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동과 빅 데이터 #2

Simon Mills(De Montfort University), Simondon and Big Data, Journal of Media and Communication vol. 6, "Simondon: Media and Technics"  

 








번역: 최유미 (수유너머 N 회원) 

 




 

개방 시스템들과 과잉목적(Open systems and Hypertelia)

 

 

<사회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빅데이터와 관련된 주장들의 신념이다. 과연 그것만이 최선일까?>

 

 

 

    시몽동의 관점에서 빅데이터, 특히 사회물리학과 관련해서 고안된 주장들을 볼때, 이들의 주장에는 논의 중인 시스템들의 개방성의 정도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다는 점이 첫번째 논평이다. 펜트랜드(Pentland, 2012; 2014, p. 203)는 빅데이터의 잠재력에 대해서 낙관적인데, 그는 빅데이터의 잠재력은 사회 효율성, 운영 효율성과 회복력을 갖춘 설계를 통해서 안전성이 개선될 수 있는 구체화된 기술-사회 메커니즘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기술 사회를 만드는 시스템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빅데이터의 약속이다. 당신이 그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 당신은 더 나은 시스템들을 만들 수 있다. 그 약속은 멜트-다운 되지 않는 금융 시스템들, 무기력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정부들, 제대로 작동하는 헬스 시스템들, 등등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제안에 있어서 한 가지 위험한 점은, 그것이 과잉 목적적인 사회 구조들의 개발을 노린다는 점이다. 이것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몽동의 존재론에서 개체화가 수행하는 중심적 역할에 대해 간략히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현상들의 광범위한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실재론자의 형이상학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시몽동은, 완벽하게 이미 구성되어 있는 개체들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가정하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존재론은, 개체 발생적 작용들에 의해 개체들이 구성되기에 이르고 그리고 계속해서 개체화하는 것에 관해 더 많이 신경 쓰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몽동에게 있어서는, 시스템의 개발과 지속적인 개체화는, 연관환경( associated milieu)과 그가 부르는 바로서의 전-개체(pre-individual) 양쪽에 대한 이중적 관계의 유지 때문에 일어난다. 시몽동이 그의 개체화의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지점들 중의 하나는 기술적 개체들과 관련해서이다:

  

 

          그러한 개체화는, 기술적 존재가 그 자신의 주위에 창조하는 환경 속에서의 인과성의 회귀 때문에 가능한데, 이 환경이란 기술적 존재 자신이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자신이 그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는 그런 환경이다. 이 환경은 이것은 동시에 자연적이고 기술적인데 연관환경(associate milieu)으로 불릴 수 있다. 이것을 수단으로 해서 기술적 존재는 그 자신의 작동에 조건 지어진다. 이것은 제작된 환경(fabricated milieu)이 아니고, 혹은 적어도 전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술적 대상을 둘러싼 자연적 요소의 한정된 시스템이다. 연관환경은, 제작된 기술적 요소와 그 속에서 기술적 존재들이 기능하는 자연적 요소들 사이에서의 관계의 매개자이다. (Simondon, 1980, p. 60).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하나의 일관된 시스템으로서의 기술적 개체의 개체화가 의미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작동이 자신의 지속적 작동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이라고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적 대상을 위한 만족스런 환경은 자연세계의 일부에 대한 얼마간의 변형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점; 그리고 기술적 개체들은 외부환경에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그것들을 더욱 더 개체화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수준의 비결정성을 가지고 작용한다는 점.

 

     연관 환경에 관한 명기에 더해서, 추상적인 기술적 대상과 구체적인 것과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개발은 증가하는 구체화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시몽동이 구체화의 예로 들고 있는 갱발 수력발전기 도해: 터빈과 발전기가 모두 물속에 들어있는 수력발전기다. 물과 전기라는 양립불가능한 성질이 발명에 의해 하나의 해를 찾은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란 요소들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해를 찾으면서 진행된다..>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의 본질은 기능적 하위 시스템들을 전체적 기능성 속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각 구조는 다수의 기능들을 수행 한다; 하지만, 추상적 기술적 대상에서 각 구조는, 전체의 기능성 속으로 통합되는 단 하나의 중요하고 적극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반면에, 구체적 기술적 대상에서는 어떤 특정한 구조에 의해 수행되는 모든 기능들은 적극적이며 중요하고, 기능하는 전체 속으로 통합된다 (Simondon, 1980, p. 31).

 

 

     그 차이는, 작동에 필요한 추상적 구조들을 포함하는 기술적 대상은 작동 상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각자 단 한 가지 기능만을 수행하는 다수의 시스템들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작동 상에서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그들의 작동은 종종 충돌한다. 구체화의 과정은, 그러한 추상적 구조들이 어떠한 단일 구조를 이용하는 해법에 의해 극복될 때 일어나는데, 일관된 수준의 다기능성(pluri-functionality)을 가지고 작동한다.

 

 

     시몽동이 제시하는 하나의 예는 두 개의 추상적 시스(엔진과 수냉 시스템)으로 구성된 수냉식 연소엔진의 예인데, 그것의 구체화된 솔루션은 피스톤 실린더 상에 냉각핀(gill)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냉각핀 구조는 한편으로는 실린더를 위한 구조적인 지지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공기의 흐름을 통한 냉각 문제를 또한 해결한다. 하나의 대상은, 그것의 발생과 기능의 추가적인 발전의 모든 가능성이라는 양쪽 모두로부터 추상화될 정도로 닫혀 있을 때 과잉 목적적(hypertelic)이라고 기술된다. 과잉 목적적인 도구는 어떤 계통의 완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의 발전은 만들어 지지 않는다.

