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없는 편지*

2018년 신인들의 시적 감응에 대하여

 

 

최진석_문학평론가. 수유너머104 회원

 

 



1. 리듬과 감응, 유물론의 시학

 

유물론적 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i Plekhanov)는 예술의 오래된 기원 중 하나로 리듬에 대한 감각을 꼽은 적이 있다. 그의 예술론을 모아놓은 주소 없는 편지(Pis’ma bez adresa, 1899)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 노동이란 파편화된 각자의 힘을 단일한 집합성으로 끌어모으는 과정이고, 그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은 다수의 인간을 하나로 엮어내는 몸의 감각 즉 리듬이라는 것이다. 플레하노프가 유물론적 혁명가이자 정치철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이 새롭거나 놀라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채롭게 보아야 할 점은 리듬을 정의하는 그의 독특한 안목이다. 아마도 최초의 노래란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몸짓이나 목소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동작하고 소리내는 와중에 혼합되어 하나의 가락 속에 합쳐진다. 서로는 각자의 구별을 잃으며 점점 단일한 집합체처럼 노동에 참여하게 되고, 거기서 노동요 곧 공동의 리듬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부터다. 그러한 무의식적 일치를 언제든 이루어내기 위해 인간은 노래를 짓고 악기를 발명한 게 아닐까? 어쩌면 시란 그러한 일치의 감각을 다시금 뽑아내기 위한 언어적 주문이 아닐런가?



Georgii Plekhanov(1856-1918)



리듬은 비단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함께-있음이라는 관계성이 형성되는 언제, 어디서, 무엇과라도 리듬은 발생하고, 거꾸로 관계의 성격마저 규정짓는다. 열매를 채취하는 사람들과 표적을 뒤쫓는 사냥꾼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가만히 매달린 열매와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물을 응시할 때 만들어지는 관계의 리듬이 상이한 까닭이다. 타작을 하려고 흙을 밟는 농부들과 강철을 연마하는 노동자들의 발걸음도 같을 리 없다. 흙과 쇠의 질료적 차이가 보폭과 운동의 이질성을 자아낸다. 리듬은 어떤 대상을 만나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매번 상이한 속도와 정도로 표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리듬이란 사물에 내재한 속성이라기보다 서로 마주한 대상들이 얽혀들 때 파생되는 관계의 표현이다. 리듬은 사이[]에서 만들어져 그 사이를 채우는 모든 것들의 공-동적(-動的) 관계 전체라는 것. 그렇다면 흔히 환경이라 부르는 관계들의 총체야말로 리듬의 비밀이 아닐까? 예술 역시 예외이진 않을 터. 어떤 예술작품이 뿜어내는 맹렬한 감응(affect, 情動)이란 예술가가 그의 환경과 공-동으로 조형하는 관계성에 다름 아니다.

시 또한 그러하다고 나는 믿는다. 전통적 시학이 전제하듯, 시는 시인-주체의 고독한 내적 성찰과 외로운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다. 홀로 독야청청 세상천하를 관조하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신화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주체의 내면으로부터 어떤 이미지와 언어가 피어나든, 그것은 그가 만난 세계 곧 환경 전체가 그의 몸에 새겨놓은 상호작용의 각인일 뿐이다. 시의 제목이, 소재가, 주제가 어떤 식으로든 특정될 수는 있어도, 거기서 발견되는 낯선 감응의 흐름들, 때로 시인과 독자를 배반하기조차 하는 이질적 의미의 조형은 그 시가 온전히 시인 자신에게만 귀속될 수 없음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에서 매양 읽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넘어서 그 이면에 엄존하고 있는 리듬의 진실, 시인과 우리가 동시에 마주한 이 세계의 울림이다. 그것이 유물론의 시학이다.

등단이라는 제도적 문턱을 넘어선 시인들이 바라본 세계는 특별하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 졌더라는 어떤 작가의 고백처럼, 한낱 표찰에 불과할지라도 시인이라는 꼬리표는 그네들의 삶을 절단시키고, 차이의 감각을 발동시켜 이전과는 상이한 리듬의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젊은 시인들을 보라! 그들의 감수성과 시적 언어를 느껴보라! 하지만 또한 분명하리니, 그들의 시는 그들 자신만의 것은 아니며, 이 시대가 그들에게 남긴 감응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손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어 그 자취들을 더듬어 보자.

 

 

2. 문턱의 시선, 결별의 예감

 

()은 분리와 결합의 기묘한 이중 평면이다. 창이 있음으로 우리는 문턱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창으로 인해 거기에 닿을 수는 없다. 해방구인가 감옥인가? 영구히 풀 수 없는 이 삶의 오랜 질문은, 적어도 이제 갓 시의 관문을 통과했다고 느끼는 자들에게는 모종의 깨달음의 표석으로 장식될 만하다. 내내 과거형 어미로 주도되는 그림자 극장의 전반적 분위기는, 아마도 그와 같은 통과의례적 의식을 스스로에게 표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

 

커다란 창이 있는 방이었다.

 

[...]

 

나는 창을 연 채 그 방에 앉아 벽에 영화를 틀어놓았고

어제 저녁엔 여러 여성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 같이 이곳에서 우리와 있다. 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그나마 행복해 했고

 

초저녁이 되면 영화를 튼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지이, 그림자 극장부분

 

낡은 필름이 풀려나가듯 문턱 이전의 시간들은 다양한 이미지들로 변주되며 지나간다. 어제 저녁에 어딘가에 있던 이들이, 오늘은 우리와 함께 있고, 그것조차 영화 속의 한 장면인 양 이미지화되면서 강 건너의 무연한 사태처럼 창밖으로 비치는 정황이다. 이것은 순수한 과거의 시제, 과거의 장면, 과거의 감정 아닐까? 지금 현재의 사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관조되고 반조(反照)되기만 하는 무연관의 시공간. “그나마 행복해 했노라 말하고는 있으나 문턱 위에서, 더 이상 이전의 세계에 머물 수 없는 경계선 위에서 바짝 날이 선 시적 주체는 마냥 긍정적일 수 없다. 지금 이전의 지나간 시절은 제 아무리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구속된 아름다움이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인 탓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며/평생을 견디고 있다.” 주체로 하여금 한 걸음 앞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쳐 개화하지도 않은 시가 어째서 벌써 시드는가? 논리정연한 산문의 언어로 설명하진 못해도 시쳇말로 느낌적 느낌으로 지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바짝 발붙인 경계 너머로 나아가야할 때, 거기에 있는 것이 과거를 보상해 주는 빛나는 무엇일지 아닐지 가늠할 수 없는 탓이다. 바람이 휙 불어오듯 찰나의 순간 시적 주체는 경계 위에 올라섰지만, 감히 더 나아갈 욕망도 품지 못한 채 아직 거기 머물러 있다.

 

건조한 곳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강지이, 달의 계곡전문

 

물론, 더 나아가길 바라는 욕망 또한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느릿하되 편안한 산보도, 숨가쁘나 활기찬 뜀박질도 아니다. 강진영 시인에게 이는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자각과 의지, 성찰과 욕망이 뒤얽힌 채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로 표상된다. 익숙한 환경, 친절한 이웃, 다정한 가족과의 무참한 결별. 기차처럼 달리는 아이들은 엄마 없이 엄마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면서” “엄마라 부르던 세계를 떠나야 한다. 아무리 사랑스럽고 안온했던 울타리라도 여하한의 의존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 돌아보고 후회하는 것조차 자신의 몫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쾌한 각오를 짚어내자. 문턱을 넘으려 할 때는 필연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내 손을 놓아요 터널을 지나요 바다를 건너요 뒤를 돌아보는 건 나예요.” 철없던 아이가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서사의 행복한 광경으로 미화해서는 곤란하다. 엄마의 세계는 안전하되 속박되는 굴레였고, 떠나는 아이는 자라지 못한 채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으며, 문턱 너머로 열린 낯선 세상은 이물감 가득한 두렵고 분열적인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기차에 오를 거예요 내릴 거예요 엄마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요 아무것도 낳지 않을 거예요 

노을에서 엄마의 커피향이 나 엄마의 노을을 훔쳐 마시며 /////////////////////////////////////////////////////////////////////////////mmmmmmmmmm

m                                       m                                        m ,,,,,,,,,,,,,,,,,,,,,,,,,,,,

 

여기는 벽이 모두 창문이잖아 매일의 풍경이 바뀌잖아 엄마가 한 칸 한 칸 분열하잖아

 

강진영,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말입니다부분

 

그럼, 거기에는, 문턱 너머 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아니라 사건이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감각의 경험, 그로 인해 아이가 뒤틀리고 기이하게 변모하여 성장의 미명 하에 부서지고 말 변화들. 해변에 부딪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파도야말로 그러한 파열적 체험이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이미지 아닐까? 속절없이 너울대는 파도처럼 부유하는 시상과 언어는 산산이 흩어지기 직전의 모습만을 애틋하게 기억할 것이다.

