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정치철학 교본

 

박준영(nomadia)/수유너머104 회원

 

 

 

오늘 산책할 논문은 바로 아래  논문입니다. 

 

만만치 않은 난이도를 가진 글입니다. 같이 슬슬 접근해 봅시다.

 

 

지난호에 소개한 논문과 동일한 저널인 [들뢰즈 연구] 2017년 11월에 실린 논문입니다(현재는 [들뢰즈-가타리 연구]로 바뀌었지요). 이 저널은 주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에 대한 연구논문을 싣지요. 에딘버러 대학에 소재한 들뢰즈 연구학회에서 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논문은 텍스트 전체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 논문 제목을 번역해 보면,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제목에서 뭔가 감이 오시나요? 전혀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목부터가 이렇게 범상치 않아서 이걸 쓴 사람은 어떻게 생겨 먹었나 싶어 구글링을 해봤습니다.

 

육-후이(Yuk-Hui)

 

그런데 공저자인 루이스 모렐(Louis Morelle)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군요. 다만 파리 1 대학의 대학원생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육-후이에 대해서만 설명해보도록 할게요. 이 분에 대한 오피셜한 정보 원문은 http://www.digitalmilieu.net/yuk/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분 현재 소속은 독일 루네부르그에 소재한 루파나 대학이에요. 여기서 하빌리타치온 과정을 밟은 것으로 나옵니다. 2018년 여름에 과정을 마쳤다는군요. 아, 하빌리타치온 과정이란 우리나라 대학에는 없는 코스인데요, 박사를 졸업하고 '강사' 자격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과정을 거쳐야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 대학을 두 번 다녔는데, 한 번은 홍콩대에서 컴퓨터를 전공했고, 또 한 번은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어요. 역시 21세기의 철학은 공학적 사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 분이 주로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기술철학'이라는 파트입니다. 오늘 소개할 논문도 그 방면 이야기가 정치철학과 결합되는 글이고요.

 

책이 한 권 출판되어 있는데 아주 읽어 보고 싶게 만듭니다. 이 사람의 박사논문을 출간한 것이거든요. 게다가 기술철학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가 서문을 써 주었네요. 바로 이 책입니다.

 

[디지털 대상들의 실존에 대하여], 육 후이의 책

 

우리가 살펴볼 논문 제목에 두 사람의 철학자가 나옵니다. 시몽동과 들뢰즈. 그러고 보니 제가 시몽동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들뢰즈에 대한 소개는 다음 제 글을 참조하시길.-><낯선 타인과 춤추기>

 

낯선 타인과 춤추기

- 질 들뢰즈와 미셸 투르니에 | 얼마전 제가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대한 글(<스페란차에서의 절대고독>)을 쓰면서 약속했던 대로 들뢰즈의 아주 '아름다운 논문' 하나를 살펴보도록 할게요. 들뢰즈란 철학자가 워낙 방대한 체계를 설파하고, 난해한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이라 이걸 쉽게 설명하기가 녹록치 않겠지만, 일단 시작해 보겠습니다. 들뢰즈, 넌 누구냐?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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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 시몽동(1924-1989)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은 물론 철학자입니다. 태어난 곳은 생-에티엔이라는 곳이고요. 이 분은 철학 중에서도 '기술철학'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기계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지요. 기계철학은 들뢰즈 이후 현대철학의 핫테마라고 할 수 있는 분과입니다. 이제 철학을 하려면, 공학과 물리학 정도(덤으로 생물학)는 같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 되겠습니다.  

 

시몽동은 프랑스의 수재들만 간다는 '에꼴 노르말 수프리외', 즉 '고등사범학교'와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요. 스승들도 쟁쟁합니다. 조르쥬 캉길렘(이 분은 과학철학자이고 들뢰즈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마르시알 게루(스피노자 철학의 권위자입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유명한 현상학자이지요)가 그들입니다. 1958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소르본과 푸아티에, 파리 4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일반 심리학과 기술공학 실험실>을 설립하여 연구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주요 저서는 박사학위 논문([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인데요 이 논문은 처음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출판됩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논문 전체가 온전히 출간된 것은 2005년이고, 밀롱(Millon)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2013년에 개정판이 나왔지요). 그리고 부논문도 아주 중요합니다. 프랑스에서는 대체로 이렇게 주논문과 부논문 2개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씁니다. 부논문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입니다. 시몽동의 주논문과 부논문 둘 다 한국어 번역판이 있어요(번역자들의 노고에 박수를!)

 

시몽동 철학의 핵심 개념은 '개체화'입니다. 이 개념만을 거의 평생 물고 늘어져서, 과학철학, 기술철학, 기계철학을 일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존재론을 전개했지요. 이런 시도는 당대의 들뢰즈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후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정치철학, 브라이언 마수미와 베르나르 스티글러와 같은 과학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시몽동과의 대담입니다. 영어자막이 있으니 한 번 보시면 좋을 듯해서 올립니다.

 

자, 그럼 시몽동과 들뢰즈에 대해 대강 알아봤으니 논문으로 들어갑시다. 우선 목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논문제목: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
저자: 육 후이(루파나 대학), 루이스 모렐(파리 1 대학)

- 논문 초록
- 키워드: 강도, 가속주의, 개체화, 기술, 시몽동, 들뢰즈

I. 존재론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강도
II. 들뢰즈의 '가속': 강도에서 변조로
III. 또 다른 '가속': 내적 공명으로서의 강도
IV. 변조, 도래할 강도의 정치
V. 결론

 

논문초록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뭐, 이런 도입부는 거의 정형화되어 있어요. 논문의 목적을 밝히는 것이지요.

 

이 논문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사유에서 속도와 강도의 문제를 명료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속 개념들을 살펴보면 아마 철학 전공자들도 다소 낯설 것 같습니다. '속도'와 '강도'라는 개념이 그렇지요. 사실 이 개념은 전통적인 철학 개념이라기보다는 과학 개념에 가깝지요? 전공자들이라 해도 과학철학이나 기술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낯설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말 뒤에 후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이는 가속주의(accelerationism)와 그것의 정치학에 대한 논쟁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가속주의'가 뭘까요?

찾아본 후 꽤 긴 글을 썼는데, 여기서는 다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아 다른 페이지에 써 놓았습니다-><속도를 더 내, 지옥을 건널 때까지!>

 

 

속도를 더 내, 지옥을 건널 때까지!

