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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자, 다시한번 마르크스 -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자, 다시 한번 마르크스

- 이시카와 야스히로,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나름북스)





전 주 희 / 수유너머N 회원




이렇게까지 귀여워도 되나싶다. 그래도 맑스인데. 심지어 베이비 핑크의 맑스라니. 





책의 뒷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멎었다. 아... 난생처음 보는 맑스의 뒤태라니! 

(저 엉덩이 어쩔거냐. 김보통 작가는 책임져라.)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은 수없이 쏟아지는 맑스 입문서 중에서도 극강의 귀여움으로 독자들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평생 저런 맑스를 본 적이 없다. 정말 이렇게까지 유혹해야해? 라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거 같다.  

저자는 ‘부드러운 마르크스 입문서’를 내걸었다. 맑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맑스가 뭐에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했다. 그렇구나. 세상에는 맑스를 아는 사람과 맑스를 모르는 사람 혹은 맑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맑스에 적대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맑스가 뭐냐?’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물은 적이 없다. 난 처음부터 맑스가 싫었다. 지겨우리만치 푸르던 대학교정의 잔디밭이 권태로워 미치기 일보직전일 때, 잔디밭 대신 맑스가 싫었다. 대체 언제부터 싫었을까? 고등학생 때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철거민들하고 학생들을 쫓아 영화관 골목까지 쫓아온 백골단들의 살기보다 학생들과 철거민들의 그 눈빛이 더 싫었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중학생 때 나와 자주 어울려 장구와 꽹과리를 치고 놀았던 선생님들이 죄다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였나? 한달, 두달이 넘게 단식을 하고도 교단에서 머리끄댕이를 잡힌채 기어이 쫓겨나 미처 챙기지도 못해 그들의 책장에 그대로 박혀있었던 ‘그 책’ 때문이었을까?

하여간 학교다니는 내내 맑스가 싫었다. 그리고 선배들은 집요하리만치 내게 맑스를 읽게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딱히 ‘처음’이랄게 없는 맑스와의 지리한 만남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이십대 내내 맑스가 싫을수록 까뮈가 부러웠다. 알베르 까뮈는 자신을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한권의 책에 대하여, 세계적인 작가가 된 후에 서문을 남겼다. 그의 영원한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섬>에 대해, 까뮈는 강렬하게 체험한 자신의 '처음'에 대해 고백했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 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알베르 까뮈, 장 그르니에의 <섬>에 부쳐.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는 까뮈가 부러워 미치겠다. 나는 왜 온 우주에 심사가 뒤틀려 이십대를 보냈던가. 또 회한에 사무쳐 사십대에 이런 글을 쓰고 있나. 

대신에 나는 맑스를 나와 함께 읽었던 사람들의 푸르던 눈빛들을 기억할 따름이다. 어느 철도 노동자는 <자본>을 읽고서 맑스를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고마운 사람이라니. 나는 맑스보다도 그 철도노동자를 보기 위해 <자본>을 읽는 자리에 꼬박꼬박 나갔다. 그러니까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쳐 <자본>의 한 귀퉁이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가 좋았고, 부러웠던 것이다. 

베이비 핑크로 무장한 맑스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건 순전히 저자의 한국어 서문 때문이다. 내년에 60세가 되는 노학자는 부드러운 맑스를 소개하기 전에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 역사’를 이야기한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본을 뒤흔든 시절, 저자는 맑스를 ‘평화운동’과 함께 만났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시작된 이후 40년간 축적된 새로운 맑스를 다시 읽기 위하여 저자는 자신이 청년시절 읽었던 맑스가 아니라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맑스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위해 저자는 심지어 ‘부드러운 맑스’로 유혹하며 함께 동지가 되자고 말 건넨다. 이 책의 미덕은 심오한 통찰이나 깊이있는 분석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과 맑스를 놓고 말이 오갈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진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을 ‘마르크스는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이십대 제자들과 맑스의 <자본> 1장을 읽고 나눈 대화를 싣는다. 대략 이런 식의 대화다.  



후쿠다(제자1).       ‘환원’은 무슨 의미인가요?


하토오카(제자2).   캐시백 같은 거죠?


아시카와(저자)    그렇죠. 고객 감사 세일 비슷한^^. 사전에는 ‘사물을 이전의 형태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보면 여기서의 환원이란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사물의 형태’로 되돌리는 걸 의미하겠죠. 

    • 본문, 194쪽. 




아.. 캐시백이라니.. 한참을 웃고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왜 맑스가 싫었는지. 

맑스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던 선배가 너무 멋져서 고백한 밤. 

“선배, 좋아해요.”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은 상념에 빠지더니, 나에게 그랬다. 

“세상에 사랑은 두 종류가 있지. PT적 사랑과 BG적 사랑. 넌 너의 BG적 사랑을 부끄러워 해야해.”

그놈이 그랬다. 대충 느낌으로 차인 것 같았지만 PT가 ‘프롤레타리아’의 약어고, BG가 부르주아를 뜻하는지 나중에 가서 알고 나서, 맑스가 진절머리가 났다. 이번에도 선배대신 맑스가 미웠다. 

그 시절 그 선배에게 ‘환원’을 캐시백이라고 대답했다면, 난 아마 ‘자본주의의 하수인’정도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인 아시카와 선생은 ‘붉은 맑스’를 젊은 후배들에게 전달해주는 대신, 젊은 세대들이 만나는 맑스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여백을 만들어준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여백’이었을 것 같다. 나는 맑스를 읽어야만 하는 99가지의 이유에 질렸던 것이다. 나에게는 맑스가 나에게 말 건네주는 그 처음의 공간. ‘맑스가 머에요?’라고 묻게 만드는 시간. 그 ‘처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가보다. 아직도 지리하게 맑스를 읽는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처음’을 흠모하며 질투하며 그들과 함께 읽는다. 

오늘 처음으로 이 <자본>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하며, 다시 한번, 마르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