 

 

<냉각기와 엔진이라는 추상적인 구조는 공냥식, 냉각핀에 의해 냉각과 구조적 보강이라는 다기능성을 확보하면서 구체화된다.>

 

 

 

      비록 지금까지의 기술(description)은 기술적 개체들의 개체화에 특정되어 왔지만, 이 일반적인 스키마는 또한 시몽동에 의해서 다양한 범위에서 광범위한 현상들에 적용된다. 예를 들면, 인간 진보의 한계들 The Limits of Human Progress(2010, p. 230)에서, 시몽동은 기술적 발전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것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여 인간의 문화적 진보 (‘인간이 생산하는 것과 인간이라는 것에 의해 구성된 활동과 존재의 전체 시스템’)를 서술한다. 즉 불일치(disparity)를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도메인들 (예를 들면, 언어, 윤리학, 종교, 기술) 사이의 구체화하기라는 진보적 작용으로서 말이다. 어떤 도메인이든지 그 도메인 속에서의 진보는, 그것이 포화되지 않고 (과잉 목적적이지 않고), 추가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그리고 다른 도메인들과 함께, 어느 정도의 공명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발전은 또한, 도메인들의 분열과 그들 관계의 변형을 포함하는 상전이를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서 서술된다.

 

     하지만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의 개체화의 양식에 관한 설명을 다른 도메인, 예컨대 생명체와 심리적 개체들 같은 도메인에서의 그 설명으로 너무 급하게 옮겨가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이것들의 개체화가 이해되는 방법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예를 들면 생명개체의 개체화는 기술적 개체의 그것으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생명의 개체화는 연속적인데 비해 기술적 대상들의 개체화는 불연속적 도약 속에서 일어난다. 이 차이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시몽동의 존재론에서 현재 작동하는 일반 공리적인 이해만을 요구하는 여기서는 이에 관한 설명을 제시할 수가 없다.

 

    심리적 개체들의 개체화에 관한 시몽동의 설명 또한 이러한 공통의 관점들 몇몇을 공유하고 있는데, 주체와 그 환경(milieu)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이나 문제의 극복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 하나 추가되는 관점은 의미화의 역할을 포함한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시몽동(1989, p. 126)은 신호와 의미화간의 차이점을 작동시킨다. 개체화는 문제해결의 과정을 통해서 문제가 되는 불일치의 극복을 수반하는데, 이 해결 과정의 결과는 어떤 개체(개별화, individualization)의 출현이다. 혹은 어떤 새로운 체계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의미화가 또한 나타난다. 여기서의 의미화는 어떤 새로운 체계의 문제해결적 개체화를 수반하는 의미 혹은 감각의 동시적 전개이다. 반대로 신호들은, 재현적이고 전통적 정보 이론에서의 개별화된 개체들 간에 오가는 메시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의미화는 그것의 환경과 그 자체 내부와 관련해서 어떤 개체가 개체화하는 시공간적인 현실적 성취를 표시한다.

 

여기서 시몽동이 사용하는 신호와 의미화는 펜트랜드가 사용하는 정보와 사고 사이에 외견상의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에 관한 펜트랜드의 이해가 단지 사고와 정보의 흐름에만 초점을 맞추는 지점에서 시몽동은 의미화와 관련하여, 개체화의 중심적인 역할, 즉 심리적 개체와 집합적인 개체 양쪽 모두의 중심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몽동은 펜트랜드의 설명이 쉽게 영향을 받는 과잉 목적성에 저항한다.

 

만약 우리가 시몽동의 관점에서 빅 데이터에 관한 사회학적 주장들을 따져 물어볼 것이라면 질문 되어야 할 문제다. 이 주장들이 의지하는 사회시스템들에 대한 가정, 즉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서 조절되는 평형상태에서 사회시스템의 지속적인 운영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추상적인 가정에 어느 정도로 의지하는지 혹은 반대로, 아마 더 곤혹스럽겠지만, 그렇게 제안된 관리가 사회가 과잉 목적적이 될 것을 어느 정도로 요구할 것인가?

 

펜트랜드의 사회물리학이 질문들에 응답하는데 전적으로 실패하지는 않으나, 그 응답들은 제한적이다. 그의 책에서 논의된 시스템들의 대부분은 비교적 추상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시스템의 예들로서, 금융 투자, 헬스 모니터링, 마케팅 그리고 기업체의 생산성 증대와 같은 것에 관계된다. 사회의 복잡성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뿐 아니라 이 모든 예들 역시 어느 정도 상호 연관된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라도, 펜트랜드는 그것들을 비교적 닫힌 시스템들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는 마투라나, 바렐라 그리고 루만의 이론 같은 오토포이에시스의 이론화와 가깝다.

 

 

<오토포이에시스의 닫힌시스템>

 

 

 

 

그 자체로서 사회 물리학의 주된 관심은 시스템들의 자기유지(self-maintenance), 혹은 구조적 커플링과의 관계에서 흐트러짐 없는 작용에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공익 사업 시스템들의 보호와 향상을 포함할 때 이해 가능한 기획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전을 총괄적으로 사회의 더 크고 더 복잡한 상황으로 확대하는 것이 정말 실현 가능한 것일까? 그런 목적은 사회의 과잉 목적적인 생성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설정된 목적을 항상성 조절의 목적에 맞추어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그러한 비전은 기술자주의를 지지하여 정치적인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권장한다.

 

이것이 개체가 유지하는 다른 관계, 그것의 전-개체에 대한 관계가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간단한 용어로 하자면 시스템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의 그런 것이 아닌 무엇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개방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술적 대상과 관련해서 시몽동은 아래와 같이 쓴다:

 

 

 

   기술적 대상의 존재는 이중 관계에 의해서 유지된다 한편으로는 그것의 지리적 환경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기술적 환경과의 관계. 기술적 대상은 두 환경들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고,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 환경들 양쪽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여전히, 이 두 환경들은 같은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 두 개의 세상이고, 서로 간에 반드시 완전하게 양립하는 것은 아니다(Simondon, 1980, p. 54).

