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없는 편지*

2018년 신인들의 시적 감응에 대하여

 

 

최진석_문학평론가. 수유너머104 회원

 

 



1. 리듬과 감응, 유물론의 시학

 

유물론적 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i Plekhanov)는 예술의 오래된 기원 중 하나로 리듬에 대한 감각을 꼽은 적이 있다. 그의 예술론을 모아놓은 주소 없는 편지(Pis’ma bez adresa, 1899)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 노동이란 파편화된 각자의 힘을 단일한 집합성으로 끌어모으는 과정이고, 그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은 다수의 인간을 하나로 엮어내는 몸의 감각 즉 리듬이라는 것이다. 플레하노프가 유물론적 혁명가이자 정치철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이 새롭거나 놀라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채롭게 보아야 할 점은 리듬을 정의하는 그의 독특한 안목이다. 아마도 최초의 노래란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몸짓이나 목소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동작하고 소리내는 와중에 혼합되어 하나의 가락 속에 합쳐진다. 서로는 각자의 구별을 잃으며 점점 단일한 집합체처럼 노동에 참여하게 되고, 거기서 노동요 곧 공동의 리듬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부터다. 그러한 무의식적 일치를 언제든 이루어내기 위해 인간은 노래를 짓고 악기를 발명한 게 아닐까? 어쩌면 시란 그러한 일치의 감각을 다시금 뽑아내기 위한 언어적 주문이 아닐런가?



Georgii Plekhanov(1856-1918)



리듬은 비단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함께-있음이라는 관계성이 형성되는 언제, 어디서, 무엇과라도 리듬은 발생하고, 거꾸로 관계의 성격마저 규정짓는다. 열매를 채취하는 사람들과 표적을 뒤쫓는 사냥꾼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가만히 매달린 열매와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물을 응시할 때 만들어지는 관계의 리듬이 상이한 까닭이다. 타작을 하려고 흙을 밟는 농부들과 강철을 연마하는 노동자들의 발걸음도 같을 리 없다. 흙과 쇠의 질료적 차이가 보폭과 운동의 이질성을 자아낸다. 리듬은 어떤 대상을 만나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매번 상이한 속도와 정도로 표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리듬이란 사물에 내재한 속성이라기보다 서로 마주한 대상들이 얽혀들 때 파생되는 관계의 표현이다. 리듬은 사이[]에서 만들어져 그 사이를 채우는 모든 것들의 공-동적(-動的) 관계 전체라는 것. 그렇다면 흔히 환경이라 부르는 관계들의 총체야말로 리듬의 비밀이 아닐까? 예술 역시 예외이진 않을 터. 어떤 예술작품이 뿜어내는 맹렬한 감응(affect, 情動)이란 예술가가 그의 환경과 공-동으로 조형하는 관계성에 다름 아니다.

시 또한 그러하다고 나는 믿는다. 전통적 시학이 전제하듯, 시는 시인-주체의 고독한 내적 성찰과 외로운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다. 홀로 독야청청 세상천하를 관조하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신화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주체의 내면으로부터 어떤 이미지와 언어가 피어나든, 그것은 그가 만난 세계 곧 환경 전체가 그의 몸에 새겨놓은 상호작용의 각인일 뿐이다. 시의 제목이, 소재가, 주제가 어떤 식으로든 특정될 수는 있어도, 거기서 발견되는 낯선 감응의 흐름들, 때로 시인과 독자를 배반하기조차 하는 이질적 의미의 조형은 그 시가 온전히 시인 자신에게만 귀속될 수 없음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에서 매양 읽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넘어서 그 이면에 엄존하고 있는 리듬의 진실, 시인과 우리가 동시에 마주한 이 세계의 울림이다. 그것이 유물론의 시학이다.

등단이라는 제도적 문턱을 넘어선 시인들이 바라본 세계는 특별하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 졌더라는 어떤 작가의 고백처럼, 한낱 표찰에 불과할지라도 시인이라는 꼬리표는 그네들의 삶을 절단시키고, 차이의 감각을 발동시켜 이전과는 상이한 리듬의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젊은 시인들을 보라! 그들의 감수성과 시적 언어를 느껴보라! 하지만 또한 분명하리니, 그들의 시는 그들 자신만의 것은 아니며, 이 시대가 그들에게 남긴 감응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손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어 그 자취들을 더듬어 보자.

 

 

2. 문턱의 시선, 결별의 예감

 

()은 분리와 결합의 기묘한 이중 평면이다. 창이 있음으로 우리는 문턱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창으로 인해 거기에 닿을 수는 없다. 해방구인가 감옥인가? 영구히 풀 수 없는 이 삶의 오랜 질문은, 적어도 이제 갓 시의 관문을 통과했다고 느끼는 자들에게는 모종의 깨달음의 표석으로 장식될 만하다. 내내 과거형 어미로 주도되는 그림자 극장의 전반적 분위기는, 아마도 그와 같은 통과의례적 의식을 스스로에게 표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

 

커다란 창이 있는 방이었다.

 

[...]

 

나는 창을 연 채 그 방에 앉아 벽에 영화를 틀어놓았고

어제 저녁엔 여러 여성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 같이 이곳에서 우리와 있다. 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그나마 행복해 했고

 

초저녁이 되면 영화를 튼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지이, 그림자 극장부분

 

낡은 필름이 풀려나가듯 문턱 이전의 시간들은 다양한 이미지들로 변주되며 지나간다. 어제 저녁에 어딘가에 있던 이들이, 오늘은 우리와 함께 있고, 그것조차 영화 속의 한 장면인 양 이미지화되면서 강 건너의 무연한 사태처럼 창밖으로 비치는 정황이다. 이것은 순수한 과거의 시제, 과거의 장면, 과거의 감정 아닐까? 지금 현재의 사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관조되고 반조(反照)되기만 하는 무연관의 시공간. “그나마 행복해 했노라 말하고는 있으나 문턱 위에서, 더 이상 이전의 세계에 머물 수 없는 경계선 위에서 바짝 날이 선 시적 주체는 마냥 긍정적일 수 없다. 지금 이전의 지나간 시절은 제 아무리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구속된 아름다움이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인 탓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며/평생을 견디고 있다.” 주체로 하여금 한 걸음 앞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쳐 개화하지도 않은 시가 어째서 벌써 시드는가? 논리정연한 산문의 언어로 설명하진 못해도 시쳇말로 느낌적 느낌으로 지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바짝 발붙인 경계 너머로 나아가야할 때, 거기에 있는 것이 과거를 보상해 주는 빛나는 무엇일지 아닐지 가늠할 수 없는 탓이다. 바람이 휙 불어오듯 찰나의 순간 시적 주체는 경계 위에 올라섰지만, 감히 더 나아갈 욕망도 품지 못한 채 아직 거기 머물러 있다.

 

건조한 곳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강지이, 달의 계곡전문

 

물론, 더 나아가길 바라는 욕망 또한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느릿하되 편안한 산보도, 숨가쁘나 활기찬 뜀박질도 아니다. 강진영 시인에게 이는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자각과 의지, 성찰과 욕망이 뒤얽힌 채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로 표상된다. 익숙한 환경, 친절한 이웃, 다정한 가족과의 무참한 결별. 기차처럼 달리는 아이들은 엄마 없이 엄마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면서” “엄마라 부르던 세계를 떠나야 한다. 아무리 사랑스럽고 안온했던 울타리라도 여하한의 의존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 돌아보고 후회하는 것조차 자신의 몫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쾌한 각오를 짚어내자. 문턱을 넘으려 할 때는 필연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내 손을 놓아요 터널을 지나요 바다를 건너요 뒤를 돌아보는 건 나예요.” 철없던 아이가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서사의 행복한 광경으로 미화해서는 곤란하다. 엄마의 세계는 안전하되 속박되는 굴레였고, 떠나는 아이는 자라지 못한 채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으며, 문턱 너머로 열린 낯선 세상은 이물감 가득한 두렵고 분열적인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기차에 오를 거예요 내릴 거예요 엄마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요 아무것도 낳지 않을 거예요 

노을에서 엄마의 커피향이 나 엄마의 노을을 훔쳐 마시며 /////////////////////////////////////////////////////////////////////////////mmmmmmmmmm

m                                       m                                        m ,,,,,,,,,,,,,,,,,,,,,,,,,,,,

 

여기는 벽이 모두 창문이잖아 매일의 풍경이 바뀌잖아 엄마가 한 칸 한 칸 분열하잖아

 

강진영,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말입니다부분

 

그럼, 거기에는, 문턱 너머 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아니라 사건이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감각의 경험, 그로 인해 아이가 뒤틀리고 기이하게 변모하여 성장의 미명 하에 부서지고 말 변화들. 해변에 부딪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파도야말로 그러한 파열적 체험이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이미지 아닐까? 속절없이 너울대는 파도처럼 부유하는 시상과 언어는 산산이 흩어지기 직전의 모습만을 애틋하게 기억할 것이다.

 

                                                        사랑해

                                                                  나는 부서지기 직전의 파도를 사랑했지

                                        너는 부서진 파도

 

강진영, 쇼어 브레이크부분

 

 

3. 너머의 세상, 차이 없는 반복

 

여기를 넘어 저기로 나아갈 때마다 기대를 품고 희망의 탑을 쌓아올리는 심정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이나 욕망이 남아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도, 문턱의 저편도 이편과 다름없이 동일한 상황의 반복으로 점철되리란 의구심은 이상하게도 늘 적중하는 듯하다.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도 굳이 여기의 삶을 겹쳐 보는 현상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게다.

