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없는 편지*

2018년 신인들의 시적 감응에 대하여

 

 

최진석_문학평론가. 수유너머104 회원

 

 



1. 리듬과 감응, 유물론의 시학

 

유물론적 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i Plekhanov)는 예술의 오래된 기원 중 하나로 리듬에 대한 감각을 꼽은 적이 있다. 그의 예술론을 모아놓은 주소 없는 편지(Pis’ma bez adresa, 1899)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 노동이란 파편화된 각자의 힘을 단일한 집합성으로 끌어모으는 과정이고, 그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은 다수의 인간을 하나로 엮어내는 몸의 감각 즉 리듬이라는 것이다. 플레하노프가 유물론적 혁명가이자 정치철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이 새롭거나 놀라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채롭게 보아야 할 점은 리듬을 정의하는 그의 독특한 안목이다. 아마도 최초의 노래란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몸짓이나 목소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동작하고 소리내는 와중에 혼합되어 하나의 가락 속에 합쳐진다. 서로는 각자의 구별을 잃으며 점점 단일한 집합체처럼 노동에 참여하게 되고, 거기서 노동요 곧 공동의 리듬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부터다. 그러한 무의식적 일치를 언제든 이루어내기 위해 인간은 노래를 짓고 악기를 발명한 게 아닐까? 어쩌면 시란 그러한 일치의 감각을 다시금 뽑아내기 위한 언어적 주문이 아닐런가?



Georgii Plekhanov(1856-1918)



리듬은 비단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함께-있음이라는 관계성이 형성되는 언제, 어디서, 무엇과라도 리듬은 발생하고, 거꾸로 관계의 성격마저 규정짓는다. 열매를 채취하는 사람들과 표적을 뒤쫓는 사냥꾼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가만히 매달린 열매와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물을 응시할 때 만들어지는 관계의 리듬이 상이한 까닭이다. 타작을 하려고 흙을 밟는 농부들과 강철을 연마하는 노동자들의 발걸음도 같을 리 없다. 흙과 쇠의 질료적 차이가 보폭과 운동의 이질성을 자아낸다. 리듬은 어떤 대상을 만나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매번 상이한 속도와 정도로 표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리듬이란 사물에 내재한 속성이라기보다 서로 마주한 대상들이 얽혀들 때 파생되는 관계의 표현이다. 리듬은 사이[]에서 만들어져 그 사이를 채우는 모든 것들의 공-동적(-動的) 관계 전체라는 것. 그렇다면 흔히 환경이라 부르는 관계들의 총체야말로 리듬의 비밀이 아닐까? 예술 역시 예외이진 않을 터. 어떤 예술작품이 뿜어내는 맹렬한 감응(affect, 情動)이란 예술가가 그의 환경과 공-동으로 조형하는 관계성에 다름 아니다.

시 또한 그러하다고 나는 믿는다. 전통적 시학이 전제하듯, 시는 시인-주체의 고독한 내적 성찰과 외로운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다. 홀로 독야청청 세상천하를 관조하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신화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주체의 내면으로부터 어떤 이미지와 언어가 피어나든, 그것은 그가 만난 세계 곧 환경 전체가 그의 몸에 새겨놓은 상호작용의 각인일 뿐이다. 시의 제목이, 소재가, 주제가 어떤 식으로든 특정될 수는 있어도, 거기서 발견되는 낯선 감응의 흐름들, 때로 시인과 독자를 배반하기조차 하는 이질적 의미의 조형은 그 시가 온전히 시인 자신에게만 귀속될 수 없음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에서 매양 읽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넘어서 그 이면에 엄존하고 있는 리듬의 진실, 시인과 우리가 동시에 마주한 이 세계의 울림이다. 그것이 유물론의 시학이다.

등단이라는 제도적 문턱을 넘어선 시인들이 바라본 세계는 특별하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 졌더라는 어떤 작가의 고백처럼, 한낱 표찰에 불과할지라도 시인이라는 꼬리표는 그네들의 삶을 절단시키고, 차이의 감각을 발동시켜 이전과는 상이한 리듬의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젊은 시인들을 보라! 그들의 감수성과 시적 언어를 느껴보라! 하지만 또한 분명하리니, 그들의 시는 그들 자신만의 것은 아니며, 이 시대가 그들에게 남긴 감응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손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어 그 자취들을 더듬어 보자.

 

 

2. 문턱의 시선, 결별의 예감

 

()은 분리와 결합의 기묘한 이중 평면이다. 창이 있음으로 우리는 문턱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창으로 인해 거기에 닿을 수는 없다. 해방구인가 감옥인가? 영구히 풀 수 없는 이 삶의 오랜 질문은, 적어도 이제 갓 시의 관문을 통과했다고 느끼는 자들에게는 모종의 깨달음의 표석으로 장식될 만하다. 내내 과거형 어미로 주도되는 그림자 극장의 전반적 분위기는, 아마도 그와 같은 통과의례적 의식을 스스로에게 표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

 

커다란 창이 있는 방이었다.

 

[...]

 

나는 창을 연 채 그 방에 앉아 벽에 영화를 틀어놓았고

어제 저녁엔 여러 여성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 같이 이곳에서 우리와 있다. 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그나마 행복해 했고

 

초저녁이 되면 영화를 튼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지이, 그림자 극장부분

 

낡은 필름이 풀려나가듯 문턱 이전의 시간들은 다양한 이미지들로 변주되며 지나간다. 어제 저녁에 어딘가에 있던 이들이, 오늘은 우리와 함께 있고, 그것조차 영화 속의 한 장면인 양 이미지화되면서 강 건너의 무연한 사태처럼 창밖으로 비치는 정황이다. 이것은 순수한 과거의 시제, 과거의 장면, 과거의 감정 아닐까? 지금 현재의 사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관조되고 반조(反照)되기만 하는 무연관의 시공간. “그나마 행복해 했노라 말하고는 있으나 문턱 위에서, 더 이상 이전의 세계에 머물 수 없는 경계선 위에서 바짝 날이 선 시적 주체는 마냥 긍정적일 수 없다. 지금 이전의 지나간 시절은 제 아무리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구속된 아름다움이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인 탓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며/평생을 견디고 있다.” 주체로 하여금 한 걸음 앞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쳐 개화하지도 않은 시가 어째서 벌써 시드는가? 논리정연한 산문의 언어로 설명하진 못해도 시쳇말로 느낌적 느낌으로 지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바짝 발붙인 경계 너머로 나아가야할 때, 거기에 있는 것이 과거를 보상해 주는 빛나는 무엇일지 아닐지 가늠할 수 없는 탓이다. 바람이 휙 불어오듯 찰나의 순간 시적 주체는 경계 위에 올라섰지만, 감히 더 나아갈 욕망도 품지 못한 채 아직 거기 머물러 있다.

 

건조한 곳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강지이, 달의 계곡전문

 

물론, 더 나아가길 바라는 욕망 또한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느릿하되 편안한 산보도, 숨가쁘나 활기찬 뜀박질도 아니다. 강진영 시인에게 이는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자각과 의지, 성찰과 욕망이 뒤얽힌 채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로 표상된다. 익숙한 환경, 친절한 이웃, 다정한 가족과의 무참한 결별. 기차처럼 달리는 아이들은 엄마 없이 엄마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면서” “엄마라 부르던 세계를 떠나야 한다. 아무리 사랑스럽고 안온했던 울타리라도 여하한의 의존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 돌아보고 후회하는 것조차 자신의 몫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쾌한 각오를 짚어내자. 문턱을 넘으려 할 때는 필연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내 손을 놓아요 터널을 지나요 바다를 건너요 뒤를 돌아보는 건 나예요.” 철없던 아이가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서사의 행복한 광경으로 미화해서는 곤란하다. 엄마의 세계는 안전하되 속박되는 굴레였고, 떠나는 아이는 자라지 못한 채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으며, 문턱 너머로 열린 낯선 세상은 이물감 가득한 두렵고 분열적인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기차에 오를 거예요 내릴 거예요 엄마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요 아무것도 낳지 않을 거예요 

노을에서 엄마의 커피향이 나 엄마의 노을을 훔쳐 마시며 /////////////////////////////////////////////////////////////////////////////mmmmmmmmmm

m                                       m                                        m ,,,,,,,,,,,,,,,,,,,,,,,,,,,,

 

여기는 벽이 모두 창문이잖아 매일의 풍경이 바뀌잖아 엄마가 한 칸 한 칸 분열하잖아

 

강진영,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말입니다부분

 

그럼, 거기에는, 문턱 너머 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아니라 사건이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감각의 경험, 그로 인해 아이가 뒤틀리고 기이하게 변모하여 성장의 미명 하에 부서지고 말 변화들. 해변에 부딪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파도야말로 그러한 파열적 체험이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이미지 아닐까? 속절없이 너울대는 파도처럼 부유하는 시상과 언어는 산산이 흩어지기 직전의 모습만을 애틋하게 기억할 것이다.

 

                                                        사랑해

                                                                  나는 부서지기 직전의 파도를 사랑했지

                                        너는 부서진 파도

 

강진영, 쇼어 브레이크부분

 

 

3. 너머의 세상, 차이 없는 반복

 

여기를 넘어 저기로 나아갈 때마다 기대를 품고 희망의 탑을 쌓아올리는 심정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이나 욕망이 남아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도, 문턱의 저편도 이편과 다름없이 동일한 상황의 반복으로 점철되리란 의구심은 이상하게도 늘 적중하는 듯하다.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도 굳이 여기의 삶을 겹쳐 보는 현상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게다.

 

우리는 자주 시청에서 만났다 여당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었다 밀착해도 시차가 발생하는 여자였다 한 침대에 누워도 상대방의 꿈속에 도래하지 않았다 일인칭의 새벽 교대로 일어나 담배를 피웠다 아직 잠들어 있는 다른 한 쪽의 꿈속으로 급조된 안개가 피어올랐다 지극한 침묵이 함께 있는 새벽의 암구호였다 나는 줄곧 나를 사칭했고 둘이 형성할 수 있는 것들이 다 떨어질 때면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 군중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방백마저 무례하게 확성되고 있었다 어는점이 십도쯤 낮은 여자였다 그 속에서 흥분을 익히며 매번 촛농 같은 땀을 흘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분실해도 태연하게 행진의 일속을 가장했다 살수 같은 비가 직사로 쏟아지는 밤이면 여자와 나는 시청에서 자주 해산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줄곧 나에게만 전력으로 가담했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입을 떼며 무슨 말인가 했지만 초 단위의 시차로 매번 싱크가 맞지 않았다

 

곽문영, 시청전문

 

무성영화 화면들이 연속적으로 스쳐가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내용적 연관 없이 툭툭 끊어지면서 아슬아슬하게 접붙어 있다. 내용과 형식의 불연속적 결절은 상호 소통되지 않고, 일치하지 않는 타인들, 세계들, 감정들의 절단면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서 일관된 것은 매번 싱크가 맞지 않는 전체의 분위기, 그 어긋남의 감응이다. 물론 시제는 과거형이다. 어쩌면 이 시편은 문턱 이전의 순간들을 침울하게 회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음에도 끝내 도래하지 않, “줄곧 나를 사칭하는 나 자신과의 결렬은 나와 여자사이의 불협화음만큼이나 일관된 불일치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욕망도 담지할 수 없는 이 광경은 매번 맞지 않는 싱크처럼 저편에서도 반복될까? 이런 정조에 감싸인다면 문턱 이후, 그 너머의 세계를 가히 밝게 예상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나는 소리조차 녹음된 새의 소리일 뿐이며, “어제 내려 쌓인 눈 위로/새로운 눈이 내릴 때/나는 소리조차 전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조로(早老)의 대기에 휩싸여 낡고 지루한 풍광을 연출할 따름이다. “매일 보았던 후뢰시맨은/마지막 회에서 너무 늙어보이고, 마침내 시적 주체는 이렇게 뇌까리기에 이른다.