  

 

     이 2차적인 관계가 없이는 어떤 시스템도 불완전하고 과잉 목적적이 될 위험에 처하는데 그것은 확고한 단일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어떤 시스템이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빅 데이터를 사용함에 있어서의 문제는, 더 넓고 자주 변화하는 환경과 통합하는 문제에 직면한다는 점인데, 변화하는 환경은 비결정론의 원천이 될 공산이 있다. 물론 이것은 항상 정치의 역할인데, 펜트랜드 (Pentland, 2014, p. 203)의 책에서는 거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주제다. 그것은 사회의 핵심적인 목적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유용한 행위 규범을 개발하도록 개체들을 부양하는 환경에서의 테크노크라트적인 효율성과 회복력이라는 점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속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또한 총체적으로 사회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원한다. 만약 사회가 그런 통제에 복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것이 전술한 베니거(Beniger)의 프로그래밍의 문제인데, 그것은 목적성에 관한 사이버네틱스의 관심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질문은 펜트랜드에 의해 생략된다. 그리고 시몽동의 관점에서 중요했던 것과 같은 발명의 역할도 생략된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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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0 : 나이 사십에 제대로 혹하고 싶은 가십거리]


90년대 학교를 다닐때 80년대 운동권 선배들의 준열한 눈빛 앞에 나는 근본없는 X세대였다. 졸업과 함께 IMF 사회에 진입해 나름 힘겹게 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20대들의 헬조선 앞에서는 그저 좋은시절 막차 탄 막내 꼰대일 뿐이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데 명예퇴직 1순위가 된 40대. 이럴거면 좀 일찍 내보내든가. 치킨집을 하기에도 젊고, 재입사를 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 사십이 되고 보니 알겠다. 구려 가럼 볼 것도 많고, 욕할 것도 많은 사십년 묵은 세상. 꽃병을 들기엔 한창 겁먹을 나이지만 꽃다운 욕은 찰지게 하고 싶은 사십. 인생 이모작이라는데 지난 사십년은 망했으니, 앞으로 사십년은 제대로 말아먹겠다. 



“문제는 노동이야” 

- 경제민주화와 최저임금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여소야대 총선이후, 첫 번째 선물이 도착하다. 


‘새누리당 참패’로 귀결된 총선 직후 야권에서는 총선내내 제기해 온 ‘경제민주화’의 각론이 아니라 ‘부실기업 구조조정’ 문제를 불쑥 꺼내들었다. 정확히 야권이 아니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그랬다. 그는 총선내내 "문제는 경제"라며 박근혜 정부의 '배신의 경제'를 이번 총선에서 심판해달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랬던 그가 선거 후 엉뚱하게 구조조정 문제를 들고 나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중심으로 제기된 ‘선제적 구조조정’은 본격적 구조조정에 앞서 실업대책 등 사회안전망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며 IMF 위기 이후 진행되어왔던 구조조정과는 다른 구조조정을 제시하는 듯한 모양새다. 이에 대해 은수미 전 의원은 ‘어제는 경제민주화, 오늘은 구조조정’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총선 시기의 ‘배신의 경제’ 심판론과 총선 후의 구조조정의 중심에는 더불어 민주당의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있다. 그에게 구조조정과 경제민주화는 총선 민심에 대한 배신일까, 아니면 김종인표 경제의 동전의 양면일까. 


다시 총선 전으로 돌아가보자. 지난 4월 6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2017년 최저임금 투쟁 선포식을 가졌다. 매년 이뤄진 ‘노동계’ 만의 최저임금 투쟁은 20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이슈가 되면서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안에 대한 총선 공약이 쏟아져 나왔다. 세부안은 다르지만 모든 정당들이 9천원~1만원 가량의 인상안을 제시했고, 정의당과 더민주당 등은 노동계와 함께 기존에 주장해왔던 최저임금 1만원안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반전은 새누리당이었다. 애초에 공약에 없던 최저임금안 이었다. 4월 3일 강봉균 공동선대위원장의 입은 9000원 최저임금 인상안을 탄생시켰다. 물론 애초에 공약에 없었고, 이 마저서도 나중에 번복, 수정되었지만 최저임금 문제가 총선 기간안에 이슈가 되었고,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4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규직을 늘리는 파견법 등의 처리를 거듭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일자리를 잃는 근로자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며 그에 대한 대책으로 파견법이 포함된 ‘노동개혁 4법’의 국회 처리를 또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최저임금과 ‘노동개혁 4법’, 더불어민주당의 구조조정과 박근혜 대통령의 구조조정이 총선 이후 국민들에게 각기 다른 포장을 하고 국민들 앞에 도착했다. 어느 선물 포장지를 풀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가장 허망한 것은 어느 포장지를 풀어도 모두 같은 내용물이 나오게 되는 경우이다. 


선거는 끝났다. 공약으로서 경제민주화도 끝났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는 노동과 자본, 보수와 진보의 각축장 속에서 어떤 내용으로든 채워져야하는 ‘의미화’의 과정이 남아있다. 



지금 어떤 경제민주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현행 헌법 119조 2항에 ‘경제의 민주화’라는 말을 넣었다고 해서 ‘경제민주화의 아버지’로 대접받는 인물이다. 법제정 이전에 법을 가능케 했던 것은 87년 민주항쟁이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의 바람은 경제 영역에서도 시장 혹은 자본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의 요구로 나아갔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경제민주화는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반면 민족경제론의 입장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국가권력의 민중화였고, 정경유책과 매판적 독접자본의 거부는 사회주의를 전망한 것이었다. 법제정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의미화가 서로 각축을 벌였다. 어느 세력의 경제민주화가 최종적으로 법의 지위까지 올랐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대중적인 의미화의 과정 자체가 헌법 119조 2항을 구성한 것이다. 



87년 6월 민주화투쟁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87년 이후 민주화 10년은 IMF 협약으로 매듭지어졌고, 그 뒤 10년은 사회양극화로 귀결되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민중들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불안정노동자가 되었거나, 대출을 끼고서라도 집을 사야 안심이 되는 불안정소유자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법 제정 이후, 경제민주화는 역대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공약과 약속, 계획과 실행에서 빠진적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재벌개혁이 중심이 되었던 경제민주화의 방향은 자본에 대한 규제와 노동의 권리 실현이라기 보다는 시장의 효율성 제고에 있었다. 시장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독점과 규제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한되었고, 시장의 효율성을 가로막는 노동이 유연화되었고 강경한 노동조합이 후진적이라는 이름으로 철퇴되었다. 