 

우리는 자주 시청에서 만났다 여당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었다 밀착해도 시차가 발생하는 여자였다 한 침대에 누워도 상대방의 꿈속에 도래하지 않았다 일인칭의 새벽 교대로 일어나 담배를 피웠다 아직 잠들어 있는 다른 한 쪽의 꿈속으로 급조된 안개가 피어올랐다 지극한 침묵이 함께 있는 새벽의 암구호였다 나는 줄곧 나를 사칭했고 둘이 형성할 수 있는 것들이 다 떨어질 때면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 군중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방백마저 무례하게 확성되고 있었다 어는점이 십도쯤 낮은 여자였다 그 속에서 흥분을 익히며 매번 촛농 같은 땀을 흘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분실해도 태연하게 행진의 일속을 가장했다 살수 같은 비가 직사로 쏟아지는 밤이면 여자와 나는 시청에서 자주 해산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줄곧 나에게만 전력으로 가담했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입을 떼며 무슨 말인가 했지만 초 단위의 시차로 매번 싱크가 맞지 않았다

 

곽문영, 시청전문

 

무성영화 화면들이 연속적으로 스쳐가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내용적 연관 없이 툭툭 끊어지면서 아슬아슬하게 접붙어 있다. 내용과 형식의 불연속적 결절은 상호 소통되지 않고, 일치하지 않는 타인들, 세계들, 감정들의 절단면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서 일관된 것은 매번 싱크가 맞지 않는 전체의 분위기, 그 어긋남의 감응이다. 물론 시제는 과거형이다. 어쩌면 이 시편은 문턱 이전의 순간들을 침울하게 회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음에도 끝내 도래하지 않, “줄곧 나를 사칭하는 나 자신과의 결렬은 나와 여자사이의 불협화음만큼이나 일관된 불일치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욕망도 담지할 수 없는 이 광경은 매번 맞지 않는 싱크처럼 저편에서도 반복될까? 이런 정조에 감싸인다면 문턱 이후, 그 너머의 세계를 가히 밝게 예상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나는 소리조차 녹음된 새의 소리일 뿐이며, “어제 내려 쌓인 눈 위로/새로운 눈이 내릴 때/나는 소리조차 전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조로(早老)의 대기에 휩싸여 낡고 지루한 풍광을 연출할 따름이다. “매일 보았던 후뢰시맨은/마지막 회에서 너무 늙어보이고, 마침내 시적 주체는 이렇게 뇌까리기에 이른다.

 

이곳은 좁으니까 이제 우리는

그만 크자

 

[...]

 

길게 이어진

새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새의 발자국 옆에 새겨진 나의 발자국

 

뒤를 돌아보면

새와 다정하게 걷는 사람의 발자국

 

새의 마지막 발자국 곁에서

한 번도 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곽문영, Black Fire부분

 

새로움과 신선함, 낯선 반가움으로 표징되는 신인들에게, 도대체 문턱 너머의 무망(無望)이라는 정조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채 장성하기도 전에 설익어 떨어지고, 미쳐 깨닫기도 전에 벌써 체념해 버리는 이토록 급속한 노화의 감각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라기보다, 그들과 교감하며 구축된 이 시대의 감응이라 불러야 옳을 터. 정치와 사회, 문화와 예술, 혹은 삶의 모든 부면에 만연한 권태와 피로의 감수성을 그들은 머리로 알기 전에 이미 몸으로 느껴버리고 말았던 것.

늘상 새의 발자국 곁에 머물면서도 결국 새는 찾아내지 못하는 파랑새 전설마냥, 시적 주체는 오직 자취의 초상화만을 그리는 운 없는 화공이다. 그저 눈물로만 색을 입힌 이 그림의 진실은, 그것이 슬픔이 곧 주소인 우리초상화라는 데 있다. 왜 자신의 기원(주소)이 슬픔인가? 너머의 삶, 저편의 일상을 욕구하기도 전에 이미 폐기해야 하는 역설의 세대인 탓이다. 마땅히 바래도 좋은 것, 마침내 도착할 수 있는 곳, 기어이 원하는 것을 필연코 얻지 못하리란 역설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갓 시인명부에 입적한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계시의 언어가 아니라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처럼 중단된 살아있는 미라의 삶일지도 모른다. 문턱을 밟아선 시인의 두려움과 낯설음은 필시 이로부터 기인한 불안일 테다.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 언어를 기다리고, 언제나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리 자신을 종속시키려 했지만

 

모든 무렵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

성가의 전주前奏에서 발각되는 도처의 미라

 

김유태, 검은 원부분

 

제목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작품 검은 원(1913)에서 따왔다. 말레비치는 회화의 근원적 구성요소인 색과 형태를 극도로 추상화시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것이 흰 바탕 위의 검은 원이었다.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이 검은 원은 더 이상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기원의 색깔이요 모양일지 모르나, 역설적이게도 흰 바탕 없이는 그 자신을 주장할 수조차 없다. 문제는 흰 바탕이라는 것이 무()는 아니되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무규정적인 존재 자체라는 것. 검은 원보다도 더욱 근본적이라 해야 할 흰 바탕은 온갖 규정을 넘어서는 순수 존재이자 순수 무에 다름 아니다. 기원에 대한 앎의 추구가 이토록 무참히 깨질 수 있을까? 문턱 너머를 들여다 본 자의 절망이란 그와 같지 않을까? 궁극의 원점에 다가선다 해도, 결국은 그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깨달을 뿐이라는 카산드라적 예언 아닌가? “검은 멍이 된 이 경험은 불판 위에 구워진 냉동육 껍질에 남은 도장의 흔적처럼 아이러니컬하게 읽히며, 너머의 삶에서 기대하게 마련인 아름다움이란 결국 잔혹한 멍으로만” “몸에 고이는기억임을 자각하게 될 터(김유태, 낙관).

너머에 대한 포기와 체험은 자기 아이러니적 희화화로 귀결되는 듯하다. 시인 각자는 시인 일반으로 추상화되고, 구별 불가능한 어둠에 감싸여 모두 같은 인종이 될 것이다”(류현, 학술보고서). ‘객관과학을 뽐내는 학술보고서이지만, 결국 차이나는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카프카적 냉소가 지속될 뿐이다. 너머의 불가피한 진실을 알게 된 시적 주체는 경계에 머물고자 애쓰겠지만, 그 역시 자기를 인간으로 남겨두려는 비겁한 타협일지 모를 일이다. 다른 모두도 그렇겠지만.

 

경계선은 두려움을 밀어내는 타협, 선에서 시작되는 출구는 인간적이다. 선은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출구, 지켜야 할 선 같은 건 없다. 나의 직업을 미리부터 정해 놓은 너희는 말했다. 바나나를 받아먹는 원숭이는 지루하다. 바나나만을 받아먹은 나는 너와 같아졌다. 겉모습을 갖추었다. 구별되지 않는다. 다음 원숭이는 누구인가?

 

류현, 학술보고서부분

 

 





4. 반복과 차이, 사건의 감응

 

세상과 섞이는 것. 낡은 선비정신은 혼탁한 세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닦으라 명령해 왔다. 그러나 사람의 사이라는 게 인간의 본뜻이라면 어떻게 이 세계에 몸을 섞지 않고 인간일 수 있으랴? 문턱을 넘어, 시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 세계, 그리고 자신과 다시 한번 섞이는 교통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느끼고 반응하며 감수하는 것. 감응(感應)의 체험을 언어 속에 투여하는 것이야말로 문턱을 넘은 자, 시인 주체의 몫이 아닐까?

하지만 문턱 이후의 삶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다시금 세인과 어울리고 세상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속편히 타협하는 게 시적 행위일리는 없다. 세계에 자기를 섞을수록, 범속에 몸을 담그고 혼탁에 자신을 바칠수록 시는 시가 되어야 하며, 시인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소리의 분산 가운데 스스로를 표시할 수 있는 홑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겹쳐진 다른 소리들을 찢어 분리하고, 여러 가지 발음들을 실험하여 뾰족한 모서리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 떠들썩한 세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될 수 있는 대로 차갑게, 설익은 내면을 푹 고아 시의 온존한 형태로 표현해 내야 한다.

 

모음을 찢는 소리가 경사지고 있었고

당신의 발음은 더듬을수록 모서리가 됐다

 

체온이 높은 노래를 한 음절씩 물에 빠뜨렸다

철들지 않은 발음은 수면을 밟고 올라설 수 없었다

 

류현, 홑소리부분

 

이는 언어의 리듬을 만드는 작업이다. 세계와 교통하며 지각하는 동시에 세계로부터 건네진 감응에 시적 주체의 울림을 실어 시의 감응을 구축해 내는 것. 세상의 온갖 소음, 이미지, 목소리를 내 몸에 투과시키는 게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소통이란 자신에게 닥쳐온 세계의 감응을 자신의 것과 조율하여 특이한 리듬을 지닌 시적 감응으로 변형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거침없이 모음을 탕진한 메아리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수천 번 입술을 말아도 완성되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울음을 조율하며기어코 그 리듬의 형태에 다가서려는 분투, 여기에 시인-되기의 노고가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유일무이하고 고고한 단독자가 아니지만, 또한 세상만사에 참견하는 수다스런 호사가도 아니다. 그는 차라리 이 세계의 흐름을, 미세한 리듬을 감지해 내는 지진계가 되어야 한다. 바꿔 말해, 세계의 형상을 읽고 대지의 분위기를 포착하며, 그 감응을 짚어내 언어로 옮기는 번역기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진학자 안드리야 모호로비치치는 지구라는 대지의 감응을 예감하고 과학의 언어로 풀어낸 시인-번역자라 불러야 하겠다.

 

여러분, 우리의 녹는점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생각은 옅어지고 서로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아가고 있습니다. 1인칭의 언어는 사라지고 쓸모를 다한 눈금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속눈썹과 손톱만 남아 보트 위에 표류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연속적이어야 하며 술에 취해 어깨동무해서도 안됩니다. 종국에 서로를 나라고 느끼며 견디지 못할 온도에 다다를 것입니다. 책을 펴지 마십시오. 꿈을 꾸지 마세요.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방향성을 믿지 마십시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박길숙, 모호로비치치의 연설문부분

 

모호로비치치의 모호한 연설은 서로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1인칭이 소실되며, 눈금마저 지워져 하나로 혼융하게 될 지각의 변이를 경고하고 있다. 시적 전통에서 위기이자 파국으로 언명되었던 시적 자아, 데미우르고스적 창조자의 형상은 그 변이를 버틸 수 없다. 모호로비치치의 슈트에 달린 금장 단추처럼 떨어져 녹아내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성의 상실도 아니요, 개인의 소거도 아니다. 차라리 이전, 이편의 자아를 의문에 붙임으로써 문턱 너머에서도 그와 같은 자기성이 여전히 유효할지 탐문하는 시적 성찰의 과정이겠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그제야 우리는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돌연 낯설어지는 사태를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까.