 

이곳은 좁으니까 이제 우리는

그만 크자

 

[...]

 

길게 이어진

새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새의 발자국 옆에 새겨진 나의 발자국

 

뒤를 돌아보면

새와 다정하게 걷는 사람의 발자국

 

새의 마지막 발자국 곁에서

한 번도 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곽문영, Black Fire부분

 

새로움과 신선함, 낯선 반가움으로 표징되는 신인들에게, 도대체 문턱 너머의 무망(無望)이라는 정조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채 장성하기도 전에 설익어 떨어지고, 미쳐 깨닫기도 전에 벌써 체념해 버리는 이토록 급속한 노화의 감각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라기보다, 그들과 교감하며 구축된 이 시대의 감응이라 불러야 옳을 터. 정치와 사회, 문화와 예술, 혹은 삶의 모든 부면에 만연한 권태와 피로의 감수성을 그들은 머리로 알기 전에 이미 몸으로 느껴버리고 말았던 것.

늘상 새의 발자국 곁에 머물면서도 결국 새는 찾아내지 못하는 파랑새 전설마냥, 시적 주체는 오직 자취의 초상화만을 그리는 운 없는 화공이다. 그저 눈물로만 색을 입힌 이 그림의 진실은, 그것이 슬픔이 곧 주소인 우리초상화라는 데 있다. 왜 자신의 기원(주소)이 슬픔인가? 너머의 삶, 저편의 일상을 욕구하기도 전에 이미 폐기해야 하는 역설의 세대인 탓이다. 마땅히 바래도 좋은 것, 마침내 도착할 수 있는 곳, 기어이 원하는 것을 필연코 얻지 못하리란 역설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갓 시인명부에 입적한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계시의 언어가 아니라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처럼 중단된 살아있는 미라의 삶일지도 모른다. 문턱을 밟아선 시인의 두려움과 낯설음은 필시 이로부터 기인한 불안일 테다.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 언어를 기다리고, 언제나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리 자신을 종속시키려 했지만

 

모든 무렵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

성가의 전주前奏에서 발각되는 도처의 미라

 

김유태, 검은 원부분

 

제목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작품 검은 원(1913)에서 따왔다. 말레비치는 회화의 근원적 구성요소인 색과 형태를 극도로 추상화시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것이 흰 바탕 위의 검은 원이었다.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이 검은 원은 더 이상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기원의 색깔이요 모양일지 모르나, 역설적이게도 흰 바탕 없이는 그 자신을 주장할 수조차 없다. 문제는 흰 바탕이라는 것이 무()는 아니되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무규정적인 존재 자체라는 것. 검은 원보다도 더욱 근본적이라 해야 할 흰 바탕은 온갖 규정을 넘어서는 순수 존재이자 순수 무에 다름 아니다. 기원에 대한 앎의 추구가 이토록 무참히 깨질 수 있을까? 문턱 너머를 들여다 본 자의 절망이란 그와 같지 않을까? 궁극의 원점에 다가선다 해도, 결국은 그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깨달을 뿐이라는 카산드라적 예언 아닌가? “검은 멍이 된 이 경험은 불판 위에 구워진 냉동육 껍질에 남은 도장의 흔적처럼 아이러니컬하게 읽히며, 너머의 삶에서 기대하게 마련인 아름다움이란 결국 잔혹한 멍으로만” “몸에 고이는기억임을 자각하게 될 터(김유태, 낙관).

너머에 대한 포기와 체험은 자기 아이러니적 희화화로 귀결되는 듯하다. 시인 각자는 시인 일반으로 추상화되고, 구별 불가능한 어둠에 감싸여 모두 같은 인종이 될 것이다”(류현, 학술보고서). ‘객관과학을 뽐내는 학술보고서이지만, 결국 차이나는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카프카적 냉소가 지속될 뿐이다. 너머의 불가피한 진실을 알게 된 시적 주체는 경계에 머물고자 애쓰겠지만, 그 역시 자기를 인간으로 남겨두려는 비겁한 타협일지 모를 일이다. 다른 모두도 그렇겠지만.

 

경계선은 두려움을 밀어내는 타협, 선에서 시작되는 출구는 인간적이다. 선은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출구, 지켜야 할 선 같은 건 없다. 나의 직업을 미리부터 정해 놓은 너희는 말했다. 바나나를 받아먹는 원숭이는 지루하다. 바나나만을 받아먹은 나는 너와 같아졌다. 겉모습을 갖추었다. 구별되지 않는다. 다음 원숭이는 누구인가?

 

류현, 학술보고서부분

 

 





4. 반복과 차이, 사건의 감응

 

세상과 섞이는 것. 낡은 선비정신은 혼탁한 세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닦으라 명령해 왔다. 그러나 사람의 사이라는 게 인간의 본뜻이라면 어떻게 이 세계에 몸을 섞지 않고 인간일 수 있으랴? 문턱을 넘어, 시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 세계, 그리고 자신과 다시 한번 섞이는 교통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느끼고 반응하며 감수하는 것. 감응(感應)의 체험을 언어 속에 투여하는 것이야말로 문턱을 넘은 자, 시인 주체의 몫이 아닐까?

하지만 문턱 이후의 삶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다시금 세인과 어울리고 세상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속편히 타협하는 게 시적 행위일리는 없다. 세계에 자기를 섞을수록, 범속에 몸을 담그고 혼탁에 자신을 바칠수록 시는 시가 되어야 하며, 시인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소리의 분산 가운데 스스로를 표시할 수 있는 홑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겹쳐진 다른 소리들을 찢어 분리하고, 여러 가지 발음들을 실험하여 뾰족한 모서리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 떠들썩한 세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될 수 있는 대로 차갑게, 설익은 내면을 푹 고아 시의 온존한 형태로 표현해 내야 한다.

 

모음을 찢는 소리가 경사지고 있었고

당신의 발음은 더듬을수록 모서리가 됐다

 

체온이 높은 노래를 한 음절씩 물에 빠뜨렸다

철들지 않은 발음은 수면을 밟고 올라설 수 없었다

 

류현, 홑소리부분

 

이는 언어의 리듬을 만드는 작업이다. 세계와 교통하며 지각하는 동시에 세계로부터 건네진 감응에 시적 주체의 울림을 실어 시의 감응을 구축해 내는 것. 세상의 온갖 소음, 이미지, 목소리를 내 몸에 투과시키는 게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소통이란 자신에게 닥쳐온 세계의 감응을 자신의 것과 조율하여 특이한 리듬을 지닌 시적 감응으로 변형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거침없이 모음을 탕진한 메아리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수천 번 입술을 말아도 완성되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울음을 조율하며기어코 그 리듬의 형태에 다가서려는 분투, 여기에 시인-되기의 노고가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유일무이하고 고고한 단독자가 아니지만, 또한 세상만사에 참견하는 수다스런 호사가도 아니다. 그는 차라리 이 세계의 흐름을, 미세한 리듬을 감지해 내는 지진계가 되어야 한다. 바꿔 말해, 세계의 형상을 읽고 대지의 분위기를 포착하며, 그 감응을 짚어내 언어로 옮기는 번역기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진학자 안드리야 모호로비치치는 지구라는 대지의 감응을 예감하고 과학의 언어로 풀어낸 시인-번역자라 불러야 하겠다.

 

여러분, 우리의 녹는점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생각은 옅어지고 서로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아가고 있습니다. 1인칭의 언어는 사라지고 쓸모를 다한 눈금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속눈썹과 손톱만 남아 보트 위에 표류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연속적이어야 하며 술에 취해 어깨동무해서도 안됩니다. 종국에 서로를 나라고 느끼며 견디지 못할 온도에 다다를 것입니다. 책을 펴지 마십시오. 꿈을 꾸지 마세요.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방향성을 믿지 마십시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박길숙, 모호로비치치의 연설문부분

 

모호로비치치의 모호한 연설은 서로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1인칭이 소실되며, 눈금마저 지워져 하나로 혼융하게 될 지각의 변이를 경고하고 있다. 시적 전통에서 위기이자 파국으로 언명되었던 시적 자아, 데미우르고스적 창조자의 형상은 그 변이를 버틸 수 없다. 모호로비치치의 슈트에 달린 금장 단추처럼 떨어져 녹아내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성의 상실도 아니요, 개인의 소거도 아니다. 차라리 이전, 이편의 자아를 의문에 붙임으로써 문턱 너머에서도 그와 같은 자기성이 여전히 유효할지 탐문하는 시적 성찰의 과정이겠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그제야 우리는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돌연 낯설어지는 사태를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까.

 

양심의 소리는 어느 쪽에서 날까?

내가 귀머거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른발 왼발 발맞추다 박자가 헷갈리면?

계단은 내 발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나뭇결대로 내 얼굴이 깎여 버리면?

질문에 질문을 더하면 답은 없어

 

박길숙, 지미니 크리켓부분

 

당연하게도, 귀머거리에게 양심의 소리라는 비유는 의미가 없다. 나란히 평행하게 자라난 두 발 사이에도 순서가 있을 리 없고, 계단과 걸음걸이가 늘 조화롭게 일치하란 법도 없다. 순리와 당착, 인식과 오인. 질문의 순서가 바뀌면 논점이 달아나고, 전혀 낯선 명제가 고개를 쳐 든다. 피노키오의 양심을 자처하는 지미니 크리켓은 말하는 귀뚜라미다. 의인화된 가상의 비존재지만 통상의 순리와 인식을 전도시켜 당착과 오인을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또 다른 진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더할 수 없이 강력한 현실성을 갖는다. 그럼 허구적 실존 지미니 크리켓이 있음으로써 너머의 삶은 비로소 실제의 삶이 된다고 해야지 않을까? 이전과 이후, 이편과 저편이 어떻게 연속적이고 또 어떻게 불연속적인지, 그 절단과 흐름의 감응을 탐지해 물음을 던지는 지미니 크리켓은 그 자체로 시적 주체의 형상에 비견할 만하다. 계단도 없이 문턱을 오르고, 이편과 저편을 넘어서기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또한 언제든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장전된 미지의 그것.

 

나는 죽지 않는 불멸의 옴므

너는 죽지 않는 불멸의 양심

 

계단도 없이 오르내리는 나는

죽지 않는 아이, 살아 있지도 않은 아이

그래서 태어난 적도 없지

 

마침내 그렇게 너머의 지평에 도달한 시인은, 이미 너무나 정확히 예감하고 있었듯 이전의 생활과 이편의 일상을 반복해 살아가리라.

