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정치철학 교본

 

박준영(nomadia)/수유너머104 회원

 

 

 

오늘 산책할 논문은 바로 아래  논문입니다. 

 

만만치 않은 난이도를 가진 글입니다. 같이 슬슬 접근해 봅시다.

 

 

지난호에 소개한 논문과 동일한 저널인 [들뢰즈 연구] 2017년 11월에 실린 논문입니다(현재는 [들뢰즈-가타리 연구]로 바뀌었지요). 이 저널은 주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에 대한 연구논문을 싣지요. 에딘버러 대학에 소재한 들뢰즈 연구학회에서 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논문은 텍스트 전체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 논문 제목을 번역해 보면,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제목에서 뭔가 감이 오시나요? 전혀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목부터가 이렇게 범상치 않아서 이걸 쓴 사람은 어떻게 생겨 먹었나 싶어 구글링을 해봤습니다.

 

육-후이(Yuk-Hui)

 

그런데 공저자인 루이스 모렐(Louis Morelle)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군요. 다만 파리 1 대학의 대학원생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육-후이에 대해서만 설명해보도록 할게요. 이 분에 대한 오피셜한 정보 원문은 http://www.digitalmilieu.net/yuk/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분 현재 소속은 독일 루네부르그에 소재한 루파나 대학이에요. 여기서 하빌리타치온 과정을 밟은 것으로 나옵니다. 2018년 여름에 과정을 마쳤다는군요. 아, 하빌리타치온 과정이란 우리나라 대학에는 없는 코스인데요, 박사를 졸업하고 '강사' 자격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과정을 거쳐야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 대학을 두 번 다녔는데, 한 번은 홍콩대에서 컴퓨터를 전공했고, 또 한 번은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어요. 역시 21세기의 철학은 공학적 사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 분이 주로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기술철학'이라는 파트입니다. 오늘 소개할 논문도 그 방면 이야기가 정치철학과 결합되는 글이고요.

 

책이 한 권 출판되어 있는데 아주 읽어 보고 싶게 만듭니다. 이 사람의 박사논문을 출간한 것이거든요. 게다가 기술철학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가 서문을 써 주었네요. 바로 이 책입니다.

 

[디지털 대상들의 실존에 대하여], 육 후이의 책

 

우리가 살펴볼 논문 제목에 두 사람의 철학자가 나옵니다. 시몽동과 들뢰즈. 그러고 보니 제가 시몽동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들뢰즈에 대한 소개는 다음 제 글을 참조하시길.-><낯선 타인과 춤추기>

 

낯선 타인과 춤추기

- 질 들뢰즈와 미셸 투르니에 | 얼마전 제가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대한 글(<스페란차에서의 절대고독>)을 쓰면서 약속했던 대로 들뢰즈의 아주 '아름다운 논문' 하나를 살펴보도록 할게요. 들뢰즈란 철학자가 워낙 방대한 체계를 설파하고, 난해한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이라 이걸 쉽게 설명하기가 녹록치 않겠지만, 일단 시작해 보겠습니다. 들뢰즈, 넌 누구냐?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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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 시몽동(1924-1989)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은 물론 철학자입니다. 태어난 곳은 생-에티엔이라는 곳이고요. 이 분은 철학 중에서도 '기술철학'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기계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지요. 기계철학은 들뢰즈 이후 현대철학의 핫테마라고 할 수 있는 분과입니다. 이제 철학을 하려면, 공학과 물리학 정도(덤으로 생물학)는 같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 되겠습니다.  

 

시몽동은 프랑스의 수재들만 간다는 '에꼴 노르말 수프리외', 즉 '고등사범학교'와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요. 스승들도 쟁쟁합니다. 조르쥬 캉길렘(이 분은 과학철학자이고 들뢰즈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마르시알 게루(스피노자 철학의 권위자입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유명한 현상학자이지요)가 그들입니다. 1958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소르본과 푸아티에, 파리 4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일반 심리학과 기술공학 실험실>을 설립하여 연구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주요 저서는 박사학위 논문([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인데요 이 논문은 처음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출판됩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논문 전체가 온전히 출간된 것은 2005년이고, 밀롱(Millon)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2013년에 개정판이 나왔지요). 그리고 부논문도 아주 중요합니다. 프랑스에서는 대체로 이렇게 주논문과 부논문 2개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씁니다. 부논문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입니다. 시몽동의 주논문과 부논문 둘 다 한국어 번역판이 있어요(번역자들의 노고에 박수를!)

 

시몽동 철학의 핵심 개념은 '개체화'입니다. 이 개념만을 거의 평생 물고 늘어져서, 과학철학, 기술철학, 기계철학을 일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존재론을 전개했지요. 이런 시도는 당대의 들뢰즈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후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정치철학, 브라이언 마수미와 베르나르 스티글러와 같은 과학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시몽동과의 대담입니다. 영어자막이 있으니 한 번 보시면 좋을 듯해서 올립니다.

 

자, 그럼 시몽동과 들뢰즈에 대해 대강 알아봤으니 논문으로 들어갑시다. 우선 목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논문제목: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
저자: 육 후이(루파나 대학), 루이스 모렐(파리 1 대학)

- 논문 초록
- 키워드: 강도, 가속주의, 개체화, 기술, 시몽동, 들뢰즈

I. 존재론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강도
II. 들뢰즈의 '가속': 강도에서 변조로
III. 또 다른 '가속': 내적 공명으로서의 강도
IV. 변조, 도래할 강도의 정치
V. 결론

 

논문초록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뭐, 이런 도입부는 거의 정형화되어 있어요. 논문의 목적을 밝히는 것이지요.