 

양심의 소리는 어느 쪽에서 날까?

내가 귀머거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른발 왼발 발맞추다 박자가 헷갈리면?

계단은 내 발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나뭇결대로 내 얼굴이 깎여 버리면?

질문에 질문을 더하면 답은 없어

 

박길숙, 지미니 크리켓부분

 

당연하게도, 귀머거리에게 양심의 소리라는 비유는 의미가 없다. 나란히 평행하게 자라난 두 발 사이에도 순서가 있을 리 없고, 계단과 걸음걸이가 늘 조화롭게 일치하란 법도 없다. 순리와 당착, 인식과 오인. 질문의 순서가 바뀌면 논점이 달아나고, 전혀 낯선 명제가 고개를 쳐 든다. 피노키오의 양심을 자처하는 지미니 크리켓은 말하는 귀뚜라미다. 의인화된 가상의 비존재지만 통상의 순리와 인식을 전도시켜 당착과 오인을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또 다른 진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더할 수 없이 강력한 현실성을 갖는다. 그럼 허구적 실존 지미니 크리켓이 있음으로써 너머의 삶은 비로소 실제의 삶이 된다고 해야지 않을까? 이전과 이후, 이편과 저편이 어떻게 연속적이고 또 어떻게 불연속적인지, 그 절단과 흐름의 감응을 탐지해 물음을 던지는 지미니 크리켓은 그 자체로 시적 주체의 형상에 비견할 만하다. 계단도 없이 문턱을 오르고, 이편과 저편을 넘어서기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또한 언제든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장전된 미지의 그것.

 

나는 죽지 않는 불멸의 옴므

너는 죽지 않는 불멸의 양심

 

계단도 없이 오르내리는 나는

죽지 않는 아이, 살아 있지도 않은 아이

그래서 태어난 적도 없지

 

마침내 그렇게 너머의 지평에 도달한 시인은, 이미 너무나 정확히 예감하고 있었듯 이전의 생활과 이편의 일상을 반복해 살아가리라.

 

가로등이 반복된다

에스컬레이터의 단면에서는 세계의

상승과 하강이 매순간 교차하고 있다

 

달이 반복되었다

식사가 반복되었다

바다 너머에 바다가 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박정은, 자연발화부분

 

나는/그저 가끔씩 뜨거워질 뿐”, 여기에 비약적인,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 턱이 없다. 문턱 너머는 선택된 땅도 아니고, 도착할 수 있는 최후의 지평도 아니다. 여기엔 여기대로의 지루한 일상이 시인을 기다리고, 생활에 삼켜진 또 다른 시인들이 졸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언자의 목청을 드높이거나 순교자의 비탄을 쏟아내는 것 따위가 아닐 게다. 수선스런 시인의 자의식을 내려둔 채, “칼국수를 먹바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머에서는 너머의 삶을 삶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바로 그럴 때, 슬그머니 덮쳐오는 세상의 감응과 낯선 감각들을 마주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처음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바다가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평선과 시선이 직각을 그렸다

 

바다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고, 시선과 직각을 그은 수평선을 보는 일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온갖 감각적 파장들이 시적 주체에게 지각되는 방식은, 물론 그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 감응이란 사태가 직관되고, 그 과정에서 체감되는 사물의 체험이자 수용의 효과인 까닭이다. 통념으로부터의 불일치, 그 어긋남의 발견이야말로 너머의 삶을 살아가며 찾아낼 수 있는 시의 감응일 터. 이전의 생활, 이쪽의 일상과 하나 다를 바 없던 이후와 저쪽의 삶은 그렇게 다른 것으로, 일종의 인공정원으로 조형되기 시작한다.

 

정원에는 높고 긴 나무들이 가득했다

인공정원이었다

중앙에 커다란 나무 세 그루를 중심으로

정원은 네다섯 개의 숲을 품고 있는 듯 했다

 

박정은, 정원부분

 

인공정원이야말로 너머의 세계를 또 다른 삶의 세계로 형상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다. 인공낙원일 수도 있고, 인공지옥일 수도 있는 양가적 경계의 중간지대로서 이 정원은, 물론 삶의 최종적 종착지는 아니다. 이 주소지는 언제든, 어떻게든 파기되고 새로이 옮겨질 수 있다. 여기 또한 이편 우리의 생활을 모방하여 큰 나무를 심고, 거기 올라 세상을 욕망하는 나날에 잠식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니 자칫 정원에서도 시인은 앙상한 꼬리표만 나풀거리며 이 세계를 자신의 감응 속에 융화시키지 못할지 모른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안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각의 촉수를 예리하게 갈아두기 위해 시적 주체는 주변부를 향해 뛰어야 하고, 사람들이 큰 나무에 오르려 줄을 설 때 오히려 정원의 끝을 향해 달려야 한다. 그렇게 변경으로, 구석으로, 끄트머리로 힘껏 내달릴 때, 아마도 인공정원의 너머는 또 다른 정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끝이 아닌 시작, 혹은 새로운 감응의 응결과 전염. 거기서 시인은 말하리라. “정원은 나로 인해 넓어졌다. 그렇게 주소지는 또 다시 이전될 것이다.

주소 없는 편지. 이는 너머의 세계가 쏟아내는 감응을 부지런히 수신하고 그에 응답하여 주체의 감응을 발신됨으로써 새로운 감응, 곧 세계의 리듬을 창안하는 시적 투쟁의 과정이다. 제아무리 낙토의 장관을 연출하더라도, 그것이 건설되면서 또한 붕괴되는 속도를 추월해 새로운 정원의 이미지를 구성하려는 그 시적 여정에 주목하라. 그것은 반복 속에 차이를 발견하고, 사건의 감응을 촉지하며, 그 리듬에 어울리려는 시작(詩作)의 노동에 값하는 일이다. 시의 편지가 부쳐지는 주소를 확정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 주소를 결코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귀속되어 있다. 편지가 도달하기도 전에, 주소는 벌써 바뀌어 있을 테니까.

 

나는 정원과 속도를 겨뤘다

 

* * *

 

올해 등단한 시인들의 최근작을 살펴보며, 시인으로서 그들이 감촉하는 이 세계와 그에 조응하여 그들이 조형해낸 시적 감응을 거칠게나마 짚어보고 싶었다. 감응이 감정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특이한 분위기의 조성을 가리킬진대, 시인 하나하나를 어떤 특정한 상태나 단계, 태도에 결박시킬 의도는 전혀 없다. 이 글에서 각자의 이름과 작품을 호명하며 단평한 것은 또한 그들의 시와 마주친 나의 비평적 감응이라 간주해주면 좋겠다. 비록 시인 개인의 이름으로 쓰여진 작품들 하나하나일지라도,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이 시대와 교응하고 결합하여 안출해 낸 공-동의 시적 리듬이라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나의 비평도 시인과 시 작품 그리고 나 사이의 공-동적 감응의 결과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를지라도, 여기에는 서로를 읽고 호응하는 일관된 리듬의 감응이 필연코 존재한다.




* 이 글은 월간 현대시201811월호에 게재된 동명의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염려하는 주체와 언어의 형식

2010년대 한국시의 경향과 특이점: 김복희와 안태운의 시

 

 


돌들은 땅 위에 깔려 있다,

물 한 방울 짜낼 수 없는 돌들,

목덜미를 연상시키는 보통 돌들,

보통 돌들비문 없는 돌들.[각주:1]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송승환_시인. 문학평론가

 

 



1. 새로운 언어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없다

 

지난 201610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201731120차 촛불집회까지 매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의 광장에서 열렸다. 헌법에 기초하지 않은 소수의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촉발된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평화적이며 지속적인 참여로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특히, 19차 촛불집회까지 세대와 성별을 가르지 않고 참여한 시민들의 최종 누적 연인원은 1,500여만 명이었는데, 이는 헌법재판소 전원일치로 2017310일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이 이뤄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 점에서 탄핵 인용 결정이 이뤄진 다음날 개최된 20차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였으며 대한민국과 세계의 역사에 민주주의가 기록되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촛불 시민들은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선정한 2017년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2008225일부터 2017310일까지 유지된 정부의 비민주적이며 퇴행적인 치안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실천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시인들은 지난 정부의 비민주적이며 폭력적인 치안 통치 속에서 발생한 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실천을 감행한 바 있다. 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은 동시대의 비극적인 삶을 드러낸 사건으로서 시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한꺼번에 제기하였다. 시인들은 동시대의 사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표명하면서도 경악과 비명, 분노와 슬픔 외의 시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고통과 무력감을 겪었다. 2009‘6.9 작가 선언20149월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304 낭독회는 그 고통과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문학적 실천이었다. 2000년대 한국시의 전위적이며 미학적인 실험은 제도적으로 안정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미적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는데, 2008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시는 다시,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모색하고 폭력적인 현실을 어떻게 감각하고 표현할 것인가, 라는 논의의 자리로 재결집하는 양상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최근 촛불 시민들의 투표로 재건한 제도적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올바름과 그 윤리를 시적 언어로 구현해야 한다는 당위의 차원까지 치달았다. 직장과 학교 안팎의 위계질서에 의한 성차별과 폭력 등에 대한 고발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구조뿐만 아니라 사회의 미시적 영역에 만연한 불평등과 비민주성에 대한 시민 개인들의 강렬한 저항과 연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예증한다. 한국시는 급박한 현실의 국면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 앞에 놓여있는 형국이다.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한국시의 신인들이 나타났다. 2000년대 한국시의 전위적 실험을 주도한 1970년대생 시인들과 구별되는 1980년대생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앞선 세대의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언어의 영향과 자장 속에 있으면서도 그 영향의 극복과 정치적 올바름’, 미학적 정치성과 윤리의 언어를 동시에 발명해야 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출현하였다. 2000년대의 1970년대생 시인들은 현실을 억압하는 세계과 자본에 대하여 윤리를 초과하는 주체와 소수점 이하의 주체 및 분열하는 주체를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강렬하게 열망하는 알레고리 시의 파편적 파노라마를 전개하였다. 2010년대의 1980년대생 시인들은 2000년대보다 더욱 심화된 장기적 불황과 자본의 예속에서 삶의 생존을 더욱 민감하게 고려하고 반응하는 알레고리 시의 염려하는 주체를 등장시켰다. 그들의 시에서 염려, 즉 쿠라(Cura, 라틴어)[각주:2]지금-여기의 삶에서 다른 시간의 도래를 희망하지만 다른 삶의 어떤 가능성도 품지 못하는 주체의 불안을 드러내는 심리적 특성을 함의한다. 염려는 지금-여기한국의 시간과 장소에서 시들지 않는 꽃들을 심어 세계를 뒤덮[각주:3]는 상상력과 다른 삶에 대한 동경(憧憬)’을 가로막는다. 다른 삶을 향해 도전하고 고통과 마주하고 싸우면서 절대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킨다.