 

가로등이 반복된다

에스컬레이터의 단면에서는 세계의

상승과 하강이 매순간 교차하고 있다

 

달이 반복되었다

식사가 반복되었다

바다 너머에 바다가 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박정은, 자연발화부분

 

나는/그저 가끔씩 뜨거워질 뿐”, 여기에 비약적인,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 턱이 없다. 문턱 너머는 선택된 땅도 아니고, 도착할 수 있는 최후의 지평도 아니다. 여기엔 여기대로의 지루한 일상이 시인을 기다리고, 생활에 삼켜진 또 다른 시인들이 졸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언자의 목청을 드높이거나 순교자의 비탄을 쏟아내는 것 따위가 아닐 게다. 수선스런 시인의 자의식을 내려둔 채, “칼국수를 먹바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머에서는 너머의 삶을 삶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바로 그럴 때, 슬그머니 덮쳐오는 세상의 감응과 낯선 감각들을 마주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처음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바다가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평선과 시선이 직각을 그렸다

 

바다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고, 시선과 직각을 그은 수평선을 보는 일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온갖 감각적 파장들이 시적 주체에게 지각되는 방식은, 물론 그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 감응이란 사태가 직관되고, 그 과정에서 체감되는 사물의 체험이자 수용의 효과인 까닭이다. 통념으로부터의 불일치, 그 어긋남의 발견이야말로 너머의 삶을 살아가며 찾아낼 수 있는 시의 감응일 터. 이전의 생활, 이쪽의 일상과 하나 다를 바 없던 이후와 저쪽의 삶은 그렇게 다른 것으로, 일종의 인공정원으로 조형되기 시작한다.

 

정원에는 높고 긴 나무들이 가득했다

인공정원이었다

중앙에 커다란 나무 세 그루를 중심으로

정원은 네다섯 개의 숲을 품고 있는 듯 했다

 

박정은, 정원부분

 

인공정원이야말로 너머의 세계를 또 다른 삶의 세계로 형상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다. 인공낙원일 수도 있고, 인공지옥일 수도 있는 양가적 경계의 중간지대로서 이 정원은, 물론 삶의 최종적 종착지는 아니다. 이 주소지는 언제든, 어떻게든 파기되고 새로이 옮겨질 수 있다. 여기 또한 이편 우리의 생활을 모방하여 큰 나무를 심고, 거기 올라 세상을 욕망하는 나날에 잠식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니 자칫 정원에서도 시인은 앙상한 꼬리표만 나풀거리며 이 세계를 자신의 감응 속에 융화시키지 못할지 모른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안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각의 촉수를 예리하게 갈아두기 위해 시적 주체는 주변부를 향해 뛰어야 하고, 사람들이 큰 나무에 오르려 줄을 설 때 오히려 정원의 끝을 향해 달려야 한다. 그렇게 변경으로, 구석으로, 끄트머리로 힘껏 내달릴 때, 아마도 인공정원의 너머는 또 다른 정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끝이 아닌 시작, 혹은 새로운 감응의 응결과 전염. 거기서 시인은 말하리라. “정원은 나로 인해 넓어졌다. 그렇게 주소지는 또 다시 이전될 것이다.

주소 없는 편지. 이는 너머의 세계가 쏟아내는 감응을 부지런히 수신하고 그에 응답하여 주체의 감응을 발신됨으로써 새로운 감응, 곧 세계의 리듬을 창안하는 시적 투쟁의 과정이다. 제아무리 낙토의 장관을 연출하더라도, 그것이 건설되면서 또한 붕괴되는 속도를 추월해 새로운 정원의 이미지를 구성하려는 그 시적 여정에 주목하라. 그것은 반복 속에 차이를 발견하고, 사건의 감응을 촉지하며, 그 리듬에 어울리려는 시작(詩作)의 노동에 값하는 일이다. 시의 편지가 부쳐지는 주소를 확정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 주소를 결코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귀속되어 있다. 편지가 도달하기도 전에, 주소는 벌써 바뀌어 있을 테니까.

 

나는 정원과 속도를 겨뤘다

 

* * *

 

올해 등단한 시인들의 최근작을 살펴보며, 시인으로서 그들이 감촉하는 이 세계와 그에 조응하여 그들이 조형해낸 시적 감응을 거칠게나마 짚어보고 싶었다. 감응이 감정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특이한 분위기의 조성을 가리킬진대, 시인 하나하나를 어떤 특정한 상태나 단계, 태도에 결박시킬 의도는 전혀 없다. 이 글에서 각자의 이름과 작품을 호명하며 단평한 것은 또한 그들의 시와 마주친 나의 비평적 감응이라 간주해주면 좋겠다. 비록 시인 개인의 이름으로 쓰여진 작품들 하나하나일지라도,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이 시대와 교응하고 결합하여 안출해 낸 공-동의 시적 리듬이라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나의 비평도 시인과 시 작품 그리고 나 사이의 공-동적 감응의 결과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를지라도, 여기에는 서로를 읽고 호응하는 일관된 리듬의 감응이 필연코 존재한다.




* 이 글은 월간 현대시201811월호에 게재된 동명의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수유너머N은 올해부터 우리 시대 인문학을 비판적으로 되씹고 새로운 출발을 내딛기 위해 강의, 심포지움, 총서를 통해 <불온한 인문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불온한 인문학' 카테고리 바로가기) 그 일환으로 지난 3월 12일에 심포지움을 통해 발표한 글들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총서의 첫번째 책입니다.

휴머니스트 홈페이지에 실린 <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책소개를 여기에 옮깁니다.
(원글 바로가기)
 







1.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기획의도)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의 가장 큰 화두는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인문학은 학교 바깥에서 재기를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대중과 직접 만나서 교감하는 공부를 하고,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을 넘어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해 확장되는 앎의 지평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렇게 사회로 걸어 나왔으며, 지금 진행되는 ‘인문학의 부흥 시대’는 그 발걸음이 만들어낸 성과다.
인문학의 대중화, 그 실험의 한복판에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도 있었다. 2000년 활동을 시작한 ‘수유너머’는 제도 밖 연구공동체 실험과 대중강연 등으로 인문학 부흥에 거름 역할을 했다. 그들의 시도는 신선했고, 앎이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대중에게 알렸다.
고전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도서관과 문화센터, 기업, 각종 기관에서 여는 대중강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까지, 그 대상과 성격도 다양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학문’ 취급을 받았던 인문학은 이제 ‘유용한 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멜로드라마에 책 읽는 남성 주인공이 이전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그때 그 주인공은 사회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이었거나, 아니면 지식인이라는 배경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령 ‘인욱’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소지섭이 연기한 인물. 그 드라마에서 인욱은 자신이 읽었던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하지원이 연기한 수정이란 인물에게 선물했다.……그는 과거 학생운동을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재벌 후계자 캐릭터는 조인성이 연기한 ‘재민’이었다. 그는 이른바 ‘무개념’ 캐릭터였지 않았던가.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재벌과 인문학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하지만 6~7년이 흐른 지금, 인문학은 재벌 후계자와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비싼 외제차나 고가의 명품 슈트 못지않게 젊은 재벌 남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액세서리로 인문학이 선택되고 있는 건 아닐까?……나는 〈시크릿 가든〉의 인문학 책 읽는 주인공 ‘김주원’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삶을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이자, 세련된 감수성과 지적인 안목을 심화하게 해주는 교양의 원천이 된 것이다.
― 본문 94~95쪽,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에서
 
 
2.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의 새 프로젝트 ‘불온한 인문학’ (이 책의 개요)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수유너머(노마디스트 수유너머N)’는 ‘지금의 인문학’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보았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를 위해 인문학에 ‘비판성과 전복성’을 되찾아주는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 권력에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의 인문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불온성이 거세된 채 구체적인 삶과의 접점도 잃고 ‘문화적 교양주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적 일상에 길들여진 대중이 어렵고 낯선 주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적인 정치?사회적 주제들은 그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기에 곧잘 반려되곤 했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 오래된 과거에 대한 정보들, 두루두루 유익하기만 한 ‘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게 권장되었다. 품격 있는 ‘고전’을 다루면서도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서구의 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헤겔 등 사상사의 거인들은 너무 어려워서 빠지고, 마르크스나 레닌 등은 어딘지 위험스러워 보여서 누락되었다.……그렇게 대중과의 만남과 소통이 ‘건전해질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사회로 발길을 돌렸을 때 인문학이 욕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세상과 담쌓은 ‘온실 속 지식’이 아니라, 안온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무사안일한 상식을 질타하며 낯선 가치,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자는 소신은 ‘강의를 위한 강의’에 밀려 종적 없이 사라졌다. 수준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본문 6~7쪽 〈지은이의 말〉에서
 
 
3. 지은이 소개 및 차례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www.nomadist.org) 연구원.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러시아에서 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과 사유, 문화의 정치적 동력학이 최근의 연구 주제다. 함께 지은 책으로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해체와 파괴》 등이 있다.
 
문 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연구실에 접속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송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은 방송 일도 잠시 접고 연구실 활동에 푹 빠졌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문학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이후 사회적 배제와 문화정치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함께 쓴 책으로 《코뮨주의 선언》, 《소수성의 정치학》,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2권, 정치사회 편) 등이 있다.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여, 《철학과 굴뚝청소부》, 《수학의 몽상》,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등을 썼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사유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철학의 외부》,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역사의 공간》 등의 책을 썼다.
 
손기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 공부를 시작한 이후 신학과 철학, 종교는 언제나 그의 관심사 한가운데를 차지해왔다. 최근에는 바울의 정치신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들에 주목하고 있다.
 
박정수 수유너머R 연구원.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프로이트, 라캉, 지젝, 푸코, 들뢰즈, 카프카, 루신에 관심이 많으며, 자칭 ‘욕망의 정치경제학’을 개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현대소설과 환상》,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이 있고, 옮긴 책으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등이 있다.
 
차례
지은이의 말. 불온한 인문학은 왜 인문학이 아닌가

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1장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 양상 ― 문 화
2장 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시론 ― 최진석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 ― 정정훈
4장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불온성의 ‘트랜스내셔널’을 위하여 ― 이진경
5장 인문학의 현장은 어디인가 실수-방황의 인문학 현장 ― 박정수
6장 인문학은 위험한 존재를 만들 수 있는가‘희망의 인문학’이 가르쳐준 희망? ― 손기태
 
 
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대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한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고자 희생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인간’과 '문화'를 말하는 인문학은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과 대결한다.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익숙한 현재의 인문학을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든 영토를 떠나는 첫 걸음이다. 그 첫 걸음은 현행의 ‘인문학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에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 뒤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 이처럼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통념적인 삶의 관성에 낯설고 불쾌한 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온한 인문학, 혹은 인문학의 불온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환상 따위로 세상과 자신을 중독 시키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요,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 넣는 것이어야 한다.……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 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 본문 17~18쪽〈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에서
 
 
5. 사유의 불온성, 사상의 전복성, 비판의 급진성! 이것이 인문학이다
 
불온성과 전복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느끼는 기분이다. 또한 불온성은 ‘저들’은 아니지만 ‘저들’을 믿는 자들, 자신들이 저들과 같다는 감각을 갖고 있는 ‘그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은 저들이 찬양하는 위대함이나 탁월함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을 만한 그런 지위도 갖지 못하면서, 그런 자랑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불온성은 ‘저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하는 당혹스런 침범 앞에서, ‘그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 앞에서, ‘저들’과 ‘그들’이 느끼게 되는 기분이고 감정이다.
불온함(전복성)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내용과 이유, 사고방식,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입구에서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알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처하는 한 사람이 “이게 무얼 하려는 것인지” 물을 때에 못마땅함과 불편함, 불쾌함에 당혹스러움까지 뒤섞인 그 얼굴에서, ‘저들’, 혹은 ‘그들’이 느끼는 불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온한 인문학》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효율과 순치의 흐름으로 구성되고 있는 인문학의 흐름에 반한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고유한 전복성과 불온성을 찾아 인문학을 재정의하고 현대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여는 책이다.
 