 

                                                        사랑해

                                                                  나는 부서지기 직전의 파도를 사랑했지

                                        너는 부서진 파도

 

강진영, 쇼어 브레이크부분

 

 

3. 너머의 세상, 차이 없는 반복

 

여기를 넘어 저기로 나아갈 때마다 기대를 품고 희망의 탑을 쌓아올리는 심정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이나 욕망이 남아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도, 문턱의 저편도 이편과 다름없이 동일한 상황의 반복으로 점철되리란 의구심은 이상하게도 늘 적중하는 듯하다.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도 굳이 여기의 삶을 겹쳐 보는 현상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게다.

 

우리는 자주 시청에서 만났다 여당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었다 밀착해도 시차가 발생하는 여자였다 한 침대에 누워도 상대방의 꿈속에 도래하지 않았다 일인칭의 새벽 교대로 일어나 담배를 피웠다 아직 잠들어 있는 다른 한 쪽의 꿈속으로 급조된 안개가 피어올랐다 지극한 침묵이 함께 있는 새벽의 암구호였다 나는 줄곧 나를 사칭했고 둘이 형성할 수 있는 것들이 다 떨어질 때면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 군중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방백마저 무례하게 확성되고 있었다 어는점이 십도쯤 낮은 여자였다 그 속에서 흥분을 익히며 매번 촛농 같은 땀을 흘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분실해도 태연하게 행진의 일속을 가장했다 살수 같은 비가 직사로 쏟아지는 밤이면 여자와 나는 시청에서 자주 해산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줄곧 나에게만 전력으로 가담했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입을 떼며 무슨 말인가 했지만 초 단위의 시차로 매번 싱크가 맞지 않았다

 

곽문영, 시청전문

 

무성영화 화면들이 연속적으로 스쳐가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내용적 연관 없이 툭툭 끊어지면서 아슬아슬하게 접붙어 있다. 내용과 형식의 불연속적 결절은 상호 소통되지 않고, 일치하지 않는 타인들, 세계들, 감정들의 절단면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서 일관된 것은 매번 싱크가 맞지 않는 전체의 분위기, 그 어긋남의 감응이다. 물론 시제는 과거형이다. 어쩌면 이 시편은 문턱 이전의 순간들을 침울하게 회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음에도 끝내 도래하지 않, “줄곧 나를 사칭하는 나 자신과의 결렬은 나와 여자사이의 불협화음만큼이나 일관된 불일치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욕망도 담지할 수 없는 이 광경은 매번 맞지 않는 싱크처럼 저편에서도 반복될까? 이런 정조에 감싸인다면 문턱 이후, 그 너머의 세계를 가히 밝게 예상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나는 소리조차 녹음된 새의 소리일 뿐이며, “어제 내려 쌓인 눈 위로/새로운 눈이 내릴 때/나는 소리조차 전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조로(早老)의 대기에 휩싸여 낡고 지루한 풍광을 연출할 따름이다. “매일 보았던 후뢰시맨은/마지막 회에서 너무 늙어보이고, 마침내 시적 주체는 이렇게 뇌까리기에 이른다.

 

이곳은 좁으니까 이제 우리는

그만 크자

 

[...]

 

길게 이어진

새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새의 발자국 옆에 새겨진 나의 발자국

 

뒤를 돌아보면

새와 다정하게 걷는 사람의 발자국

 

새의 마지막 발자국 곁에서

한 번도 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곽문영, Black Fire부분

 

새로움과 신선함, 낯선 반가움으로 표징되는 신인들에게, 도대체 문턱 너머의 무망(無望)이라는 정조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채 장성하기도 전에 설익어 떨어지고, 미쳐 깨닫기도 전에 벌써 체념해 버리는 이토록 급속한 노화의 감각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라기보다, 그들과 교감하며 구축된 이 시대의 감응이라 불러야 옳을 터. 정치와 사회, 문화와 예술, 혹은 삶의 모든 부면에 만연한 권태와 피로의 감수성을 그들은 머리로 알기 전에 이미 몸으로 느껴버리고 말았던 것.

늘상 새의 발자국 곁에 머물면서도 결국 새는 찾아내지 못하는 파랑새 전설마냥, 시적 주체는 오직 자취의 초상화만을 그리는 운 없는 화공이다. 그저 눈물로만 색을 입힌 이 그림의 진실은, 그것이 슬픔이 곧 주소인 우리초상화라는 데 있다. 왜 자신의 기원(주소)이 슬픔인가? 너머의 삶, 저편의 일상을 욕구하기도 전에 이미 폐기해야 하는 역설의 세대인 탓이다. 마땅히 바래도 좋은 것, 마침내 도착할 수 있는 곳, 기어이 원하는 것을 필연코 얻지 못하리란 역설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갓 시인명부에 입적한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계시의 언어가 아니라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처럼 중단된 살아있는 미라의 삶일지도 모른다. 문턱을 밟아선 시인의 두려움과 낯설음은 필시 이로부터 기인한 불안일 테다.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 언어를 기다리고, 언제나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리 자신을 종속시키려 했지만

 

모든 무렵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

성가의 전주前奏에서 발각되는 도처의 미라

 

김유태, 검은 원부분

 

제목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작품 검은 원(1913)에서 따왔다. 말레비치는 회화의 근원적 구성요소인 색과 형태를 극도로 추상화시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것이 흰 바탕 위의 검은 원이었다.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이 검은 원은 더 이상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기원의 색깔이요 모양일지 모르나, 역설적이게도 흰 바탕 없이는 그 자신을 주장할 수조차 없다. 문제는 흰 바탕이라는 것이 무()는 아니되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무규정적인 존재 자체라는 것. 검은 원보다도 더욱 근본적이라 해야 할 흰 바탕은 온갖 규정을 넘어서는 순수 존재이자 순수 무에 다름 아니다. 기원에 대한 앎의 추구가 이토록 무참히 깨질 수 있을까? 문턱 너머를 들여다 본 자의 절망이란 그와 같지 않을까? 궁극의 원점에 다가선다 해도, 결국은 그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깨달을 뿐이라는 카산드라적 예언 아닌가? “검은 멍이 된 이 경험은 불판 위에 구워진 냉동육 껍질에 남은 도장의 흔적처럼 아이러니컬하게 읽히며, 너머의 삶에서 기대하게 마련인 아름다움이란 결국 잔혹한 멍으로만” “몸에 고이는기억임을 자각하게 될 터(김유태, 낙관).

너머에 대한 포기와 체험은 자기 아이러니적 희화화로 귀결되는 듯하다. 시인 각자는 시인 일반으로 추상화되고, 구별 불가능한 어둠에 감싸여 모두 같은 인종이 될 것이다”(류현, 학술보고서). ‘객관과학을 뽐내는 학술보고서이지만, 결국 차이나는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카프카적 냉소가 지속될 뿐이다. 너머의 불가피한 진실을 알게 된 시적 주체는 경계에 머물고자 애쓰겠지만, 그 역시 자기를 인간으로 남겨두려는 비겁한 타협일지 모를 일이다. 다른 모두도 그렇겠지만.

 

경계선은 두려움을 밀어내는 타협, 선에서 시작되는 출구는 인간적이다. 선은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출구, 지켜야 할 선 같은 건 없다. 나의 직업을 미리부터 정해 놓은 너희는 말했다. 바나나를 받아먹는 원숭이는 지루하다. 바나나만을 받아먹은 나는 너와 같아졌다. 겉모습을 갖추었다. 구별되지 않는다. 다음 원숭이는 누구인가?

 

류현, 학술보고서부분

 

 





4. 반복과 차이, 사건의 감응

 

세상과 섞이는 것. 낡은 선비정신은 혼탁한 세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닦으라 명령해 왔다. 그러나 사람의 사이라는 게 인간의 본뜻이라면 어떻게 이 세계에 몸을 섞지 않고 인간일 수 있으랴? 문턱을 넘어, 시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 세계, 그리고 자신과 다시 한번 섞이는 교통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느끼고 반응하며 감수하는 것. 감응(感應)의 체험을 언어 속에 투여하는 것이야말로 문턱을 넘은 자, 시인 주체의 몫이 아닐까?

하지만 문턱 이후의 삶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다시금 세인과 어울리고 세상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속편히 타협하는 게 시적 행위일리는 없다. 세계에 자기를 섞을수록, 범속에 몸을 담그고 혼탁에 자신을 바칠수록 시는 시가 되어야 하며, 시인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소리의 분산 가운데 스스로를 표시할 수 있는 홑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겹쳐진 다른 소리들을 찢어 분리하고, 여러 가지 발음들을 실험하여 뾰족한 모서리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 떠들썩한 세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될 수 있는 대로 차갑게, 설익은 내면을 푹 고아 시의 온존한 형태로 표현해 내야 한다.