1980년대생 한국시에서 염려하는 주체는, “시작부터 시작만을 반복하는 세계”(백은선의 유리도시)에서 총력을 다해 할 일 없는 하루”(백은선의 가능세계)를 살고 사람들은 공평하게 우울을 나눠 가졌”(유계영의 생각의자)다고 생각한다. 우울의 반복 세계에서 나는 숨을 참는 얼굴”(안미옥의 거미)이 되고 네 숨은 서서히 마취되어”(안태운의 감은 눈이 내 얼굴을)가고 주름만으로 중력은 악몽”(신두호의 증후군)이 된다. “이 집에서 나는 노력 없이 노력한 것보다 더 작아진다”(김복희의 잉어 양식장)[각주:4]고 진술한다. 염려하는 주체는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 일상의 무한 반복 속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과 그 동경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데, 그것은 다른 삶의 가능성과 동경에 대한 열망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망조차 품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2010년대 지금-여기한국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동경 없는 세대의 염려하는 시적 주체가 발화하는 언어는 그 근심을 표명하는 알레고리의 고백적 진술이 특징이다. 시적 대상을 돌파하고 난관을 가로질러서 다른 삶과 다른 의미, 그 절대에 도달하려는 과정에서 실패한 우울이라기보다는 미지의 세계와 기지의 현실 로부터 기원한 불안에 휩싸인 주체의 우울한 고백이다. 염려하는 주체의 고백체 진술은 우울한 현실과 대면하는 알레고리의 미적 거리가 가까워서 평면적 의미의 맥락과 규범적인 언어의 경향을 지닌다.

 

이 시는 땅 위에 깔려 있는 돌들에 관한 것이다.

보통 돌들, 그들 중 반은 태양을 보지 못할,

회색빛 보통 돌들,

보통 돌들비문(碑文) 없는 돌들.

 

우리의 걸음걸음을 받아들이는 돌들,

태양 아래선 하얗고, 밤이면

물고기의 불거진 눈 같아져 버리는 돌들,

우리의 걸음걸음을 가루로 만드는 돌들,

영원한 양식의 영원한 맷돌.

 

우리의 걸음걸음을 받아들이는 돌들,

검은 물 같은 회색빛 돌들,

자살자의 목을 장식하는 돌들,

분별력으로 연마된 보석 돌들.

 

어느날 자유라고 새겨지게 될 돌들,

어느날 거리를 포장하게 될 돌들,

감옥을 짓게 될 돌들,

아니면 아무런 연상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돌처럼

그냥 그대로 제자리에 남겨질 돌들.

 

이렇게

돌들은 땅 위에 깔려 있다,

물 한 방울 짜낼 수 없는 돌들,

목덜미를 연상시키는 보통 돌들,

보통 돌들, 비문 없는 돌들.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땅 위의 돌들(1958) 전문

 


소련이 강제 추방한 러시아계 미국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Iosif Brodsky, 1940-1996)땅 위의 돌들은 지상에 깔려있는 돌들에 관한 시이다.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돌들은 흔히 깔려있는 보통의 돌들만을 함의하지 않는다. 그는 보통의 돌들이 태양도 보지 못하고 죽은 자의 이름도 새겨지지 않은 익명의 존재들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비문 없는 돌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그 돌들은 우리의 걸음걸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걸음걸음을 가루로 만드는돌들이며 영원한 양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내는 맷돌이다. 자살자가 목에 매단 돌들이며 연마된 보석 돌들이기도 하다. 어느 날에는 자유를 위해 치켜든 돌들이고 새로운 길을 놓는 포석이며 감옥을 짓는 돌들이기도 하다. 아니면 앞서 언급된 돌들의 유용성과 무관하게 아무런 연관성도 불러일으키지않고 그냥 제자리에 남겨질 돌들이다. 생명의 물 한 방울 짜낼 수 없거나 자살자의 목덜미를 연상시키는보통의 비문 없는 돌들이다. 돌들은 무용함에서 유용함까지, 자유에서 억압까지, 생명에서 죽음까지, 복종에서 저항까지, 흰빛에서 검은빛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의미를 거느린다. 돌들을 완전히 재현하고 지시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흔적을 거느린다. 시인은 보통의 많은 돌들이 땅 위에 깔려있음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돌들의 입체적 의미를 알레고리의 언어와 간결한 음악으로 땅 위의 돌들에 구축한다. 더 나아가 자유를 지향하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과 배치되는 소련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한 알레고리로 형식화한 것은 염려하는 주체의 알레고리와 다른 지점이다.

시는 지금-여기의 상황을 재현하고 비판하면서도 지금-여기의 의미를 항상 재구축하는 언어의 형식을 통해 지금-여기의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초과하는 낯선 현존, 동경의 대상을 지금-여기에 출현시킨다. 이질적인 언어의 형식과 상상력을 통해 지금까지 보지 못했거나 감춰져있던 세계의 이면을 드러낸다. 시는 고통의 경험에서 흘러넘치는 낯선 언어의 경이를 받아 적는 낯선’ ‘의 목소리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세계의 출현을 지금-여기타자로서의 내가 재현 불가능한 언어로 기입하는 것이다. 2010년대 한국시의 염려하는 주체의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두 개의 특이점, 1986년생 김복희와 안태운의 시[각주:5]에는 재현 불가능한 세계의 흔적을 드러내는 언어의 형식이 있다. 새로운 언어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없다.

 


2. 새로운 종은 이름을 얻지 않는다 김복희 언어의 시적 서사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

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 거품을 묻힌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

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

 

낮이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

 

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 냈을 겁니다

전쟁은 전쟁인거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이 들렸던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 문을 찧는다

인질들이 일어선다

 

김복희의 백지의 척후병전문

 




김복희의 첫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은 우울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의 서사와 염려하는 주체를 배면에 두고 있다. 58편으로 구성된 시집은 우울한 현실의 알레고리, 그 중력의 순환 구조로부터 벗어나서 초현실의 세계로 진입하여 이름 붙일 수 없는 세계가 출현하는 순간을 제시한다. 김복희의 시는 제목과 본문 사이에 설치한 간극의 도약을 적극 전개한다. 대상에 해당하는 제목과 대상의 성격을 암시하는 본문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희박하다. 더 나아가 시행과 시행, 연과 연 사이의 간극이 커서 면밀한 독해가 요구된다. 그 관련성이 희박한 만큼 제목과 시행 사이를 매개하는 상상력의 증폭과 암시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백지의 척후병은 김복희가 발명한 언어의 특이점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시편들 중의 하나이다. 백지의 척후병의 시적 주체는 가스검침원이다. 내가 포함된 우리는 시적 주체이면서도 관찰자의 시선을 지닌 시적 객체에 가깝다. 시공간은 가스검침원이 우리 집에 가스검침을 하기 위해 온 어느 겨울이다. 시는 연속사방무늬 물”, 즉 눈이 부서져 날리는 겨울날로부터 시작한다. 눈의 기원인 구름재난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성되고 다시 많은 눈을 흩뿌리는 겨울날이다. 김복희는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라고 단순히 재현하지 않는다. ‘을 암시하는 <연속사방무늬구름재난>이라는 연속적인 연상의 상상력과 재난에 대한 시적 인식을 드러낸다. 그 재난은 자연 재해이면서도 삶의 재난으로 확장되는 중의적 의미를 품는다. 김복희의 언어는 사물과 세계를 단순히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시인의 시적 인식을 담아낸 암시의 언어임을 드러내는데, 이는 김복희의 시에서 빈번하게 구축되는 언어의 형식이다.

가스검침원은 집집마다 방문하여 가스누출 여부를 검사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스 폭발과 화재의 위험 징후를 살펴보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삶의 밸브에 비누 거품을 묻히는 노동자이다. 그는 두 번 진술한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 냈을 겁니다/전쟁은 전쟁인거죠라고. 우리에게 가스검침은 사고 예방을 위한 작은 조치이지만 그에게 가스검침은 그가 맡은 모든 집을 방문해서 수행해야 할 노동이다. 그 노동의 길, 바닥구름이 토한 것같은 눈이, 사방연속무늬의 눈이 발가락을 다 잘라낸 것처럼 가득 쌓여있다면 그의 노동은 눈과 싸우면서 눈을 돌파해야 할 전쟁이다. 눈으로 인한 자연 재해가 삶의 재난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닥은 노동의 길바닥만이 아니라 삶이 처한 바닥도 함의한다.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포함한 공동체의 위기를 예방하는 노동을 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공동체로부터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당한 대가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단지 가스검침원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의 바닥지금-여기한국에서 살고 있는 다수의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가스검침원의 노동하는 삶의 구체성은 지금-여기에서 노동하는 우리의 보편적인 삶과 겹쳐진다. 가스검침원이 치르고 있는 전쟁은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치르고 있는 전쟁이다. 그리하여 시적 객체였던 나는, 시적 주체가 되어 나지막이 묻는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보이지 않는 전쟁의 폭발음이 들렸던가라고. 김복희 언어의 미학적인 형식이 정치적인 내용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이다.