세상 모든 것에 ‘내 것’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처럼 말에게 낯선 장면들이 또 있을까? 사유 재산 제도란 오직 인간의 눈으로 볼 때만, 익숙하고 당연했던 게 아닐까? 인문학이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고 부르짖었던 것들, 즉 인간, 문화, 예술, 민족, 국가…… 사실 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때다!
과연 우리 자신을 낯설고 거북하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소명이 될 수 있을까?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꿨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反]’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이 ‘좋은’ 인문학일까? 수월하게 소비되지 않은 인문학, 목구멍에 걸려 잘 삼켜지지 않는 인문학, 위장 장애를 일으켜 이미 소화시켰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게워내 직시하게 만드는 인문학―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 본문 83쪽, 〈2장?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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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수유너머104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id, 1946-2010)

 

 

몇 해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늦은 밤, 모스크바에서 가장 화려한 대로 중 하나인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수많은 인파(주로 노인들)가 몰려드는 것을 보았다.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던 그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책이나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레닌의 사진도 걸려있었다. 한 피켓에는 “레닌의 당, 인민의 힘”(구 소련 국가의 가사)이란 문구도 적혀 있었다. 러시아 공산당의 기념 행진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 날이 10월 혁명 기념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흥분과 감흥에 사로잡혔던 내게,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던 어느 러시아 젊은이의 한 마디는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레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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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조국’ 러시아에서도 레닌의 복귀는 아주 느린 속도로, 때론 구식 공산주의자들의 생경한 구호 속에, 때론 당과 무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충실한 이론가들 사이에서만 대단히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사정은 트로츠키도 마찬가지다.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소멸되면서 트로츠키의 저작들이 속속들이 복간되고 관련 서적들이 출판됐지만, ‘체제화된 혁명’이 남긴 피로는 혁명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기억도 상기시키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레닌도 트로츠키도 기억하기 ‘난감한’ 지난 역사일 뿐이다. 그런 러시아가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혁명의 추억’을 되살려낸 것은 바로 얼마 전부터이며, 지젝을 위시한 서구의 새로운 좌파들이 러시아에 소개된 이후의 일이다. 올해 사망한 다니엘 벤사이드의 이름도 그 곁에서 자그마한 반향을 자아내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혁명의 오랜 추억들이 혁명의 조국에서 ‘낯선 기억’의 딱지를 붙인 채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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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라는 사건

 


다니엘 벤사이드는 프랑스 트로츠키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이미 열여섯 살에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후 줄곧 좌파 혁명 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벤사이드에게 레닌을 되살려낸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이제껏 그가 몸담아 왔던 혁명 운동의 당연한 대의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혁명의 ‘빛나는 추억’을 되풀이하고 기념하는 것으로서 레닌의 반복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벤사이드가 되풀이하고자 하는 것은 ‘레닌의 추억’이 아니라 ‘레닌이라는 사건’, 레닌을 통해 재점화되고 불러일으켜질 수 있는 혁명이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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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서의 혁명을 사유하기 위해 벤사이드가 참조하는 것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역사 철학 테제>(1940)에서 근대의 시간을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라 정의했는데, 이는 현실을 계량 및 예측 가능성을 통해 파악하려는 근대적 사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빈 상자를 쌓듯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거나 이어붙일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 과정이 응축점 없이 단순히 산술적으로 조합되는 매개물이란 표상에 기초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들이 아무리 결집되더라도 혁명이라는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무너질 정도로 높게 쌓인 블록들을 해체시켜 바닥에 깔면 위험성이 제거되듯 시간적으로 응집된 모순들도 개별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누적되고 중첩되는 모순들은 쉽사리 해소될 수 없이 뒤얽혀 폭발의 순간을 향해 진전한다. 그것은 미리 계산할 수도, 예고할 수도 없는 순간의 사건이다. 혁명을 통과하는 현실은 이전과는 다른 이질적인 시공(時空)을 열어젖힌다. 그러므로 벤사이드에게 혁명은 ‘정상적인’ 현실 과정을 갑작스럽게 폭력적으로 중단시키고 변형시키는 급변의 순간을 말한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나 데리다의 <법의 힘>(1990)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논의를 굳이 벤사이드를 통하지 않고도 이해할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파 진영에서 나왔던 비판적 반성의 일부는 1917년 혁명을 제도나 당조직, 국가 형태의 차원이 아니라 사건의 형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데 바쳐졌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스탈린의 관료제 국가 장치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판단이기도 했다. ‘실패한’ 혁명을 되살리기 위해 혁명의 기원으로 소급해 들어가 ‘실패한’ 지점들을 캐물었을 때, 늘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제도와 조직, 국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미처 다루지 못했고 스탈린이 실효적으로 작동시켰던 지점이며, 레닌은 그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있었다. 국가를 타도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활동했던 레닌이 국가를 떠맡아 운영해야 하는 위치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지난 90년대에 좌파 진영에서 레닌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었던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벤사이드는 좌파의 좌초 지점 역시 바로 거기, 레닌의 이중적 입장을 분석하고 읽어내기보다는 사유하지 않고 회피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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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알랭 바디우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실패를 경직된 일당 전제주의로부터 찾는다. 하지만 군대같은 규율로 무장한 당조직은 내부의 민주적 요소들을 갉아먹고 고사시킴으로써 결국 공산주의마저 파멸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국가의 형태로부터 찾지 않는다. 정치의 모든 제도화된 형태는 일종의 자격 부여 체제로서 ‘배제’를 통해 운영되기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바디우나 랑시에르는 혁명과 민주주의를 사건적 계기 속에서 사유한다는 점에서 벤사이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조직과 형태, 국가 등의 제도적 차원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태도가 혁명을 구체적으로 사유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련의 경험을 반성하며 좌파가 모든 책임을 당과 국가에 미루고 한발 물러서는 동안, 우파는 그 ‘오물의 한 가운데’에 들어감으로써 결국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그 치명적 결과가 신자유주의의 전성시대다). 제도를 비판하며 실패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비판과 성찰의 '의연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혁명은 어느새 신기루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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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정치를 시작하라

 


좌파의 이런 태도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멘셰비키가 취했던 이중 혁명론 역시 이런 논리 속에서 재구성된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1단계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를 이룰 때까지 부르주아지에 조력한 다음 궁극의 2단계 혁명,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입장에서 우리는 좌파의 현실 회피주의를 찾아낸다. 1905년 당시, 혁명은 예측 가능한 역사적 수순이므로 부르주아지가 그 밑바탕을 마련해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입장은 현재의 좌파가 취하는 의연함과 얼마나 멀리 있는가. 적들에게 권력을 순순히 양도하고 ‘혁명의 이론에 따라’ 역사의 컨베이어 벨트가 혁명을 전달해 줄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가. 벤사이드는 말한다. “당의 매개를 제거하라. 그러면 당신은 무(無)-당의 일당인 국가를 갖게 되리라!”(<영원한 스캔들>) “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이 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한다.”(<도약! 도약!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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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주의의 좌절은 분명 경화된 당조직과 부패한 관료제 국가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당과 국가를 전혀 배제해 버린다면 그것은 정치의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상의 모든 곳에서 정치가 작동한다고 외치는 좌파들의 목소리가 옳은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정치의 장인 제도에서도 정치는 여전히 작동 중이기 때문이다. 레닌이 호출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혁명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 어떤 곳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정치는 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고려돼야 하고, 어떤 순간에서도 터뜨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혁명이라는 사건, 도약을 마주치기 위해 우리는 임의적으로 방기하는 어떤 순간과 장소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벤사이드의 이 주장에서 우리는 연속 혁명(트로츠키)의 반향을 듣는다.

 

 


지금 좌파는 대중을 조직화하는 문제에서 물러나 관조적 태도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당과 국가라는 골치아픈 문제와 만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좌파가 사건으로서의 혁명을 근본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면, 어째서 당과 국가는 예외로 두어야 할까. 특히 조직화의 첨점으로서 당에 관해, 좌파는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레닌을 불러내, 다시 그와 마주쳐야 하는 절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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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2010년 12월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제목과 구성을 약간 바꾸어 옮겼습니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Q. 요즘 반값 등록금 시위나 서울대 법인화 저지 점거사태 등을 보면 젊은 사람들의 정치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이 강좌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진경: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얘기하면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이죠. 정해진 코스대로,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쌓아서, 정해진 자리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일반화된 요구입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장은 딱히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꼭 따야 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위해 어이 없이 비싼 등록금을 내야하는 것이죠. .

 

얼마 전에 칼럼에서 ‘비정규 학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요즘에는 비정규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시간을 피해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비정규 학생이 생긴거죠. 그렇게 일함에도 등록금을 제대로 벌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 학생이 하나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학졸업장을 따야하는 학생들을 불리한 위치로 몰아세우는 것이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한국 학벌중심 사회의 현실입니다.

정치란 그런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런 자리를 뒤집어 버리는 것, 이런 것이 정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그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치안에 반하는 정치다’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현재적인 의미가 크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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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을 넘어 무상교육의 그날까지.... 촛불아 꺼지지 말고 계속 타올라라!>

 

변성찬: 요즘 한국 대학생은 존재 자체가 소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그렇게 지위가 변화하는 것은 위기일텐데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정치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대학생들에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그런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들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수화시켜 준 MB 정부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하하하!!)

 

 

Q. 바흐친은 요즘 한국의 대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최진석: 아까 얘기했던 웃음과 연결하여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은 일상의 문법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바흐친이 전복적인 힘으로 얘기하는 것은 폐부를 찌르는 비웃음과 풍자적인 불온한 웃음이죠. 그런 것들은 최근 박정수씨의 쥐그림 사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쥐그림이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검찰은 기소 내용에서 그 그림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 미래를 빼앗았다고 강조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이런 방식의 웃음이야 바흐친이 말한 웃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 검찰이 말한 아이들은 말그대로 퇴행한 MB의 아이들인거죠.

 

이렇게 정권이나 권위에 누구라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사태 자체는 자신들의 권위의 벽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도발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권위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하면서 그 벽을 건드리기도 하고, 그 벽에 오줌을 누기도 하는 방식, 직접적으로 권위를 망치로 부수는 방식이 아니라 권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것 냄새나게 만드는 방식이야 말로 권위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진경: 요즘엔 웃음에 대해서 좀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준비하면서 불온한 웃음,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이 웃음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편에 있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MB 정부가 유발하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웃길 의도가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깔깔거리고 웃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의도 없는 개그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웃음은 왜 유발되는지, 그 의미는 뭔지, 굉장히 다른 종류의 이 웃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웃음은 더 다양해지고 더 중요해진 것 같은데, 바흐친의 사상을 통해 웃음의 정치학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하하하....-_-;; 그냥 웃기다.>

 

 최진석: 바흐친은 패러디적 웃음의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죠. 예를 들어 건설부양에의 의한 정권를 비판하면서 누군가 거대한 삽의 모형을 만들어 던졌는데, 그것은 거대한 이미지를 통해 정권이 하고 있는 일과 유사하지만 들어나서는 안 되는 이미지를 들어내며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패러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죠. 보이지 않았던 본질을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던 권위를 추락시키는 방식들. 그것이 재미를 넘어서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웃음은 굉장히 치명적인 웃음이 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MB 정권은 패러디 자체의 위험성의 낌새를 채로, 그 근원을 봉쇄해 버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웃음을 주고 있지요. 강좌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이런 사람들은 이 강좌를 꼭 들어야한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변성찬: 등록금 투쟁하고 있는 대학생이 들으면 좋지 않을까요? ^^

이진경: 정치를 좀 더 큰 스케일로 그리고 통념을 깨는 방향으로 사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대학생 여러분, 힘내세요^^!!>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wabore

 

Q. 강의 전에 읽어야 할 책이 있나요?

이진경: 강좌에서 만나게 될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오면 좋겠지만 책을 안 읽는다고 강의를 못듣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사유의 열기로 무더운 7월 금요일 밤을 더욱 화끈하게 만들어 줄 이진경, 최진석, 정정훈, 변성찬 강사의 열강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http://nomadist.org/xe/lecture/145640 강좌 안내는 요기 클릭!!!