 

모음을 찢는 소리가 경사지고 있었고

당신의 발음은 더듬을수록 모서리가 됐다

 

체온이 높은 노래를 한 음절씩 물에 빠뜨렸다

철들지 않은 발음은 수면을 밟고 올라설 수 없었다

 

류현, 홑소리부분

 

이는 언어의 리듬을 만드는 작업이다. 세계와 교통하며 지각하는 동시에 세계로부터 건네진 감응에 시적 주체의 울림을 실어 시의 감응을 구축해 내는 것. 세상의 온갖 소음, 이미지, 목소리를 내 몸에 투과시키는 게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소통이란 자신에게 닥쳐온 세계의 감응을 자신의 것과 조율하여 특이한 리듬을 지닌 시적 감응으로 변형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거침없이 모음을 탕진한 메아리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수천 번 입술을 말아도 완성되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울음을 조율하며기어코 그 리듬의 형태에 다가서려는 분투, 여기에 시인-되기의 노고가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유일무이하고 고고한 단독자가 아니지만, 또한 세상만사에 참견하는 수다스런 호사가도 아니다. 그는 차라리 이 세계의 흐름을, 미세한 리듬을 감지해 내는 지진계가 되어야 한다. 바꿔 말해, 세계의 형상을 읽고 대지의 분위기를 포착하며, 그 감응을 짚어내 언어로 옮기는 번역기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진학자 안드리야 모호로비치치는 지구라는 대지의 감응을 예감하고 과학의 언어로 풀어낸 시인-번역자라 불러야 하겠다.

 

여러분, 우리의 녹는점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생각은 옅어지고 서로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아가고 있습니다. 1인칭의 언어는 사라지고 쓸모를 다한 눈금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속눈썹과 손톱만 남아 보트 위에 표류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연속적이어야 하며 술에 취해 어깨동무해서도 안됩니다. 종국에 서로를 나라고 느끼며 견디지 못할 온도에 다다를 것입니다. 책을 펴지 마십시오. 꿈을 꾸지 마세요.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방향성을 믿지 마십시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박길숙, 모호로비치치의 연설문부분

 

모호로비치치의 모호한 연설은 서로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1인칭이 소실되며, 눈금마저 지워져 하나로 혼융하게 될 지각의 변이를 경고하고 있다. 시적 전통에서 위기이자 파국으로 언명되었던 시적 자아, 데미우르고스적 창조자의 형상은 그 변이를 버틸 수 없다. 모호로비치치의 슈트에 달린 금장 단추처럼 떨어져 녹아내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성의 상실도 아니요, 개인의 소거도 아니다. 차라리 이전, 이편의 자아를 의문에 붙임으로써 문턱 너머에서도 그와 같은 자기성이 여전히 유효할지 탐문하는 시적 성찰의 과정이겠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그제야 우리는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돌연 낯설어지는 사태를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까.

 

양심의 소리는 어느 쪽에서 날까?

내가 귀머거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른발 왼발 발맞추다 박자가 헷갈리면?

계단은 내 발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나뭇결대로 내 얼굴이 깎여 버리면?

질문에 질문을 더하면 답은 없어

 

박길숙, 지미니 크리켓부분

 

당연하게도, 귀머거리에게 양심의 소리라는 비유는 의미가 없다. 나란히 평행하게 자라난 두 발 사이에도 순서가 있을 리 없고, 계단과 걸음걸이가 늘 조화롭게 일치하란 법도 없다. 순리와 당착, 인식과 오인. 질문의 순서가 바뀌면 논점이 달아나고, 전혀 낯선 명제가 고개를 쳐 든다. 피노키오의 양심을 자처하는 지미니 크리켓은 말하는 귀뚜라미다. 의인화된 가상의 비존재지만 통상의 순리와 인식을 전도시켜 당착과 오인을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또 다른 진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더할 수 없이 강력한 현실성을 갖는다. 그럼 허구적 실존 지미니 크리켓이 있음으로써 너머의 삶은 비로소 실제의 삶이 된다고 해야지 않을까? 이전과 이후, 이편과 저편이 어떻게 연속적이고 또 어떻게 불연속적인지, 그 절단과 흐름의 감응을 탐지해 물음을 던지는 지미니 크리켓은 그 자체로 시적 주체의 형상에 비견할 만하다. 계단도 없이 문턱을 오르고, 이편과 저편을 넘어서기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또한 언제든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장전된 미지의 그것.

 

나는 죽지 않는 불멸의 옴므

너는 죽지 않는 불멸의 양심

 

계단도 없이 오르내리는 나는

죽지 않는 아이, 살아 있지도 않은 아이

그래서 태어난 적도 없지

 

마침내 그렇게 너머의 지평에 도달한 시인은, 이미 너무나 정확히 예감하고 있었듯 이전의 생활과 이편의 일상을 반복해 살아가리라.

 

가로등이 반복된다

에스컬레이터의 단면에서는 세계의

상승과 하강이 매순간 교차하고 있다

 

달이 반복되었다

식사가 반복되었다

바다 너머에 바다가 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박정은, 자연발화부분

 

나는/그저 가끔씩 뜨거워질 뿐”, 여기에 비약적인,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 턱이 없다. 문턱 너머는 선택된 땅도 아니고, 도착할 수 있는 최후의 지평도 아니다. 여기엔 여기대로의 지루한 일상이 시인을 기다리고, 생활에 삼켜진 또 다른 시인들이 졸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언자의 목청을 드높이거나 순교자의 비탄을 쏟아내는 것 따위가 아닐 게다. 수선스런 시인의 자의식을 내려둔 채, “칼국수를 먹바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머에서는 너머의 삶을 삶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바로 그럴 때, 슬그머니 덮쳐오는 세상의 감응과 낯선 감각들을 마주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처음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바다가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평선과 시선이 직각을 그렸다

 

바다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고, 시선과 직각을 그은 수평선을 보는 일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온갖 감각적 파장들이 시적 주체에게 지각되는 방식은, 물론 그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 감응이란 사태가 직관되고, 그 과정에서 체감되는 사물의 체험이자 수용의 효과인 까닭이다. 통념으로부터의 불일치, 그 어긋남의 발견이야말로 너머의 삶을 살아가며 찾아낼 수 있는 시의 감응일 터. 이전의 생활, 이쪽의 일상과 하나 다를 바 없던 이후와 저쪽의 삶은 그렇게 다른 것으로, 일종의 인공정원으로 조형되기 시작한다.

 

정원에는 높고 긴 나무들이 가득했다

인공정원이었다

중앙에 커다란 나무 세 그루를 중심으로

정원은 네다섯 개의 숲을 품고 있는 듯 했다

 

박정은, 정원부분

 

인공정원이야말로 너머의 세계를 또 다른 삶의 세계로 형상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다. 인공낙원일 수도 있고, 인공지옥일 수도 있는 양가적 경계의 중간지대로서 이 정원은, 물론 삶의 최종적 종착지는 아니다. 이 주소지는 언제든, 어떻게든 파기되고 새로이 옮겨질 수 있다. 여기 또한 이편 우리의 생활을 모방하여 큰 나무를 심고, 거기 올라 세상을 욕망하는 나날에 잠식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니 자칫 정원에서도 시인은 앙상한 꼬리표만 나풀거리며 이 세계를 자신의 감응 속에 융화시키지 못할지 모른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안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각의 촉수를 예리하게 갈아두기 위해 시적 주체는 주변부를 향해 뛰어야 하고, 사람들이 큰 나무에 오르려 줄을 설 때 오히려 정원의 끝을 향해 달려야 한다. 그렇게 변경으로, 구석으로, 끄트머리로 힘껏 내달릴 때, 아마도 인공정원의 너머는 또 다른 정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끝이 아닌 시작, 혹은 새로운 감응의 응결과 전염. 거기서 시인은 말하리라. “정원은 나로 인해 넓어졌다. 그렇게 주소지는 또 다시 이전될 것이다.

주소 없는 편지. 이는 너머의 세계가 쏟아내는 감응을 부지런히 수신하고 그에 응답하여 주체의 감응을 발신됨으로써 새로운 감응, 곧 세계의 리듬을 창안하는 시적 투쟁의 과정이다. 제아무리 낙토의 장관을 연출하더라도, 그것이 건설되면서 또한 붕괴되는 속도를 추월해 새로운 정원의 이미지를 구성하려는 그 시적 여정에 주목하라. 그것은 반복 속에 차이를 발견하고, 사건의 감응을 촉지하며, 그 리듬에 어울리려는 시작(詩作)의 노동에 값하는 일이다. 시의 편지가 부쳐지는 주소를 확정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 주소를 결코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귀속되어 있다. 편지가 도달하기도 전에, 주소는 벌써 바뀌어 있을 테니까.