그의 노동은 낮 동안 눈과의 전쟁 속에서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길게 이어진다. 그것은 우리 집의 추위와 다른 집의 추위를 측량하는 것이면서 자신의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는 삶의 추위를 체감하는 노동이다. 김복희는 길게 이어지는 노동을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고 표현한다. 시에서 표현은 사상이다. 침묵까지 거느린 언어의 표현을 통해 시의 사유는 전개된다. 눈 덮인 길을 뚫고 눈과 싸우면서 나아가는 노동과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는 것의 유사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스검침원의 노동에서 의 아날로지(analogy)를 발견해내고 멀리 있는 두 대상의 병치와 암시를 통해 시인의 시적 인식을 드러낸 것은 주목할 만한 시적 사유이다. 그 아날로지는 빛은 우회로를 모르는 짐승처럼 한 곳만을 두드리지요”(사다코 씨에게)밤과 낮은 겹쳐진 나뭇가지처럼 서로를 문지르고처럼 직유를 통해서도 김복희의 시에서 자주 출현하는 언어의 특이점이다.

가스검침원의 노동은 그의 육체가 죽음을 무릅쓰고 통과하는 전쟁처럼 눈에 흔적을 남기면서 길을 내고 -무덤을 쌓는 삶의 수고이자 연장이듯이 뱀은 허물을 벗음으로써 성장한다.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몸이 굳어서 죽듯이 가스검침원도 저 노동의 눈길을 헤쳐 나가지 못하면 죽는다. 그가 헤쳐나간 길 뒤에 눈이 쌓여있듯이 새로운 육체를 얻고 사라진 뱀 뒤에 허물이 쌓여있다. 시인은 노동과 뱀의 아날로지를 통한 시적 사유를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고 표현한다. 죽음의 눈길을 돌파하는 노동 속에 지속하는 삶이 있고 허물 벗는 육체 속에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눈더미를 돌파한 삶과 허물 벗은 육체, 미지의 뱀은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고 태어난다. 지금 눈길을 가로질러서 나아가는 가스검침원은 시인에게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로 명명된다. ‘정수리는 죽음의 빙하를 밀고 뚫고 돌파하면서 생성되는 미지의 삶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미지의 생명은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며 현실의 고통과 죽음의 위협에 짓눌렸던 인질들이다. 가스검침원과 짓눌렸던 존재들은 다르지 않다. 시인은 가스검침원이 나아가는 노동의 길을 통해 눈 밑에서 포복하던생물들과 인질들을 발견해낸다. ‘지금-여기의 언어로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분명 새로운 존재들이 죽음의 문을 찧일어서서 탄생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선언은 시행의 간극과 도약 속에 도사린 시인의 시적 인식으로서 가스검침원이 새로운 존재들, 미지의 생명들의 출현을 최초로 목격한 척후병임을 드러낸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옥수수 밭 바깥을 정돈한다

없는 사람으로 약속한다 공을 날려 달라는 말이다

아침마다 쓸고 닦았지만 털어 낼 수 없는 빛을 본다

―「플레이 볼부분

 

친구가 벽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친구가 무서우니까 이야기 좀 계속 해 보라고 말한다.

―「부분

 

털어낼 수 없는 빛을 바라보고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이야기[각주:6]하는 시인은, 염려하는 주체, 즉 우리가 삶의 불안과 재난의 고통 속에 휩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돌파할 때 다른 삶과 다른 존재로의 거듭남이 가능할 것임을 암시한다.

척후병이 다름 아닌 가스검침원으로 드러나는 순간 표제로 제시된 백지의 척후병은 다시 한번 의미의 확장을 일으킨다. 제목과 본문 사이의 간극에서 의미의 도약이 전개된다. ‘백지가 불러일으키는 흰빛의 아날로지는 과 결합된다. 가스검침원은 가스 누출 여부를 검사하고 우리의 겨울을 측량하며 눈의 흰빛과 함께, 흰빛 안에서, 눈더미를 쌓으면서 죽음의 흰빛을 뚫고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인질들의 출현을 목격하며 흰빛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시인은 백지 위에서 삶의 재난을 예감하고 고통의 크기를 측량하며 그 기록을 백지 위에 남긴다. 낯선 현존과 다른 삶의 출현을 감지하는 한 편의 시를 파국의 징후와 함께 백지 위에 남기며 사라진다. 가스검침원이 백지의 척후병이며 시인이다.

 

냉혈을 타고 오라, 서늘하고 축축한 전갈이

너를 놀래키는 것이다

―「내일과 모래 사이

 

시인은 내일도 모래도 아니라 내일과 모래 사이의 미지의 시간에 지금-여기로 출현하는 인질들과 새로운 생명들을 백지의 척후병으로서 목격한다. 그 타자의 존재들은, “냉혈을 타고” “너를 놀래키기위해 지금-여기의 바깥과 외부에서 온다. 그들은 서늘하고 축축한 전갈이며 새의 육체와 인간의 육체가 결합된 새로운 종으로서의 새로운 인간’, “새 인간”(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이다. 그들은, “새로운 종은 이름을 얻지 않”(내일과 모래 사이)는다. 새로운 종은 현실의 언어로 명명할 수 없는 백지에서 솟아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쟁 같은 현실을 돌파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백지 위에 출현하는 새로운 종을 목격한다. 시인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로 끝없이 이야기하고 받아 적는 척후병이다. 김복희의 시는 흰빛으로 수렴되는 파국의 백지 위에서 삶의 재난과 보이지 않는 전쟁 뒤에 출현하는 낯선 존재들을 예감하고 목격하며 이야기하는 백지의 척후병이다.

 

 

3. 사라짐으로써 유명해진다 안태운 언어의 시적 이미지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고 그러나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 그러니 밖으로 나가자 비는 내리고

비는 믿음이 가고 모든 맥락을 끊고 있어서 좋다고 그는 되뇌고 있다 그러면서 걸어가므로

젖은 얼굴이 보이고 젖은 눈이 보이고 비가 오면 사람들은 눈부터 젖어 든다고 그는 말하게 되고 그러자 그건 아무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드나들게 된다

얼굴의 물 안으로

얼굴의 물 밖으로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은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고

 

안태운의 얼굴의 물전문

 




이미지는 실재와 실재를 지시하는 언어 사이에 위치한다. 이미지는 실재를 드러내면서 실재를 가린다. 언어가 실재를 지시하면서도 언어의 자의성 때문에 매번 실재를 온전히 지시하지 못하는 실패를 겪는다면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비존재와 다른 세계의 현존을 눈앞에 드러낸다. 죽은 예수의 시체에 드리워져서 예수의 얼굴을 드러낸 토리노의 수의(Shroud of Torino)’처럼 이미지는 말해지지 않은 것과 고대적인 것, 있지 않은 것과 죽어있던 것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물과 생명체가 거기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잔존의 영상(映像)이다. 잔존하는 영상으로서 이미지는 비가시적인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드러낸다. 예수의 얼굴이 찍힌 리넨처럼 이미지가 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드러낼 때 비가시적인 것은 죽은 존재이거나 눈앞에 부재하다. 이미지는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이미지가 불러일으킨 기억에는 죽거나 망각되거나 있지 않은 비존재에 대한 파토스의 잔존이 있다. 이미지는 기억과 파토스의 잔존을 통해 부재하는 현존, 그 실재와 실재에 가장 근접한 언어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매개한다.

1986년생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는 빛조차 파괴된 허상의 현실 세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어두운 숲속에서 이 발하기를 준비하는 알레고리의 이미지를 구축한 바 있다. 송승언의 시에서 이미지는 저 숲의 어둠 속에 소멸하지 않고 잔존하고 있는 실재의 빛이 있음을 암시한다면 안태운의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에서 이미지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주체가 지워지는 의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안태운의 시에서 염려하는 익명의 주체는 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났다가 의 이미지를 통해 사라진다. 안태운은 접속부사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이미지, 문장과 접속부사의 간극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통해 안태운 언어의 특이한 형식, 알레고리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시집의 첫 시 얼굴의 물은 안태운의 시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특이점을 명시한다. 안태운은 시에서 흔히 활용하지 않는 접속부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그는 그러나의 역접관계, “그러니의 인과관계, “그러면서의 동시성, “그러자의 인과관계를 전복하면서 그러나그러니’, ‘그러면서그러자가 지닌 기존의 의미와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안태운의 시에서 접속부사는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 체언과 용언을 수식하면서 생략해도 무방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에 준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가 체언과 용언으로서 문장의 의미를 확정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삶을 분명히 재현하는 품사라면 부사는 체언과 용언을 수식하는 품사로서 시적 주체의 양태와 강도를 드러낼 수 있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고 생략해도 된다. 접속부사는 부사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안태운 시의 염려하는 주체를 암시하며 알레고리한다. 염려하는 주체는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처럼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사처럼 지워져도 무방한 존재인 것이다.

접속부사는 두 문장의 기존 관계를 뒤틀면서 염려하는 주체의 운동성과 그 방향을 암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름 없는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다라는 문장과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라는 문장은 명확한 역접관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로 인해 안에 있고 안이 좋다는 그의 위치와 가치판단이 부정되는 암시의 이미지가 생성된다. “그러나가 암시하는 부정적 이미지는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과 결부된다. 그가 있고 그가 좋아하는 이란, 빛이 없고 안개가 가득한 공간이다. 그의 은 어둠과 안개로 가득한 방과 음울한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의 부정적 상황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그가 좋았던 그러나를 통해 부정되었기에 그는 에서 으로 나간다. “그러니는 사건의 인과관계에서 공간의 인과관계까지 확장된 의미를 품는다. 좋아하는 을 부정하고 으로 나갔는데 밖에서는 가 내린다. ‘가 만들어내는 물의 하강 이미지는 알 수 없는 슬픔의 감정 수위를 솟아오르게 한다. 수직으로 내리는 의 물 이미지는 감옥의 철창처럼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모든 맥락을 끊어버리고 그를 고립시키면서 비의 철창 안에 가둬버린다. “비는 믿음이 간다는 진술은 안이 좋다는 것처럼 비가 내리는 밖의 세계를 믿을 수 없다는 진술의 반어적 표현이다. “안이 좋고 밖에 내리는 비가 믿음이 간다는 그의 안팎은, 모두 어둡고 비가 내리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그러면서의 동시성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상태와 안팎 모두 부정적 상태의 지속을 함의한다. 안팎의 부정적인 상황과 지속 속에서 그러자는 순차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순서 없는 인과관계를 암시한다. 비 오는 밖에서 젖은 얼굴젖은 눈이 보이고 비가 오면 사람들은 눈부터 젖어 든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이 어둡고 안개가 가득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건 아무 말도 아닌 것이다. 안팎을 계속 드나드는 것과 같다. 이상의 접속부사는 시적 주체의 운동성과 그 방향, 시공간의 양태와 심리적 강도를 드러내지만 여전히 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모든 물은 넘쳐흐르고 옷자락은 몸을 휘감고 형태는 마모되어 갔다.”