 

그럼, 7월 8일 첫강의에서 만나요! ^^


Posted by 수유너머104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대표 미남 (...........응? ) 강사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정정훈이 '히치하이커의 정치학-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를 탐사한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강좌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현대 정치철학에 왠 히치하이커?

도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강좌에서 만나게 될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어떻게 한 곳에 엮을 수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세 강사를 만났다.

 

 

                                                                                                                                  인터뷰 : 강좌 반장 아샤   

 

 

 

Q. 강좌 제목이 특이한데요, 어떻게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진경: 사상가들을 공부할 때 어떤 때는 그들의 사유에 편승을 해서 그것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뒤집기도 때로는 대결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종의 히치하이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적지가 같으면 같이 가지만 목적지가 다르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딴 길로 가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히치하이커 역할을 자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정치학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제이기 때문에, 방향을 가지고 운전사·차주와 대결하는

히치하이커라는 컨셉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정치사상가들과 대면하는 방식을 만들어보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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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찬: 얘기를 들어보니 히치하이커가 아니라 하이잭킹의 느낌인데요?

(일동 웃음~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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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킹?? 혹은 하이잭킹??>

 

 

Q. 강좌에서 총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만나게 될텐데,

여섯 명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얘기해주세요.

 

최진석: 현대 정치철학 경향이나 철학자들의 사유를 소개·해설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추종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을 거부합니다.

예를 들어 첫 강의의 주인공인 아렌트의 경우도 통상적인 방식이 아닌 아렌트의 사상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진경: 남으로 갈 비행기를 북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죠.

 

변성찬: 그게 정확히 하이재킹이죠.

 

이진경: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랑시에르의 ‘평등성의 정치학’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성까지 밀고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좌에서도 랑시에르의 얘기에 그대로 주석을 달지는 않을 것입니다.

 

Q. 정치철학 강좌인데 바흐친이 있는 것도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바흐친~ 하면 문학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최진석 : 그렇죠. 바흐친을 정치철학자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흐친이 얘기하는 전복성의 사유가 단순히 예술이나 문학을 논할 때의 전환점,

새로운 미적감각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흐친이 이야기하는 감각성을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도입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강좌를 통해 학문적 담론 안에 곱게 정리된 그의 사유를 끄집어내어 현실 속에 던질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를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포리아 자체로 끝나버리는,

‘불가능하다’와 ‘불가능하지 않다’를 동시에 말해버리는 것으로 데리다의 정치철학을 지표화해버리고 맙니다.

그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의 언어로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은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아포리아로서 데리다의 정치철학적인 가능성을 ‘법의 힘’이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사유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바흐친이 주목했던 유머가 가진 힘과 그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진경 : 특히 바흐친의 웃음, 유머는 정말 공부해 볼만 하단 생각이~~ 정말 재밌다는..!

나중에 베르그송의 '웃음'이랑 같이 해서.. 더 공부를 해보면 좋을 듯...?

(인터뷰 도중에도 끊이지 않는 기획들....^^)

 

Q. 영화 평론가 변성찬이 보는 들뢰즈의 정치철학도 궁금합니다.

 

변성찬: 현대정치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메타 정치학을 얘기합니다.

들뢰즈는 ‘정치란 이런 것이다’라고 사유를 한 사람이 아닌 만큼 더더욱 그럴 것 같은데요,

‘천의 고원’,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영화평론을 하는 사람인만큼 ‘씨네마’에서

들뢰즈가 지나가듯 얘기하는 현대적 정치영화와 고전적 정치영화의 차이라는 부분을 참고로 하여

들뢰즈가 얘기하는 ‘소수성의 정치’라는 개념이 갖는 함의를 좀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들어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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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강좌를 통해 우리가 조우하게 될 철학자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하일 바흐친,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Part 2에서는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펼쳐집니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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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 1 1  여 름 강 좌 안 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은 매 분기별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를 통해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경험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그리고 삶으로부터 다시 공부를 길어내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여정! 배움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개강일: 2011년 7월 4일 월요일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18-23 이스턴빌 2층 수유너머N | 전화 (070)8263-0910 | http://www.nomadist.org

 

∙ 접수계좌: 우리은행 011-9571-1509 (휴대 전화번호와 동일) 예금주 명: 오하나

 

∙ 강좌문의: 오하나(011-9571-1509), 문화(010-6210-3021)

 

∙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위의 접수계좌에 입금하신 후,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에 강좌명과 입금자명을 남겨주세요.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수강생명과 입금자명이 다를 경우 꼭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세요.)

 

∙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좌의 수강료는 환불되지 않습니다. <강좌신청> 게시판의 공지를 참조해주세요.

 

 

 

 

 

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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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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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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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오빠가 돌아왔다!” 1980년대 한국 비평계와 지성계에 민중 문화 담론을 촉발시키고서 홀연 사라졌던(?!) 바흐찐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완역본’이라는 휘장을 감고서. 물론, ‘문화의 시대’를 선언하던 1990년대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군주가 지배하던 2000년대에 그가 온전히 종적을 감췄던 것은 아니다. 그의 최대 주저(主著) 중 하나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아카넷, 2001)가 번역되었고, 몇 권의 전문 연구서들이 간간히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문예 미학의 ‘태두’였던 루카치와 나란히 거론되고, 한때 구미권에서 ‘바흐찐 산업’이라는 표현이 떠돌 정도로 명성과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비한다면, 지난 20년간 바흐찐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그가 ‘돌연’, 혹은 ‘마침내’ 귀환했다! 국내 초역인 <예술과 책임>과 오래 전 절판되었던 <프로이트주의>가 그 시작이란다. 그저 빛바랜 신화의 추억일까, 아니면 미처 소진되지 않은 사유의 잠재력일까?

<예술과 책임>은 학문적 이력을 갓 시작하는 청년 바흐찐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두 편의 논문들을 담고 있다(정확히 말한다면, 표제 논문인 "예술과 책임"은 몇해 전 <말의 미학>(길,
2006)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고, "행위 철학"만이 유일한 초역이다). 1919년 작성된 "예술과 책임"은 불과 세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바흐찐의 사유 전체를 추동하는 본원적 모티브를 담고 있다. 알다시피, 칸트의 3대 비판서를 통해 과학과 윤리, 예술이 상호 독립적으로 분과학문의 길을 간 이래, 근대인의 삶은 성찰의 거울을 상실한 채 유전(流轉)을 거듭해 왔다. 달리 말해, 윤리적 반성 없이 과학과 예술이 가능하고, 윤리는 그저 선택과 맹목의 대상으로 유폐되거나, 예술 지상주의의의 미명 아래 미(美)의 자족적 실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근대의 발전은 과학과 예술, 윤리가 각자 ‘제 갈 길을 떠나버림으로써’ 성취한 역설적인 성과였고, 그 파국적 결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기 말·세기 초’의 혼돈과 착종이었다(백년 전의 이야기지만, 불과 십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20세기를 전후한 유럽의 시대 정황은 고스란히 바흐찐에게도 이어져, <예술과 책임>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구성했다. 문화와 삶의 분열을 어떻게 다시 통일할 수 있을 것인가?

"행위 철학"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바흐찐 나름의 응답으로 작성된 글이다(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 요약은 그만두겠다). 그런데 이 텍스트를 둘러싼 사연이 대단히 흥미롭다. 바흐찐이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첫 저서는 1929년의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불확실한 혐의로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유형길을 떠나게 되었고, 5년 후 간신히 돌아와 외국어 교사나 문학 강사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잔혹했던 스탈린 시대를 살아남은 그를 기다렸던 것은 화려한 복권이었다. 50년대 이후 그가 학계에 되돌아오자마자 그의 저술들은 우후죽순처럼 재출간되는 호기를 맞는다. 1963년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이 증보·출판되었으며, 40년대에 작성된 박사학위논문 <리얼리즘 역사에서의 라블레>는 1965년에 현재의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그와 동시에 줄리아 크리스테바나 츠베탕 토도로프 등을 통해 바흐찐은 삽시간에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과 함께 전세계적 ‘유행’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꾸준히 발간된 바흐찐의 저술들은 ‘문학 이론의 시대’였던 20세기 후반기를 장식하며 널리 연구되었다. 1980년대에 우리에게 선보였던 바흐찐의 모습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즉, 러시아에서 나온 바흐찐의 저술들은 먼저 서구에 소개·번역되고, 그것이 다시 한국에 수입되면서, ‘민중 문화 및 문학 연구가’ 바흐찐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에 접어들어, 바흐찐의 초기 원고들을 뒤적거리던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1920년대의 청년 시절에 바흐찐이 썼던 원고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아직 남아있었으
며, 이때의 원고들은 문예학에 정진하던 후반기 원고들과는 상당히 다른 주제 의식이나 성찰적 태도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철학적 미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청년기 저술들 가운데 최대의 논쟁거리는 바로 1986년 공간(公刊)된 "행위 철학"으로서, 바흐찐이 학문적 기원이 (그간 알려졌던 바대로 문학이 아니라) 철학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간주되었다. 토도로프는 바흐찐의 문예학 연구는 그의 철학을 문학이라는 풍요로운 사례들로부터 입증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행위 철학"의 발견은 마치 토도로프의 이 말을 입증이나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이때부터 러시아에서는 바흐찐을 ‘철학자’나 ‘사상가’로 다루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한국을 포함해 서구의 바흐찐 연구가 시들해졌던 지난 20년간 이 부문에서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예컨대 현재 러시아에서 간행 중인 <바흐찐 저작집>의 제1권이 바로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총 950여 페이지 중 600페이지에 달하는 주(註)가 청년 바흐찐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규명하고 입증하는 데 바쳐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 철학"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거의 백년 전에 수기(手記)로 작성된 문서인데다, 출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청년기의 자유로운 사유와 실험이 녹아있는 텍스트이며, 많은 부분들이 훼손되거나 간략한 메모의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미적 활동에서의 작가와 주인공"(<말의 미학>에 수록)과 연관되지만, 온전히 행위와 윤리라는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텍스트로서 사유의 치밀함보다는 자유로운 도약과 상상력이 더욱 돋보이는 이 글은 ‘번역 불가능하다’라는 딱지를 떼지못할 운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은 사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실험적’이며 피치못하게 ‘문제적’인 운명을 밟아갈 듯하다. 가령, 제목부터 그러한데, 그간 국내 러시아 학계에서 통용되던 이 텍스트의 제목은 ‘행동 철학’이었던 것이다. 또한 학문과 사유, 활동 사이의 규정된 범주나 경계를 넘나듦을 지칭하는 (‘위반transgression’과 관련된) ‘transgredientnyi’는, 그간 ‘경계 이월적(移越的)’이라는 번역어가 사용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외재적(外在的)’이라는 단어로 옮겨졌다. 번역어의 선택에는 언제나 번역자가 짊어진 사유의 노고가 뒤따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경우 말 그대로 ‘외재적’으로 옮겨져 왔던 ‘vnenakhdimost'(exteriority, outsideness)'와는 앞으로 어떻게 구별해 갈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잠재적인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바흐찐의 저술들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더 없이 소중하다. 바흐찐이 일단의 지적 유행에 밀려 적절히 소비되고 말 ‘박제된 이론’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행위 철학"은 그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논란의 근원이며 바흐찐 신화의 기원에 해당하는 텍스트지만, 실제로는 거의 읽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번 한국어 번역본의 출간이 그 ‘신화’의 진상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이로써 바흐찐은 누군가에게 사유의 새로운 심화나 전화(轉化)를 촉발하겠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실망과 환멸을 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화가 그저 신화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직접 만나고 읽을 수 있는 신화!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데, 사유의 ‘전화’든 ‘실망’이든 일단 맞부딪혀보고 판단할 일이다.