자본에 대한 규제의 효과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는 '신한국',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몫을 체계적인 강탈을 세련되게 추진하기 위한 매너좋은 신사의 얼굴로 등장했다. 시장의 분배를 국가가 개입해 재분배의 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기초적인 의미지만 국가 개입으로 인한 재분배는 역설적이게도 시장이라는 객관적인 이름 뒤에 숨은 자본에게 추가적인 몫을 재할당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배신의 경제에 대한 심판은 박근혜 대통령 뿐 아니라, 87년 당시 경제민주화의 요구를 가장 약한 수준으로 관철시킨 김종인에게도 해당된다. 따라서 김종인 대표가 2012년 출판한 제목이기도 한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는 다시 물어져야 한다. 지금 어떠한 경제민주화인가. 


그런 의미에서 김종인 대표의 경제민주화와 구조조정은 선거 이전과 이후의 말바꿈의 처세가 아니다. 그에게는 87년 이후 일관된 하나의 이념에 대한 두 표현이다. 

지난 4월 25일 한국경제 인터뷰에서 김종인 대표는 그동안 지녀온 경제민주화 이념과 현실의 구조조정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피력했다. “경제민주화는 시장의 공정한 경쟁룰을 만들자는 게 핵심”이라며 “재벌개혁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나는 한번도 재벌개혁을 입에 올린 적이 업다”고 선을 그었다. 

그에게 경제민주화는 성장을 위한 시장의 효율성 제고다. “경제민주화는 시장원리를 보다 더 보완하고 공정하게 경쟁시키자는 것이다.”

국가는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인해 시장의 질서를 침해해서는 안되고, 시장의 룰이 잘 지켜지도록 관리하는 ‘정원사’의 역할을 가질 뿐이라는 주장은 정확하게 신자유주의 이념이다. 김종인 대표가 젊은시절 독일로 건너가 배워온 것은 신자유주의의 조상격인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이념이었다. 


김종인 대표의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어려운 중소기업 보호라는 온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경제 전반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다. 시장의 경쟁의 룰을 다시 짜는 것, 곧 구조조정의 다름 아니다. 

197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한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노.사.정을 중심으로한 사회적 공동결정의 제도화였고, 이를 위해 친노동조합 노선이 전제된다. 하지만 김종인 대표의 반노동조합적 정서는 87년 이래 일관된다. 그의 경제민주화론에 소득분배와 노동자의 몫이 고려되지 않는 이유다. 원하청 구조가 개선되고 중소기업을 보호한다고 해서 노동자의 권리와 몫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알바 노동자들에게 행해지는 갑질은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자영업으로 내려갈수록 심각하다. 자영업자들의 삶이 나아진다면 좋은 사장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낭만어린 착각은 반시대적이기까지 하다. 


노동 문제가 배제된 경제민주화는 더욱 강한 시장화, 자본화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지난 20년의 경험이다. 하지만 노동 배제는 김종인대표의 무능력이 아니라 노동 혐오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론이다. 그가 주장하는 양극화 해소는 “빈곤층에게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 발동해 집단행동에 나서면 제어하기 힘들어지기 때문”[각주:1]이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경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기 보다는 대중에 대한 지배층의 공포와 배제에 기반한다. 



“문제는 노동이야” : 최저임금을 둘러싼 ‘공정한 룰’의 의미


시장의 공정한 룰을 다시 구성하기 위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87년 이래 체계적으로 배제된 노동의 몫이다. 임금의 경제적인 몫 뿐만 아니라 노동의 정치적인 몫을 둘러싼 싸움, 그것은 권리를 둘러싼 정치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싸움은 이 문제의 한가운데에 있다. 9천원이냐 1만원이냐 흥정의 문제가 아니고, 2020년까지냐 2019년까지냐 조정할 문제가 아니다. 김종인 대표를 비롯해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구조조정이 또 다시 노동자들의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희생으로 점철되는 것인지, 아니면 공정한 룰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동의 권리가 이제야말로 경제민주화의 전면에 등장할 것인지는 지금,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우리나라 최저임금법에 상응하는 법으로 미국에는 공정근로기준법(Fair Labor Standard Act, 'FLSA')이 있다. 미국 사회는 ‘공정함’(fairness)이 어떤 의미인지 오랜 시간 사회적 논쟁을 벌여왔으며, 그 의미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공정함의 의미가 생활임금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자본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교섭력의 대등성으로 정의되기도 하였다. 그중 “공정성은 공정경쟁”이라는 의미가 있다. 노동과 자본간의 공정한 계약이 이뤄지려면 자본간의 공정한 경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즉 자본간의 경쟁 격화와 불공정한 경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장시간 저임금으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이를 강제하는 대자본의 횡포는 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해 경제성장에 해악을 끼친다는 논리다.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유지의 비용은 자본이 사회적으로 전가시킨 것-노동손실의 사회화!-이므로 이에 대해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한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김종인 대표와 더민주당, 국민의 당은 구조조정의 선결 전제로 실업수당 등의 사회안전망의 보완을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자본의 손실을 국민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복지정책의 전면적인 확대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비용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던진 주사위의 어떤 면이 나와도 이길 수밖에 없는 자본불패의  불공정 게임이다. 때문에 공정한 시장의 룰을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구조조정에서 자본의 경영과 주주들의 부당한 이익을 사회적으로 환수하고 법적 처벌을 하는 것이 먼저 전제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정치적 목소리를 배제한다는 것은 정치적 표절이다. 노동자들이 줄곧 제기해왔던 것은 주주들과 재벌들의 배당잔치에 가려진 기업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기업의 위기를 땜빵하기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2차, 3차, 4차 하청 노동자들의 사다리는 점점더 촘촘해졌다. 이미 울산 거제를 중심으로 구조조정은 촘촘해진 사다리를 슬림하게 하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다. 노동의 제거는 노동의 몫과 목소리를 제거하는 이중의 배제로 나타났다.


그 동안의 구조조정을 구조조정 하겠다는 김종인표 구조조정에 여전히 노동의 자리는 없다. 배신의 경제는 다시 각색되어 재상연할 준비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동의 권리로 재구성되는 경제민주화는 총선 이후 지금의 문제다. 최저임금과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고용보장을 둘러싼 노동의 정치는 구조조정 시기에-경제가 어려우니까!-공세적으로 제기해야한다. 더민주와 국민의 당이 박근혜 정부에 대놓고 공세적 구조조정을 선포했듯이. 







