으로 매주 다양한 주제를 가지로 설전을 벌이는 프로그램이다. 외국인이라면 아무나 참여할 수 있지만 일단은 한국말을 기가막히게 잘해야 한다. 그래야 ‘지들끼리 정상이라고 우기면서’ 토론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3일은 토론주제는 각국의 TV 문화였다. 이 중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하고 있는 알베르토가 “이태리 뉴스”의 특징을 말한다. 


“이태리 뉴스 특징은 정치적 성향이 강해요. 보수적인 채널, 진보적인 채널, 아예 국가 입장이 채널이 확연해욥.”


“그런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나요?”라는 성시경(사회자)의 질문에, 갑자기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이야기를 꺼낸다. 

 




“예전에 심각한 상황이 있었는뎁, 

베를루스코니가 방송국 사장님이셨는뎁, 

그분이 총리가 되셨을 때 뉴스에서 정치에 대한 뉴스가 안나오고 바보같은 뉴스만 나오는 거에욥. 

예를 들어 어떤 강아지가 집에서 도망갔는데, 3일 후에 돌아온 거에요. 이런 이야기가 뉴스 메인으로 나와요. 그리고 개 주인을 인터뷰해욥. 주인이 인터뷰에서 ‘아 정말 힘들었는뎁..’ 그런 뉴스만 나와요. 그리고는 정치에 대한 뉴스는 아주 쪼금 살짝 나와욥.”


순간 와-하고 웃음보가 터진다. 알베르토가 왁자한 웃음소리를 뚫고 덧붙인다. 



“(그 때) 사람들이 난리났어요. 젋은 사람들이 TV보지 말자고 했어욥.”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는 미디어 재벌이자 보수적인 정치성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밥도둑 홍준표’처럼 자신의 발언이나 행위가 언론에 자극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즐기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다. 그는 이탈리아 최대 미디어 회사인 ‘미디어셋’을 소유하고 있다. 자신이 소유한 미디어를 통해 정치적 뉴스 대신, “여자 연예인이 애인 앞에서 상의 탈의한 사진을 찍었다거나 누드 달력 촬영현장의 백스테이지 장면을 비춰둔다거나 집 나간 강아지가 3일 뒤에 돌아왔다는 식의 뉴스”(알베르토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도 베를루스코니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를 대대적으로 생산해서 정치적 사안을 덮어버리는 것이 그의 특기다. 


종편의 괴물들이 만든 바보같은 뉴스, 세월호



참여자들이 웃은 이유는 베를루스코니가 만들어낸 바보같은 뉴스의 생소함이 아니라 이질적인 장소에서 날라온 생뚱맞은 낯익음 때문이다. 알베르토의 서투른 한국어투로 전하는 이탈리아 언론의 실상은 빨강에서 초록으로 진화한 ‘이태리 타월’만큼이나 익숙하다. 최근들어 한국사회도 종편을 중심으로 바보같은 뉴스는 차고 넘치게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개발독재 시절부터 악명높은 보도지침은 땡전뉴스를 만들어냈으니, 따지고 보면 빨강 타월이나 초록 타월이나 매한가지 이태리 타월이긴 하다. 그럼에도 최근 1년여간 ‘종편’의 행보는 가히 미디어 생태계를 교란하고도 남을 언론계의 베스와 황소개구리임에 틀림없다. 






세월호 1주기에 맞춰 출간된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강부원의 글, 〈소문의 힘과 일상 미디어의 가능성〉은 세월호와 함께 언론어 어떻게 침몰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세월호의 언론은 “미디어의 위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참사이자 사태”다. 예기치 못한 재난앞에 선 사람들에게 미디어의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온다. 미디어는 대중들로 하여금 사건으로 쏠리게 하고 들끓게 만든다. 정확히 1년 전, 세월호의 첫 보도가 오보로 시작된 것과 함께 미디어 ‘막장쇼’가 펼쳐졌고 언론은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 세월호 보도는 한국사회의 언론들이 어디까지 와있으며, 무엇을 말해왔고, 어떻게 말해왔는가를 압축적이고 인상적으로 보여줬다. 한국사회의 언론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뿐이지 여전히 이태리 타올이었다. 기자+쓰레기=기레기는 물에 빠진 언론에 대한 대중의 새삼스런 경멸이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혹은 '해도해도 너무한다.' 등등등 구구절절하게 잔소리, 쓴소리도 아깝다는 단호한 조롱이다. 