- '가속주의'와 기술정치철학 | 노마가 최근에 읽은 논문이 있는데요, 바로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육-후이, 루이스 모렐)입니다. 이 논문은 매우 흥미로운 최근의 철학 경향과 그것의 정치철학적 응용에 관해 논하고 있지요. 그 경향을 '가속주의'라고 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가속주의는 현존하는 가장 진보적인 정치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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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하나 문제가 있네요. 저기 논문의 목적을 밝혀 놓은 부분에 보이는 '강도'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이 논문 안에 한 장을 할애해서 설명이 되고 있어요. 그러니 이건 찬찬히 따라가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아무튼 저자들은 목적을 밝힌 후에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가속주의 정치와 더불어 강도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속도에 대한 집착 없이 어떻게 강도의 정치학을 사유할 수 있는가?

 

우선 저자들은 시몽동의 이론에서 개체화(individuation)는 강도에 대한 논의의 핵심에 자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가 보기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시몽동은 이 한 개념을 가지고 평생 철학한 사람이니까요.

 

이 개념은 생성과 존재의 조화를 목표로 합니다. 쉽게 말해서 개체화라는 개념은 여기 내가 '있다'라는 사실과 내가 '움직인다'라는 두 사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몽동은 이 개념에 현대의 기술과 과학적 성과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철학을 구사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개체화를 좀 더 설명해 보지요.  개체화란 처음부터 끝까지 준안정(metastable)적인 상태로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개체'는 안정된 '결과'라면 개체화는 계속되는 요동과 불일치로 이루어지는 '과정'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이건 사실 우리가 잘 지각하지 못하는 측면을 시몽동이 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 여기 있어요~'(존재)라고 말하지 '나 여기 있게 되어요~'(생성)라고 말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내가 여기 붙박여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있다는 사실(존재)이 아니라, 늘상, 시시각각 변하면서, 최소한 눈이라도 깜박이면서 뭔가가 '되어 간다'(생성)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만물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정'과 '준안정'은 각각 얌전한 물과 펄펄 끓는 물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다시 말해 개체화는 펄펄 끊은 물과 같은 과정중에 있다는 것이지요.

 

시몽동에게는 '개체화'라는 개념과 더불어 변환(transduction)이라는 개념도 중요합니다. '변환'은 본래 물리적으로는 에너지의 전환을 의미하고 생물학적으로는 유전형질의 변화를 의미하지요. 그런데 시몽동은 이 두 의미를 포괄하면서, '논리적 의미'로도 이 말을 사용합니다. 즉 변환은 연역과 귀납과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저자들의 말을 직접 들어 보시죠.

 

전통적 논리학인 귀납과 연역은 명제들의 추론에 대해 작동하지만, 변환은 질문에 속해 있는 존재의 구조를 변형시키도록 이끈다.

 

다음에 오는 설명을 들으면 이 말에 좀 수긍이 갑니다. 

 

변환이란 긴장들과 불일치들로부터 초래되는 강도에 의해 지배되며 조건 지어진다. 변환은 정보라는 측면에서 형태를 구성하며, 강도라는 측면에서 정보를 구성한다. 또는 이것은 불균등성(disparation)이기도 하다. 불균등성은 개체화의 조건이며, 물리적, 생물학적, 심리적 존재자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환이라는 것이 '정보'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과정'이라는 의미로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유전자들은 '정보'의 덩어리들이지요. 그 정보들을 교환하는 것이 유전자의 일입니다. 이는 컴퓨터와 같은 인공지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물리적 차원에서는 '결정화' 작용(물이 얼음이 되는 과정이 대표적인 사례이지요)에서 입자들 간에 '형태'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일정한 기하학적 결정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강도'의 작용이 없으면 불가능해집니다.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변환 작용은 그 오가는 작용에 필요한 '힘'을 강도로부터 얻습니다. 정보가 형태를 구성하고, 또 그 정보는 존재하는 것들의 '강도'가 구성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것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구성되느냐고 물을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이쪽과 저쪽의 '불균등성'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변환은 일종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흐르려면 양쪽 간에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즉 높낮이, 에너지의 차이 등등이 말이지요.

 

변환은 폭포처럼 전달되는 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점은 어떤 한 항이 '질문'을 제기할 때 응답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지요.

 

강도는 변환이 수행되는 그 '차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한 항에서 다른 항으로 움직이면서 변환되는 과정은 '질문-응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래'라는 정보를 '위'에 주면(질문하면), '위'는 '아래'에 응답하면서 강도를 선사하는 것이지요. 생명체들의 변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체들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유전자라는 미시 수준과 신체라는 거시 수준 모두에서 환경에 질문을 던지고, 환경은 생명체에 '강도'를 선사하면서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불균등성'이 해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유지든, 폭포의 흐름이든 '차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흐름이 이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시몽동뿐 아니라 들뢰즈에게서도 개체화는 중요한 개념인데요, 이것은 강도로부터 생산되는 활동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를 참조하다 보면, 개체화 과정이 '차이'와 결정적인 관련을 가지고, 또한 이 차이는 '강도'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몽동에게서는 '차이'보다 '불균등성' 개념이 개체화를 설명하는데 관건인데, 들뢰즈에게서는 '차이'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둘 다 비슷해 보이는데, 좀 다른 점은, 시몽동이 불균등성을 통해 강도를 설명한다면, 들뢰즈는 불균등성의 핵심이 차이이고, 이 차이가 곧 강도라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철학사적으로 봤을 때도 이 둘이 겨냥하는 지점은 다른데요, 시몽동은 아주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비판하고자 하지만, 들뢰즈의 경우에는 칸트의 감각과 지성 개념을 비판하고자 하지요. 칸트에 반대하면서 들뢰즈는 지각 과정(사물을 감각하고 개념화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은 순수 직관(시공간에 대한 직관)에 의해 지배되지도 않고, 지성의 범주(양. 질. 관계과 같은 보편적 개념 도구)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지각 과정은 감각의 강도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폭포의 물 알갱이 하나하나처럼 지각과 대상이 서로 부딪히면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감각적 강도 이전의 지배 주체가 없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표상', 범주라는 '표상' 이전의 상황이에요. 표상은 지각 과정, 즉 강도적 감각 과정 이후에 구성되는 것이지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서 자주 등장하는 '강도'란 무엇일까요? 논문 저자들도 인용하고 있고, 많은 철학자들이 흔히 예시로 드는 것은 '온도'입니다. '강도'는 온도를 측정하면서 양으로 표시됩니다. 이를테면 31도 C와 같은 것이 있지요. 그런데 이 31도 C는 그 자체로 특이성(단독성, singularity)입니다. 즉 그것이 21+10도 C로 분해될 수 있다거나, 1X31도 C로 결합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31도 C는 그 자체 기온의 '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강도는 해당 존재자의 특이성을 지시하는 것이며, 다수의 단위들로 분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어떤 것의 속도와 가속도도 강도라고 봅니다. 즉 속도든 가속도든 단위로 쪼갤 수 없는 특이성의 연속체라고 보는 것이지요. 위 연속촬영의 길게 이어진 불빛처럼 말이지요.