 

나는 정원과 속도를 겨뤘다

 

* * *

 

올해 등단한 시인들의 최근작을 살펴보며, 시인으로서 그들이 감촉하는 이 세계와 그에 조응하여 그들이 조형해낸 시적 감응을 거칠게나마 짚어보고 싶었다. 감응이 감정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특이한 분위기의 조성을 가리킬진대, 시인 하나하나를 어떤 특정한 상태나 단계, 태도에 결박시킬 의도는 전혀 없다. 이 글에서 각자의 이름과 작품을 호명하며 단평한 것은 또한 그들의 시와 마주친 나의 비평적 감응이라 간주해주면 좋겠다. 비록 시인 개인의 이름으로 쓰여진 작품들 하나하나일지라도,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이 시대와 교응하고 결합하여 안출해 낸 공-동의 시적 리듬이라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나의 비평도 시인과 시 작품 그리고 나 사이의 공-동적 감응의 결과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를지라도, 여기에는 서로를 읽고 호응하는 일관된 리듬의 감응이 필연코 존재한다.




* 이 글은 월간 현대시201811월호에 게재된 동명의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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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세미나_기록과 현장]문학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송승환/시인. 문학평론가





안녕하세요?

 

수유너머104 문학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수유너머104 문학세미나는 지난 2018528() 첫 세미나를 시작했습니다.

문학세미나는 [2018 수유너머104 여름강좌] ‘다른 삶들은 있는가-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마주침에서 촉발되어 첫 세미나의 책으로 선정된 작가는 에드가 앨런 포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문학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에드가 앨런 포, 단편전집 우울과 몽상, 하늘연못

2. 에드가 앨런 포, 포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3. 알프레드 쟈리, 위비 왕, 연극과인간

4. 앙토넹 아르토, 잔혹연극론, 현대미학사

5. 앙토넹 아르토, 첸치 일가, 연극과인간

6. 앙토넹 아르토,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

7. 기욤 아폴리네르티레시아스의 유방』, 연극과인간

8. 로제 비트락,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

9.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연극, 연극과인간

11.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유령소나타, 지식을만드는지식

11. 러시아 여성시인 시선집 레퀴엠, 고려대출판부

12. 마야코프스키, 마야코프스키 선집, 열린책들

13. 폴 클로델, 마리아에게 고함, 연극과인간

14. 로베르트 무질, 특성없는 남자 1, 2, 북인더갭

15. 로베르트 무질, 생전유고/어리석음에 대하여, 워크룸프레스

16. 알렉상드르 블로끄, 블로끄 선집, 지식을만드는지식

17.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홀로 내가 있는 방식, 민음사

18. 페르난두 페소아, 초컬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민음사

19. 페르난두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지성사

 

현재 읽고 있는 책은

1.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 러시아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창비

2. 마야코프스키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책세상

 

앞으로 읽을 예정인 책은

1. 페르난두 페소아, 산문선-페소아와 페소아들, 워크룸프레스

 

수유너머104_문학세미나는 매주 월요일 저녁 730분에 시작합니다. 많은 양을 빠르게 읽기 보다는 적은 양을 천천히 읽고 다양한 의견을 서로 나누는 세미나입니다.

http://www.nomadist.org/s104/SeminarBB1/105678

언제든지 새로운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며 환영합니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불온한 인문학 집중세미나란?

 

인문학의 불온성은 몇 마디 구호가 아니라 꾸준한 탐구와 현실 모색 속에 있습니다. 집중세미나는 그런 탐구와 모색을 실천하는 작은 통로가 되고자 합니다. 집중 세미나 시간에는 강의와 연구 관련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해서, 20주 동안 함께 부대끼며 읽고 질문하고 토론할 것입니다. 혼자라면 외롭고 힘든 공부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어려움도 기쁨과 보람이 되리라 믿습니다.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튜터 박은선, 유영선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신학정치론.jpg        에티카.jpg         정치론.jpg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튜터 김은영, 권은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사회를보호해야한다.jpg       통치성과 자유.jpg

 

 

 

Posted by 수유너머104


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2기를 모집합니다!

 

* 주요 프로그램

 

I. 스피노자 -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와 만나기

 

강의 주제

강의 내용

교재

1

9. 22

회차/일자강의 소개 및 오리엔테이션

2

9. 29

신에 대하여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1부

3

10.6

자유의지와 목적론

4

10.13

정신과 신체

평행론

『에티카』2부

5

10.20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6

10.27

정서와 예속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3부

7

11. 3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4부

8

11. 10

인간의 자유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5부

9

11. 17

정치에 대하여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10

11. 24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II. 푸코 -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불온한 탐험가 되기

 

 II-1 푸코 읽기

회차/일자

강의 주제

강의 내용

비고

1

12.1

담론과 권력

타자의 사유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

12.8

지식의 고고학에서 권력의 계보학으로

3

12.15

권력의 미시정치학

지식-권력-신체

『감시와 처벌』

4

12.22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훈육권력

5

12.29

생명권력

『성의역사1』

 

 II-2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와 정치

회차/일자

강의제목

내용

기본참고자료

6

1. 5

1강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 변동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출현과 그 기본 축적메커니즘을 살펴본다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제라르 뒤메닐 외,

『자본의 반격』

7

1. 12

2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1)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성립과정과 그 사회적 효과들 주체화의 맥락에서 규명한다.

미쉘 푸코,

『안전, 영토, 인구』

8

1. 19

3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2)

9

2. 2

4강 배제사회와 공안체제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검토하고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정치적 특성을 분석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경향신문특별취재팀,

『한국의 워킹푸어』

10

2. 9

5강 반신자유주의의 정치학의

몇 가지 길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운동과 정치적 활동을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자원들을 살펴본다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자끄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진경, 『코뮨주의』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o 강 사 : 손기태, 정정훈, 정행복

o 세미나 튜터 : 박은선, 유영선, 김은영, 권은혜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9. 22.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저서를 중심으로 한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정치학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 8. 8. 월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신한은행 434-04-354206 (예금주 : 김은영)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김은영 010-8334-4389, 권은혜 010-4515-2725


Posted by 수유너머104

보알(Boal)의 토론연극 Forum Theatre 워크샵 “모집합니다”


일단 재미있습니다. 펜과 종이가 필요없이 놀이와 움직임 속에서 많이 웃고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몸과 움직임에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 기다립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억압, 아직까지 불편함의 원인이 되는 억압, 뭔가 바꾸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억압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관찰하는 나, 그 자리에 있는 나, 나 아닌 나를 느낄 수 있는 시간 /놀이 속에서 즐거움과 웃음 경험하기 /신체로 말하기 /연극적 의사소통 익히기 /공연하기


나의 몸과 마음, 타인과의 만남을 깊이 경험하는 자리...


신체로 말하는 법에 익숙해지는 자리...


연극은 인간이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자신을 보다가 그 자리에 있는 자신과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태어난다.


연극은 행복이어야 하며, 연극을 통해 우리 자신과 시대에 대해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연극은 앎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연극은 우리가 미래를 그저 기다리고 있기보다 그것을 건설해 낼 수 있도록 돕는다.

-Boal



 

시간: 매주 목요일 오전 10~12시 (9월 1일 ~ 10월 13일, 총 7회기)


장소: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그랜드볼룸(
www.nomadist.org에서 약도참고)


인원: 최대 15명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선착순입니다)


돕는이: 놀이(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연극치료 전문가, 집단상담가)


아기곰(연극치료전문가)


연락처: 놀이 019-251-8391, apriljune@hanmail.net


준비물: 몸, 편히 움직일 수 있는 옷차림


비용: 12만원 신한은행 384-12-039154(장진부)



Posted by 수유너머104

근대적 사유방식을 거부하는 니체의 사유와 글쓰기 방식은,

때로 그의 글들을 광기의 산물로 몰고 가기도 하고,

엉뚱한 정치적 흐름의 지지자로 오해받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서 그렇게 숱한 오해와 몰이해에 휘말리고 있을 때에도,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를 끊임없이 재해석 하고 있기도 했던것 같아요.

우선 들뢰즈는 니체라는 철학자를 서양 철학사 전체와의 대결구도 하에서 방대한 스케일로 읽어냈습니다.

또 푸코의 경우에는 권력과 담론에 대한 그의 방대한 저작들을 통해,

끈질기게 힘이나 역사, 진리에 관한 니체의 테마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래전에 어설프게 읽었던 니체를

푸코의 저작들에서 다시 발견하고 좀 더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어졌는데요.

일단은 니체의 전체 저작을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가 보려고 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주저 마시고 함께 해요~ ^^

 

p.s  세미나 명칭과 세미나 시간대가 매치가 안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

      순전히 반장의 개인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반장에게 10시는 새벽이라능 ㅠ

       초큼 더 보태자면 니체랑 새벽이랑 굳이 억지로라도 연결해 보겠다는 의지 ;;;;;;;;

 

(세미나실 배정 때문에 인원파악이 필요합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수유너머N 세미나 게시판 원글 바로가기

 

시작일 : 8월 12일 금요일부터

시 간 : 매주 금요일 새벽 10시

장 소 : 수유너머N (세미나실 미정 - 추후 공지)

문 의 : 해피 010-9404-8403

 

* <책세상>에서 나온 니체전집 기준으로

2권.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6권. 바트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7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8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10권. 아침놀

12권. 즐거운학문

13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4권.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15권.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 기존에 책을 갖고 계신 분은 아무 책이나 상관이 없지만,

새로 구입하실 분은 함께 하기 편하도록 책세상본을 권합니다.