 

이 논문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사유에서 속도와 강도의 문제를 명료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속 개념들을 살펴보면 아마 철학 전공자들도 다소 낯설 것 같습니다. '속도'와 '강도'라는 개념이 그렇지요. 사실 이 개념은 전통적인 철학 개념이라기보다는 과학 개념에 가깝지요? 전공자들이라 해도 과학철학이나 기술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낯설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말 뒤에 후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이는 가속주의(accelerationism)와 그것의 정치학에 대한 논쟁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가속주의'가 뭘까요?

찾아본 후 꽤 긴 글을 썼는데, 여기서는 다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아 다른 페이지에 써 놓았습니다-><속도를 더 내, 지옥을 건널 때까지!>

 

 

속도를 더 내, 지옥을 건널 때까지!

- '가속주의'와 기술정치철학 | 노마가 최근에 읽은 논문이 있는데요, 바로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육-후이, 루이스 모렐)입니다. 이 논문은 매우 흥미로운 최근의 철학 경향과 그것의 정치철학적 응용에 관해 논하고 있지요. 그 경향을 '가속주의'라고 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가속주의는 현존하는 가장 진보적인 정치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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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하나 문제가 있네요. 저기 논문의 목적을 밝혀 놓은 부분에 보이는 '강도'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이 논문 안에 한 장을 할애해서 설명이 되고 있어요. 그러니 이건 찬찬히 따라가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아무튼 저자들은 목적을 밝힌 후에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가속주의 정치와 더불어 강도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속도에 대한 집착 없이 어떻게 강도의 정치학을 사유할 수 있는가?

 

우선 저자들은 시몽동의 이론에서 개체화(individuation)는 강도에 대한 논의의 핵심에 자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가 보기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시몽동은 이 한 개념을 가지고 평생 철학한 사람이니까요.

 

이 개념은 생성과 존재의 조화를 목표로 합니다. 쉽게 말해서 개체화라는 개념은 여기 내가 '있다'라는 사실과 내가 '움직인다'라는 두 사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몽동은 이 개념에 현대의 기술과 과학적 성과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철학을 구사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개체화를 좀 더 설명해 보지요.  개체화란 처음부터 끝까지 준안정(metastable)적인 상태로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개체'는 안정된 '결과'라면 개체화는 계속되는 요동과 불일치로 이루어지는 '과정'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이건 사실 우리가 잘 지각하지 못하는 측면을 시몽동이 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 여기 있어요~'(존재)라고 말하지 '나 여기 있게 되어요~'(생성)라고 말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내가 여기 붙박여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있다는 사실(존재)이 아니라, 늘상, 시시각각 변하면서, 최소한 눈이라도 깜박이면서 뭔가가 '되어 간다'(생성)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만물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정'과 '준안정'은 각각 얌전한 물과 펄펄 끓는 물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다시 말해 개체화는 펄펄 끊은 물과 같은 과정중에 있다는 것이지요.

 

시몽동에게는 '개체화'라는 개념과 더불어 변환(transduction)이라는 개념도 중요합니다. '변환'은 본래 물리적으로는 에너지의 전환을 의미하고 생물학적으로는 유전형질의 변화를 의미하지요. 그런데 시몽동은 이 두 의미를 포괄하면서, '논리적 의미'로도 이 말을 사용합니다. 즉 변환은 연역과 귀납과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저자들의 말을 직접 들어 보시죠.

 

전통적 논리학인 귀납과 연역은 명제들의 추론에 대해 작동하지만, 변환은 질문에 속해 있는 존재의 구조를 변형시키도록 이끈다.

 

다음에 오는 설명을 들으면 이 말에 좀 수긍이 갑니다. 

 

변환이란 긴장들과 불일치들로부터 초래되는 강도에 의해 지배되며 조건 지어진다. 변환은 정보라는 측면에서 형태를 구성하며, 강도라는 측면에서 정보를 구성한다. 또는 이것은 불균등성(disparation)이기도 하다. 불균등성은 개체화의 조건이며, 물리적, 생물학적, 심리적 존재자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환이라는 것이 '정보'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과정'이라는 의미로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유전자들은 '정보'의 덩어리들이지요. 그 정보들을 교환하는 것이 유전자의 일입니다. 이는 컴퓨터와 같은 인공지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물리적 차원에서는 '결정화' 작용(물이 얼음이 되는 과정이 대표적인 사례이지요)에서 입자들 간에 '형태'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일정한 기하학적 결정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강도'의 작용이 없으면 불가능해집니다.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변환 작용은 그 오가는 작용에 필요한 '힘'을 강도로부터 얻습니다. 정보가 형태를 구성하고, 또 그 정보는 존재하는 것들의 '강도'가 구성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것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구성되느냐고 물을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이쪽과 저쪽의 '불균등성'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변환은 일종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흐르려면 양쪽 간에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즉 높낮이, 에너지의 차이 등등이 말이지요.

 

변환은 폭포처럼 전달되는 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점은 어떤 한 항이 '질문'을 제기할 때 응답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지요.