 

들뢰즈에 따르면 이와 같은 강도의 특성이 속도와 가속도에도 적용됩니다. 속도와 가속도는 각각의 시간에 본성적인 변화 없이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즉 이 두 물리량은 '연속되는 특이성'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칸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들뢰즈는 이를 원용합니다. 하지만 칸트의 논의를 더 밀어붙이게 되지요.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시몽동의 철학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강도'를 '양'이라는 칸트적 범주뿐 아니라, '관계'와 '양상'이라는 시몽동의 동력학적 범주에도 연결시키는 것이지요.  

 

따라서 들뢰즈는 강도라는 개념을 칸트적인 초월적 층위에서 내재성의 층위로 되가져 옵니다. 즉 표상의 논리에서 강도의 논리로 말이지요. 표상의 논리를 '초월적'으로 강도의 논리를 '내재적'으로 옮기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이지요? 이것은 좀 전에 예를 든 온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온도는 초월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내재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어요. 초월적으로 표현된 온도는 '31도 C'라는 단순한 숫자를 측정 절댓값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재적으로 표현된 온도는 같은 수치를 절댓값이 아니라 상대값으로 치환하는 것이지요. 31도 C 안에 존재하는 여러 온도의 느낌들, 또는 31도라는 기준값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잔여값들, 30. 9999999... 도 C, 또는 31.00000000001.... 도 C 같은 것들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2장으로 와서 들뢰즈의 '가속' 개념이 '강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논지를 전개합니다. 강도와 가속이 기본적으로는 개체화 안에서 상호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도란 구조적 변환으로 향해가기 때문이다. 여기 비로소 강도와 연관하여 시몽동과 들뢰즈의 기획 사이에 주목할만한 분기점이 형성된다. 시몽동의 경우 강도란 유적 과정(generic process)으로서의 '개체화'와 동일시되는 반면, 들뢰즈의 경우 강도란 '차이로서의 존재'라는 이름을 획득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들은 들뢰즈의 존재론을 정치철학과 접목시키고자 합니다.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행복한 만남이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선 저자들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차이가 위와 같다는 것을 제시한 다음, 강도 개념이 역사 정치적 맥락에서 변형된다고 봅니다. 그 변형된 개념이 '흐름들'과 '욕망'이라는 것이지요. 이 개념으로의 변형과정은 가타리(Felix Guattari)와의 공저인 [앙띠 오이디푸스]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논문 저자들이 인용하는 [앙띠 오이디푸스]의 해당 부분을 옮겨 볼게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두 사람은 [앙띠 오이디푸스], [천의 고원], [카프카-소수문학을 위하여],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공동 사유를 진행했습니다.

 

어떤 혁명적 길이 있을까? 하나라도 있을까? 사미르 아민이 제3 세계 나라들에 충고하듯, 세계시장에서 파시스트적 <경제해법>이라는 기묘한 갱신 속으로 퇴행하는 것?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말하자면 시장의 운동,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더욱더 멀리 가는 것? 왜냐하면 아마도 고도로 분열적인 흐름들의 이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보면, 흐름들은 아직 충분히 탈영토화 되지도, 탈코드화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퇴행하지 않고, 더 멀리 가야 한다. 니체가 말했듯, <과정을 가속하라.> 사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p. 406).
# # 페이지수는 김재인 2014 번역판입니다. 번역은 일부 수정했어요).

 

이 구절은 '가속 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특히 '과정을 가속하라'라는 말은 이들의 슬로건이기도 하지요. 들뢰즈와 가타리, 혹은 니체의 이 슬로건을 위에 언급한 단어들과 더불어 다르게 해석하면, '흐름'과 '욕망'을 가속하라, 또는 '기존의 흐름과 욕망을 탈영토화 하라'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속주의자들과 저자들은 이 부분에서 존재론이 정치철학으로 변형되는 어떤 '문턱'을 보는 것이지요.

 

저자들에 따르면, 바로 [앙띠 오이디푸스]야말로 '존재론의 정치철학'이라는 가장 첨예한 철학의 분과를 드러내는 중요한 저작이 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란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서 두 가지 항목에 따라 형성됩니다. 하나는 바로 '욕망'이지요. 이것은 '정치화된 강도'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근원적인 불안정성'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요? 쉽게 말해 자본주의 체계라는 것은 끊임없는 불안정성 하에 진행, 발전, 퇴행되는데(공황이나, 노사갈등, 전쟁 등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촉진시키거나 저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또 이 욕망의 흐름에 촉발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불안정성과 욕망의 피드백이 자본주의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소비심리를 구성하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고등학교 경제나 사회문화 시간에 배우는'이스털린 역설'이나 '트레드밀 효과'를 예로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노마가 가지고 있는 [앙띠 오이디푸스] 두 개의 판본입니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욕망의 흐름과 불안정성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자들과 들뢰즈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한계는 곧장 사건을 향해 가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혁명적 사건'일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들뢰즈의 개념은 [천의 고원]이라는 저작에 와서는 '배치'(assemblage)라는 것으로 바뀌는데요, 사실은 그 이전에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라는 짧은 논문에서 이에 관한 논의가 이미 진행되었다고 봅니다. 이 짧은 논문은 들뢰즈가 푸코의 '규율사회'(또는 '훈육사회')에서 '주권사회'로의 이행이라는 테제를 이어받아 '통제사회'라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기술합니다. 이에 따르면 통제사회의 특성은 '돌연변이 변형'(mutation)입니다.

 

질 들뢰즈,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 영역문은 아래에 걸어놓았어요.