현대 사회에서 재난은 사회적 구조나 부조리한 원인에 연루되어 있다. 천재지변에는 이 사고를 더 증폭시키거나 진압하는 인위적인 인간의 노력이나, 시스템의 결함이 있다. 때문에 언론은 재난의 사이즈나 스펙터클한 사고현장을 전송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원인을 추적해 드러내야 할 역할을 갖는다. 긴급한 재난일수록 예리한 시선과 긴호흡으로 사건의 뒷골목을 후비고 다니는 언론의 본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언론은 정부 발표에만 의존해 사건 현황을 보도했고, 반쯤 잠겨있는 세월호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보도는 넘쳐났지만 동일한 장면과 동일한 말들이 반복되어 전송되었다.  


간신히 구조된 단원고 학생에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며 ‘친구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묻기도 했고, 사지를 겨우 빠져나온 여섯 살 어린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어디에 갔는지 아느냐?’고 묻는 언론은 무엇보다 공포를 확산시켜 국민들의 시선을 사건의 본질을 탐색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듯 했다. 가령, ‘대체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혹은 ‘왜 단 한명도 구조되지 않았는가?’라는 의구심을 삭제하려는 듯이 유족들의 보험금 액수와 악의적인 대학 입학 특혜 논란이 있었고, 골든타임, 에어포켓의 희망고문이 이어졌다.  


세월호 보도에서 클라이막스는 무엇보다 유병언에 내건 현상금 5억원이었다. 

골든타임을 아무 성과없이 보낸 후, ‘구조자 0명’이라는 참담한 결과는 해양경찰조직 해체와 유병언 책임론으로 키를 돌렸다. 여기에 채널A나 TV조선 같은 종편의 활약은 엄청났다. 



파란 점선은 세월호 구조 관련 기사, 빨간 실선은 유병언 관련 기사의 추이다.




‘한겨레21’은 3월 17일자 특집으로 종편의 패널들의 ‘말’을 다뤘다. '종편이 낳은 괴물들의 거친입, 독한입, 쏠린입' 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가 나간 뒤에 어느 익명의 패널이 한겨레21에 메일을 보내왔고, 그 후에 이 패널과의 인터뷰 후속기사가 실렸다. 


이 익명의 패널은 어느새 종편의 괴물이 된 자신을 고백하면서 세월호 보도 중에 언론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는지 언급했다. 




기자 - (종편의 내용이) “공중파에도 영향을 미치나.”


종편 패널 -“엄청나다. 우선 종편이 패널을 키워서 공중파로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경력이 미천하고 전문성도 없는데 종편에서 방송 경력을 쌓은 덕분에 지상파로 영역을 확장한 패널이 생겼다. 둘째, 사건을 특정 바향으로 몰아간다. 종편과 보도채널의 사회부 기자들이 뛰어다니다 재밌는 인물을 발굴할 때가 있다. 사건의 본질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지만 수다를 떨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세월호 사건 때 유병언(전 세모그룹 회장)처럼 말이다. 종편이 하루종일 떠들어대니까 포털에도 기사가 뜨고 시청자의 관심도 생긴다. 그러면 공중파가 저녁 뉴스에 보도해야 한다. 종편이 이슈를 선점하고 선명하게 치고 나가면 공중파가 따라가는 식이다. 때로는 종편 패널이 새로운 정보를 흘리기도 한다.”ᅠ


- 나는 종편 괴물이 되었다. "어느 패널의 고백"(3월 17일, 한겨레21)





세월호 1주년이다. 정부는 세월호에게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듯이 시행령과 보상금을 던졌다. 종편의 입은 다시 바빠졌다. 하지만 이 입은 더 이상 세월호를 들쑤시지 않는다. 


1년전 처음 정부가 보상금과 대학 특례 입학을 내걸었을 때 종편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유가족들은 억울했다. 사람들은 '시체장사'로 특혜를 받게 될 유족들에 분노했다. 1년이 지나 언론은 다시금 '시행령'을 관철시키기 위해 보상금을 들고나왔다. 이번에 유가족들은 입술을 앙다물며 삭발을 했다. 삭발을 한 채 거리로 나와 길바닥에서 잠을 잤다. 아무리 보상금이 적다고 하더라도, 자식들의 시신을 흥정대상으로 내건 부모들이라도, 집단적으로 삭발을 하고 비오는 밤에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며 흥정을 하지는 않는다. 대중들의 일부 시선은 종편과 소위 ‘정통 언론’의 거친 입에서 집단 삭발의 현장으로 이동했다.


루쉰은 무언(無言)의 경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누구를 경멸할 때, 말로써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경멸이 못 된다. 오직 침묵만이 최고의 경멸이다.” 



“그것도 눈깜짝하지 않는 채로의 무언”


침묵이 아니라, 외면이 아니라,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최고의 경멸은 무엇일까?


종편의 독한 입들은 입술을 깨물은 50여명의 삭발들 앞에 풀이 죽었다. 1년 전에 억울하고 분한 유족들이 아니었다. 