* 이글은 오마이뉴스 5월 17일자 원고 편집 전 원본입니다. 



  1. ㅍㅍㅅㅅ, 4월 5일자,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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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 - 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記録를 통해 보는 어떤 반전 운동

 

가게모토 츠요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_연재를 시작하며.-한국에서 소개되지 못할 것 같은 일본의 운동에 관한 책들을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일본 책들이 번역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일본에서는 한국 책이 별로 번역되지 않는다. 한국에 관련된 역사책이나 사회학 책은 번역되지만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철학책 등은 아예 번역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서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는 상당히 많은 일본 책이 소개되어왔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일본어 책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일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현대사상이나 애니메이션, 문학 등은 일본어를 몰라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되지 못할 것 같은 매우 중요한 일본 책들이 있다. 그것은 아마 시장논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인 말인데 그런 책이야 말로 중요하다. 잘 팔리지 않은 책은 발행부수가 적은 만큼 독자에 대한 필자의 책임이 커진다. 잘 팔리는 글쓴이는 누군지 모르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만 단 한 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애 편지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글쓴이의 힘이 보다 많이 담겨져 있을까? 거칠게 말하면 발행부수가 적을수록 그 책은 연애편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책임감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잘 팔리지 않는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핵심을 잡을 수 있다. 일본에서도 잘 팔리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소개되지 않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책들을 소개해 보고 싶다는 것이 내 마음이다. 잘 팔리는 책이 가질 수 없는 운명적 만남을 통해서.

 

1. <이웃집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 싶은 책은 다음과 같다.

 

세키야 시게루, 사카모토 요시에 편, <이웃집의 탈주병이 있던 시대 쟈텍, 어떤 시민운동의 기록>, 사상의 과학사, 1998. (644) (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時代 - 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記録) 

 

 

이 책은 쟈텍(JATEC)이라는 운동의 기록이다. 쟈택이란 Japan Technical Committee의 약칭이다. 무엇을 했던 운동인가? 바로 베트남 전쟁에서 탈주한 미군 병사를 보호하며 제3국에 탈주시킨 운동이다. 쟈텍에 의해 제3국으로 탈출한 어떤 병사의 수기는 일본을 떠나는 순간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결정된 출발의 날, 나는 공항의 모든 곳을 어떤 문제도 없이 통과했습니다. 불안을 안고 출발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드디어 내 비행기 넘버가 불렸습니다. 밖으로 나와 비행기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내에 들어가기 전에 계단을 올라가 멈추었습니다. 뒤돌아보아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사히 기내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려고 온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쩐지 거기 있는 사람 모두가 나의 안전한 여행을 빌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위한 미리 알려진 지시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기장을 불러달라고 말하며, 정치 망명을 요구하며, 기내에서 나가기를 거부한다는 것. 비행기 내는 기술적으로는 프랑스 영토로 인정되어 기장에게는 마음만 있으면 망명을 허락할 권장이 있다고 합니다. 엔진이 파워를 내며, 비행기는 이륙의 장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며 지상에서 올라가면서 나의 마음도 비행기와 같이 뛰어 올라갔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떠난 것입니다."(370)

 

미군은 베트남 전쟁 때 일본의 기지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병사들은 다양한 이유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비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자텍은 어떤 이유든 탈주의 의사가 있는 병사를 보호했다. 물론 부대복귀를 시켜서 부대 내부에서 반전운동을 하는 것을 권장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탈주와 망명의 의사를 표시하면 실제로 탈주를 시키도록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병사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매우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도 있었다. 이 운동은 전쟁터에서 베트남인을 직접 죽이고 온 병사들을 바로 자기 집에서 비밀로 보호하면서 같이 지내던 일반 사람의 존재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한 기록집이기 때문에 탈주한 병사에 배신당하고 화를 낸 기억이나, 돈 문제로 탈주 병사로 싸운 이야기 등도 나온다. 어쨌든 어제까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해온 병사들과 함께 지낸다는 실천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실제로 했다는 일은 놀라운 것이다. "탈주병들은 일본 가정의 냉장고의 내부를 알게 된 최초의 외국인"(492)인 셈이다.

 

이 책이 98년에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쟈텍의 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은 긴 시간이 흘러서야 자기 운동 경험을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8년의 시점에도 아직 밝힐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면서 추후 봉인을 풀기로 한다고 한다.(495).


2. 법의 문제

 

베트남 전쟁 시기 일본에는 일본군 병사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의 상식에서 보면 탈주는 매우 큰 죄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일 안보조약에 인한 미군의 지위협정에서 미군 병사는 입국에 관해서 일본법의 적응 대상 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탈주 운동을 지원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리고 탈주병사들에게 전쟁에 되도록 참여하지 않기 위한 권리를 알리는 상담활동도 쟈텍이 수행한 중요한 운동 중 하나였다. 쟈텍이 병사들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알림으로, 그들이 제대를 신고하거나 부대 내부에서의 합법적 대항운동을 하는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활동가들이 미군 내의 법을 배우면서 일본군의 군율과 매우 다른 부분이 많아서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법과 관련해서 말하면 일본정부는 절대로 그들의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일본의 평화헌법을 알고 있었으며, 일본에서 살겠다는 의사를 제시한 경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백인, 흑인 병사와 함께 한국계 미국인 역시 탈주했다는 것은 지적해두어야 한다. 어떤 이는 한국전쟁 고아로 양자를 가서 미국에서 잘았다. 그는 전쟁에 나가며 일본에서 탈주했다. 그는 일본공산당, 조선총련, 쿠바대사관을 거쳐 쟈텍에 접속했다. 그는 무사히 유럽으로 출국했다. 탈주병 가운데에서는 한국군 병사도 있었다. 그는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다 마코토(小田実)라는 작가이자 당시 쟈텍의 활동에 관여하던 사람이 76년에 김일성을 만났을 때 김일성은 그 인물을 모른다고 했으며, 나중에 그런 사실은 없다는 답이 왔다고 한다.