 

들뢰즈의 통제사회는 푸코의 통치체제가 돌연변이 변형을 거쳐 전 사회적 기제로 확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권력은 더 이상 폐쇄된 공간(푸코의 경우 학교, 감옥, 병원, 공장)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개인에 대해 외적으로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열린 공간에서 개인들 각각의 내재성의 장 안으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들뢰즈는 이를 '변조'(modulation)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바로 '강도' 개념과 연관이 깊습니다. 즉 통제사회에서 내재적인 권력화 과정은 강도를 통해 변조된다는 것이지요. 이때 규율은 개인들 각각의 자율적 과정 안에서 내면화됩니다. 이때 강도는 욕망이기도 하고, 심리적인 권력이기도 하며, 사회적 관계며, 심지어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것들 모두가 규율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규율'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규율입니다. 즉 통제사회에서의 개체화는 바로 규율의 내면화며 강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와 시몽동이 정치철학에서 만나는 지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통제사회를 하나의 기계(machine)로 묘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시몽동의 개체화에 관한 저작들에서 가져온 이 '기계' 개념은 후기 들뢰즈 철학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누리게 됩니다. 이는 또한 가타리의 독립적인 저작들에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이지요. 이것은 단순히 공학적인 기계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의미로 쓰이지요. 그것을 정의 내리면 이질적인 요소들의 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개념인 '아상블라쥬'(배치)는 본래 예술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위) 아상블라쥬 아트의 예시,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어떤 형상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요소들'이란 성적인 것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하며, 경제적이기도 한 요소들입니다. 논문 저자들은 여기서부터는 다시 들뢰즈와 시몽동이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시몽동에게 개체화는 다만 발생론적으로 중립화되어 있지만, 들뢰즈에게서 개체화는 그것 자체가 '문제'며, 사회 정치적 평면에서 펼쳐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라는 이 짧은 논문이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이 논문에서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정치철학, 그리고 기술철학의 구분이 불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실제로 기계에 관한 이러한 개념 규정이 유의미한 것은 현대사회, 특히  포스트-포디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기술적 과정이 인간의 욕망, 그리고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AI에 관한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거기 연결되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욕망, 직업에 관한 욕망이 변조되고, 정치적으로 그 기술을 통제하고자 하는 각축이 일어나며, 그에 관한 윤리학이 발전하게 되는 식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매우 빠르게 발생합니다.

 

시몽동은 이 변조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이를 그는 '공명'(resonance) 또는 개체화와 관련하여 '내적 공명'(internal resonance)라고 칭합니다. 이 내적 공명을 개체화와 연관해서 보면, 어떠한 준안정상태(matastable)로 진입하기 전의 개체화 과정, 변형과정에서 강도를 특징짓는 용어가 됩니다. 그런데 시몽동에 따르면 인간은 산업화 시기에 '기술적 개체'로서의 그 중심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소외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시몽동은 어떤 인간론적인 기술 윤리로 퇴행하지 않고, 논의를 더 진행시킵니다. 그는 산업화가 더 진행되면서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노예대 노예의 관계로 들어설 것이라고 예견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어떠한 혁명적 정치학의 사유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들은 주장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고, 그것을 가속시키는 것이 바로 이 상황을 돌파하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또 다른 이론가인 토스카노(Alberto Toscano)를 인용합니다. 토스카노의 테제는 '혁명적 가능성으로서의 불균등성의 변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스카노는 시몽동의 그룹(group) 개념을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여, 혁명적 잠재성으로서의 그룹의 구성에 대해 논합니다. 다시 말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혁신하게 될 가능성은 잠재적 힘들을 변조해냄으로써 증폭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혁명의 개체화'라는 토스카노의 또 다른 테제는 바로 이러한 변조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개체화'라는 것이 '개별화'와는 아주 다르다는 점입니다. 개별화는 원자화와 같이 따로따로 떨어진 추상적 실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재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에 불과하지요. 개체화는 사람과 사람, 동물과 동물, 또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람과 기계 간의 집합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개인에게 있어서는 세포와 세포들의 집합화이지요. 이를 토스카노는 '그룹'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티글러에게 비개체화란 개체화를 달성하기 힘들게 하는, 다른 말로 해서 '다른 변조'를 생산하기 힘들게 하는 장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장애물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개체화하기 위한 강도를 상실할 때 더 두드러집니다. 이는 통제불능 상태로 이끌고 끝내는 '죽음을 향한 가속'이 되고 말지요. 예를 들면 이런저런 유형의 기술 중독들(게임중독,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들)이 이러한 것에 해당된다고 보입니다.

 

저자들은 논문의 말미에 들뢰즈와 시몽동을 포함하여 언급된 네 명의 철학자들(토스카노와 스티글러 까지)은 기술이 그 목적이 확정될 수 없는 방향으로 강도들을 이끌고 증폭하는 기능을 제공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고 논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기술발전이 지속적으로 가속된다면, 그것은 기계들과 서로를 횡단하는 개체들 사이에 어떤 내적 공명을 찾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이를 토스카노의 용어를 빌려 '발명의 정치'라고 규정합니다. 

 

'발명의 정치'란 어떤 특이점을 향해 가는 기술의 가속에 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혁명적 기회를 위해 그러한 기술을 이용하는 것만도 아니지요. 발명의 정치란 그룹들의 잠재력을 공명 시키고 증폭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을 발명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적 대상들이 그 자체로 개체 '횡단 개체적 관계', 즉 개체를 횡단하여 관계 맺는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저항방식(이를테면 오픈소스 운동이나, 탈중심화 운동 등등)은 기술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여전히 구닥다리 질료-형상론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운동들은 기존의 전형들을 반복하기만 할 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저항'의 가능성을 재구성하기를 원한다면, '혁신의 정치'(politics of innovation), 즉 시장과 통제 정치에 의해 광범위하게 조정되는 그러한 정치가 아니라 발명의 정치를 구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이렇게 토스카노의 개념을 새로운 정치의 슬로건으로 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발명의 정치는 아마도 기존의 저항방식을 탈피하되, 자족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에 잘 적응하고, 그것을 매개로 삼아 전략과 전술을 발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저항의 예로 '스노든'과 '어노니머스'가 떠올랐습니다. 앞사람은 자신의 기술자산을 활용하여 기존 권력의 정보를 누설함으로써 체제를 뒤흔들었고, 후자는 시시때때로 출몰하면서 해킹을 활용하여 같은 효과를 달성하는 집합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러한 예는 다소 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1. 들뢰즈의 '강도'와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가속주의 정치철학을 설명할 길을 열어준다.

2. 들뢰즈의 경우 '강도'는 '욕망의 흐름' 그리고 '배치' 그리고 '통제사회'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정치철학과 만난다.

3. 시몽동의 경우 '강도'는 '개체화', '변조'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정치철학과의 만남을 준비한다.

4. 이 둘을 보다 구체화하는 철학자는 스티글러와 토스카노로서, 이들은 각각 '비개체화', '발명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들뢰즈와 시몽동을 더욱 발전시킨다.