하지만 <비극의 탄생>은 박찬국씨가 번역한 아카넷본이 좋다고들 하니까 참고하시구요.

 

* 니체 저작을 다 읽고 나면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까지 한번 달려 보아요 ^^

  

Posted by 수유너머104

화요토론회란?

화토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과 외부의 연구자, 활동가들을 초청해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해 보는 시간입니다.

연구실 회원 뿐만이 아니라 해당 주제에 관심 있으신 모든 분들에게 열린 토론의 자리입니다.

 

일시와 발표자

이번 7월 26일 화요일에 개최되는 화요토론회에는

미학자이자 문화평론가로 활약하고 계신 진중권 선생님이

오십니다. 진중권 선생님에 대해서는 따로 더 설명드릴 필요가 없겠죠?




발표주제는 "디지탈의 존재론"입니다.

최근 선생님은 디지탈예술이론을 연구하시며 디지탈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모색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이번 토론회에서는 그 성과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제 : 디지털의 존재론

일시 : 7월 26일 화요일 7시

장소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대강의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수유너머N은 올해부터 우리 시대 인문학을 비판적으로 되씹고 새로운 출발을 내딛기 위해 강의, 심포지움, 총서를 통해 <불온한 인문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불온한 인문학' 카테고리 바로가기) 그 일환으로 지난 3월 12일에 심포지움을 통해 발표한 글들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총서의 첫번째 책입니다.

휴머니스트 홈페이지에 실린 <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책소개를 여기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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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기획의도)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의 가장 큰 화두는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인문학은 학교 바깥에서 재기를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대중과 직접 만나서 교감하는 공부를 하고,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을 넘어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해 확장되는 앎의 지평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렇게 사회로 걸어 나왔으며, 지금 진행되는 ‘인문학의 부흥 시대’는 그 발걸음이 만들어낸 성과다.
인문학의 대중화, 그 실험의 한복판에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도 있었다. 2000년 활동을 시작한 ‘수유너머’는 제도 밖 연구공동체 실험과 대중강연 등으로 인문학 부흥에 거름 역할을 했다. 그들의 시도는 신선했고, 앎이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대중에게 알렸다.
고전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도서관과 문화센터, 기업, 각종 기관에서 여는 대중강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까지, 그 대상과 성격도 다양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학문’ 취급을 받았던 인문학은 이제 ‘유용한 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멜로드라마에 책 읽는 남성 주인공이 이전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그때 그 주인공은 사회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이었거나, 아니면 지식인이라는 배경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령 ‘인욱’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소지섭이 연기한 인물. 그 드라마에서 인욱은 자신이 읽었던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하지원이 연기한 수정이란 인물에게 선물했다.……그는 과거 학생운동을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재벌 후계자 캐릭터는 조인성이 연기한 ‘재민’이었다. 그는 이른바 ‘무개념’ 캐릭터였지 않았던가.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재벌과 인문학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하지만 6~7년이 흐른 지금, 인문학은 재벌 후계자와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비싼 외제차나 고가의 명품 슈트 못지않게 젊은 재벌 남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액세서리로 인문학이 선택되고 있는 건 아닐까?……나는 〈시크릿 가든〉의 인문학 책 읽는 주인공 ‘김주원’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삶을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이자, 세련된 감수성과 지적인 안목을 심화하게 해주는 교양의 원천이 된 것이다.
― 본문 94~95쪽,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에서
 
 
2.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의 새 프로젝트 ‘불온한 인문학’ (이 책의 개요)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수유너머(노마디스트 수유너머N)’는 ‘지금의 인문학’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보았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를 위해 인문학에 ‘비판성과 전복성’을 되찾아주는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 권력에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의 인문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불온성이 거세된 채 구체적인 삶과의 접점도 잃고 ‘문화적 교양주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적 일상에 길들여진 대중이 어렵고 낯선 주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적인 정치?사회적 주제들은 그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기에 곧잘 반려되곤 했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 오래된 과거에 대한 정보들, 두루두루 유익하기만 한 ‘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게 권장되었다. 품격 있는 ‘고전’을 다루면서도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서구의 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헤겔 등 사상사의 거인들은 너무 어려워서 빠지고, 마르크스나 레닌 등은 어딘지 위험스러워 보여서 누락되었다.……그렇게 대중과의 만남과 소통이 ‘건전해질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사회로 발길을 돌렸을 때 인문학이 욕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세상과 담쌓은 ‘온실 속 지식’이 아니라, 안온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무사안일한 상식을 질타하며 낯선 가치,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자는 소신은 ‘강의를 위한 강의’에 밀려 종적 없이 사라졌다. 수준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본문 6~7쪽 〈지은이의 말〉에서
 
 
3. 지은이 소개 및 차례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www.nomadist.org) 연구원.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러시아에서 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과 사유, 문화의 정치적 동력학이 최근의 연구 주제다. 함께 지은 책으로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해체와 파괴》 등이 있다.
 
문 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연구실에 접속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송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은 방송 일도 잠시 접고 연구실 활동에 푹 빠졌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문학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이후 사회적 배제와 문화정치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함께 쓴 책으로 《코뮨주의 선언》, 《소수성의 정치학》,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2권, 정치사회 편) 등이 있다.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여, 《철학과 굴뚝청소부》, 《수학의 몽상》,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등을 썼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사유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철학의 외부》,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역사의 공간》 등의 책을 썼다.
 
손기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 공부를 시작한 이후 신학과 철학, 종교는 언제나 그의 관심사 한가운데를 차지해왔다. 최근에는 바울의 정치신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들에 주목하고 있다.
 
박정수 수유너머R 연구원.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프로이트, 라캉, 지젝, 푸코, 들뢰즈, 카프카, 루신에 관심이 많으며, 자칭 ‘욕망의 정치경제학’을 개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현대소설과 환상》,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이 있고, 옮긴 책으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등이 있다.
 
차례
지은이의 말. 불온한 인문학은 왜 인문학이 아닌가

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1장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 양상 ― 문 화
2장 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시론 ― 최진석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 ― 정정훈
4장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불온성의 ‘트랜스내셔널’을 위하여 ― 이진경
5장 인문학의 현장은 어디인가 실수-방황의 인문학 현장 ― 박정수
6장 인문학은 위험한 존재를 만들 수 있는가‘희망의 인문학’이 가르쳐준 희망? ― 손기태
 
 
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대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한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고자 희생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인간’과 '문화'를 말하는 인문학은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과 대결한다.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익숙한 현재의 인문학을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든 영토를 떠나는 첫 걸음이다. 그 첫 걸음은 현행의 ‘인문학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에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 뒤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 이처럼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통념적인 삶의 관성에 낯설고 불쾌한 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온한 인문학, 혹은 인문학의 불온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환상 따위로 세상과 자신을 중독 시키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요,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 넣는 것이어야 한다.……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 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 본문 17~18쪽〈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에서
 
 
5. 사유의 불온성, 사상의 전복성, 비판의 급진성! 이것이 인문학이다
 
불온성과 전복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느끼는 기분이다. 또한 불온성은 ‘저들’은 아니지만 ‘저들’을 믿는 자들, 자신들이 저들과 같다는 감각을 갖고 있는 ‘그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은 저들이 찬양하는 위대함이나 탁월함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을 만한 그런 지위도 갖지 못하면서, 그런 자랑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불온성은 ‘저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하는 당혹스런 침범 앞에서, ‘그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 앞에서, ‘저들’과 ‘그들’이 느끼게 되는 기분이고 감정이다.
불온함(전복성)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내용과 이유, 사고방식,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입구에서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알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처하는 한 사람이 “이게 무얼 하려는 것인지” 물을 때에 못마땅함과 불편함, 불쾌함에 당혹스러움까지 뒤섞인 그 얼굴에서, ‘저들’, 혹은 ‘그들’이 느끼는 불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온한 인문학》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효율과 순치의 흐름으로 구성되고 있는 인문학의 흐름에 반한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고유한 전복성과 불온성을 찾아 인문학을 재정의하고 현대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여는 책이다.
 