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계간 <자음과 모음> 2011년 여름호(제12호)에 게재되었습니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두 번째 트랙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다. 연구실에 자주 접속한 친구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 이름은 번쯤 들어봤을터인데... 그의 다른 저작 중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를 선택한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지난 트랙 1에서 맑스의 『자본』을 읽고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데는 뭔가!?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맑스의 『자본』을 읽고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들뢰즈·가타리를 만나면 조금은 해소가 되지 않을까? 혹은 어떻게 증폭이 될까? 여기저기서 트랙 2 강의에 대한 질문들이 들린다.

 

그동안 좀처럼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학자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강의 준비(?)와 집필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는 최진석 선생님을 만나 궁금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 이들테면 “왜 하필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입니까? 절판되서 책 찾기도 힘든데용?” 같은 기초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왜 지금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어야 할까?

 

 

인터뷰어 / 화 (불온한 인문학 튜터)

인터뷰이 / 최진석 (불온한 인문학 강사)

 

 

 

: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 선택한 이유는 뭔가? 들뢰즈의 다른 책들도 많은데~ 그 중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고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진석 :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제목으로 책을 두 권을 냈다. 첫 번째가 『안티 오이디푸스』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 nie)고 두 번째가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 nie 2)이다. 들뢰즈는 워낙 전방위적인 철학자이기 때문에 책 마다 특별한 제목이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시리즈로 나온 것은 사회철학에 해당하는 책이다.

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들뢰즈의 사회철학책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내가 기대하던 사회철학과 이미지가 다르더라.

 

 

화 : 그 때가 대략 몇 년 전?

 

진석 : 90대 중반에 처음 읽으니까... (자세한 건 묻지 말라... ㅠ)

어쨌든 그 당시 사회철학 하면 마르크스나 헤겔을 생각하거나 좀 세련된 사람이라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 들을 이야기 했다. 그런 책들의 특징은 굉장히 논리정연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피아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철학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상당히 깨더라.

 

 

 <그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 뭐가 그렇게 깼나...?

  

진석 : 무엇보다도 전혀 이해할 수 없더라. (웃음) 재밌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 첫 문단에서 '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라고 한다. 여기서 <그것>은 어떤 대명사가 아니라 사실은 이제 사회전체 혹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감싸고 존재하도록 만들면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주는 힘 즉 생성력에 대한 이야기 이다.

 

 

: 그래도 『안티 오이디푸스』읽으려고 시도 했다가~ 문단 보고 뭔말이야? 하고 덮었단 친구들도 많더라. 도대체 그 <그것>이 뭔지 도통 감이 안온다~

 

진석 : 프로이트로 따지면 리비도(Libido) 같은 것이다. 사실은 그런 힘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힘의 장 힘의 무대를 어떤 방식으로 구축하는 가가 바로 사회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철학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사실 이런 걸 안 건 굉장히 나중의 일이다^^)

 

 

: 들뢰즈·가타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이 있을 것 같다.  다른 사회철학과는 어떻게 다르던가?

  

진석 : 사회철학이나 역사철학이란 관점에서 이 책을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가 전제하는 것이 있는데 삶이나 사회의 역사에서는 항상 중심화하는 힘이 있고 그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힘이 같이 있다는 거다. 전자를 구심력 후자를 원심력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두 가지 힘의 상호관계가 특정한 사회형태를 결정짓기도 하고 사회가 다른 사회로 변화하게 하는데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확장적인 측면을 가지면서 모든 것을 중심적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이때 이 자본주의를 중심화하는 힘, 사회의 모든 방면으로 확장하는 힘이라는 것이 자본의 힘이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봉건사회다. 봉건사회에서는 신분이라는 규칙이 절대적이었다. 가령 양반과 상민은 결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분리돼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도 있다. 돈 많은 상민이 양반 신분을 산다. 그리고 그는 양반 행세를 한다고 큰 갓도 써 보고 기와집도 올린다. 그렇게 해 봤는데 양반들이 인정을 안하고... ‘저 놈은 원래 상민 출신이다.’ 결국 별로 재미를 못 봤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신분이라는 규칙(코드)다. 이 신분이라는 규칙(코드)은 봉건사회에선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 않느냐. 과거로 가면 갈수록 신분을 규정하는 벽이라는 것은 더 두텁고 강했다. 한 사회가 통일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와서는 완전히 변한다. 잘 알다시피 ‘돈’이면 안되는 게 없지 않느냐. 내가 물건을 파는데 ‘양반한테만 팔고, 상민한텐 안판다?’ 아니지 않느냐. 돈은 이전의 신분 관계를 해체 시키는 힘이다. 또한 과거에 있었던 유기적인 공동체 역시 다 파괴한다. 씨족 공동체, 지역 공동체가 화폐가 도입되면서 무의미하게 됐다.

 

화폐라는 것이 교환형태가 되면서 돈에 의해 모든 것이 평등하게 환원되어 버리는 이런 상황이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성이다. 돈이라는 규칙. 신분이 아니라 돈이라는 규칙이 자본주의 사회를 재패했다. 이것을 들뢰즈·가타리는 초코드화 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굉장히 모순적인 양면성을 갖는다. 자본은 모든 것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만들어주지만. 자본이 없다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화폐 없이는 그 무엇도 존재를 규정할 수 없다.

 

겉보기에는 자본주의는 평등하고 이상사회로 보인다. 그러나 자본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돈이라는 규칙.. 그 누구도 화폐를 통하지 않고선 세상에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벌지 않을 수 없고.. 돈을 벌어야 하는 규칙에 종속되지 않고선 살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화폐에 대한 중심화이다. (이 내용에 대해선 “불온한 인문학” 트랙 1『자본』 강의에서 열심히 배웠지요? ^^)

 

 

 

 

 

목요일엔 『안티 오이디푸스』를 토요일엔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 “불온한 인문학”은 목요일 강의와 함께, 토요일엔 함께 책을 읽는 집중 세미나를 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는 목요일 강의를 통해서 만난다면 토요일 세미나에서는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다. 권의 책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도 궁금하다.

 

진석 : 빌헬름 라이히는 20세기 초에 독특한 정신분석 학자였다. 그는 대단히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당시에 사회 하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노동자 계급이 분명히 계급의 해방을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 지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 한국 정치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가?

 

진석 : 그렇다. 빌헬름 라이히도 아는 것과 실천이 확연히 분리되는 현상 목격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세상에서 노동자들도 돈의 규칙을 따르는 한에서 그들이 품고 있었던 계급 해방의 욕망이라는 것은 사실 자본가들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에게 반대했지만 그들의 욕망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에게 타협하거나 종속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히가 던진 질문이 “왜 대중은 혁명적이지 않는 가” 다.

 

들뢰즈·가타리는 질문을 이어받아서 이렇게 대답한다. “문제는 대중이 혁명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욕망이 혁명적인가 아닌가” 다. 혁명의 열쇠 혹은 해방에 대한 잠재력은 어느 누구에게 어떤 계급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법칙이라도 받아들이지 않고 빠져나가지 않는 힘 종속되지 않겠다는 욕망 자체에 있는 것이다.

 

말은 굉장히 간단하지만 사실 우리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건전하다든지 바람직하다는 기준과 분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학교 가고 좋은 회사 입사하고 잘 먹고 잘 살라.’ 는 사회의 요구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죄의식을 갖게 한다든가 혹은 잘못된 삶을 살지 않나. 하는 불안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 그 불안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욕망이 혁명적일 수 있을까?’ 를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들처럼 사는 걸 욕망하는 게 그렇게 나빠요?’ 하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더라.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욕망을 줄여라. 이런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진석 : 보통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을 보자. 이것들은 사실 대부분이 타자의 욕망이고.. 사회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타자의 욕망이 다 나쁘냐’ 그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우리의 활동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어느 누구의 활동도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각자가 놓여 있는 맥락 상황은 서로 다르다. 거기에서 욕망의 선이 나에게 주어질 선을 따를 때와 아닐 , 각각의 경우가 다르다. 원칙에 따라 다른 것이다.

 

문제는 동일하게 ‘이것은 좋은 것이다.’ 하고 다른 욕망의 가능성을 꺾어버릴 때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타성적인 존재니까 ‘정말 그래’ 하고 쉽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번 강의를 듣다보면 타성적인 우리의 존재에서 ‘야성“을 끌어 낼 수도 있을까?

 

진석 : 하하~기대하시랏~

 

 

 

: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혁명, 욕망~ 그리고 야성? 이런 단어가 나오니 흥미가 돋긴하는데~ 문제는 너무 어려워보인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친해질 있는 좋은 방법 없나?

 

진석 : 『안티 오이디푸스』는 읽어 보는 것이 좋은데 쉽지 않다. 현재 나와 있는 판본은 절판인데다가 최선의 번역본도 아닐 뿐 더러 원래 내용 자체도 쉬운 내용이 아니다. 일단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토요일 집중세미나에서 읽으면서 강의 예습을 하시고, 목요일 강의를 듣고,『안티 오이디푸스』를 직접 읽으면서 복습을 하면 어떨까. 중간 중간 읽어야할 프로이트 논문도 몇 편 있다. 그것도 조만간 공지할 예정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아마도~! 그 어렵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출구를 찾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 혹시 출구만 있고 나가는 문은 없는 거 아닌가?

 

진석 : 하하^^ 그건 책임 못지겠다~~

 

 

 

10주동안 강의를 맡아줄 최진석 선생님~ 기대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마디로 한다면?

 

진석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해방에 관한 책이다. 욕망의 해방은 결코 범죄도 아니고 살아있는 존재에겐 필연적인 충동이다. '욕망해도 좋다.' 라는 것이 이 책의 중심테마다.

 

 

 

 

 

빽빽한 메모로 가득한 최진석 선생님의 『안티 오이디푸스』. 그가 풀어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벌써 부터 기대가 된다.

 

 

[5월 21 개강-10주 과정]

Ⅰ 트랙 2 강의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Ⅱ 트랙 2 세미나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대중의 흐름과 욕망의 정치학-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옮김, 그린비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트랙 2 강의 안내는 요기!

http://nomadist.org/xe/bulin/12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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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대중 공동 학습의 장,

“불온한 인문학” 트랙 2를 개강합니다.