5. 이들을 하나로 엮는 정치철학의 테제는 '가속'과 '가속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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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동과 빅 데이터 #2

Simon Mills(De Montfort University), Simondon and Big Data, Journal of Media and Communication vol. 6, "Simondon: Media and Technics"  

 








번역: 최유미 (수유너머 N 회원) 

 




 

개방 시스템들과 과잉목적(Open systems and Hypertelia)

 

 

<사회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빅데이터와 관련된 주장들의 신념이다. 과연 그것만이 최선일까?>

 

 

 

    시몽동의 관점에서 빅데이터, 특히 사회물리학과 관련해서 고안된 주장들을 볼때, 이들의 주장에는 논의 중인 시스템들의 개방성의 정도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다는 점이 첫번째 논평이다. 펜트랜드(Pentland, 2012; 2014, p. 203)는 빅데이터의 잠재력에 대해서 낙관적인데, 그는 빅데이터의 잠재력은 사회 효율성, 운영 효율성과 회복력을 갖춘 설계를 통해서 안전성이 개선될 수 있는 구체화된 기술-사회 메커니즘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기술 사회를 만드는 시스템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빅데이터의 약속이다. 당신이 그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 당신은 더 나은 시스템들을 만들 수 있다. 그 약속은 멜트-다운 되지 않는 금융 시스템들, 무기력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정부들, 제대로 작동하는 헬스 시스템들, 등등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제안에 있어서 한 가지 위험한 점은, 그것이 과잉 목적적인 사회 구조들의 개발을 노린다는 점이다. 이것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몽동의 존재론에서 개체화가 수행하는 중심적 역할에 대해 간략히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현상들의 광범위한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실재론자의 형이상학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시몽동은, 완벽하게 이미 구성되어 있는 개체들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가정하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존재론은, 개체 발생적 작용들에 의해 개체들이 구성되기에 이르고 그리고 계속해서 개체화하는 것에 관해 더 많이 신경 쓰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몽동에게 있어서는, 시스템의 개발과 지속적인 개체화는, 연관환경( associated milieu)과 그가 부르는 바로서의 전-개체(pre-individual) 양쪽에 대한 이중적 관계의 유지 때문에 일어난다. 시몽동이 그의 개체화의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지점들 중의 하나는 기술적 개체들과 관련해서이다:

  

 

          그러한 개체화는, 기술적 존재가 그 자신의 주위에 창조하는 환경 속에서의 인과성의 회귀 때문에 가능한데, 이 환경이란 기술적 존재 자신이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자신이 그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는 그런 환경이다. 이 환경은 이것은 동시에 자연적이고 기술적인데 연관환경(associate milieu)으로 불릴 수 있다. 이것을 수단으로 해서 기술적 존재는 그 자신의 작동에 조건 지어진다. 이것은 제작된 환경(fabricated milieu)이 아니고, 혹은 적어도 전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술적 대상을 둘러싼 자연적 요소의 한정된 시스템이다. 연관환경은, 제작된 기술적 요소와 그 속에서 기술적 존재들이 기능하는 자연적 요소들 사이에서의 관계의 매개자이다. (Simondon, 1980, p. 60).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하나의 일관된 시스템으로서의 기술적 개체의 개체화가 의미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작동이 자신의 지속적 작동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이라고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적 대상을 위한 만족스런 환경은 자연세계의 일부에 대한 얼마간의 변형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점; 그리고 기술적 개체들은 외부환경에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그것들을 더욱 더 개체화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수준의 비결정성을 가지고 작용한다는 점.

 

     연관 환경에 관한 명기에 더해서, 추상적인 기술적 대상과 구체적인 것과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개발은 증가하는 구체화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시몽동이 구체화의 예로 들고 있는 갱발 수력발전기 도해: 터빈과 발전기가 모두 물속에 들어있는 수력발전기다. 물과 전기라는 양립불가능한 성질이 발명에 의해 하나의 해를 찾은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란 요소들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해를 찾으면서 진행된다..>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의 본질은 기능적 하위 시스템들을 전체적 기능성 속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각 구조는 다수의 기능들을 수행 한다; 하지만, 추상적 기술적 대상에서 각 구조는, 전체의 기능성 속으로 통합되는 단 하나의 중요하고 적극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반면에, 구체적 기술적 대상에서는 어떤 특정한 구조에 의해 수행되는 모든 기능들은 적극적이며 중요하고, 기능하는 전체 속으로 통합된다 (Simondon, 1980, p. 31).

 

 

     그 차이는, 작동에 필요한 추상적 구조들을 포함하는 기술적 대상은 작동 상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각자 단 한 가지 기능만을 수행하는 다수의 시스템들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작동 상에서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그들의 작동은 종종 충돌한다. 구체화의 과정은, 그러한 추상적 구조들이 어떠한 단일 구조를 이용하는 해법에 의해 극복될 때 일어나는데, 일관된 수준의 다기능성(pluri-functionality)을 가지고 작동한다.

 

 

     시몽동이 제시하는 하나의 예는 두 개의 추상적 시스(엔진과 수냉 시스템)으로 구성된 수냉식 연소엔진의 예인데, 그것의 구체화된 솔루션은 피스톤 실린더 상에 냉각핀(gill)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냉각핀 구조는 한편으로는 실린더를 위한 구조적인 지지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공기의 흐름을 통한 냉각 문제를 또한 해결한다. 하나의 대상은, 그것의 발생과 기능의 추가적인 발전의 모든 가능성이라는 양쪽 모두로부터 추상화될 정도로 닫혀 있을 때 과잉 목적적(hypertelic)이라고 기술된다. 과잉 목적적인 도구는 어떤 계통의 완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의 발전은 만들어 지지 않는다.

 

 

<냉각기와 엔진이라는 추상적인 구조는 공냥식, 냉각핀에 의해 냉각과 구조적 보강이라는 다기능성을 확보하면서 구체화된다.>

 

 

 

      비록 지금까지의 기술(description)은 기술적 개체들의 개체화에 특정되어 왔지만, 이 일반적인 스키마는 또한 시몽동에 의해서 다양한 범위에서 광범위한 현상들에 적용된다. 예를 들면, 인간 진보의 한계들 The Limits of Human Progress(2010, p. 230)에서, 시몽동은 기술적 발전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것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여 인간의 문화적 진보 (‘인간이 생산하는 것과 인간이라는 것에 의해 구성된 활동과 존재의 전체 시스템’)를 서술한다. 즉 불일치(disparity)를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도메인들 (예를 들면, 언어, 윤리학, 종교, 기술) 사이의 구체화하기라는 진보적 작용으로서 말이다. 어떤 도메인이든지 그 도메인 속에서의 진보는, 그것이 포화되지 않고 (과잉 목적적이지 않고), 추가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그리고 다른 도메인들과 함께, 어느 정도의 공명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발전은 또한, 도메인들의 분열과 그들 관계의 변형을 포함하는 상전이를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서 서술된다.