세상 모든 것에 ‘내 것’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처럼 말에게 낯선 장면들이 또 있을까? 사유 재산 제도란 오직 인간의 눈으로 볼 때만, 익숙하고 당연했던 게 아닐까? 인문학이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고 부르짖었던 것들, 즉 인간, 문화, 예술, 민족, 국가…… 사실 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때다!
과연 우리 자신을 낯설고 거북하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소명이 될 수 있을까?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꿨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反]’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이 ‘좋은’ 인문학일까? 수월하게 소비되지 않은 인문학, 목구멍에 걸려 잘 삼켜지지 않는 인문학, 위장 장애를 일으켜 이미 소화시켰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게워내 직시하게 만드는 인문학―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 본문 83쪽, 〈2장?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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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수유너머104

여름강좌(7/6-8/10)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강사 인터뷰!

 

 

 

"상상력 없이 우린 변화할 수 없어요!"  

-홍서연 강사와의 인터뷰-

 

 


 

홍서연 소개 - 수유너머N 연구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역사인류학을 공부했음.  

 

 

 

질문 : 안녕하세요^^ 저는 인류학에 대한 관심은 많은데, 왜 이 공부에 끌리는지 잘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인류학은 확실히 인문학 독자들에게도 조금 낯설기도 하구요.

인류학에 대한 전반적 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왜 인류학을 공부해야하는지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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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서연 : 확실히 인류학은 우리나라에서 철학이나 다른 분야보다 훨씬 안 읽히죠!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레비-스트로스나 모스의 이름이 낯설지 않겠지만 그들의 책을 꼼꼼히 읽어본 독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듯 하고요. 외국 인류학자들이 낸 이론서와 수많은 민족지 작업들은 별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과거에 번역된 것들도 절판되어 잊힌 상태예요. 국내 인류학자들의 작업은 소수의 전공자들만 읽고요.                        

 

인류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실증적인 학문이라는 점이에요. 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라는 방법으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기록하고 연구합니다.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행위와 말, 의례, 생산기술 또는 생활기술, 문물, 친족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한 사회의 지식, 정치, 상징적인 것들, 사회관계와 사회조직, 제도, 그리고 또… 한 사회의 특이성, 사람들이 한 마디로 '문화'라고 지칭하는 것이죠.

다양한 것들의 세세한 면모를 읽는 데서 아무런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겠죠.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미미한 건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질문 :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것이 인문학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부족 때문이라... 

좀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홍서연 : 스스로 사유하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기보다, 보증된 이론 또는 이론가에게 기대기 위해 공부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어요. 그런데 학문은 보증을 해 주는 안전장치가 아니거든요. 특히 인문학은요. 가령 철학은 언제나, 익숙한 방식으로 굳어져버린 믿음들을 전복하여 이미 있었던 개념들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어요. 우리가 푸코, 들뢰즈, 랑시에르에게 열광한다면 그것 또한 그들에게 안주하기 위해서는 아니거든요. 그들의 권위에 의존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율배반적이고요.

다시 인류학으로 돌아와서, 인류학은 현장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현실의 무한한 개별성으로부터 시작하는 셈이죠.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 언어로써 다루기 힘든 부분, 개념과 언어의 틀 밖으로 세어나가 버리는 부분, 거기 뿌리박고서 하는 작업입니다. 흔히 감각을 통한 사유는 편견에 지배되기가 쉬운데, 인류학의 사유는 오히려 자문화중심주의적인 편견을 깨뜨리는 사유입니다. 거기에 긴장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개별성 속에서 어떻게 편견에 치우치지 않을 것이며, 개념화 작업 속에 어떻게 특수성을 담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과 접촉해서 낯설고 불편한 생활양식 속으로 들어가서, 종종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과 함께 얽히면서 강도 높은 감정적 투입 속에 자기 몸을 던져 넣어야 하지요. 인류학자들의 민족지 작업들은 그걸 견뎌낸 다음에만 탄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은 그 익숙함 때문에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착각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면 인문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죠. 우리가 경험과 교육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현실의 아주 작은 조각들일 뿐이에요. 인류학은 우리가 '모른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알 때에만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가 있어요.

 

 

mauss.jpg malinowski.jpg        Clastres1.jpg

                모스                           말리노프스키                             클라스트르        

 

질문 : 강좌 제목은 그런 인류학의 성격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왜 "근대의 외부들"이고 왜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인가요?

 

 

 

홍서연 : 필연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물질적 조건 속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면 거기서 필요한 건 상상력이에요. 상상력은 우리가 지각하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건, 하나의 현상을 통해 무한한 확장을 이루는 능력이에요. 경계들을 넘어서 체감하는 능력이고, 한계들을 넘어서 인식하는 능력이죠.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변화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해 상상력 없이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어요. 강좌 기간 동안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얘기를 하고 사유를 할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언가 변화된 상태로 나아갈 거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세계를 발명할 겁니다.

이번에 다룰 여섯 권의 책은 모두 '원시사회'라고 불리는, 근대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물론 인류학이 언제나 그런 사회를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건 우리에게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통해 우리 자신을 사유하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책들에서 우리는 이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몹시 친숙한 것들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고 나면, 근대 이후의 사회는 '근대적인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한 착각인지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결국은 나 자신에게서 나의 외부라고 생각했던 것, 다시 말해 타자를 발견할 거예요. 우리 사회 안에서 우리 사회의 바깥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될 거고요. 좀 전에도 '솔직함'을 말했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기만에 맞설 수가 없어요.

 

 

 

질문 : 강의 주제로 되어 있는 책들의 저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Leroi-Gourhan.jpg   .레비스트로스.jpg

             르루아-구랑                              레비-스트로스

 

 

 

홍서연 : 말리노프스키(Bronisław Malinowski, 1884-1942)는 영국 사회인류학의 창시자이고 현지조사 방법론을 정립한 사람이에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증여론>의 모스(Marcel Mauss, 1872-1950)는 증여관계뿐만 아니라 주술, 의례, 기술(테크닉)에 대해 중요한 작업들을 남겼죠.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은 선사시대 도구와 종교를 연구한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에요. <인간과 물질>, <환경과 기술> 등의 책을 통해서 인지와 생태학에 대한 이후의 사유들에 대해 큰 영향을 끼쳤는데, 국내에는 거의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아요.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인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남아메리카 부족사회들에 대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해서 상당히 이론적인 논의를 전개하는데,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와 <폭력의 고고학> 두 논문집이 번역되어 있어요. (과야키족에 대한 민족지가 번역되지 않은 건 좀 아쉬워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의 책은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는데, 강의 주제인 <야생의 사고>는 그 중에서도 가장 구조주의적인 냄새가 옅은 책이지요.

 

 

 

질문 : 강의 프로그램으로 선택한 책들의 선정 이유를 알려주세요^^

 

 

 

홍서연 : 사유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들을 선택했습니다. 첫 강의에서는 말리노프스키와 함께 영국 사회인류학을 소개하면서 인류학이 흘러온 역사를 짚어볼 겁니다. 사회인류학은 인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했거든요.

 

또한 경계를 넘나들기에 좋은 저자들을 선택했습니다. 인류학적 사유 자체가 경계를 넘어 체감하는 사유이지만, 선택한 책들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말리노프스키의 <미개사회의 성과 억압>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가지고 실험을 합니다. 모스의 <증여론>은 데리다, 부르디외 등에게 무한한 영감을 제공했고요. (길게 말하면 잔소리일 터!) 르루아-구랑의 <몸짓과 언어>는 아마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고고학과 인류학의 연결점을 보여주기도 하고, 책의 주제 자체가 경계를 넘어 흘러요. 최근에 프랑스에서는 미학에서도 참조되고 있고요.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국가, 권력, 사회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들의 연장선상 안에서 읽힐 수 있죠. 들뢰즈, 가따리의 <천 개의 고원> 12장은 클라스트르의 '전쟁기계'에 대한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모스의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논문인데, 주술(magic)에 대한 민족지 자료들을 가지고 이론적 작업을 합니다. 로알드 달의 <마녀를 잡아라 The Witches>를 읽어보셨어요? 마녀는 눈동자 색이 수시로 바뀌고, 발가락이 없고, 침이 파란색이고… ^^ 이 논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열거가 등장해요. (어쩜 로알드 달은 이 논문을 읽고 영감을 얻었는지도?) 하지만 로알드 달이 아이들로 하여금 마녀에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녀의 특징들을 열거한다면(^^), 모스는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주술사의 특징들을 정리하죠.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지식'이라는 주제에 대해 사유할 때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한 것처럼 역사성을 고려하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시대, 지역, 사회의 특수성과 구체성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분야와 관계 없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에요.

 

저자들은 공부한 여정에서도 경계를 넘어 흘러다녔어요. 레비-스트로스는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클라스트르도 인류학을 하기 전에 철학을 했죠. 모스는 사회학자이기도 했고, 르루아-구랑은 고고학자였고,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한 다음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어요.

  

 

질문 : 강좌를 듣기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이 있나요?