 

강도는 변환이 수행되는 그 '차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한 항에서 다른 항으로 움직이면서 변환되는 과정은 '질문-응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래'라는 정보를 '위'에 주면(질문하면), '위'는 '아래'에 응답하면서 강도를 선사하는 것이지요. 생명체들의 변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체들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유전자라는 미시 수준과 신체라는 거시 수준 모두에서 환경에 질문을 던지고, 환경은 생명체에 '강도'를 선사하면서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불균등성'이 해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유지든, 폭포의 흐름이든 '차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흐름이 이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시몽동뿐 아니라 들뢰즈에게서도 개체화는 중요한 개념인데요, 이것은 강도로부터 생산되는 활동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를 참조하다 보면, 개체화 과정이 '차이'와 결정적인 관련을 가지고, 또한 이 차이는 '강도'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몽동에게서는 '차이'보다 '불균등성' 개념이 개체화를 설명하는데 관건인데, 들뢰즈에게서는 '차이'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둘 다 비슷해 보이는데, 좀 다른 점은, 시몽동이 불균등성을 통해 강도를 설명한다면, 들뢰즈는 불균등성의 핵심이 차이이고, 이 차이가 곧 강도라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철학사적으로 봤을 때도 이 둘이 겨냥하는 지점은 다른데요, 시몽동은 아주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비판하고자 하지만, 들뢰즈의 경우에는 칸트의 감각과 지성 개념을 비판하고자 하지요. 칸트에 반대하면서 들뢰즈는 지각 과정(사물을 감각하고 개념화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은 순수 직관(시공간에 대한 직관)에 의해 지배되지도 않고, 지성의 범주(양. 질. 관계과 같은 보편적 개념 도구)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지각 과정은 감각의 강도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폭포의 물 알갱이 하나하나처럼 지각과 대상이 서로 부딪히면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감각적 강도 이전의 지배 주체가 없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표상', 범주라는 '표상' 이전의 상황이에요. 표상은 지각 과정, 즉 강도적 감각 과정 이후에 구성되는 것이지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서 자주 등장하는 '강도'란 무엇일까요? 논문 저자들도 인용하고 있고, 많은 철학자들이 흔히 예시로 드는 것은 '온도'입니다. '강도'는 온도를 측정하면서 양으로 표시됩니다. 이를테면 31도 C와 같은 것이 있지요. 그런데 이 31도 C는 그 자체로 특이성(단독성, singularity)입니다. 즉 그것이 21+10도 C로 분해될 수 있다거나, 1X31도 C로 결합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31도 C는 그 자체 기온의 '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강도는 해당 존재자의 특이성을 지시하는 것이며, 다수의 단위들로 분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어떤 것의 속도와 가속도도 강도라고 봅니다. 즉 속도든 가속도든 단위로 쪼갤 수 없는 특이성의 연속체라고 보는 것이지요. 위 연속촬영의 길게 이어진 불빛처럼 말이지요.

 

들뢰즈에 따르면 이와 같은 강도의 특성이 속도와 가속도에도 적용됩니다. 속도와 가속도는 각각의 시간에 본성적인 변화 없이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즉 이 두 물리량은 '연속되는 특이성'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칸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들뢰즈는 이를 원용합니다. 하지만 칸트의 논의를 더 밀어붙이게 되지요.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시몽동의 철학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강도'를 '양'이라는 칸트적 범주뿐 아니라, '관계'와 '양상'이라는 시몽동의 동력학적 범주에도 연결시키는 것이지요.  

 

따라서 들뢰즈는 강도라는 개념을 칸트적인 초월적 층위에서 내재성의 층위로 되가져 옵니다. 즉 표상의 논리에서 강도의 논리로 말이지요. 표상의 논리를 '초월적'으로 강도의 논리를 '내재적'으로 옮기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이지요? 이것은 좀 전에 예를 든 온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온도는 초월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내재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어요. 초월적으로 표현된 온도는 '31도 C'라는 단순한 숫자를 측정 절댓값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재적으로 표현된 온도는 같은 수치를 절댓값이 아니라 상대값으로 치환하는 것이지요. 31도 C 안에 존재하는 여러 온도의 느낌들, 또는 31도라는 기준값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잔여값들, 30. 9999999... 도 C, 또는 31.00000000001.... 도 C 같은 것들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2장으로 와서 들뢰즈의 '가속' 개념이 '강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논지를 전개합니다. 강도와 가속이 기본적으로는 개체화 안에서 상호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도란 구조적 변환으로 향해가기 때문이다. 여기 비로소 강도와 연관하여 시몽동과 들뢰즈의 기획 사이에 주목할만한 분기점이 형성된다. 시몽동의 경우 강도란 유적 과정(generic process)으로서의 '개체화'와 동일시되는 반면, 들뢰즈의 경우 강도란 '차이로서의 존재'라는 이름을 획득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들은 들뢰즈의 존재론을 정치철학과 접목시키고자 합니다.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행복한 만남이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선 저자들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차이가 위와 같다는 것을 제시한 다음, 강도 개념이 역사 정치적 맥락에서 변형된다고 봅니다. 그 변형된 개념이 '흐름들'과 '욕망'이라는 것이지요. 이 개념으로의 변형과정은 가타리(Felix Guattari)와의 공저인 [앙띠 오이디푸스]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논문 저자들이 인용하는 [앙띠 오이디푸스]의 해당 부분을 옮겨 볼게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두 사람은 [앙띠 오이디푸스], [천의 고원], [카프카-소수문학을 위하여],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공동 사유를 진행했습니다.