 

     하지만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의 개체화의 양식에 관한 설명을 다른 도메인, 예컨대 생명체와 심리적 개체들 같은 도메인에서의 그 설명으로 너무 급하게 옮겨가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이것들의 개체화가 이해되는 방법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예를 들면 생명개체의 개체화는 기술적 개체의 그것으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생명의 개체화는 연속적인데 비해 기술적 대상들의 개체화는 불연속적 도약 속에서 일어난다. 이 차이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시몽동의 존재론에서 현재 작동하는 일반 공리적인 이해만을 요구하는 여기서는 이에 관한 설명을 제시할 수가 없다.

 

    심리적 개체들의 개체화에 관한 시몽동의 설명 또한 이러한 공통의 관점들 몇몇을 공유하고 있는데, 주체와 그 환경(milieu)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이나 문제의 극복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 하나 추가되는 관점은 의미화의 역할을 포함한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시몽동(1989, p. 126)은 신호와 의미화간의 차이점을 작동시킨다. 개체화는 문제해결의 과정을 통해서 문제가 되는 불일치의 극복을 수반하는데, 이 해결 과정의 결과는 어떤 개체(개별화, individualization)의 출현이다. 혹은 어떤 새로운 체계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의미화가 또한 나타난다. 여기서의 의미화는 어떤 새로운 체계의 문제해결적 개체화를 수반하는 의미 혹은 감각의 동시적 전개이다. 반대로 신호들은, 재현적이고 전통적 정보 이론에서의 개별화된 개체들 간에 오가는 메시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의미화는 그것의 환경과 그 자체 내부와 관련해서 어떤 개체가 개체화하는 시공간적인 현실적 성취를 표시한다.

 

여기서 시몽동이 사용하는 신호와 의미화는 펜트랜드가 사용하는 정보와 사고 사이에 외견상의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에 관한 펜트랜드의 이해가 단지 사고와 정보의 흐름에만 초점을 맞추는 지점에서 시몽동은 의미화와 관련하여, 개체화의 중심적인 역할, 즉 심리적 개체와 집합적인 개체 양쪽 모두의 중심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몽동은 펜트랜드의 설명이 쉽게 영향을 받는 과잉 목적성에 저항한다.

 

만약 우리가 시몽동의 관점에서 빅 데이터에 관한 사회학적 주장들을 따져 물어볼 것이라면 질문 되어야 할 문제다. 이 주장들이 의지하는 사회시스템들에 대한 가정, 즉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서 조절되는 평형상태에서 사회시스템의 지속적인 운영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추상적인 가정에 어느 정도로 의지하는지 혹은 반대로, 아마 더 곤혹스럽겠지만, 그렇게 제안된 관리가 사회가 과잉 목적적이 될 것을 어느 정도로 요구할 것인가?

 

펜트랜드의 사회물리학이 질문들에 응답하는데 전적으로 실패하지는 않으나, 그 응답들은 제한적이다. 그의 책에서 논의된 시스템들의 대부분은 비교적 추상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시스템의 예들로서, 금융 투자, 헬스 모니터링, 마케팅 그리고 기업체의 생산성 증대와 같은 것에 관계된다. 사회의 복잡성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뿐 아니라 이 모든 예들 역시 어느 정도 상호 연관된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라도, 펜트랜드는 그것들을 비교적 닫힌 시스템들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는 마투라나, 바렐라 그리고 루만의 이론 같은 오토포이에시스의 이론화와 가깝다.

 

 

<오토포이에시스의 닫힌시스템>

 

 

 

 

그 자체로서 사회 물리학의 주된 관심은 시스템들의 자기유지(self-maintenance), 혹은 구조적 커플링과의 관계에서 흐트러짐 없는 작용에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공익 사업 시스템들의 보호와 향상을 포함할 때 이해 가능한 기획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전을 총괄적으로 사회의 더 크고 더 복잡한 상황으로 확대하는 것이 정말 실현 가능한 것일까? 그런 목적은 사회의 과잉 목적적인 생성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설정된 목적을 항상성 조절의 목적에 맞추어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그러한 비전은 기술자주의를 지지하여 정치적인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권장한다.

 

이것이 개체가 유지하는 다른 관계, 그것의 전-개체에 대한 관계가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간단한 용어로 하자면 시스템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의 그런 것이 아닌 무엇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개방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술적 대상과 관련해서 시몽동은 아래와 같이 쓴다:

 

 

 

   기술적 대상의 존재는 이중 관계에 의해서 유지된다 한편으로는 그것의 지리적 환경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기술적 환경과의 관계. 기술적 대상은 두 환경들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고,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 환경들 양쪽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여전히, 이 두 환경들은 같은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 두 개의 세상이고, 서로 간에 반드시 완전하게 양립하는 것은 아니다(Simondon, 1980, p. 54).

  

 

     이 2차적인 관계가 없이는 어떤 시스템도 불완전하고 과잉 목적적이 될 위험에 처하는데 그것은 확고한 단일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어떤 시스템이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빅 데이터를 사용함에 있어서의 문제는, 더 넓고 자주 변화하는 환경과 통합하는 문제에 직면한다는 점인데, 변화하는 환경은 비결정론의 원천이 될 공산이 있다. 물론 이것은 항상 정치의 역할인데, 펜트랜드 (Pentland, 2014, p. 203)의 책에서는 거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주제다. 그것은 사회의 핵심적인 목적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유용한 행위 규범을 개발하도록 개체들을 부양하는 환경에서의 테크노크라트적인 효율성과 회복력이라는 점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속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또한 총체적으로 사회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원한다. 만약 사회가 그런 통제에 복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것이 전술한 베니거(Beniger)의 프로그래밍의 문제인데, 그것은 목적성에 관한 사이버네틱스의 관심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질문은 펜트랜드에 의해 생략된다. 그리고 시몽동의 관점에서 중요했던 것과 같은 발명의 역할도 생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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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동X번역기계]

코너소개:   질베르 시몽동에 관한 최신의 연구들을 번역합니다. 우선 Journal of Media and Communication vol. 6, "Simondon: Media and Technics" 에 있는 논문들이 주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 저널의 장점은 신진 학자들이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 발명의 개념등을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시키는 논문들을 싣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요즘 핫한 이슈인 빅데이터에 대한 논문부터 시작합니다. 이 저널 외에도 시몽동 관련해서 흥미 있는 읽을 거리가 발견되면 계속 번역을 해볼 작정입니다. 첫번째 글은 Simon Mills(De Montfort University), Simondon and Big Data 입니다.