 

 

홍서연 : 책을 읽고 오면 가장 좋겠지요(번역본이 있는 경우). 하지만 시간에 쫓긴다면 꼭 읽고 오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감각에 곧바로 와 닿는 이야기들을 들려드릴 거예요. 그러니 잘 뚫린 귀를 가지고 오세요. 그리고 들은 것들을 내가 알고 있는 것들과 결합하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주세요. 강좌가 끝날 때쯤엔 더 접속률이 좋아진 뇌신경과 더 좋아진 시력과 더 예민해진 내 몸의 안테나를 확인하는 것이 이 강좌의 목적이에요.

 

 

 

     감사합니다. 7월 6일 첫 강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강좌 신청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수유너머104

Q. 요즘 반값 등록금 시위나 서울대 법인화 저지 점거사태 등을 보면 젊은 사람들의 정치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이 강좌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진경: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얘기하면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이죠. 정해진 코스대로,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쌓아서, 정해진 자리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일반화된 요구입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장은 딱히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꼭 따야 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위해 어이 없이 비싼 등록금을 내야하는 것이죠. .

 

얼마 전에 칼럼에서 ‘비정규 학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요즘에는 비정규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시간을 피해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비정규 학생이 생긴거죠. 그렇게 일함에도 등록금을 제대로 벌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 학생이 하나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학졸업장을 따야하는 학생들을 불리한 위치로 몰아세우는 것이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한국 학벌중심 사회의 현실입니다.

정치란 그런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런 자리를 뒤집어 버리는 것, 이런 것이 정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그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치안에 반하는 정치다’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현재적인 의미가 크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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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을 넘어 무상교육의 그날까지.... 촛불아 꺼지지 말고 계속 타올라라!>

 

변성찬: 요즘 한국 대학생은 존재 자체가 소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그렇게 지위가 변화하는 것은 위기일텐데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정치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대학생들에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그런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들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수화시켜 준 MB 정부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하하하!!)

 

 

Q. 바흐친은 요즘 한국의 대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최진석: 아까 얘기했던 웃음과 연결하여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은 일상의 문법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바흐친이 전복적인 힘으로 얘기하는 것은 폐부를 찌르는 비웃음과 풍자적인 불온한 웃음이죠. 그런 것들은 최근 박정수씨의 쥐그림 사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쥐그림이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검찰은 기소 내용에서 그 그림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 미래를 빼앗았다고 강조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이런 방식의 웃음이야 바흐친이 말한 웃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 검찰이 말한 아이들은 말그대로 퇴행한 MB의 아이들인거죠.

 

이렇게 정권이나 권위에 누구라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사태 자체는 자신들의 권위의 벽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도발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권위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하면서 그 벽을 건드리기도 하고, 그 벽에 오줌을 누기도 하는 방식, 직접적으로 권위를 망치로 부수는 방식이 아니라 권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것 냄새나게 만드는 방식이야 말로 권위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진경: 요즘엔 웃음에 대해서 좀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준비하면서 불온한 웃음,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이 웃음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편에 있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MB 정부가 유발하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웃길 의도가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깔깔거리고 웃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의도 없는 개그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웃음은 왜 유발되는지, 그 의미는 뭔지, 굉장히 다른 종류의 이 웃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웃음은 더 다양해지고 더 중요해진 것 같은데, 바흐친의 사상을 통해 웃음의 정치학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하하하....-_-;; 그냥 웃기다.>

 

 최진석: 바흐친은 패러디적 웃음의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죠. 예를 들어 건설부양에의 의한 정권를 비판하면서 누군가 거대한 삽의 모형을 만들어 던졌는데, 그것은 거대한 이미지를 통해 정권이 하고 있는 일과 유사하지만 들어나서는 안 되는 이미지를 들어내며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패러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죠. 보이지 않았던 본질을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던 권위를 추락시키는 방식들. 그것이 재미를 넘어서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웃음은 굉장히 치명적인 웃음이 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MB 정권은 패러디 자체의 위험성의 낌새를 채로, 그 근원을 봉쇄해 버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웃음을 주고 있지요. 강좌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이런 사람들은 이 강좌를 꼭 들어야한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변성찬: 등록금 투쟁하고 있는 대학생이 들으면 좋지 않을까요? ^^

이진경: 정치를 좀 더 큰 스케일로 그리고 통념을 깨는 방향으로 사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대학생 여러분, 힘내세요^^!!>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wabore

 

Q. 강의 전에 읽어야 할 책이 있나요?

이진경: 강좌에서 만나게 될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오면 좋겠지만 책을 안 읽는다고 강의를 못듣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사유의 열기로 무더운 7월 금요일 밤을 더욱 화끈하게 만들어 줄 이진경, 최진석, 정정훈, 변성찬 강사의 열강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http://nomadist.org/xe/lecture/145640 강좌 안내는 요기 클릭!!!

 

그럼, 7월 8일 첫강의에서 만나요! ^^


Posted by 수유너머104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대표 미남 (...........응? ) 강사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정정훈이 '히치하이커의 정치학-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를 탐사한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강좌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현대 정치철학에 왠 히치하이커?

도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강좌에서 만나게 될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어떻게 한 곳에 엮을 수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세 강사를 만났다.

 

 

                                                                                                                                  인터뷰 : 강좌 반장 아샤   

 

 

 

Q. 강좌 제목이 특이한데요, 어떻게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진경: 사상가들을 공부할 때 어떤 때는 그들의 사유에 편승을 해서 그것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뒤집기도 때로는 대결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종의 히치하이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적지가 같으면 같이 가지만 목적지가 다르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딴 길로 가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히치하이커 역할을 자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정치학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제이기 때문에, 방향을 가지고 운전사·차주와 대결하는

히치하이커라는 컨셉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정치사상가들과 대면하는 방식을 만들어보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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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찬: 얘기를 들어보니 히치하이커가 아니라 하이잭킹의 느낌인데요?

(일동 웃음~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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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킹?? 혹은 하이잭킹??>

 

 

Q. 강좌에서 총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만나게 될텐데,

여섯 명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얘기해주세요.

 

최진석: 현대 정치철학 경향이나 철학자들의 사유를 소개·해설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추종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을 거부합니다.

예를 들어 첫 강의의 주인공인 아렌트의 경우도 통상적인 방식이 아닌 아렌트의 사상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진경: 남으로 갈 비행기를 북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죠.

 

변성찬: 그게 정확히 하이재킹이죠.

 

이진경: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랑시에르의 ‘평등성의 정치학’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성까지 밀고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좌에서도 랑시에르의 얘기에 그대로 주석을 달지는 않을 것입니다.

 

Q. 정치철학 강좌인데 바흐친이 있는 것도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바흐친~ 하면 문학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최진석 : 그렇죠. 바흐친을 정치철학자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흐친이 얘기하는 전복성의 사유가 단순히 예술이나 문학을 논할 때의 전환점,

새로운 미적감각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흐친이 이야기하는 감각성을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도입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강좌를 통해 학문적 담론 안에 곱게 정리된 그의 사유를 끄집어내어 현실 속에 던질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를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포리아 자체로 끝나버리는,

‘불가능하다’와 ‘불가능하지 않다’를 동시에 말해버리는 것으로 데리다의 정치철학을 지표화해버리고 맙니다.

그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의 언어로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은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아포리아로서 데리다의 정치철학적인 가능성을 ‘법의 힘’이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사유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바흐친이 주목했던 유머가 가진 힘과 그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진경 : 특히 바흐친의 웃음, 유머는 정말 공부해 볼만 하단 생각이~~ 정말 재밌다는..!

나중에 베르그송의 '웃음'이랑 같이 해서.. 더 공부를 해보면 좋을 듯...?

(인터뷰 도중에도 끊이지 않는 기획들....^^)

 

Q. 영화 평론가 변성찬이 보는 들뢰즈의 정치철학도 궁금합니다.

 

변성찬: 현대정치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메타 정치학을 얘기합니다.

들뢰즈는 ‘정치란 이런 것이다’라고 사유를 한 사람이 아닌 만큼 더더욱 그럴 것 같은데요,

‘천의 고원’,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영화평론을 하는 사람인만큼 ‘씨네마’에서

들뢰즈가 지나가듯 얘기하는 현대적 정치영화와 고전적 정치영화의 차이라는 부분을 참고로 하여

들뢰즈가 얘기하는 ‘소수성의 정치’라는 개념이 갖는 함의를 좀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들어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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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강좌를 통해 우리가 조우하게 될 철학자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하일 바흐친,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Part 2에서는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펼쳐집니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수유너머104

2011년 여름, 수유너머N 최고의 미녀 강사 유정아와 박수진이 뜬다! 수유너머N의 숨겨진 보석으로 늘 쉬크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던 그녀들이 드디어 강좌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로 그 지성과 매력을 드러낸다. 수유너머에서 쉽게 접해보지 못한 예술과 미학에 대한 강의라 더욱 기대되는 마음을 안고 강사인 유정아, 박수진 선생님을 만나 보았다.