 

어떤 혁명적 길이 있을까? 하나라도 있을까? 사미르 아민이 제3 세계 나라들에 충고하듯, 세계시장에서 파시스트적 <경제해법>이라는 기묘한 갱신 속으로 퇴행하는 것?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말하자면 시장의 운동,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더욱더 멀리 가는 것? 왜냐하면 아마도 고도로 분열적인 흐름들의 이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보면, 흐름들은 아직 충분히 탈영토화 되지도, 탈코드화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퇴행하지 않고, 더 멀리 가야 한다. 니체가 말했듯, <과정을 가속하라.> 사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p. 406).
# # 페이지수는 김재인 2014 번역판입니다. 번역은 일부 수정했어요).

 

이 구절은 '가속 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특히 '과정을 가속하라'라는 말은 이들의 슬로건이기도 하지요. 들뢰즈와 가타리, 혹은 니체의 이 슬로건을 위에 언급한 단어들과 더불어 다르게 해석하면, '흐름'과 '욕망'을 가속하라, 또는 '기존의 흐름과 욕망을 탈영토화 하라'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속주의자들과 저자들은 이 부분에서 존재론이 정치철학으로 변형되는 어떤 '문턱'을 보는 것이지요.

 

저자들에 따르면, 바로 [앙띠 오이디푸스]야말로 '존재론의 정치철학'이라는 가장 첨예한 철학의 분과를 드러내는 중요한 저작이 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란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서 두 가지 항목에 따라 형성됩니다. 하나는 바로 '욕망'이지요. 이것은 '정치화된 강도'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근원적인 불안정성'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요? 쉽게 말해 자본주의 체계라는 것은 끊임없는 불안정성 하에 진행, 발전, 퇴행되는데(공황이나, 노사갈등, 전쟁 등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촉진시키거나 저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또 이 욕망의 흐름에 촉발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불안정성과 욕망의 피드백이 자본주의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소비심리를 구성하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고등학교 경제나 사회문화 시간에 배우는'이스털린 역설'이나 '트레드밀 효과'를 예로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노마가 가지고 있는 [앙띠 오이디푸스] 두 개의 판본입니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욕망의 흐름과 불안정성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자들과 들뢰즈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한계는 곧장 사건을 향해 가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혁명적 사건'일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들뢰즈의 개념은 [천의 고원]이라는 저작에 와서는 '배치'(assemblage)라는 것으로 바뀌는데요, 사실은 그 이전에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라는 짧은 논문에서 이에 관한 논의가 이미 진행되었다고 봅니다. 이 짧은 논문은 들뢰즈가 푸코의 '규율사회'(또는 '훈육사회')에서 '주권사회'로의 이행이라는 테제를 이어받아 '통제사회'라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기술합니다. 이에 따르면 통제사회의 특성은 '돌연변이 변형'(mutation)입니다.

 

질 들뢰즈,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 영역문은 아래에 걸어놓았어요.

 

들뢰즈의 통제사회는 푸코의 통치체제가 돌연변이 변형을 거쳐 전 사회적 기제로 확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권력은 더 이상 폐쇄된 공간(푸코의 경우 학교, 감옥, 병원, 공장)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개인에 대해 외적으로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열린 공간에서 개인들 각각의 내재성의 장 안으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들뢰즈는 이를 '변조'(modulation)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바로 '강도' 개념과 연관이 깊습니다. 즉 통제사회에서 내재적인 권력화 과정은 강도를 통해 변조된다는 것이지요. 이때 규율은 개인들 각각의 자율적 과정 안에서 내면화됩니다. 이때 강도는 욕망이기도 하고, 심리적인 권력이기도 하며, 사회적 관계며, 심지어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것들 모두가 규율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규율'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규율입니다. 즉 통제사회에서의 개체화는 바로 규율의 내면화며 강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와 시몽동이 정치철학에서 만나는 지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통제사회를 하나의 기계(machine)로 묘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시몽동의 개체화에 관한 저작들에서 가져온 이 '기계' 개념은 후기 들뢰즈 철학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누리게 됩니다. 이는 또한 가타리의 독립적인 저작들에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이지요. 이것은 단순히 공학적인 기계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의미로 쓰이지요. 그것을 정의 내리면 이질적인 요소들의 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개념인 '아상블라쥬'(배치)는 본래 예술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위) 아상블라쥬 아트의 예시,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어떤 형상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요소들'이란 성적인 것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하며, 경제적이기도 한 요소들입니다. 논문 저자들은 여기서부터는 다시 들뢰즈와 시몽동이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시몽동에게 개체화는 다만 발생론적으로 중립화되어 있지만, 들뢰즈에게서 개체화는 그것 자체가 '문제'며, 사회 정치적 평면에서 펼쳐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라는 이 짧은 논문이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이 논문에서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정치철학, 그리고 기술철학의 구분이 불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실제로 기계에 관한 이러한 개념 규정이 유의미한 것은 현대사회, 특히  포스트-포디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기술적 과정이 인간의 욕망, 그리고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AI에 관한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거기 연결되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욕망, 직업에 관한 욕망이 변조되고, 정치적으로 그 기술을 통제하고자 하는 각축이 일어나며, 그에 관한 윤리학이 발전하게 되는 식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매우 빠르게 발생합니다.