 

어쨌든 이 운동은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나라의 대사관도 관여하기는 했는데, 결국 그런 국가들은 쟈텍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쟈텍은 정말 시민운동으로 이루어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간첩과 조직의 문제

 

이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간첩에 대한 대응 방식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미군은 쟈텍에 대해서 대응했다. 쟈텍은 제1차와 제2차로 나누어진다. 그 이유는 간첩 때문에 한 번 조직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쟈텍은 간첩을 그대로 받아 들었다. 쟈텍은 간첩 찾기를 하는 일이 스스로의 운동을 부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간첩 찾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간첩이 들어오면 그냥 조직자체를 무너져 버리자는 쟈텍의 생각은 비밀조직으로서의 전위주의와 아예 정반대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할 수 있던 까닭은 운동 내부에서의 간첩 찾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힘든 역사적 운동 경험에서 배운 운동으로 쟈텍의 간첩 대응법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파괴될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운동, 이 조직론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를 줄 것이다. 당시 제1차 자텍에서 운동하던 구리하라 유키오(栗原幸夫)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글의 맺음말로 이 인용문을 대신하겠다.

 

"스파이 존슨에 대해서는 그 때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생각납니다. 다른 곳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가 스파이였다는 것을 확신했었습니다. 그것을 츠르미 슌스케(鶴見俊輔)씨에게 말했을 때, 츠르미씨는 찌그러진 얼굴로 "동료 사이에서 그런 의심이 생기는 것은 운동이 무너질 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때의 그의 찌그러진 얼굴을 이 30년 동안 자주 생각나면서 왜 그랬을까? 하고 계속 생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략) 최근 저는 겨우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츠르미씨는 옳았다는 것입니다. 1차 자텍은 스파이 존슨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령 우리가 스파이의 침입에 대해서 방어태세를 취하고 모든 탈주병과 협력자에 대해서 의혹의 눈을 가졌으면 탈주병 원조 운동은 붕괴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지금 이렇게 운동 경험자가 가볍게 그 무렵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상황도 없었을 것입니다. 파괴될 것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 비밀이 없는 열린 운동을 소중하게 싶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일종의 전위주의입니다(예전의 저에게는 다분히 그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아니라 누구든지 교체할 수 있는 운동이야말로 필요합니다. 실제로 쟈텍은 그러한 운동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103)


Posted by a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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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수 2016.05.23 0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첨 듣는 운동이에요. 쟈텍 정신 만세!

  2. 나무북 2016.06.01 16: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일한번역 하는 사람입니다.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코너 이름...좀 찔리네요. 귀엽기도 하고 ㅎㅎ 한국 출판계에 일본책이 넘치지만 시장 논리 때문에 의외로 그 책들의 분야나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데 동의해요. 반대의 경우는 더하겠지요...그런 점에서 일단 코너의 취지에 격하게 공감하며! 얼마전 베헤이렌과 김동희, 김진수에 관한 칼럼을 읽었는데 마침 그 얘기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들르기 위해 북마크해뒀어요. 건필하시기를. :)

  3. 필자 2016.06.01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무북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사실 베헤이렌이나 감동희 김진수에 대해서는 기본적 정보는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해본 책은 탈주병 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고민이나 운동경험 등을 보여주는 것이라서 기본적인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 자체가 매우 생생한 책이지요. 운동에서 발행한 서식지 등 자료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군사 문화'를 상대화시키기 위해서도 군대에서의 '탈주'를 돕는 것이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운동은 매우 시사하는 바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알려지지 않은 운동에 대해서 조금씩 소개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시도는 일본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는 책에 대한 소개인 셈입니다. 일본에서 잘 알려진 책은 이미 한국에서 소개되었지요. 버려진 폐지 산더미 속에서 보물찾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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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TV 앞에 온가족이 모여 앉아 '닥본사'하곤 했던 <브이>나 <맥가이버>등의 외화시리즈를 미드열풍의 1세대, <X-file>류의 미드를 2세대급으로 본다해도, 드라마 <섹스앤더시티(SATC)>는 분명 미드의 역사상(?) 애매한 위치에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로스트>와 <프리즌브레이크>등의 미드가 탄생되며 지금과 같은 대규모의 미드팬이 양산되기 이전인 98년부터 ,SATC는 야금야금 여성팬들을 사로잡은 바 있습니다. 이후 때마침 한국에 불어닥친 '된장녀' 열풍은 "나 SATC 팬이야"를 커밍아웃하게하는데 큰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2011년인 지금까지도 주말 아침이면 여러 케이블 방송에서 마치 장수 고정프로그램인양 지난 에피소드들이 되풀이되어 방영되고 있는 것을 보자면, SATC의 보이지 않는 열풍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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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문화의 확산에는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영향이 컸다. 주인공들이 수다를 떨며 브런치를 먹는 모습은 하나의 로망이 되어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2000년대 중반 서울 이태원에서 시작된 브런치 카페 붐은 불과 몇년 사이 전국으로 확산되며 브런치 애호가들을 양산하고 있다.

(늦은 아침 '브런치' 외식 새 유행/ 매일신문 2010.10.2)