 

 

박수진.jpg 유정아.jpg

위 : 박수진 선생님 / 아래 : 유정아 선생님

 

Q. 선생님들께서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유. 제가 석사 첫 학기에 ‘다큐멘터리 사진’에 관해서 발표한 적이 있었어요. ‘세상이 참 살기 힘든거구나.’ 그 때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죠.^^;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깨졌거든요. 완전히 소심해져서는 다시는 이런 주제 따위 누가 뒷돈 대준데도 공부하지 않으리라, 아니, 아예 여기서 공부를 포기해버릴까 수없이 고민했죠. 그런데 몇 년 후, 정신을 차려보니 박사논문 주제를 고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인생이란...C'est la vie...


 

암튼 그 때 미국의 대공황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발표했었는데,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준다고 믿는 사진들 이면에는 수많은 왜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이건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또 막상 파고 들어가면 쉽지 않은 얘기거든요. 그 때는 그 주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건 예술의 근본적인 문제인 리얼리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구요.


 

시대를 통틀어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현실을 진실하게 보여주는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했겠죠. 우리가 볼 때는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표현주의나 입체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그래서 ‘현실적인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거꾸로 ‘초현실 내지는 비현실’을 다루어 보려고 하는 겁니다.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를 미술사적으로 규명한다기 보다는 이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현실과 이미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싶어요. 너무 산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중심점이 필요하죠.


 

박. 정신분석으로 논문을 썼는데, 그때는 초현실주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계적으로 정신분석과 초현실주의를 연관 짓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박사 졸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독립기획자로서 전시를 기획하면서 다시 만나는 초현실주의는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우연과 무의식과 만나는 혁명과 사랑, 그리고 번뜩이는 예술적 아이디어와 실천력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 그리고 전시회에서 폭발하는 것 같아요.


 

 

Q. 박수진 선생님께서는 현직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11년 한국에서, 20세기 초 유럽의 꿈꾸는 집단이었던 초현실주의자들을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박.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매력적이지요. 특히 21세기에 들어서서 현대미술의 현장에서는 모더니즘 미술 다시 보기를 하고 있지요. 현재 미술계에서 관심은 미술의 이즘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과 경향성입니다. 기존의 미술사가 형식주의 모더니스트의 관점에서 순수주의와 추상주의로 20세기 미술을 보지만 동시에 미술의 역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것은 다다라든지 초현실주의와 같은 표현주의적 미술이었지요. 그러나 양식적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이들 표현주의 경향을 바라보고 미술사에서 평가절하되거나 배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초현실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예술적 스타일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술 뿐 아니라 모든 관습적 견해에 대한 강한 불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초현실주의자를 사유한다는 것은 배제되었던 역사를 지금 우리 시대에 복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꿈꾸었던 욕망, 그들이 꿈을 기억하며 동시에 해석하는 방식, 그들이 무작위적인 병렬에서 생산하는 이미지들, 전통적 예술에 대한 저항, 변증법적 각성과 그 속에서 혁명적인 에너지를 읽어낸 정치적 태도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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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_겨울비   

 

 

Q. 강의 소개를 보니 ‘초현실주의’ ‘예술’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정치’ ‘혁명’ 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예술’ 과 정치’ 이 두 가지 사이의 관계가 이번 강의의 직접적인 화두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요. 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고 싶습니다.

 

유. 어쩌면 결론은 이미 나와있는 것인데, 예술이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하죠. 아. 쥐 포스터라면 혹시 가능할까요? ^^; 그러나 이건 예술이라기 보다는 저항운동의 한 수단일테죠. 그러나 그렇다고 예술이 현실은 나몰라라 혼자서만 고고한 한 마리의 학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쉽지 않은 얘기이니, 이제까지 수많은 논쟁이 있었겠지요. 눈 앞의 대상, 각박한 사회 현실과 노동자들을 그리면 사회참여적인 예술이고, 상상의 세계를 그리면 유미주의적인 예술이라 말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은 이제는 사라졌다고 해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여전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예술로부터 철학적 사유가 생겨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이 예술가들로부터 ‘정치적인 것’의 힘을 배태할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특히 연구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던 들뢰즈나 벤야민에게 도움을 받아보려고 합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환상’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찍이 무너졌을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상품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기제가 모두 (거짓) 환상을 심어주잖아요. 저 아파트에 살면, 저 옷을 입으면, 저 커피를 마시면 공주가 될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현실 생활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이 환상, 꿈의 (사회적) 이미지이죠. 이 얘기들은 20세기 중반에 전개된 팝아트에도 영향을 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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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필드_정의의 여신 

 

 

Q. 부제가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입니다. 여기에서 ‘꿈꾸고’와 ‘혁명하라’는 말은 앞서 드렸던 질문의 답변에서 어느 정도 해소 된 것 같습니다만, ‘사랑하고’가 들어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 정신분석의 시작을 알렸던 히스테리의 다른 이름은 ‘작은 사랑의 역사’라고 하죠.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심의 중심에는 초월적인 관심이 놓여있습니다. 그들은 언캐니한 것에의 매혹, 미친 사랑에 대한 숭배가 자리잡고 있지요. 그것들이 아마도 초현실주의자들의 시적 무기 창고를 채우고 있는 보충물 혹은 논쟁의 원천이지 않을까 합니다. 전복적 아름다움과 히스테리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을 혁명의 원천으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Q.강의를 듣기 전에 미리 읽거나 보면 좋을 책이나 작품이 있다면요?

 

유. 일단은 편안하게 오셔도 될 것 같아요. 머, 어려운 철학 강의가 아니니까요. 아마 여러분들 책장을 둘러보면 미술에 관련된 책이 한 권쯤은 있을 겁니다. 제가 매번 놀라는 것은 미술관에 가거나 예술에 관련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거예요. 모두들 마음 속에 모두 ‘예술’에 대한 욕망들을 꿍쳐 놓고 있는거죠.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 강의 시간 만큼은 그 꿍쳐 놓은 마음들을 좀 풀어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일단 제 말보다 여러 작품과 이미지들이 많은 즐거움과 지적 자극이 되어주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지가 여러분들의 눈과 몸에 가서 닿는 것만으로도 (들뢰즈적 의미의) ‘폭력적인 기호’가 되어줄꺼라고 믿어요. 저는 그 이미지들의 기호를 해독해보기 위한 약간의 팁을 제공할 뿐이죠.


 

(<다다와 초현실주의>라는 책이 한길아트에서 나왔고, 오생근 선생님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학의 혁명>이라는 책도 있어요. 또한 ‘길’ 출판사에서 나온 발터벤야민 선집 5권에 <초현실주의>라는 제목의 글이 있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강좌는 오는 7월 4일 월요일을 시작으로 6주간 매주 월요일 7시 30분에 시작된다. 올 여름, 초현실주의와 미녀 선생님들로 더운 열기를 확~~ 날려버릴 사람들은 주저 말고 수유너머N 여름강좌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강좌신청 게시판)를 클릭하시길!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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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 1 1  여 름 강 좌 안 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은 매 분기별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를 통해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경험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그리고 삶으로부터 다시 공부를 길어내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여정! 배움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개강일: 2011년 7월 4일 월요일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18-23 이스턴빌 2층 수유너머N | 전화 (070)8263-0910 | http://www.nomadist.org

 

∙ 접수계좌: 우리은행 011-9571-1509 (휴대 전화번호와 동일) 예금주 명: 오하나

 

∙ 강좌문의: 오하나(011-9571-1509), 문화(010-6210-3021)

 

∙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위의 접수계좌에 입금하신 후,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에 강좌명과 입금자명을 남겨주세요.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수강생명과 입금자명이 다를 경우 꼭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세요.)

 

∙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좌의 수강료는 환불되지 않습니다. <강좌신청> 게시판의 공지를 참조해주세요.

 

 

 

 

 

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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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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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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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노마디스트 이야기" 카테고리 안에 "N개의 공간" 카테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수유너머N에서 일어나는 N개의 이야기를 이미지로 담을 겁니다.

그 첫번째 이야기!

지난 주에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희동 연구실에선 방충망을 설치했답니다.




방충망 설치방법을 알아보고, 사비는 창문 크기와 필요한 재료량을 계산하고, 하지메는 방충망 재료를 구입, 화요일 저녁 회의를 마치자마자 방충망 설치 모드 돌입!


만지작 만지작 공부방 사비와 아샤 뒷모습.



강의실에서는 열시미 쫄대와 망 재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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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라, 성천, 은이 팀은 망을 열심히 가위질하고 있네요.

하지매, 해피 팀은 쫄대를 자르고 계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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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작업에는 술이 빠질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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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매 십장의 지도 아래 하나씩 방충망이 완성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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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완성된 방충망의 모습!

CAM_0034.JPG CAM_0041.JPG 


긋~~~


CAM_0043.JPG


예술가의 손길 인증샷. 아우 훌륭합니다.

우리 올 여름도 모기들 함부로 죽이는 일 없이 사이 좋게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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