―「탕으로부분

 

너는 내 얼굴을 찾고 있나 그러나 찾지 못했지 나는 사람들이 되어 울고 있었지

―「낳고부분

 

접속부사는 우울한 세계의 안팎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의 상황과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지만 최종적으로 그의 정체성을 가리고 지워버린다. 얼굴의 물 안으로/얼굴의 물 밖으로/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낳는다. 내 얼굴의 형태는 마모되어서 너는 내 얼굴을 찾지 못한다. 접속부사는 물에 씻겨 나가서 보이지 않고 찾을 수 없는 안태운 시의 시적 주체, 염려하는 주체의 존재론적 특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비가 계속 내리는 세계에서 나는 사라짐으로써 유명”(나는 일기를 쓰고 있다)해진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나는 사람들이 되어 울고있다. 사람들도 나와 다르지 않게 얼굴이 씻겨나가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가득하고 어두운 안비가 계속 내리는 밖의 세계에서 우리의 얼굴은 모두 씻겨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접속부사와 물의 이미지를 통해 우울한 세계에서 흐려지고 지워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물에 흐려지는 그의 얼굴은 사라져가는 나의 얼굴이다. 내가 그를 바라보는 것은 그가 남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남은 얼굴로)는 일이다. 나는 그의 남은 얼굴에서 씻겨나간 내 얼굴의 이미지를 본다. 이름 없이 죽어가는 존재가 이름 없이 죽어가는 존재를 바라본다. 시인은 도시에서 이름 없는 얼굴을 지워버리는 죽음의 이미지를 목도한 것이다. 죽음의 물 이미지는 모든 존재를 흐릿한 존재로 변모시키고 씻겨나가는 얼굴의 흔적을 남긴다. 안태운의 시는 있지 않은 것이 있음으로 드러나는 이미지, 기억과 파토스의 잔존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망각과 소멸의 잔존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있는 것이 있지 않음의 흐릿한 영상으로 남는 이미지를 구축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이 말해질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는 순간의 시적 이미지를 포착한다. 이것이 안태운의 시가 도달한 언어의 특이점이며 접속부사의 알레고리이다.

 

 

0. 이 시는 땅 위에 깔려 있는 돌들에 관한 것이다

 

 

  

 


문학들2018년 가을호

 

 

 


송승환 

poetika@naver.com

 

2003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과 2005현대문학신인추천 평론 부문 당선. 시집 드라이아이스』 『클로로포름평론집 측위의 감각.






  1.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땅 위의 돌들」, 『땅 위의 돌들』, 김진영 편역, 정우사, 1996, p.197. 이하 인용 면수는 생략한다. [본문으로]
  2. 쿠라에 관한 우화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기상 옮김, 까치, 1998, p.269) 참고. 우화에서 염려는 인간을 빚어내는데, 이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염려의 지배로부터 전혀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본문으로]
  3. 노발리스, 「밤의 찬가」, 『밤의 찬가/철학 파편집』, 박술 옮김, 읻다, 2018, p.18. [본문으로]
  4. 이상 첫 시집을 출간한 1984년생 안미옥의 『온』(창비, 2017)과 신두호의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창비, 2017), 1985년생 유계영의 『온갖 것들의 낮』(민음사, 2015), 1986년생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과 안태운의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 1987년생 백은선의 『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참고. 이하 인용 면수는 생략한다. [본문으로]
  5. 1986년생 김복희와 안태운의 시와 함께 주목해야 할 첫 시집은 안희연과 송승언의 시집이다. 1986년생 안희연의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작과비평, 2015)는 “백색 공간”의 아름다움, 그 절대를 동경하는 시적 주체가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시의 윤리와 미학 사이의 고뇌로 나아가는 ‘옆’의 시쓰기를 실천한다. 안희연의 ‘옆’의 시쓰기와 실패의 정치성에 대해서는 졸고, 「대홍수의 상상력, 그 무의식적 정치성을 위하여」, 『현대문학』, 2016.6. 참고. 한편으로 1986년생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는 멜랑콜리적 세계관 속에서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대상을 암시하는 감각의 잔상을 신체에 각인시키는 빛의 이미지로 구현한 바 있다. 그의 시는 인공의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비판하고 숲속의 불빛이 어둠 속에 남아있음을 암시한다. 송승언의 시에 나타난 빛의 알레고리적 이미지에 대해서는 졸고, 「빛이 파괴된 세계의 잔존하는 빛」, 『현대시』, 2016.9. 참고. [본문으로]
  6. 김복희의 시 「길다」, 「왕과 광대」, 「테마파크」, 「사유지」 등에서 이야기와 우화는 시와 정치, 삶과 예술의 관계를 사유하는 알레고리로 표현되며, 그 시적 서사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시적 언술로 나타난다. [본문으로]
Posted by 수유너머104

어느 밤에 나는 먹으려고 평소보다 멀리 나갔다. 계란 껍질과 말라 비틀어진 사과 심을 발견해 먹고 달을 바라보며 그늘 속으로 걸었다. 목이 말랐다. 길 가장자리에 고인 물 냄새를 맡았다. 그때 뒤쪽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 순식간에 몸이 들려 자루에 담겼다. 빗물에 젖은 털 냄새가 나는 차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졌다. 나처럼 방심한 틈에 잡혀온 짐승들이 울어대고 있었다. 귀 모양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어린 녀석부터 늙은 녀석까지 이 몸 십여 개체가 넘는 동족들과 같이 각종의 분비물로 덮인 철창에 갇혔다. 미지근하게 끓는 듯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안색 나쁜 인간 두 명이 침침한 불빛 아래서 우리를 들여다보았다.

...

꼼짝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이 몸을 약품으로 처리했다. 배가 위쪽을 향하도록 몸을 뒤집어두고 거친 솜씨로 배를 갈랐다. 가르자마자 가른 곳을 먹고 빳빳한 실로 봉한 뒤 공식적으로 네 놈은 이제 불임인 거다, 하며 귀 끝을 가위로 잘라냈다.

마비되어서 눈도 감지 못했다.

찢어질 듯 바싹 눈이 마른 채로 당했다.

그 뒤로 자루에 담겼다가 다시 차에 실려 엉뚱한 곳에 버려졌다.

(황정은, 「猫氏生」, 『2011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과 지성사, p.283~284.)

 

 

 

이 이야기는 다섯 번 죽고 다섯 번 살아남은 ‘몸’이라는 고양이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이 고양이의 배를 가르고 귀 끝에 자국을 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지도 않은 정관수술을 한 표시를 낸 것이다. 배를 가르고 얼기설기 꿰맨 후 아무데나 버려진 고양이. 이 고양이는 흘러 흘러 도시 변두리 장막 안에 들어왔다. 장막 안에는 아직 사람의 냄새가 남아 있지만 살고 있는 이는 없다. 가끔 장막 안쪽을 향해 못 쓰는 물건들을 던져두고 달아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꼭 못쓰는 것 죽은 것만 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에서 효용이 다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버려진다. ‘형태가 있어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먹던 것 입던 것 사용하던 것 때로는 산 것 죽은 것’ 까지도 쌓여가는 장막 안.

 

 

 

누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이렇게 폐허로 만들었을까.

 

 

 

 

혹시 이 폐허는 우리의 ‘거친 말’(블랑쇼)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일상적인 언어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그것은 사물들 고유의 특이성을 담지 못하고 때문에 늘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런 것들. 누군가에게는 삶의 공간이었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내릴 때 이보다 더한 폭력이 어디 있을까.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라고 말해 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p.114~115.)

 

 

 

 

물론 ‘슬럼’이라는 단어가 이 소설에서 배치되는 양식은 우리에게 다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슬럼’ ‘슬럼’ ‘슬럼’ 하고 세 번 소리 내어 발음해본다. 이 때의 슬럼은 더 이상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이 아니다. 어찌 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일상적인 말의 폭력에 길들여졌던 우리를 책 바깥으로 이끈다. 이때의 바깥은 일정한 척도로 계량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고유의 특이성이 인정되는 공간이다. 이것은 어떤 위계나 중심이 없고 항상 미결정적인 상태이다.

 

 

 

작품은 ‘인간에게 있어서 말하지 않는 것에, 이름 할 수 없는 것에, 비인간적인 것에, 진리도 정의도 권한도 없는 것에 목소리를 준다.’(블랑쇼) 이제 고양이 ‘몸’의 갈라진 배는 속수무책으로 악화된다. 제대로 꿰매지 않은 틈 사이로 피가 새고 고름이 고인다. 염증이 번져 시력마저 잃고... 일생이 곧 끝나기를 기다린다. 고양이 ‘몸’은 운다. 아파서 울고 외로워서 운다. 바깥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울음이 들린다.




글 / 화(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Posted by 수유너머104

[화요토론회란?]