전세계적인 SATC 열풍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역시 SATC는 많은 사회적 현상의 배후로 지목된 바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드라마 <섹스앤더시티>를 비교적 올드한(?) 미드임에도 다시금 돌아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소위 사치재 소비의 메카로 일컫어지는 강남 특정 지역들에서 어느날 아침 눈을 뜨니 우후죽순으로 브런치 카페들이 생기게 된 현상, 말레이시아 무명 디자이너 브랜드였던 ‘지미추’나 ‘마놀로블라닉’ 같이 생소한 브랜드들이 대대적으로 압구정 모 백화점의 컬렉션 매장에 입점하게 된 사연 등의 뒷 이야기에는 모두 드라마 <섹스앤더시티>가 있었습니다. <시즌3>에서 샬롯이 트레이와의 결혼식 때 입은 웨딩드레스의 브랜드 ‘베라왕’은 고가의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단독매장까지 생겨 결혼을 앞둔 여성들의 선호상품 1위로 꼽히고 있고, 주인공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뉴욕 투어 버스는 여행사의 효자 상품이 된 지 오래입니다. 미국에서는 주인공 캐리 언니가 신고나온 '지미추' 구두를 신기위해 발을 작게 성형하는 수술 붐이 일고 있다는 믿기 힘든 소문이 나돌 정도 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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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C의 주인공들, 즉 뉴욕의 전문직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닮고자하는 사회적 현상은 비단 위에 언급한 소비재뿐만 아니라, 일부 젊은 여성 계층의 생활 패턴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늦은 아침, 동성의 친구들과 간단한 식사를 겸해 이루어지는 공연 관람 혹은 요가 클래스 수강이 더 이상 유한마담들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계층의 보편 문화처럼 당연시되는 것을 보면, 일부 계층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실연을 당한 동성의 친구를 위해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거나, 결혼 혹은 출산을 앞둔 친구를 위해 ‘샤워(미국식 파티 문화의 일종)를 했다’라는 인증샷들이 싸이월드 미니홈피나 블로그들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딱히 필요하지 않아도 명품 가방이나 구두를 구입하는 행위가 자신을 향한 위로나 투자가 될 수 있다고 자기개발서들은 앞다투어 쓰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소비에 대한 ‘안목’ 내지는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타인만이 진정한 친구라 여겨지는 현상들이 사회 곳곳에서 급속히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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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은 성적 욕망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명품과 패션에 대한 소비 욕망, 자기과시적 속물적 욕망도 드러낸다. 한마디로 ‘욕망하는 여자들’이다. 그간 욕망을 분출하기보다 억압받아온 여성 관객들은, 이처럼 더 이상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인 주인공들에게 열광했다. 그 욕망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 욕망을 숨기지 말고 당당하라. 이것이 ‘SATC’의 메시지다. 물론 그들의 욕망이 결국은 소비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SATC’는 소비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욕망하는 여자들의 '멘토' / 중앙일보 2010.6.10)

 

물론 드라마 <섹스앤더시티>는 뉴욕에 거주하는 4명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랑과 성을 다룬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섹스'는 그저 다양하고 광범위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그것이 아닌 '도시에서의 섹스'로 한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도시'란 소비재가 넘치는 도시, 그 속에서 자신을 수많은 익명의 타인들과 구별지어 도드라지게 해야만 비로소 살아 숨쉴 수 있는 '소비 도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드라마가  구두 수집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정한 캐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이유는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번 강의에서는 늘 갖고 싶은게 너무 많아 괴로운 우리 삶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필요를 양산해온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주변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소비행태들이 결국은 동일한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이를 넘어 진짜로 다양한 욕망들을 찾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 예정입니다.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되도록 일을 해도 월급봉투를 받는 족족 카드빚 독촉에 시달리고, 사도사도 항상 부족하기만 한 우리의 도시에서의 삶.. 그 속에서 상처받지 않고 고통받지 않으려면 과연 어떠한 욕망이 필요한 것일까요?

 

글/ 김은영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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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은 설두 중현 스님이 선사들의 화두 100개를 골라 송(頌)을 붙인 것(『설두 송고』)에다, 원오 극근 스님이 수시와 착어, 평창을 달아 만들어진 책이다. 수시는 각 ‘장’의 요지를 간결하게 요약해서 보여주는 부분이고, 착어는 화두나 송의 구절마다 논평을 한 것이며, 평창은 화두와 송에 대한 설명이다. 통상 벽암록에 대한 해설을 자처하는 책들은 거기서 다루는 화두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건 『벽암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긴 하지만, 원오 스님이 쓴 수시나 착어, 평창을 보지 않고선 『벽암록』이란 책을 보았다고 하긴 어렵다.

내가 『벽암록』에 대해 가진 인상은 여러 가지지만 모두 극단적이다. 그 책은 “송대 최고의 문학작품”이라고들 하는 평처럼,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아름다운 책이었다. 또한 가장 심오한 책이며, 가장 고준하며, 가장 유머러스한 책이었다. 동시에 그 책은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황당한 책이었다. 황당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쪽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언가 피할 수 없는 강한 감응을 주는, 그래서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너무도 강한 감동 내지 감응을 주는 책--이런 책이 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이런 식이다.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주의 모습입니까?”([착어]하북이라 해도, 하남이라 해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부드러운 진흙 속에 가시가 있구나. 하남에 있지 않고 바로 하북에 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열렸구나. 욕하려거든 해라. 새주둥이라도 빌려주마. 침 뱉으려면 뱉어라. 침이 모자라면 물까지 퍼다 줄께. 있는 그대로 드러난 공안이로다. 알겠는가?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여기서 앞의 스님은 조주스님에 대해 물었는데, 조주는 조주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웬 썰렁한 농담?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는 불법을 파멸할 뿐이다. 마치 물고기 눈알을 구슬에 비하는 것처럼, 닮기는 닮았겠지만 같지는 않다.” 질문에는 원오의 착어대로 가시가 있고, 조주는 이 가시를 품은 이 질문을 슬며시 받아넘기며 외통수를 날린 것이다. 조주 자신의 본래면목이 무언지 묻는 질문에, “있는 그대로”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시피 조주성(城)의 네 문에 대한 것일 뿐이다. 이 대답이 지엽말단이나 동문서답이라고 생각할까 싶은 노파심에 원오는 덧붙인다. “욕하려거든 해라. 새주둥이라도 빌려주마”하고. 그러나 “있는 그대로 드러난 공안(화두)”라고 하면서도 다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주장자로 후려친다. 아니, 어쩌라는 거야!

그런데 바로 그거다. 어쩔 도리가 없게 만드는 것. 이런 식으로 선사들의 말들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깨주고, 내가 부여잡고 있는 것을 뽑아버린다. 추리하고 생각하는 모든 근거들, 모든 분별의 근거를 뭉둥이로 후려치고 고함소리로 깨버린다. 혹은 조주나 원오처럼 우주적인 스케일의 유머로 날려버린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은산철벽 앞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떠민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그 기준이 무언가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근거나 기준이 되는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어째서 옳은 것일까? 그것의 근거 역시 내가 옳다고 믿는 다른 근거 때문이다. 이렇게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그 출발점은 역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나의 생각, 나의 믿음이 내가 옳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선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내가 옳다고, 아니 좀더 격하게 표현하면, 나만이 옳다고 하는 믿음.

