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시집
- 김혜순,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이혜진/수유너머 104 회원
말
3. <아> 字 처음 피어나는 소리
김혜순
우리 물 속에서라도 말을 해 봐. 초록색 뱀장어 한 마리 물 뱉는 소리 들리지? 우리 뱀장어처럼 속삭여 봐.
죽은 사람들의 대답을 듣고 싶어. 죽은 사람들의 말이 불을 켜고 떠나며 우리들을 간질러, 물 먹은 그 말들이 세모만 만들며 뛰어다니면 파도가 높아.
진초록 세모벽은 갯벌에 부서지고, 부서지는데 우리들의 목울대는 터지지 않아. 초록색 뱀 한 마리 물 속에 우두커니, 우리를 봐.
우리, 불을 켜고 돛단배라도 띄울까? 어서 입을 벌려 봐. 파도 소리, 돛단배 떠나는 소리. 초록, 초록 물 한 방울, 말 한마디. 초, 록, 뱀, 한 마리. 세모꼴 부서지는 소리. <아> <아> <아> 입이라도 벌려 봐.
시인 김혜순은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한 작가로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문단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 중 한 사람이다. 발표한 11권의 시집에서 한 편씩 골라 소개하는 것으로 그의 시 세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발표 연도 순서대로 살펴보면 그의 시어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는 가늠할 수 있을 거 같다.
그의 첫 시집, <또 다른 별에서>에서 고른 이 시는 특히, 언어의 회화성에 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창작 방식이 돋보여 소개한다. 우선 서평을 써 주신 오규원 시인의 글을 살펴보겠다.
'그의 작품들은 퍽 일관성 있는 방법론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시적 대상을 어떤 관념으로 파악하거나 재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주관적으로 왜곡시켜 언어로 정착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대상을 새롭게 드러냄과 동시에, 그 새롭게 드러난 대상을 있게 하는 언어의 존재 또는 언어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 앞에 내보임-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우리가 어떤 분명한 메시지를 읽고자 하면 그가 노리고 있는 세계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빚는다.' (오규원, 또 다른 별에서, 97쪽)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서평을 문자 그대로 읽을 수 없는 건 왜 일까? 분명한 메시지를 읽으려면 그가 노리고 있는 세계를 모두 놓친다고 했는데 그가 노리고 있는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일까? 이런 질문을 나만 하고 있을까?
말, 3 <아> 字 처음 피어나는 소리, 이 시는 1981년 발표된 시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 4월 16일 이후에 쓴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한다. 세월호 같은 결정적 사건이 아니어도 왜곡시킨 언어로 대상을 새롭게 드러내는 방법으로 이십 대의 김혜순이 시를 쓰고, 오규원 시인이 이렇게 서평을 쓴 것은 이 시집이 발표된 1980년대를 살았던 그들이 노리는 세계를 드러내는 언어의 선택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러한 시대 배경에만 고착해서 시를 읽는다면, 서평에서 말한 대로 언어가 주는 즐거움이 빠진 채 시의 메시지만 짚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눈으로만 읽지 않고 세모꼴로 입을 벌려 소리를 내보았다.
<아> <아> <아> 입이라도 벌리면 소리는 피어난다고 시인이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청유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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