 

시몽동은 이 변조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이를 그는 '공명'(resonance) 또는 개체화와 관련하여 '내적 공명'(internal resonance)라고 칭합니다. 이 내적 공명을 개체화와 연관해서 보면, 어떠한 준안정상태(matastable)로 진입하기 전의 개체화 과정, 변형과정에서 강도를 특징짓는 용어가 됩니다. 그런데 시몽동에 따르면 인간은 산업화 시기에 '기술적 개체'로서의 그 중심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소외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시몽동은 어떤 인간론적인 기술 윤리로 퇴행하지 않고, 논의를 더 진행시킵니다. 그는 산업화가 더 진행되면서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노예대 노예의 관계로 들어설 것이라고 예견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어떠한 혁명적 정치학의 사유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들은 주장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고, 그것을 가속시키는 것이 바로 이 상황을 돌파하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또 다른 이론가인 토스카노(Alberto Toscano)를 인용합니다. 토스카노의 테제는 '혁명적 가능성으로서의 불균등성의 변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스카노는 시몽동의 그룹(group) 개념을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여, 혁명적 잠재성으로서의 그룹의 구성에 대해 논합니다. 다시 말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혁신하게 될 가능성은 잠재적 힘들을 변조해냄으로써 증폭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혁명의 개체화'라는 토스카노의 또 다른 테제는 바로 이러한 변조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개체화'라는 것이 '개별화'와는 아주 다르다는 점입니다. 개별화는 원자화와 같이 따로따로 떨어진 추상적 실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재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에 불과하지요. 개체화는 사람과 사람, 동물과 동물, 또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람과 기계 간의 집합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개인에게 있어서는 세포와 세포들의 집합화이지요. 이를 토스카노는 '그룹'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티글러에게 비개체화란 개체화를 달성하기 힘들게 하는, 다른 말로 해서 '다른 변조'를 생산하기 힘들게 하는 장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장애물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개체화하기 위한 강도를 상실할 때 더 두드러집니다. 이는 통제불능 상태로 이끌고 끝내는 '죽음을 향한 가속'이 되고 말지요. 예를 들면 이런저런 유형의 기술 중독들(게임중독,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들)이 이러한 것에 해당된다고 보입니다.

 

저자들은 논문의 말미에 들뢰즈와 시몽동을 포함하여 언급된 네 명의 철학자들(토스카노와 스티글러 까지)은 기술이 그 목적이 확정될 수 없는 방향으로 강도들을 이끌고 증폭하는 기능을 제공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고 논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기술발전이 지속적으로 가속된다면, 그것은 기계들과 서로를 횡단하는 개체들 사이에 어떤 내적 공명을 찾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이를 토스카노의 용어를 빌려 '발명의 정치'라고 규정합니다. 

 

'발명의 정치'란 어떤 특이점을 향해 가는 기술의 가속에 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혁명적 기회를 위해 그러한 기술을 이용하는 것만도 아니지요. 발명의 정치란 그룹들의 잠재력을 공명 시키고 증폭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을 발명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적 대상들이 그 자체로 개체 '횡단 개체적 관계', 즉 개체를 횡단하여 관계 맺는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저항방식(이를테면 오픈소스 운동이나, 탈중심화 운동 등등)은 기술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여전히 구닥다리 질료-형상론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운동들은 기존의 전형들을 반복하기만 할 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저항'의 가능성을 재구성하기를 원한다면, '혁신의 정치'(politics of innovation), 즉 시장과 통제 정치에 의해 광범위하게 조정되는 그러한 정치가 아니라 발명의 정치를 구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이렇게 토스카노의 개념을 새로운 정치의 슬로건으로 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발명의 정치는 아마도 기존의 저항방식을 탈피하되, 자족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에 잘 적응하고, 그것을 매개로 삼아 전략과 전술을 발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저항의 예로 '스노든'과 '어노니머스'가 떠올랐습니다. 앞사람은 자신의 기술자산을 활용하여 기존 권력의 정보를 누설함으로써 체제를 뒤흔들었고, 후자는 시시때때로 출몰하면서 해킹을 활용하여 같은 효과를 달성하는 집합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러한 예는 다소 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1. 들뢰즈의 '강도'와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가속주의 정치철학을 설명할 길을 열어준다.

2. 들뢰즈의 경우 '강도'는 '욕망의 흐름' 그리고 '배치' 그리고 '통제사회'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정치철학과 만난다.

3. 시몽동의 경우 '강도'는 '개체화', '변조'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정치철학과의 만남을 준비한다.

4. 이 둘을 보다 구체화하는 철학자는 스티글러와 토스카노로서, 이들은 각각 '비개체화', '발명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들뢰즈와 시몽동을 더욱 발전시킨다.