화토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과 외부의 연구자, 활동가들을 초청해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해 보는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에 대해 토론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 봤습니다. 문학, 공동체에 대해 관심있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시간: 2011년 4월 12일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연희동 소재)

 

발표자 : 화

토론 : 김은영

우정의 간식 : 최진석

참가비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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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mund Dulac]Orpheus and Eurydice]

 

 

 

 

 

발표 안내 :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

 

문학은 언어를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문학이 만들어낸 공동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민족문학·세계문학이 만들어낸 하나의 중심이 있는 공동체. 다른 하나는 중심이 없는 공동체, 낭시의 표현을 따르자면 ‘무위(無爲)의 공동체’다. 맑스가 꿈꾸고 낭시가 ‘무위(無爲)의 공동체’에서 다시 언급한 이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인, 즉 자유가 진정으로 군림하는 것인, 인간적 역능의 개화가 시작되는’곳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물질적 생산의 영역 저 너머에’ 위치하는 어떤 공동체”다. 때문에 이런 공동체를 그려내는 문학은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하는 소통과 통합은 고정된 개체성을 깨는 데서 시작하기에 더욱 본질적이다. 이번 발표에서는 한국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문학이 타자를 만나고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아직은 오지 않았으나 분명히 도래할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해보려고 한다.  문학과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린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56478285.jpg  * 러시아어판 <천 개의 고원>

 

최근 러시아를 다녀온 선배의 블로그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Tysyacha plato : kapitalizm i shizophreniya)이 작년 말 러시아어로 완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Yakov Svirsky 옮김, U-Faktoriya, 2010). 코뮨에서 생활하며 부딪혔던 사유와 삶이라는 문제 외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중요한 인용 전거 중 하나였다. 그때 “혹시나 이제라도 러시아어로 번역된다면 직접 번역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하며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감이 들었다. 이제 <천 개의 고원>이 러시아어로 출판됨으로써, 들뢰즈의 거의 모든 저술들을 러시아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듯하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들뢰즈와 러시아는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글을 쓸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해명을 잠시 늘어놓는 것, 아니 그 해명이야말로 현재의 러시아 지성사적 상황을 조감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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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위부터 <경험주의와 주관성/칸트의 비판철학/베르그손주의/스피노자>(합본), <차이와 반복>, <주름>, <키노>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유입된 지적·문화적 경향이지만, 많은 문학 연구가들은 러시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1960-70년대 소츠-아트(Sost-Art)로 대변되는 개념주의 예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더 멀리는 체호프 등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엽으로도 밀고갈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탈린주의가 균열을 빚은 해빙 이후의 문학과 예술에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입장들에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던이 서구보다 ‘앞서’ 존재했다거나, 혹은 적어도 서구와 ‘동시대적인’ 문화적 경향이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직접 사용되진 않았어도 러시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주장들에는 여하한의 문화사적 흐름에서도 결코 뒤지고 싶어하지 않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지는 듯하다(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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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안티 오이디푸스>, <니체>, <니체와 철학>, <의미의 논리>, <프루스트와 기호들(초판)>

 

그러나 철학적인 문제 설정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살펴본다면, 러시아에서 그것은 분명 소련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로 밀려들어오고, 그에 대한 반응 및 성찰의 결과로서 포스트모던‘한’ 러시아 사유도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기 산정의 문제를 갖고 오래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들뢰즈, 러시아 현대 사상의 관계만이 관심사인 탓이다.

 

 

2000년대 후반의 유학 시절에 내가 놀랐던 것은,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식상해져 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제적인 것으로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서구에 소개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두 지성, 미하일 바흐친이나 유리 로트만을 프랑스 철학자들과 연관시켜 논의하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흔한 반론이 있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점으로는 러시아 지성의 고유성을 논할 수 없다”는 강한 반발감이 그것이며, 이에 따라 문제 의식은 언제나 “고전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수렴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아카데미 전통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해야 할 적(敵)이든지 혹은 적극 끌어안고 과거(‘러시아 전통 혹은 소비에트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할 원군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다소간 완고한 아카데미의 철학부들은 전자를 대표했고, 후자는 발레리 포도로가(Valery Podoroga)와 같은 서구 지향적 철학자들로 대표되었다.

 

52629.jpg  * 발레리 포도로가

 

1970년대에 이미 푸코의 <말과 사물>이 소개되었고, 소련의 붕괴 즈음과 그 이후로 현대 서구 철학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 철학서들이 물밀듯이 번역되어 나왔다. 보드리야르는 진작에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었고, 데리다나 라캉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들뢰즈의 책들은 번역도 느리고 논의도 적어 보였다. 가령 <천 개의 고원>의 1부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포도로가의 친구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이 90년대 초에 요약본을 선보인 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완역본이 나올 수 있었다. 서구의 모든 책들이 번역될 이유는 없겠으나, 포스트모던 사회와 사상의 가장 논쟁적인 고전이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라면, 다른 책들의 번역 속도에 비추어 확실히 늦다는 생각이 든다.

 

ryklin.jpg 8976823257_1.jpg  * 미하일 리클린과 그의 책

 

내게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정할 만한 경험이 있었다. 유학 초에 러시아 철학의 현재성을 살펴본답시고 우연히 고른 책의 하나가 이고르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Zhil' Delez: vvedenie v postmodernizm, 2005)이었다. 내 호기심을 끈 것은 이 책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이었기 때문인데, 한편에는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놀라움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들뢰즈=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등식이 통용된다는 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탓이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심오한 체계성이야말로 비체계적이라고 비난받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한 하나의 ‘경지’요, 최종적 결산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착지처럼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1000262036.jpg  *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현재적으로 활용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사상의 격차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짚어본다면,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통용되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다. 러시아 서점에 <천 개의 고원>을 주문해 두고 아직 받아보지 못한 상태라 단언하기는 이르지만(*오늘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서평이나 리뷰 등을 검색한 결과 이 책이 더 이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제 의식과 관련되어 논의되지는 않는 듯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근의 러시아 논저들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 내 지적 흥미를 잡아당기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당초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와 등가의 함의를 갖고 러시아로 ‘수입’된 사조였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든 옹호하든, 여기엔 러시아가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서구 콤플렉스가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말할 근거가 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러시아 연구자들은 서구에 대한 별다른 콤플렉스 없이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시킬 때 이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을 마치던 시기에, 꽤나 급진적인 관점에서 서구 사상을 번역·소개하는 잡지를 사본 적이 있는데, 마침 거기 <천 개의 고원> 중 한 장(章)이 번역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읽다가 원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으로 번역되어 있음에 깜짝 놀랐는데, 그것은 ‘잘 다듬어진’ 번역(해석)이었다기보다 사상의 ‘새로운 가공’이라 할 만한, ‘창조적’ 번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그 유효성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는 아닐까? 더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련의 붕괴 이후 맞부딪혀야 했던 서구 콤플렉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러시아 사유의 향방을 보여주는 징후라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책 한 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별별 몽상을 다 한다는 망설임이 들지만,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러시아 사유에 관해 조금씩 지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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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돼지 사체가 퍽 소리와 함께 땅 위로 솟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며칠 전 컴퓨터를 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기사 제목이다. 만약 몇 년 전쯤 이 기사 제목을 봤다면 어땠을까. SF영화나 장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 ‘구제역으로 파묻은 돼지 사체가 따뜻한 날씨에 부패하면서 가스가 차 매몰지에서 솟아올랐다’는 설명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말이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지금은 하루 종일 비가 오고 있다. 이 비에 매몰지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우려들이 쏟아지고 있고 어디선가 침출수로 의심되는 폐수가 쏟아졌다는 소문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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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는 매주 월요일 문학 세미나가 열린다. 이 세미나에서는 주로 ‘문학은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묘사하는가’를 주제로 문학사회학을 공부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누군가는 한물 같다고 말하거나, 그거 예전에 다 읽은 거 아니야? 하고 말하는 책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에리히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텍스트는 관점은 조금은 다르지만 문학 혹은 예술이 현실을 어떻게 묘사하고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그 형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핀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얼리즘 문학이 태동하고 부흥하던 19세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 세미나 내내 우리의 머릿속에는 ‘리얼리즘’이란 뭘까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이들 모두 대표적인 리얼리즘 작가로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가 알기론 너무나 다른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이들은 그렇다고 치고 우리가 흔히 한국 소설에서 리얼리즘 작가라고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또 어떤가. 다 같은 리얼리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간극이 크지 않는가. 이런 고민에 딱 맞는 대답이 하나 있긴 하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리얼리즘은 확인되고 고정되어 전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는 말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는 곤란함을 표현했다.

 

눈을 뜨면 공통된 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리얼리즘이 단순한 기록의 과정이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을 창조해내며, 이 인간적 창조는 필연적으로 적극적이다. 그러니 수동적인 관찰자의 낡고 정적인 리얼리즘은 이제는 굳어버린 관습에 불과하다.  -레이몬드 윌리엄스, <기나긴 혁명>

 

그렇다. 리얼리즘은 그냥 관찰하고 세상의 표면을 그리는 낡고 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누군가는 문학이 현실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신문기사마냥 묘사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리얼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기준 때문에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기존의 통념들에서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는 문학들이 때때로 ‘지금 우리 사는 이야기잖아’라는 말로 ‘리얼한 문학’, ‘좋은 문학’으로 치켜세워지기도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말처럼 ‘수동적인 관찰자의 낡고 정적인 리얼리즘’을 뛰어넘어 새로운 리얼리즘을 창조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리얼리즘은 바로 이런 소설이 아닐까. 아직 표면에 드러나진 않았으나 분명히 있는 것. 잠재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리얼리즘이 아닐까.

 

시커먼 개구리들이 비에 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개구리들은 대부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스팔트에 떨어져 머리가 깨지거나 지나가던 소독차에 깔리기도 했다. 그러면 아스팔트는 붉은 꽃을 피웠다. 어두운 거리에 그들이 흘린 피와 찢어진 살갗이 불빛처럼 빛났다.

-편혜영, <아오이가든>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의 도입부이다. 나는 요즘의 구제역 사태를 묘사하는 신문 기사를 볼 때마다 편혜영의 소설이 자꾸 떠오른다. 이 단편이 실린 동명의 소설집 <아오이가든>은 2005년 7월에 나왔다. 소설집이 나온 것이 이 때이니 아마 이 단편이 쓰인 지는 그보다 1~2년 앞설 것이다. 사실 편혜영 소설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재앙을 예고했던 작품이 많다.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거나 이미 지금 이 순간의 일이어도 너무 어리석어 미처 알아채지 못한 현실의 어떤 패턴을 낯선 공간에 옮겨 구체화시킨 것이다.