 

 

 

시몽동과 빅 데이터

Simon Mills(De Montfort University), Simondon and Big Data, Journal of Media and Communication vol. 6, "Simondon: Media and Technics"  

 

 

 

 

 번역:최유미/수유너머N 회원

 

 

 

 

 

이 글은 빅데이터가 사회를 이해하고 관리하기 위한 보편적 방법을 제공한다는 주장들의 몇 가지 한계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알렉스 펜트랜드 (Alex Pentland)의 작업에서 주장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질베르 시몽동의 작업에 비추어서 펜트랜드의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을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펜트랜드의 사회 이론이 근본적으로 사이버네틱스적이고, 그 이해의 도식은 시몽동의 비판을 받게 됨을 논증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이 글은 사회물리학이 과잉 목적적 사회 구조의 개발에 이르게 되는 방식을 질문한다; 발명의 이론화, 목적론과 오픈 시스템들에 대한 목적론의 능력 결여, 그리고 그것이 개발한 사회 존재론을 의문시한다. 시몽동이 수정한 정보개념은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사이에 처해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곧 인간사회(human society)를 갖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재발명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펜트랜드의 주장에 동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에서 이 주장의 성질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펜트랜드의 작업이 또 다른 통제혁명의 국면으로 향하는 지점에서 비결정성(indeterminacy)을 이론화하는 방법과 하나의 양태로서 관개체성(transindividual)에 관한 고려를 어떻게 누락하는지에 관한 더욱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버트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정보사회의 등장은 인간사회와 사회행동의 모든 측면에서 정보처리,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제어를 노출시켰는데, 그것에 상응하는 공식적인 정보이론의 개발보다도 더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과학자들이 사회적 구조와 과정에 관해, 급증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 비체계적인 지식을 환원시키려고 희망할 곳은 이들 기본적인 정보개념들이라고 나는 믿는다.”(Beniger, 1986, p. 436) 제임스 베니거(James Beniger)는 사회적 제어를 위한 정보역할의 개발에 대해 폭넓은 역사적인 분석을 통해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러한 결론과 더불어 그는 사회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사이버네틱한 이해를 갖는 사회학의 중요성을 재확인한다. 그가 비록 1차 사이버네틱스가 프로그래밍 보다는 오히려 제어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을 문제시 할지라도, 그의 견해에서 사이버네틱스의 3C (명령command, 제어control, 소통communication)가 사회적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망한 접근법을 제공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오늘날, 최근의 빅 데이터의 발전과 함께 그러한 기획의 진전을 목격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의 작업 렌즈를 통해서 빅 데이터를 위한 사회학적인 주장들에 관해서 몇 가지 제한점들을 탐구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시몽동의 작업과의 계속되는 유관성을 입증하기를 바란다. 특히 우리는 사회물리학(Alex Pentland, 2014)에 관한 알렉스 펜트랜드의 작업에 초점을 맞출 것인데, 그것은 빅 데이터를 사회의 이해에 적용하는데 있어서 현재까지 생산된 가장 철저하게 개발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목표는 빅 데이터를, 그리고 특히 사회물리학을 사이버네틱스의 계보 내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시몽동 작업의 두드러진 성취 중 하나는 그가 사이버네틱스의 주된 신조를 문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사이버네틱스가 광범위한 적용을 획득하기 이전에, 그리고 시몽동 자신이 사이버네틱스에 관한 작업을 전개하는 중에 이루어진 것이다.

 

 

<팬트랜드 와 시몽동>

 

 

먼저, 사회의 도메인과 관련해서 빅 데이터를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몇 가지 주장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킷친(Kitchin) (Kitchin, 2013)에 따르면, 빅 데이터의 새로운 점은 사용 가능한 막대한 데이터의 양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원천들 (다양성)으로부터의 수집과 분배가 거의 실시간 속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지털기기들의 광범위한 사용 때문이다. 전체적인 목표는 표적 모집단에 관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모델링과 예측에 대한 빅 데이터의 능력에 관한 초기의 주장들은 비지니스, 마케팅, 과학 그리고 경제학과 관련하여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점차 헬스케어, 운송, 하우징과 같은 타 분야에서의 솔루션 제공,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광범위한 사회학적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과대 선전되고 있다. 그러한 야심은 또한 사물 인터넷, 웹스퀘어드(Web²) 와 퍼스웨이시브 기술과 같은 현상의 전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빅 데이터가 적용되어 온 많은 응용 분야들은 비교적 닫힌 시스템들을 포함하는데, 거기서는 특정 문제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데이터가 수집된다. 예를 들면 교통 흐름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미리 프로그램된 상태로 실시간 데이터를 이끌기 위해서, 모델들과 관련된 알고리즘으로 실시간 데이터가 분석된다.

 

 

 

 

이 접근법에 있어서의 중요한 이슈는 개입된 시스템들의 인과적 작동에 관한 이해를 얻는 것이다. 문서에 의해 입증된 대로 정량적 데이터(quantitative data)의 사용은, 귀납의 문제에 의해서, 상관관계를 이끌어 내는 능력에 이르게 되지만, 반드시 인과성이 있다는 것을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 2008, no page)의 악명 높은 주장 하나는, 빅데이터는 정량적 분석에서 순전히 규모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속에서 막대한 양의 데이터와 응용 수학이 모든 다른 도구를 대체하는 세계이다. 언어학에서 사회학까지, 인간행위에 관한 모든 이론을 쫓아내라. 분류학, 존재론 그리고 심리학을 잊어라우리는 세상에서 지금껏 본 가장 큰 컴퓨팅 클러스터들 속으로 숫자들을 던져 넣고 그리고 통계알고리즘들로 하여금 과학으로는 불가능한 패턴들을 찾아내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빅 데이터에 관한 강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종류의 시스템들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데이터 그 자체에 대해서 작업하는 데서 비롯될 것이며, 해석에 관한 지저분한 고투들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킷친(Kitchin, 2013, p.130)은 이것을 경험론의 재출현으로 보는데, 그 속에서 모델은 먼저 수집하고 나중에 질문 한다.”(Croll as quoted in Kitchin 2013)