5. 이들을 하나로 엮는 정치철학의 테제는 '가속'과 '가속주의'이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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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수유너머N에서 3-4월에 진행한 초중급 불어강독 중 8회에 읽은 텍스트를 강독에 참가한 김민우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들뢰즈의 파리8대학 스피노자 강의를 녹취한 원문 중 처음부터 9번째 문단까지의 번역입니다.
(DELEUZE / SPINOZA Cours Vincennes - 24/01/1978 원문 바로가기)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 명강의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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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속된 변이(variation continue)에 대해 [이제껏] 다루었던 것을 잠시 미루고, 철학사 수업을 위하여 매우 분명한 어떤 사항에 대해 임시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이는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의 요청으로 하는, 어떤 중단 같은 겁니다. 매우 분명한 사항이란 이것과 관계있는데요. 즉,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감정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에게 있어 관념과 감정(Idée et affect chez Spinoza). 오는 3월에는,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의 요청으로, 칸트에게 있어 종합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도 또한 [강의를] 잠시 중단할 겁니다. 철학사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제겐 조금 이상한 일인데요. 저는, 여러분이 철학사의 이 부분을 그저 단순히 하나의 역사로 생각해주기를 바랍니다. 요컨대 철학자란 단지 개념들을 발명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는 아마 지각하는 방식들 또한 발명하죠. 저는 거의 순번 매기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려는데요. 우선은 용어법에 관한 고찰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강의실이 [많은 분들로] 상당히 뒤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스피노자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가 자신의 책 속에 들어온 것들과 관계하는 방식은 필적할 만한 게 없으니 말이죠. 여러분이 그를 읽었든 읽지 않았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니까요. 일단 용어법에 대한 예비 고찰로 시작해보죠. <윤리학>이라고 불리고 라틴어로 쓰인 스피노자의 주요 저작 속에는, 두 가지 단어가 발견됩니다. 아펙티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 몇몇 번역가들은 매우 이상하게도 [이 단어들을] 똑같이 번역합니다. 이건 최악이죠. 그들은 그 두 용어를, 아펙티오와 아펙투스를, “아펙시옹(affection)”으로 번역하고 있죠. 저는 이게 최악이라고 말하는데요. 왜냐하면 철학자가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할 때는 원칙적으로 그는 어떤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어가 우리에게 아펙티오와 아펙투스에 엄밀히 대응하는 두 개의 단어를 손쉽게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펙티오에는 아펙시옹이 있고, 아펙투스에는 아펙트가 있으니까요. 몇몇 번역가들은 아펙티오를 아펙시옹으로 번역하고 아펙투스를 상티망(sentiment)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똑같은 단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경우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어가 아펙트란 단어를 보유하고 있는데 굳이 상티망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므로 제가 아펙트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것은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를 가리키는 것이고, 아펙시옹이란 단어를 말할 때는 이것은 아펙티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하의 번역문에서 아펙시옹은 ‘변용’으로 옮기고, 아펙트는 ‘감정’으로 옮깁니다.]


첫 번째 사항: 관념이란 무엇인가? 관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걸 알아야] 스피노자의 가장 단순한 명제들이라도 이해할 텐데요. 이 점에 관하여 스피노자는 독창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던 의미로 관념이란 낱말을 이해하려 하죠. 철학사에서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던 의미에서 우리가 관념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표상[재현]하는 사유 양태입니다. 표상적인 사유 양태. 예컨대, 삼각형의 관념은 삼각형을 표상하는 사유 양태죠. 용어법의 관점에서, 중세 시대 이래로 관념의 이런 측면이 “객관적 실재”(réalité objective)라 불리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매우 유용합니다. 17세기 혹은 그 이전의 텍스트에서 우리가 관념의 객관적 실재와 마주칠 때, 그것은 항상 이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것의 표상으로 생각된 관념 말이죠. 관념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한에서,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해집니다. 관념과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인 것이죠.


따라서 아주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보죠. 관념이란 자신의 표상적 성격에 의해 정의되는 사유 양태입니다. 이 정의는 이미 관념과 감정(아펙투스)을 구별하기 위한 첫 번째 출발점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죠. 왜냐하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 사유 양태는 감정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든지 감정이라 부르는 것을 아무거나 취해봅시다. 가령 기대, 불안, 사랑 같은 것들, 이것들은 표상적이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것에 대한 관념은 물론 존재하고, 기대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물론 존재하지만, 기대는 그 자체로서 또는 사랑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비표상적인 한에서 사유의 모든 양태는 감정이라 불릴 것입니다. 의지력, 의지는 엄밀히 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 이건 표상의 대상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어떤 관념 속에 주어지죠. 하지만 의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표상적인 사유 양태이기에 감정인 거죠. 잘들 따라오고 있죠. 어려운 게 아니에요.