 

 

 

*불온한 인문학은 일주일에 강의 1회`세미나 1회의 방식으로 총 5개월 동안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주동안의 트랙 1 과정을 마치고

이제 트랙 2가 시작됩니다.

이번 1기에 한하여 트랙 2 신청을 받습니다.

 

 

 

주요 프로그램

Ⅰ 트랙 2 강의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Ⅱ 트랙 2 세미나 :

대중의 흐름과 욕망의 정치학-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옮김, 그린비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강사: 최진석

튜터: 정행복, 문화

일시: 2011. 5. 21(목) ~ 2011. 7. 30(토)

수강료: 3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http://nomadist.org/xe/bulin

문의: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연구실 대표 번호 (070) 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1.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 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2. “불온한 인문학” 트랙02에서는 10주간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3.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4.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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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바흐찐, 첫 번째 만남

우리나라에 바흐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였다. 루카치로 대표되던 맑스주의 문예이론의 엘리트주의를 넘어서는 한편으로, 문학과 예술의 민중적 토대에 대한 모색이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바흐찐은 문화를 루카치처럼 ‘해방’과 ‘진보’의 위대한 이념이 전개되는 과정이 아니라, ‘대화’와 ‘웃음’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이 종합되고 역사 속에 풀려나오는 과정으로 묘사했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평범한 민중들의 삶 자체가 일으키는 사건에 다름 아니었고, 이는 ‘민중문화’를 노래하던 80년대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혁명의 고향인 러시아 출신의 이론가라는 사실은 바흐찐을 ‘신화적’ 위광 속에서 조명하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문화의 시대’에 진입하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은 홀연 사라져 버렸다. 그의 책들은 절판도서의 목록에 올라갔고, 세간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효용이 다한 걸까? 그리고 2011년, 돌연 그가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완역본’이란 꼬리표를 달고서. 그저 철지난 이론의 반복일까? 혹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신화의 귀환일까? 그의 이름이 낯선 독자들을 위해 간략한 소개부터 해보자.




바흐찐, 신화와 삶의 이력

1895년에 태어난 바흐찐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은 혁명의 격랑이 러시아 전역을 휩쓸던 때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빈궁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서클을 조직해 강의와 연구, 세미나를 하며 그 시간을 버텨냈다. <문예학의 형식적 방법>(1928), <프로이트주의>(1927),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 등은 이 무렵 바흐찐이 서클 친구들의 명의로 출판한 책들인데,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란중이지만 적어도 바흐찐의 영향아래 쓰여졌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정식으로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저작은 1929년에 나온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이었고, ‘대화주의’라는 개념을 낳은 이 책은 후일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다 준다.

우연하게도, 첫 저작이 나온 직후 바흐찐은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유형길을 떠나게 된다. 이유는 분명치 않은데, 아마도 스탈린의 대숙청 와중에 ‘미심쩍은’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작업의 일환이었던 듯하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중앙아시아 황무지로의 유배는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새옹지마랄까, 유형의 댓가로 바흐찐은 잔혹한 시대에서 살아남게 된다. 이 시기 그의 청년시절의 벗들은 대부분 총살되거나 실종되었던 것이다. 유형이 끝난 후엔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연구를 이어나갔다. 30년대의 괴테론(크로노토프론)이나 40년대의 민중문화론이 이 시절의 성과들이다. 특히 <프랑수아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40년대 집필, 65년 출간)는 시간이 갈수록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대작으로 현대철학과 문화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 사후, 정식으로 복권된 바흐친은 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과 함께 서구사회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게 된다. 그의 저술들이 속속 발굴·번역되었고, 1980년대에는 ‘바흐찐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것이다. 한국에 그의 이름이 소개되었던 것도 이런 맥락을 통해서였다.


바흐찐과 한국사회의 두 번째 만남. ‘귀환’의 의미

짐작했겠지만 80년대에 영미권을 통해 소개된 바흐찐은 어느 정도 이론적 기성품의 형태에 가까웠다. 바흐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서구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그의 저작들 역시 중역본들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절 한국사회와 바흐찐의 만남이 ‘신화’와 뒤이은 ‘망각’으로 기록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열광이든 망각이든 우리 자신의 체화된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출간된 바흐찐 선집 두 권, <예술과 책임>과 <프로이트주의>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바흐찐 신화가 이미 한물간 지금 그의 저작들이 원어로부터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의 사유를 우리 내적 문제들과 부딪히게 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생산하게 만들 기회일지 모른다. 유행하는 이론이 아니라, 빛바랜 신화일지언정 고전으로서 바흐찐을 읽게 된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유의 새로운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번에 나온 선집은 이른바 바흐찐 사유의 ‘기원’에 해당하는 글들이다. 1920년대 초엽에 집필된 ‘예술과 책임’, ‘행위철학’은 번역의 난해함과 어려움 때문에 지금껏 제대로 읽히지 못했다. 이런 텍스트가 한국어로 초역됨으로써 전공자뿐만 아니라 여타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 또한 바흐찐의 초기 사상에 접근할 통로가 생겨난 것이다. 아직 두 권에 불과하지만 한국어판 선집 간행의 가장 큰 의미는 여기 있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바흐찐과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더 이상 ‘신화’라는 후광 속에 있진 않을 듯하다. 신화는 제대로 알지 못할 때나 피어나는 이미지니까. 하지만 신화의 휘장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현실을 생산하는 사유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만남을 문화라 한다면, 바흐찐도 언급했듯, 역사 속의 문화는 신화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나날의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에 다소간의 매혹을 느꼈다면, 서둘러 도서관으로가 바흐찐의 글들을 넘겨보길 바란다. 그것이 사유와 실천으로서 문화의 시작인 것이다.



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이 글은 2011년 3월 27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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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78285.jpg  * 러시아어판 <천 개의 고원>

 

최근 러시아를 다녀온 선배의 블로그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Tysyacha plato : kapitalizm i shizophreniya)이 작년 말 러시아어로 완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Yakov Svirsky 옮김, U-Faktoriya, 2010). 코뮨에서 생활하며 부딪혔던 사유와 삶이라는 문제 외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중요한 인용 전거 중 하나였다. 그때 “혹시나 이제라도 러시아어로 번역된다면 직접 번역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하며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감이 들었다. 이제 <천 개의 고원>이 러시아어로 출판됨으로써, 들뢰즈의 거의 모든 저술들을 러시아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듯하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들뢰즈와 러시아는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글을 쓸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해명을 잠시 늘어놓는 것, 아니 그 해명이야말로 현재의 러시아 지성사적 상황을 조감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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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위부터 <경험주의와 주관성/칸트의 비판철학/베르그손주의/스피노자>(합본), <차이와 반복>, <주름>, <키노>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유입된 지적·문화적 경향이지만, 많은 문학 연구가들은 러시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1960-70년대 소츠-아트(Sost-Art)로 대변되는 개념주의 예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더 멀리는 체호프 등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엽으로도 밀고갈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탈린주의가 균열을 빚은 해빙 이후의 문학과 예술에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입장들에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던이 서구보다 ‘앞서’ 존재했다거나, 혹은 적어도 서구와 ‘동시대적인’ 문화적 경향이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직접 사용되진 않았어도 러시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주장들에는 여하한의 문화사적 흐름에서도 결코 뒤지고 싶어하지 않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지는 듯하다(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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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안티 오이디푸스>, <니체>, <니체와 철학>, <의미의 논리>, <프루스트와 기호들(초판)>

 

그러나 철학적인 문제 설정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살펴본다면, 러시아에서 그것은 분명 소련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로 밀려들어오고, 그에 대한 반응 및 성찰의 결과로서 포스트모던‘한’ 러시아 사유도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기 산정의 문제를 갖고 오래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들뢰즈, 러시아 현대 사상의 관계만이 관심사인 탓이다.

 

 

2000년대 후반의 유학 시절에 내가 놀랐던 것은,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식상해져 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제적인 것으로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서구에 소개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두 지성, 미하일 바흐친이나 유리 로트만을 프랑스 철학자들과 연관시켜 논의하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흔한 반론이 있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점으로는 러시아 지성의 고유성을 논할 수 없다”는 강한 반발감이 그것이며, 이에 따라 문제 의식은 언제나 “고전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수렴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아카데미 전통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해야 할 적(敵)이든지 혹은 적극 끌어안고 과거(‘러시아 전통 혹은 소비에트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할 원군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다소간 완고한 아카데미의 철학부들은 전자를 대표했고, 후자는 발레리 포도로가(Valery Podoroga)와 같은 서구 지향적 철학자들로 대표되었다.

 

52629.jpg  * 발레리 포도로가

 

1970년대에 이미 푸코의 <말과 사물>이 소개되었고, 소련의 붕괴 즈음과 그 이후로 현대 서구 철학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 철학서들이 물밀듯이 번역되어 나왔다. 보드리야르는 진작에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었고, 데리다나 라캉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들뢰즈의 책들은 번역도 느리고 논의도 적어 보였다. 가령 <천 개의 고원>의 1부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포도로가의 친구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이 90년대 초에 요약본을 선보인 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완역본이 나올 수 있었다. 서구의 모든 책들이 번역될 이유는 없겠으나, 포스트모던 사회와 사상의 가장 논쟁적인 고전이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라면, 다른 책들의 번역 속도에 비추어 확실히 늦다는 생각이 든다.

 

ryklin.jpg 8976823257_1.jpg  * 미하일 리클린과 그의 책

 