 

비교적 닫혀있고 제한적인 시스템들이나 네트워크들 (예를 들면, 전기 그리드, 교통 통제, 구매 행위들)을 조절하기 위해서 빅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에 제기된 몇 가지의 주장들에 대해서 긍정적일 적절한 이유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전체로서의 사회를 조절하기 위해 만들어진 더 야심 찬 주장들에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서 다루었었는가? 예를 들면, 우리는 빅 데이터의 지도적 옹호자인 알렉스 펜트랜드(Alex Pentland)를 얼마나 심각하게 봐야 할 것인가?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말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칼 막스(Karl Marx)는 틀렸거나, 적어도 단지 반쪽짜리 해답을 가졌다. 왜냐고? 그들은 시장과 계급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것들은 총계들이다. 그것들은 평균들이다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충분히 볼 능력을 가진 인간의 역사에서 최초의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가졌던 시스템들보다 질적으로 더 잘 작동하는 사회 시스템들을 실제적으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괄목할만한 변화다. 그것은 쓰기가 개발되었을 때 혹은 어디서나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때, 혹은 인터넷을 통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을 때 일어났던 상전이와 아마도 같은 것이다. ( Pentland, 2012)

 

 

<팬트랜드의 책, 사회물리학>

 

 

 

 

이러한 언설로 보아, 펜트랜드가 노리는 것은 사회적 추상에 관한 전통적인 이론의 토대를 약화시키고 그 자신의 작동적인 추상을 전개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과학적 자격이 사회 물리학의 이름으로 지지되는, 전적으로 정량적이고 경험론자적 기초를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사회물리학이 계급에 기초를 둔 이론들을 기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단지 환원주의자의 이론이 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펜트랜드는 분명하다. 몇몇 근래의 경제학 이론들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집합적 행동들이 어떤 창발적 평형에 이르는 합리적 행위자들로서의 개인들 말이다. 펜트랜드(2014, p. 4)사회적 효과가 존재함을 주장했다. 그는 사이버네틱스에서 행해지는 설명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정보와 사고의 흐름을 통해서 그것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사회물리학은, 한편으로는 정보와 사고의 흐름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행위와의 사이에 신뢰 가능하고, 수학적인 연관들을 서술하는 정량적인 사회 과학이다. 사회물리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회적 학습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사고가 어떻게 흐르는지와 이 사고의 흐름이 어떻게 우리 기업들, 도시들, 그리고 사회들의 규범과 생산성 그리고 창의적 산출물을 형성하는지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사회물리학은 인간의 욕망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한 그들의 결정이 종종 사회 네트워크 효과에 의해서 지배 받는다라는 점을 입증한다. 그래서 그것은 개인들이 그들의 목적과 행위를 합리적으로 결정한다고 보는 합리적 경제행위자 접근법과는 구별된다. (Pentland, 2014, p. 59). 그 자체로서 사회물리학은 초점을 행위자로서의 개인으로부터 개인들이 살고 있는 정보와 사고의 흐름으로 이동시킨다: “사고의 흐름이 공동체와 문화의 진짜 이야기이다. 그 나머지는 단지 외관이며 환상일 뿐이다” (Pentland, 2014, p. 44).

 

펜트랜드(Pentland, 2014, p. 20)의 사고에 관한 정의는 도구적 행위를 위한 하나의 전략이고 정보는 사고에 통합될 수 있는 관찰이다. 펜트랜드가 비록 개인적 목적과 동기를 고려하지만, 개인적인 것들은 사회 네트워크 전반에 걸친 전체적인 사고의 흐름 속으로 포함된다.

 

사회물리학의 약속은 이러한 정보와 사고의 흐름에 의해 생기는 패턴의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들이 단지 평균하여 사회를 이해하는 고전적 방식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Pentland, 2014, p. 10) 더욱 미세한 마이크로 패턴의 수준에서 사회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펜트랜드는 더 나아가서 정량적이고 정성적인 전통적 사회학적 방법론들은 미래 행위의 예측 모델을 개발할 수 있는 상태에 접근하기에는 수집하는 데이터의 양이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빅데이터의 약속?

 

 

 

 

이것이 빅 데이터가 전경화 되는 지점이다. 그것은 사회물리학으로 하여금 정확히 사회 네트워크의 지도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하고 어떻게 사고들이 행위와 행동으로 바뀌는지를 볼 수 있도록하는 엄청난 양의 디지털 부스러기들을 수집하고, 저장하고 분석하기 하기 위해 동시대의 디지털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기획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단지 사회의 운영을 찾아내어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위너(Weiner)와 비어(Beer)에 의해 개발된 것과 같은 사회학적인-사이버네틱스의 전통 속에서, 명령과 통제를 위한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펜트랜드(Pentland, 2014, p. 171)의 텍스트 자체는 사회물리학을 도시에 적용하는 것에 관해서 토의를 할 때와 같은 리얼리티 마이닝reality mining”의 긍정적 잠재력에 관한 주장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우리는 개척과 개입을 향상시키기 위해 환경을 가공하기를 원한다; 혹은 사회 네트워크들은 유용한 사회 규범의 개발과 시행을 위해 더 효과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경제시스템, 정부시스템, 그리고 업무시스템을 재발명하기 위해서 이 교훈들을 적용하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Pentland, 2014, p. 208).

 

펜트랜드(Pentland, 2014, p. 180)에 관한 한, 이 프로젝트가 유토피아적 잠재력을 만족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주된 이슈는 프라이버시이다. 혹은 그의 작업을 떠받치는 암묵적인 자유주의적 정치를 다소 넌지시 비치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우리가 서비스의 대가로 회사나 정부에게 제공하는 개인데이터를 귀중한 개인 자산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그것의 소유권을 정의하는 것이다.

 

이하에서 나는 질베르 시몽동의 작업을 통해 빅 데이터를 위해 만들어진 사회학적 주장들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사회물리학은 현대의 기술적 발전을 반영하기 위해서 업데이트된 사이버네틱한 세계 상황으로부터 나타났다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시몽동의 작업은 그자체로 특별히 유관하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기술과 사회의 본성 둘 다에 관한 어떤 독창적인 관점을 개발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사이버네틱스의 관점들을 프랑스 인식론의 전통과 결합함에 있어서의 그것의 독특한 위치에 기인한다. 빅 데이터에 관해서 그리고 사회물리학에 관해서 고안된 주장들은 이러한 같은 도메인들을 횡단하고, 그 자체로 그것들 사이의 대화는 적절해 보인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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