이로부터 즉각 관념이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리고 이는 17세기의 모든 사람들에겐 상식이었죠. 하지만 우리는 스피노자만의 고유한 것에는 여전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관념은 감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아무리 미규정적이라도, 있어야만 한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러하죠. 원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아무리 미규정적이라도,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내가 무얼 느끼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할 때, 대상에 대한 어떤 표상이,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있는 것입니다. 혼란스럽긴 해도 어떤 관념이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감정보다 관념이, 다시 말해서 비표상적인 양태들보다 표상적인 양태들이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독자가 이런 논리적 우위를 환원으로 바꾸어버린다면, 아주 불행한 오해가 생길 겁니다. 감정이 관념을 전제한다는 것, 이는 무엇보다도 감정이 관념으로, 혹은 관념들의 조합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즉 관념과 감정이란, 본성상 서로 다르고, 상호간에 환원될 수 없으며, 다만 감정이 관념을,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러울지라도, 전제하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받아들여질 뿐인 두 가지 종류의 사유 양태들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항입니다. 관념-감정의 관계를 제시하는 보다 덜 표면적인 두 번째 방식. 우리가 관념에 대한 아주 단순한 성격에서 논의를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해보세요. 관념은 표상적인 한에서의 사유입니다. 표상적인 한에서의 사유 양태이죠.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관념의 객관적 실재를 말할 겁니다. 관념은 단지 객관적 실재만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널리 인정된 용어법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형상적 실재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객관적 실재란 관념이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한에서 그 관념의 실재라고 한다면, 관념의 형상적 실재(réalité formelle)란 무엇을 말할까요?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해지고 있고 그래서 더욱 흥미로워지는데요― 관념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인 한에서 관념의 실재라고 말해질 것입니다. 삼각형 관념의 객관적 실재는 삼각형으로 된 사물을 표상하는 것으로서의 삼각형 관념이지만, 이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것인 한에서, 나는 그것에 대한 관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 관념에 대한 관념을 만들 수 있죠. 그러므로 저는 모든 관념은 단순히 어떤 것의 관념인 것만은 아니라고 ―모든 관념이 어떤 것의 관념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모든 관념은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모든 관념은 무엇인가를 표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관념은 그것이 그 자체 관념으로서 어떤 것이기 때문에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이 수준에서는 더 멀리까지 계속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따로 제쳐둘 필요가 있죠. 관념의 이러한 형상적 실재란, 스피노자가 관념이 관념으로서 지닌 실재 혹은 완전함의 어떤 정도라고 매우 자주 이름 붙인 바로 그것이라는 점을 곧바로 덧붙여만 합니다. 개개의 관념은, 관념으로서, 실재 혹은 완전함의 어떤 정도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는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관계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혼동되지 않습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 즉 관념이라는 사물 내지 관념이 자기 안에 소유하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란 그것의 내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객관적 실재, 즉 관념이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맺는 관계란 그것의 외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외재적 성격과 내재적 성격은 근본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의 관념과 개구리의 관념은 상이한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즉 그 관념들은 동일한 것을 표상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것들은 동일한 내재적 실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동일한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한 관념은 ―여러분은 그것을 잘 느끼고 있을 텐데요― 다른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실재의 정도를 갖고 있는 것이죠. 신의 관념은 어떤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유한한 사물의 관념인 개구리의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내재적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이해했다면 거의 모든 걸 이해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의 형상적 실재가 있습니다. 즉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고, 이런 형상적 실재는 내재적 성격이며, 관념이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관념을 그것의 객관적 실재로 혹은 그것의 표상적 성격으로 규정하였을 때, 감정은 정확히 표상적 성격을 갖지 않은 사유 양태라고 말하면서 저는 곧바로 관념을 감정에 대립시켰죠. 이제 저는 관념을 이렇게 규정하고자 합니다. 즉, 모든 관념은 어떤 것이다, 단지 어떤 것의 관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에 고유한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수준에서 저는 관념과 감정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삶에서는 과연 무엇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을까요?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흥미로운데요. 여러분은 <윤리학>이 명제, 증명 등등의 형식을 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책은 더욱 수학적인 만큼 비범할 정도로 더욱 구체적이기도 하죠. 제가 말한 모든 것은, 그리고 관념과 감정에 대한 모든 주석들은 <윤리학>의 2, 3권에 관련됩니다. 이 2, 3권에서 스피노자는 우리 삶에 대한 일종의 기하학적 묘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제게 아주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이 기하학적 묘사는 우리의 관념들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진다는 점을 대략적으로나마 우리에게 말해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한 관념은 다른 관념을 내쫓습니다. 한 관념은 다른 관념을 대체합니다, 예컨대 순식간에 말이죠. 지각은 특정한 유형의 관념인데요, 우리는 곧바로 그 이유를 보게 될 겁니다. 좀 전에 나는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강의실 구석을 보았죠. 다시 고개를 돌립니다. 또 다른 관념이 있죠; 나는 길거리를 산책합니다. 거기서 사람들을 알아보기도 하죠. 피에르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폴에게 인사합니다. 또는 변화하는 것은 [지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물들입니다: 나는 태양을 쳐다봅니다. 그러다 태양이 점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이는 따라서 일련의 연속들, 관념들의 일련의 공존들, 관념들의 일련의 연속들입니다. 그러나 이 외에 또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우리의 일상적 삶은 연속되는 관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아우토마톤”(automa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우리[인간]이 정신적 자동기계라고 이야기하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관념들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관념들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념들의 연속들을 제외하고, 또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즉, 내 안의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죠. 관념들 그 자체의 연속과 동일하지 않은 변이(variation)의 체재가 있는 것입니다. 변이들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쓸모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변이라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이런 변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든 예를 다시 취해보면. 나는 길에서 내가 매우 싫어하는 피에르와 마주칩니다. 그를 지나치면서 피에르에게 인사합니다. 혹은 그걸 꺼림칙해 하면서 곧이어 내가 매우 좋아하는 폴을 봅니다. 그리고 폴에게 인사하죠. 거기에 내심 안도하고 만족해하고요. 자. 이것은 무엇일까요? 한편으로는 두 개의 관념, 즉 피에르의 관념과 폴의 관념의 연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죠. 내 안에서 어떤 변이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스피노자의 말은 매우 정확한데, 저는 그걸 인용해보겠습니다. “나의 실존하는 힘의 (변이)”, 또는 동의어로서 그가 사용하는 또 다른 말인 “비스 엑시스텐디”(vis existendi), 즉 실존의 힘, 혹은 “포텐샤 아겐디”(potentia agendi), 즉 행위 능력―그리고 이 변이들은 영원합니다. 