 

이 단편 소설에 나오는 ‘아오이가든’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희미하다. 주인공은 이름도 없고 나이는 몇 살인지 언제부터 집 밖에 나오지 못하게 됐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오이가든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에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사람들은 모두 집 안으로 숨는다. 문을 열면 역병에 걸린 개구리 사체가 우루루 쏟아지고 주인 잃은 개와 고양이는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누군가 아파도 비밀로 해야 한다. 바로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격리 조치를 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정체 불명의 역병과 싸울 때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얼마나 비열한 수단들을 쓰는지. 그리고 그 괴물 같은 역병은 얼마나 걷잡을 수 없는지. 시체들이 나뒹구는 현실이 서 있는 토대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같은 소설집에 있는 <맨홀>이라는 단편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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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장을 뒤지는 동안 가장 두려운 것은 혹시 얼어 죽은 아이의 시체를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거리에서 얼어 죽은 아이들은 소각장에 그냥 버려졌다. 소각장에서는 다른 냄새에 섞여 시취를 맡지 못할 때가 많다. 쓰레기를 뒤적이다가 시커멓게 썩은 몸통과 얼굴을 만날 때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또 하나의 쓰레기가 되어 소각장에 던져질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편혜영, <맨홀>


처음 이 소설을 읽었던 몇 년 전. 나는 이 소설을 ‘특이한’ 작품 혹은 세상의 끔찍함을 동물의 시체들로 ‘은유’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소설을 완전히 잘못 읽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분명한 현실을 그린 리얼리즘 소설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중요한 리얼리스트는 누구나 다 객관적 현실의 합법칙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리고 깊숙이 감추어진 채 매개되어 있어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사회현실의 제반 연관관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추상기법을 써서까지도 자신의 체험내용을 가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작가가 드러낸 현실이라는 표면구조는 ‘삶의 표면구조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요인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것을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게 리얼리즘이라면 수천만 달러를 들인 헐리우드 영화나 자극적인 영상을 담은 텔레비전 뉴스 보도 화면이 가장 리얼리즘에 가까울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의 이 현실이란 표면이 어떻게 지탱되고 있는지 모든 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표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작업이다. 매 순간 보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많은 순간 왜곡된 것이거나 그저 정말 말 그대로의 ‘표면’일 때가 많다.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리얼한 문학은 필수적이다. 아래에 인용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라. 왠지 낯익은 풍경 아닌가.

 

그녀는 베란다 유리창을 열었다. 거리의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나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뱃속의 것을 게워냈다. 붉은 내장들이 계속 쏟아졌다. 고양이의 것인지 내 것인지 헛갈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꿰맨 자국이 있는 뱃가죽이 튀어나올 때까지 구역질이 멎지 않았다. 그녀는 누이의 뱃속에서 나온 수십 마리의 붉은 개구리들을 바깥에 쏟았다. 바깥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개구리들을 따라 발돋움질을 했다. 그것들은 내 누이의 아이들이었다. 베란다를 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가늘고 단단한 다리를 접었다가 훌쩍 튀어 오르니 바깥에 닿았다. 이윽고 거리의 냄새가 느껴졌다. 냄새만으로 아오이가든 너머로 나뭇가지처럼 가벼운 다리를 벌린 채 비강을 활짝 열었다. 죽은 새끼들이 썩은 몸을 일으켜 긴 소리로 울며 낙하하는 나를 마중하였다. -편혜영, <아오이가든>


 

 

글/화(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Posted by 수유너머104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고


작년 중순부터 노들 현장인문학에 합류했다. 내가 합류하기 전에 맑스의 자본을 읽었다고 했고, 내가 결합할 즈음에는 푸코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나서 작년 말경부터 '루쉰'의 소설과 잡감을 비롯해서 그의 전기를 읽고 있다. 물론 노들의 활동가분들과, 노들 야학학생들, 그리고 수유너머가 함께 세미나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사실 루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이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소개 받은 책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람의 평론집이었다. 그런데 이 분이 말하는 '루쉰'이라는 사람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작년에 연구실에서 하는 “국제워크숍”에서 다니가와 간이라는 노동운동가이자 시인을 공부했었는데,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하는 “루쉰”은 내게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다니가와간이라는 인물을 쏘옥~ 빼닮아 있기도 했다. 그는 루쉰을 그저 설명하지 않고, 루쉰을 찾아내거나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루쉰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루쉰이지만 루쉰 자신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주는 사람. 갑자기 “문학평론가”라는 직업마저도 달리 보이는 책이었기에 다른 사람들과 조금 나누고 싶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단 루쉰 스스로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질문하고 대답했던 문제에서 시작해서 루쉰을 찾아낸다. 그런 질문과 고민이 잘 드러난 루쉰의 텍스트로 선택한 것은「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1933)라는 글이다.

 

물론 소설을 쓰게 된 이상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가 없을리는 없었다. 이를테면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느가라는 말에 답하자면 나는 역시 십수 년 전의 '계몽주의'를 마음에 품고서 반드시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면 안 되고, 나아가 인생을 계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소설은 '심심풀이 책' 이라고 하는 예로부터의 주장을 싫어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심심풀이'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되도록 병든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제재를 찾으려 했다. 병고를 폭로함으로써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글에 대해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문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루쉰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라고 물었기 때문에 굳이 ‘인생을 위해’라고 대답한 꼴이 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요된 대답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외침의 서문 중>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의 ‘인생을 위해’라는 일종의 강요된 대답은, 위에서 인용한 <외침> 서문의 글에 나타난 ‘내 나름의 확신’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본다. “병고를 폭로함으로써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조의 말. 그가 자신의 문학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그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끝내 무시했던 것도 분명하지만, 따라서 그 때문에 설명을 위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이해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뭔가 그 스스로를 밖에서 해석한 듯 한 이런 대답에 의문을 품는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후에 씌여진 「자선집(自選集)」(1932)에 씌여진 글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당시 솔직히 '문학혁명'에 대하여 어떠한 열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해혁명을 보고, 제2혁명을 보고, 위안스카이의 제제와 음모와 장쉰의 복벽을 보고, 그 밖에 여러가지를 보아오다가 아주 회의적으로 되어 실망한 나머지 무기력해진 상태였다. ---- 다만 나는 내가 이렇게 실망하고있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본 인간이나 사건은 지극히 한정된 것이므로, 그 생각이 내게 붓을 들 힘을 주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 ----- 직접적인 '문학혁명'에 대한 정열이 아니면 무엇때문에 붓을 들었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열정적인 사람들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사들은 적막 속에 있지만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함께 큰 소리로 외쳐 도움을 주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것 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낡은 사회의 병근을 폭로하여 어떠한 방법이든 치료법을 강구하도록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희망도 섞여있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여기서 많은 중요한 시사점들을 찾아낸다. 일단 루쉰은 이 글에서 자신이 문학혁명에 냉담했다고 그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대체로 루쉰이 새로운 운동에 대해서 처음부터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그것은 루쉰이 ‘선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두 번째 주목하는 점은 ‘신해혁명을 보고’에서와 같이 ‘보았다’는 것이 그의 실망 및 무기력과 관계있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소설을 쓴 데에는 ‘열정적인 자들에 대한 동감’이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으며 ‘구 사회의 병근을 폭로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촉구하고자’한 것은 앞의 원인과 ‘뒤섞여’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에 주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기에 루쉰이 말한 ‘인생을 위한’이라는 말은 그것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다기 보다는 비(非) ‘예술을 위한’이란 쪽의 의미가 강하다고 본다. 루쉰이 해석한 ‘예술을 위한’이 ‘심심풀이’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인생을 위한’은 ‘심심풀이가 아닌’의 의미로 해석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금 나의 서목들을 검토해 보니, 그것들의 내용이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창작에서는 나에게 위대한 재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여태것 장편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며....  

 

자선집과 같은 해에 씌여진 「나의 번역과 저서 목록」(1932)의 글이다. 이 글에서 루쉰은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귀결시켰다.  다케우치 요시미도 루쉰이 근대 문학의 자기 붕괴의 과정에 처했던 유럽의 현대 작가들처럼 작품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루쉰의 이런 자기평가를 사실로 인정한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기에 루쉰은 자신이 진실로 쓰지 못했던 것, 동시에 쓸 수 없었던 것에 충실했다. 그의 ‘빈약한’ 작품에서 넘쳐 나오는 충실함.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루쉰을 그 차제 ‘루쉰’인 채로 재발견 해 내려고 애쓰는 지점이자 내가 느끼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라는 문장은 루쉰 문학을 설명하는 점에서 말 이상의 것이다. 그는 이 문장을 상징적인 말 이라기 보다는 루쉰 문학의 태도, 행위라고 평가한다. 그는 사람이 절망과 희망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각을 얻은 사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태도이기 때문인데, 루쉰이 그 태도를 부여한 것이 <광인일기>라고 지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광인일기>가 근대문학의 길을 열었던 것은 그것에 의해 구어가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도, 작품세계가 가능케 되었기 때문도, 하물며 봉건사상이 파괴되었기 때문도 아니며, 이 유치한 작품 때문에 어떤 근본적인 태도가 자리 잡혔다는데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길은 아득히 멀기도 하나니’ ‘나는 장차 오르내리며 찾아보려 하노라’는 태도의 문학가. 그에게 중국 근대 문학의 최초의 기념비로서의 <광인일기>는 일종의 ‘비극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주장이 오래도록 남는다.

 

물론 루쉰을 '읽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다케우치 요시미의 평론집은 내게 루쉰 소설을 '읽고 싶게' 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해서, 오늘은 루쉰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을 읽는 날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한참을 그의 잡감들을 읽어 갈 것이다. 반쯤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시선을 한 채로 내가 읽은 루쉰 소설의 매력 중의 하나는, 그의 소설이 그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고민과 번뇌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섣불리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그가 살던 시대로 완전히 끌어들여버리지 않는다. 루쉰 자신은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서면도, 루쉰을 읽는 이들이 ‘여기, 이곳’에서 ‘여기, 이곳의 문제’로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아마 나와, 노들의 활동가들, 그리고 야학 학생들이 그의 소설대해 그렇게 생기 넘치게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클 것이다.

 

혹시 “루쉰”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글을 읽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어보라고, 아주 좋은 길벗이 될 거라고 간단히 권하려던 글이 너무 길어졌다. ^^;;; 부디 참고가 되셨기를....^^


글 / 정행복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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