부처가 말하는 ‘정견(正見)’이란 내 견해를 올바르게 세우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생각에 귀기울이고, 다른 판단, 다른 가치에 마음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무엇이 옳은가를 내 기준을 떠나서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무엇이 옳은가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상’을 버리는 것, 혹은 ‘무아(無我)’가 지혜(般若)를 뜻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자신에게 묻는 학인들에게 그들이 옳다고 믿는 모든 교의나 견해, 근거를 깨주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가령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을 땐 “없다”고 대답하고, 없다고 믿는 사람이 물을 땐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이는 묻고 대답하는 말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는 노파심이 아마도 원오로 하여금 『벽암록』을 쓰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가장 근본이 되는 성스런 진리를 묻는 양무제의 물음에 “텅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 답한 달마의 대답에다가 “꽤 기특한 줄 알았더니만, 화살이 저 멀리 신라땅으로 날아가 버렸구나. 매우 명백하다”면서 착어를 붙이고 있는 것일 게다(물론 다시 “명백하다”고 덧붙이지만). 이런 점에서 『벽암록』은 그 어느 책보다도 노파심이 가득한 책이다.

이 책에선 어느 하나의 확실한 근거나 교의에 안주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경전 안에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고, 경전에 기대어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의 말에 기대는 것조차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임제는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가라”고 했고, 조주는 “부처가 있는 곳도 그냥 지나가라. 부처가 없는 곳은 얼른 지나가라”고 했다. 사실 경전이나 훌륭한 책들에 안주하려 할 때, 그 책들이 거대한 장애가 되고 위대한 저자들이 독단의 원천이 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종지를 보고 문자를 넘나들지 못하면 문자는 어느새 죽은 문자(死句)가 되고, 가르침은 죽음의 소식이 된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불법을 묻는 질문에 손가락 하나를 펴는 것으로 대답하던 구지선사는, 자기 대신 손가락을 들어 말하던 동승의 손가락을 무참하게 잘라버린다. 그리곤 불법이 무언지 다시 묻는다. 무심코 없는 손가락을 들어 말하려는 순간 그 동승은 깨달음을 얻는다. 『벽암록』이 수많은 선사들의 말들을 다시 전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던 그들에게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하고 소리치고 방망이를 날리면서도, 그 종지가 드러나는 지점을 슬며시 알려주는 것은, 그 말들을 죽은 문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구(活句)로 만들고 싶은 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선가(禪家) 최고의 보물’로 만든 이유였을 터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아무 맛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감을 잡을 수 없었던 저 선사들의 세계로 무지한 우리 중생들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무언가 강밀한 힘을 방사하며 험준한 절벽으로 우리를 잡아당긴다. 이해할 순 없지만 강한 감응을 주는 책이란 말을 실감한다면, 좋든 싫든 이미 그 힘의 자장 안에 들어간 것이다. 심지어 이 책은 그 철벽을 오르는 밧줄이 되어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이 책은 스스로 자기가 제거하려던 것이 되고 마는 역설적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원오의 제자였던 대혜 종고는 ‘종문의 보물’이라는 스승의 이 책을 불살라버린다. 이, 이런 과격한···-.-;; 물론 다행히(!) 다른 필사본이 남아서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로 하여금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응’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벽암록』은 읽고 이해하려 해선 안되는 책, 선가의 말로 ‘알음알이’로 헤아려선 안되는 책이다. 이해할 수 없는 감응 속에서, 이해할 수 없음에서 나오는 의문과 의정(疑情)만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응을 증폭시키고 응축시켜 ‘아상’을 넘어서는 에너지로 변환시켜야 하는 책인 것이다.

어느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조주의 돌다리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막상 와보니 외나무다리뿐이군요.” “그대는 외나무 다리만 볼 뿐, 돌다리는 보지 못하는구먼.” “어떤 것이 돌다리인가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말해보라. 그대는 어느 다리를 건너고 있는가?


글 / 이진경(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책 속으로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쇠 가시로다. 천하의 납승들이 뛰어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동산스님이 말했다.
“삼(麻) 세 근이다.”
---분명히 떨어진 짚신이다. 괴목나무를 가리켜 (악담을 하고는) 버드나무를 꾸짖는 꼴이구먼. 저울질을 하는구나.

이 공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이는 참으로 씹기가 어려워 입을 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담박하여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답변을 제법 많이 했다. 어떤 이는 “대웅전 안에 계신 분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삼십이상을 갖춘 분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장림산 밑에 있는 대나무 지팡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삼 세 근”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옛사람의 혓바닥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말저말 둘러대어 “동산스님이 그때에 창고에서 삼을 저울질 하는데 어떤 스님이 이를 물었기에 이렇게 대답했다”하기도 하고, “동산스님이 동문서답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또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었기에 동산스님이 우회해서 대답했다”하기도 한다. 더 썩어빠진 놈들은 “이 삼 세 근이 바로 부처다”하니, 전혀 관계가 없다 하겠다.

너희들이 만일 이처럼 동산스님의 말을 더듬거렸다가는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참구하여도 꿈에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말이란 도를 담는 그릇인데 옛사람의 뜻은 전혀 모르고 다만 말만 따지니 어찌 핵심이 있겠는가? 듣지 못하였는가? 옛사람의 “도란 본디 말이 아니나 말로 말미암아 도가 나타나는 것이니, 도를 깨닫고 나서는 곧 말을 잊어야 한다”라는 말을.(하략)(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벽암록』, (상), 장경각)



추천도서

원오 극근 지음, 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역, 『벽암록』, (상)(중)(하), 장경각(『벽암록』의 완역본. 번역이 아주 훌륭하다).
원오 극근, 지음, 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역, 『원오심요』, (상)(하), 장경각(원오스님의 편지 모음집).
만송 지음, 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역, 『종용록』, (상)(중)(하), 장경각(『벽암록』과 동일한 형식으로 씌어진 책).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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