번역 / 김민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초중급 불어강독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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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78285.jpg  * 러시아어판 <천 개의 고원>

 

최근 러시아를 다녀온 선배의 블로그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Tysyacha plato : kapitalizm i shizophreniya)이 작년 말 러시아어로 완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Yakov Svirsky 옮김, U-Faktoriya, 2010). 코뮨에서 생활하며 부딪혔던 사유와 삶이라는 문제 외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중요한 인용 전거 중 하나였다. 그때 “혹시나 이제라도 러시아어로 번역된다면 직접 번역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하며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감이 들었다. 이제 <천 개의 고원>이 러시아어로 출판됨으로써, 들뢰즈의 거의 모든 저술들을 러시아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듯하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들뢰즈와 러시아는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글을 쓸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해명을 잠시 늘어놓는 것, 아니 그 해명이야말로 현재의 러시아 지성사적 상황을 조감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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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위부터 <경험주의와 주관성/칸트의 비판철학/베르그손주의/스피노자>(합본), <차이와 반복>, <주름>, <키노>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유입된 지적·문화적 경향이지만, 많은 문학 연구가들은 러시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1960-70년대 소츠-아트(Sost-Art)로 대변되는 개념주의 예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더 멀리는 체호프 등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엽으로도 밀고갈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탈린주의가 균열을 빚은 해빙 이후의 문학과 예술에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입장들에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던이 서구보다 ‘앞서’ 존재했다거나, 혹은 적어도 서구와 ‘동시대적인’ 문화적 경향이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직접 사용되진 않았어도 러시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주장들에는 여하한의 문화사적 흐름에서도 결코 뒤지고 싶어하지 않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지는 듯하다(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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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안티 오이디푸스>, <니체>, <니체와 철학>, <의미의 논리>, <프루스트와 기호들(초판)>

 

그러나 철학적인 문제 설정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살펴본다면, 러시아에서 그것은 분명 소련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로 밀려들어오고, 그에 대한 반응 및 성찰의 결과로서 포스트모던‘한’ 러시아 사유도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기 산정의 문제를 갖고 오래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들뢰즈, 러시아 현대 사상의 관계만이 관심사인 탓이다.

 

 

2000년대 후반의 유학 시절에 내가 놀랐던 것은,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식상해져 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제적인 것으로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서구에 소개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두 지성, 미하일 바흐친이나 유리 로트만을 프랑스 철학자들과 연관시켜 논의하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흔한 반론이 있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점으로는 러시아 지성의 고유성을 논할 수 없다”는 강한 반발감이 그것이며, 이에 따라 문제 의식은 언제나 “고전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수렴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아카데미 전통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해야 할 적(敵)이든지 혹은 적극 끌어안고 과거(‘러시아 전통 혹은 소비에트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할 원군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다소간 완고한 아카데미의 철학부들은 전자를 대표했고, 후자는 발레리 포도로가(Valery Podoroga)와 같은 서구 지향적 철학자들로 대표되었다.

 

52629.jpg  * 발레리 포도로가

 

1970년대에 이미 푸코의 <말과 사물>이 소개되었고, 소련의 붕괴 즈음과 그 이후로 현대 서구 철학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 철학서들이 물밀듯이 번역되어 나왔다. 보드리야르는 진작에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었고, 데리다나 라캉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들뢰즈의 책들은 번역도 느리고 논의도 적어 보였다. 가령 <천 개의 고원>의 1부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포도로가의 친구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이 90년대 초에 요약본을 선보인 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완역본이 나올 수 있었다. 서구의 모든 책들이 번역될 이유는 없겠으나, 포스트모던 사회와 사상의 가장 논쟁적인 고전이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라면, 다른 책들의 번역 속도에 비추어 확실히 늦다는 생각이 든다.

 

ryklin.jpg 8976823257_1.jpg  * 미하일 리클린과 그의 책

 

내게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정할 만한 경험이 있었다. 유학 초에 러시아 철학의 현재성을 살펴본답시고 우연히 고른 책의 하나가 이고르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Zhil' Delez: vvedenie v postmodernizm, 2005)이었다. 내 호기심을 끈 것은 이 책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이었기 때문인데, 한편에는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놀라움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들뢰즈=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등식이 통용된다는 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탓이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심오한 체계성이야말로 비체계적이라고 비난받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한 하나의 ‘경지’요, 최종적 결산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착지처럼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1000262036.jpg  *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현재적으로 활용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사상의 격차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짚어본다면,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통용되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다. 러시아 서점에 <천 개의 고원>을 주문해 두고 아직 받아보지 못한 상태라 단언하기는 이르지만(*오늘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서평이나 리뷰 등을 검색한 결과 이 책이 더 이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제 의식과 관련되어 논의되지는 않는 듯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근의 러시아 논저들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 내 지적 흥미를 잡아당기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당초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와 등가의 함의를 갖고 러시아로 ‘수입’된 사조였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든 옹호하든, 여기엔 러시아가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서구 콤플렉스가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말할 근거가 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러시아 연구자들은 서구에 대한 별다른 콤플렉스 없이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시킬 때 이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을 마치던 시기에, 꽤나 급진적인 관점에서 서구 사상을 번역·소개하는 잡지를 사본 적이 있는데, 마침 거기 <천 개의 고원> 중 한 장(章)이 번역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읽다가 원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으로 번역되어 있음에 깜짝 놀랐는데, 그것은 ‘잘 다듬어진’ 번역(해석)이었다기보다 사상의 ‘새로운 가공’이라 할 만한, ‘창조적’ 번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그 유효성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는 아닐까? 더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련의 붕괴 이후 맞부딪혀야 했던 서구 콤플렉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러시아 사유의 향방을 보여주는 징후라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책 한 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별별 몽상을 다 한다는 망설임이 들지만,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러시아 사유에 관해 조금씩 지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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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 2011.03.25 0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고 궁금합니다. 궁금한 건, 여전히 러시아에 대해 모르는 게 많기 때문.
    <천 개의 고원> 러시아어판 표지는 참 이쁘네요.^^

  2. vizario 2011.03.30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죠? 표지가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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