내게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정할 만한 경험이 있었다. 유학 초에 러시아 철학의 현재성을 살펴본답시고 우연히 고른 책의 하나가 이고르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Zhil' Delez: vvedenie v postmodernizm, 2005)이었다. 내 호기심을 끈 것은 이 책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이었기 때문인데, 한편에는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놀라움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들뢰즈=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등식이 통용된다는 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탓이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심오한 체계성이야말로 비체계적이라고 비난받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한 하나의 ‘경지’요, 최종적 결산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착지처럼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1000262036.jpg  *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현재적으로 활용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사상의 격차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짚어본다면,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통용되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다. 러시아 서점에 <천 개의 고원>을 주문해 두고 아직 받아보지 못한 상태라 단언하기는 이르지만(*오늘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서평이나 리뷰 등을 검색한 결과 이 책이 더 이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제 의식과 관련되어 논의되지는 않는 듯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근의 러시아 논저들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 내 지적 흥미를 잡아당기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당초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와 등가의 함의를 갖고 러시아로 ‘수입’된 사조였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든 옹호하든, 여기엔 러시아가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서구 콤플렉스가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말할 근거가 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러시아 연구자들은 서구에 대한 별다른 콤플렉스 없이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시킬 때 이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을 마치던 시기에, 꽤나 급진적인 관점에서 서구 사상을 번역·소개하는 잡지를 사본 적이 있는데, 마침 거기 <천 개의 고원> 중 한 장(章)이 번역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읽다가 원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으로 번역되어 있음에 깜짝 놀랐는데, 그것은 ‘잘 다듬어진’ 번역(해석)이었다기보다 사상의 ‘새로운 가공’이라 할 만한, ‘창조적’ 번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그 유효성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는 아닐까? 더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련의 붕괴 이후 맞부딪혀야 했던 서구 콤플렉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러시아 사유의 향방을 보여주는 징후라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책 한 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별별 몽상을 다 한다는 망설임이 들지만,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러시아 사유에 관해 조금씩 지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Posted by 수유너머104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작년 말 튀니지에서 처음 시민들의 ‘반역’이 시작되었을 때만해도 한국인들의 반응은 그리 진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잊을 만하면 간간이 이어지던 ‘그 동네’의 작은 소요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었고, 이런 인식의 나이브함은 국내 언론이 ‘반정부 소요’나 ‘무질서 상태’라고 묘사할 때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이 흐름이 점차 아랍권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어,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끌어내고, 카다피를 끝장낼 정도로 진행되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현실감을 얻게 된 듯하다. 인터넷 뉴스는 트리폴리에서 날아온 속보로 가득차고, 기민한 블로거들은 다양한 경로로 입수한 현지 사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진정 ‘아랍의 봄’이 찾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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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에서 벌어지는 민주화와 혁명의 불길에 어떻게든 말 한마디로라도 거들고자 하는 열혈 블로거들, 누리꾼들의 활약을 보면서, 침묵에 잠긴 대학의 인문학을 고민해 본다. 물론,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이라고 왜 역사의 격변에 관심이 없겠느냐마는, 실상 삼삼오오 모여 하루의 진전에 관해 논평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귀청을 울리는 ‘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강의와 세미나, 글을 통해 현실 개입적인 말과 사유를 펼치기 전에 먼저 ‘전공’을 따지고 ‘전문성’을 가늠하며 ‘자격’을 검증하는 게 인문학의 관성인 탓일까? “리비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자네 정치학이 전공인가?” “아닌....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실제로 현재 대학에서 양성되는 인문학은 혁명에 인색하다. 인문학은 인문학으로서 소임이 있다는 주장이 그렇다. 인문학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 그 일희일비(一喜一悲)의 순간들로부터 벗어나, ‘더 멀리 더 깊게’ 바라봄으로써 사회의 심층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인문학의 소임은 새롭고 참신한 가치를 창출하고 현실에 유용한 교양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현존 질서를 조금이라도 건드릴라치면 금세 경고장이 발부된다. “학문은 학문답게,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인문학이 학문으로서 갖는 위상과 자격은 그것이 현실에 봉사하되 현실 자체로부터는 한 걸음 물러서는 데서 나온다고 한다. 뭔가 이상하고 모순된 소리지 않은가? 현실에 도움을 주는 한에서, 현실에 무관한 한에서만 학문일 수 있다니? 만일 그 ‘현실’이 기성의 질서와 가치관, 지배 체제를 뜻한다면, 이 말은 일관성을 갖는다. 거꾸로 말해, 현재를 지배하는 가치와 통념에 봉사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의 자격이 없다. 4대강이 얼마나 국가에 유익한지, 국민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논하는 인문학이라면 좋다! 하지만 그게 국토를 망치고 민중을 도탄에 빠지게 만든다는 식으로 말할 테면 퇴출이다! 인문학이 삼가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혹자는 당차게 말한다. 인문학의 본령은 원래 현실 개입적이었고, 혁명적이었으며, 따라서 지금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비판의 칼날을 벼려야 한다고. 옳은 말이다. 인문학이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나 가치는 현실의 파도를 건너는 ‘우아한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을 날카롭게 찌르고, 우리의 안온한 일상을 흠집 내고 피가 날 정도로 벨 정도로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야 진정 ‘새롭다’고 할 것이다. 인문학의 혁명성을 말한다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그런데 실제로 인문학의 역사를 보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인문학은 그런 ‘불온’하고 ‘위험’한 역할을 맡은 적이 별로 없다. 오늘날 ‘인문학’이라 번역되는 ‘humanities’나 ‘philology’는 기실 혁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르네상스 전후로 사용되었던 전자는 중세기의 ‘자유 학문’을 대체하는 것들이었고, 후자는 19세기말의 고전학 연구 경향을 일컫던 것들이다. 오히려 현대의 인문학은 국가가 사회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지적 강제의 도구로서 발달되었다. 부랑자와 거지, 도둑, 반사회적 일탈자, 비정상인 등을 ‘정상인’으로 만들어 ‘정상적인 삶’을 부과하고 나아가 ‘국가의 정상화’를 위해 스스로 헌신하게끔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장치였던 것이다. 치안을 위해 작동하는 훈육·통제 장치, 그것이 현대 인문학의 기원이며 영토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인문학에서 혁명을 기대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오늘날의 인문학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렇게 다져진 영토를 떠나는 것, 책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가려는 충동이 아닐까?

 

 

나는 인문학을 공부함으로써 견고하게 나를 결박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당장 탈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면서 동시에 커지는 위험은 현실을 방기한 채 텍스트의 쾌락에 젖어버리는 일이다. 혁명을 종이 위의 글자로 만들고, 날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친구와 가족, 타인들을 인간(人間)이라는 추상 속에 가둬두는 일이다. 인문학의 효용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온순해지고 순응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인문학에 절망이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고이 남겨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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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의 군중들, 트리폴리의 시민들을 일어서게 한 것은 그들에게 인문학이 모자라거나 과도해서가 아니었다(수천 년 누적된 아랍의 방대한 문헌학적 전통을 고려할 때 그들이 무지몽매하다고 비웃는 자들은 자는 본인의 무교양부터 부끄러워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거리로 이끈 것이 순수하게 생계에 대한 절망만은 아닐 것이다(그런 나이브한 인식 따위로 아랍 민중을 모욕하고, 혁명을 폄하하지 말도록 하자!). 인문학은 인문학이다. 종이 위의 전통, 텍스트의 쾌락. 맞다! 그들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인문학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은, 인문학이 그것의 영토를 떠날 때, 묵독(黙讀)의 자아도취를 벗어날 때, 거리에서 울리는 목청이 될 때다. 아니, 적어도 거리를 바라보고, 거리를 욕망할 수 있을 때다. 그래서 학문이 아닌 인문학,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이 될 때다. 과거에 인문학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인문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문학이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남는 것이다. 묘비의 인문학. 돌 위에 새겨진 글자는 죽은 자의 이름을 가두는 감옥일 테지만, ‘짱돌’이 되어 던져지는 문자는 혁명의 초석이 될 것이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대학의 제도 ‘안’에서가 아니라, 대학의 ‘바깥’에서 일반 대중과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가 성업 중이다. 불과 십여 년 전 ‘대안 대학’을 내세우며 수유너머를 포함한 소수의 방외 단체들에서 ‘실험’되었던 인문학 강좌들이, 지금은 매 분기별로 국공립 도서관과 문화 센터, 동사무소, 호텔과 백화점 등에서 기획되고 있다. 사회적 붐을 넘어, 어느덧 일상의 풍경으로 정착된 느낌마저 든다. 빈궁과 소외가 인문학의 본래 운명처럼 생각되던 시절과 비교해 볼 때, 인문학의 외연 확대와 대중화는 여러 모로 긍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애초에 대학 교육의 부실함과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시도되었던 인문학 강좌를 이젠 대학이 나서서 주관하는 시점까지 오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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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강좌 매니저의 업무도 덩달아 바빠지고 넓어졌다. 지역과 대학 도서관, 사회 단체나 각종 문화 센터 등에서 들어오는 강의 청탁들을 접수하고, 적절한 강좌를 기획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이 접하기 어려운 ‘인문학적’ 사유를 소개하고 관심을 이끌며, 여전히 ‘가벼운’ 연구자들의 지갑 사정을 보조해 준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노동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의 내 경험들은 이런 인문학 강좌의 문제 설정에 어떤 근본적인 오류나 오판이 있던 게 아닌가 하는 당혹감이 들게 만든다.

 

 '일반 대중'이라는 막연한 수신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꾸리려면, 연구실서 공유되고 있는 흥미로운(만큼 '어려운') 논제들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나름대로 쉽게 풀고 소개한다고 해도, 일단 대중에게 '듣도보도 못한(?)' 철학자나 사상을 거론하며 이야기를 하려면 여러 모로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고 자주 생략해 버리곤 한다. 더구나 지금 현재적인 정치적·사회적 사안들이 도마 위에 오를라치면 주최측에서 먼저 변경을 요구하는 일이 다반사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에 관한, 대중적 상식('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달라는 게다. 또한, 삶과 사유의 수준있는 '고전'에 대한 강의를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동양의 고전'들은 빼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동양 고전이라면 어쩐지 지루할 것 같으니까. 맑스나 헤겔과 같은 '서구의 고전'들도 예외는 아니다. 읽어본 적은 없어도 어딘지 '어려울' 것 같고, 그래도 이름만은 자주 들어봐서 벌써 '식상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텍스트 위주의 강의안을 내밀면 난감한 미소를 띠며 되돌려준다. 요즘 세상에 PPT 같은 시청각 자료도 없이 강의를 다니는 게 말이 되냐는 거다... 이래저래 주최측의 요구 사항들을 맞추며 조율하다보면 강의할 사람도, 강의할 내용도 마땅찮기가 여러 번이다. 애초에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소통 지향적 강의'가 인문학 강좌의 지향점 아니냐고 반문할 법도 하다. 소통이 상대의 눈과 귀를 '거슬리지 않게' 하고, 사유의 노동 없이 쑥쑥 위장에 흡수되기만 할 '건전한' 만남이라면 아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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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의가 건전하게 짜여질수록, 도서관과 학교, 문화 센터의 기획 요구에 부합할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낯설고 새로운 것, 안온한 상식의 틀을 비껴가는 사유를 실험해 보자는 소신과 ‘강의를 위한 강의’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단지 수준의 높낮이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저런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파닥거릴 힘도 없다. 개인의 주머니 사정에 의해서든 집단에 대한 기여든 결국엔 ‘앵벌이’에 다르지 않다. 까놓고 말해 대중을 ‘계몽’하고 ‘소통’하는 인문학이 되기 이전에, 그렇게 비판하던 제도권의 ‘보따리상’들과 별반 차이를 못 느낄 지경이다. 인문학 강의가 일상의 질서에 대한 투항을 이론적으로 치장하거나, 자위적인 교양에 목말라하는 대중 영합적 상술로 변질되고 있다는 세간의 비판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지난 봄 모 대학에서 주최한 인문학 강좌에서 전직 대기업 CEO란 사람이 인문학은 우리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건강한’ 취향을 조성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불온하나고 낯선 것, 날카로워서 쉽게 베일 것만 같은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오는 이들은 (다는 아니겠지만) 재미나고 새로운 것을 원하지, 피를 뛰게 하는 낯선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역시 강제로라도 불온한 기호의 폭력을 휘둘러야 할까, 아니면 그냥 속 편하게 함께 웃으며 나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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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가족의 역사에 대한 주제를 다룬 최근의 한 강의에서, 쉬는 시간에 동성애와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린’ 대학생들에게 성(性)과 사회적 터부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말하는 게 좋지않다는 이유였다. 또 어떤 선배는 현 정부의 종교 편향과 파시즘에 관한 강의안을 제안했다가 주제 변경 요구를 받기도 했다. 강좌 주최가 공공 기관인데다, 청중 모두가 동의할 것도 아닌데 ‘편향적’ 입장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가져간 자료 중에 관련 부분은 적절히 얼버무리거나 아예 건너뛰고는, 몹시 태연하게, 별 탈 없이 강의를 마쳤다. 질문을 던지는 청중들에게 적당히 호응해 주고 웃으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강사료도 제때 받았다. 오는 길에 인문학 강의는 참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하나도 불온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참 모범 시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속으로 꿈틀대는 불온한 욕망이 아예 사라졌다고는 말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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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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