'보상금' 프레임은 깨졌다. 










지금 종편은 ‘성완종 리스트’로 바쁘다. 닭들은 주인이 한움큼 뿌려주는 모이를 쫓아 하루종일 쉴틈이 없다. 근혜산성이 무너지고 5만명이 5만개의 국화꽃을 들었어도 이제 그들에게 세월호를 쪼을 입은 없다. 닭들은 여전히 바쁘다. 방금 전까지 쪼아대던 모이를 잊고 새로운 모이를 쪼고 있다. 종편과 이른바 ‘정통’ 언론들은 성완종 리스트를 중심으로 열심히 말을 생산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세월호는 재장전되어 2라운드에 돌입한 듯 하다.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패라


구조인원 0명을 유병언와 구원파로 덮고, 유민아빠의 단식을 일베들의 난동과 유민아빠에 대한 비난들-‘그는 쌍욕을 박근혜 대통령과 경찰에게 마구 해대는 사람이었다!’, 민주노총 조합원-‘그는 선량한 시민이 아니었다!’, 양육비 주지 않는 비정한 아빠-‘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로 또 다시 덮었다. 그럼, 내일은 무엇으로 덮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돌아오면 이완구를 어떤 모양새든 내치고, 특검을 도입해 성완종 추문을 씻어내릴 것이다. 사건의 본질은 '불법 대선 정치자금'인데, 박근혜 대통령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관계 인사들을 엄단하기 위해 법의 칼날을 휘두를 것이다. 언론은 칼을 쥔 자가 누군지 잘 알기에 칼 끝만 열심히 보도할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 사안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 내년 총선까지 끌고가서 ‘정권심판론’을 유권자들에게 내놓기 위해 정치공학적 계산을 하느라 분주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는 세월호 유가족 옆에 새정치민주연합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도 새롭게 던져진 모이 때문에 바쁘다.


그리고 우리도 바쁘다. 루쉰의 ‘눈썹 하나 까딱 않는 무언의 경멸’을 저들의 정치일정에 보내야 할 때이다. 4월 18일의 시위에 대해 ‘경찰 추산 00명이 모였고, 시위는 밤새 이어졌고, 차들은 많이 막혔다.’는 하나마나한 스트레이트 기사를 반복적으로 내보내는 기자들의 손가락에 무언의 경멸을 보내야 한다. 우리는 앙다문 경멸의 힘으로 4월 18일 이후의 행동에 집중해야한다. 1주년이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된다. 좀더 단단해진 세월호 투쟁이 있을 뿐이다. 



1년이 지난 지금, 물 속에 가라앉은 것은 언론과 정부다. 그들은 골든타임을 놓쳤다. 그들이 구조되기 위해서는 세월호의 죽음을 팔에 안았어야 했다.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죽은 자들의 무게에 짖눌리게 된다.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이 진실을 모른다. 


4월 18일 이후 우리들의 행동이 계속된다면, 장그래 노동법 개악안과 최저임금의 이슈가 합쳐져, 더 커져, 정권이 위기감을 느낀다면 그들은 염치없이 국민들에게 구조요청을 할 것이다.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거나, 새정치민주연합이 위기에 빠진 한국호를 구해낼 수 있다는 식 말이다. MB가 촛불집회를 보고 청와대 언덕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식 말이다. 


하지만 물에 빠진 개를 구하고 나면 그 개한테 물리는 법이다. 루쉰은 중국 당대에 자유주의자였던 임어당의 ‘페어플레이’론-‘실패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는 공격해서는 안 된다.’에 대한 반박으로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패라”고 했다. 이 정도 했으니 그만하자거나, 정부의 약속을 받아냈으니 지켜보자는 식은 여전이 우리에게 ‘페어’한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데서 오는 오판이다. 4월 16일, 18일 정부는 불법으로 진압했고, 언론은 ‘경찰추산 000명이 왔고, 밤이 늦었고, 차가 막혔다.’는 보도를 했다. 이 정도면 초등학생 그림일기 수준이다. 날씨가 맑았고, 순이가 놀러왔고, 엄마가 해준 간식을 먹었다는...


이런 상황에서 복수하지 말라느니, 이성을 차려야 한다느니, 폭력시위는 안된다느니, 폭력시위는 되지만 정권 퇴진은 안된다느니 하는 것은 우리만 ‘페어’하자는 것이니, 애초에 페어플레이는 성립이 안된다. 페어는 저들의 협조 없이 우리의 진정성만으로는 어렵다. 페어플레이는 좋지만,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루쉰 시대의 중국이나 오늘의 한국이나. 


그러니 이 봄날에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다.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경멸의 눈초리로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개를 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