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유너머N에서 3-4월에 진행한 초중급 불어강독 중 8회에 읽은 텍스트를 강독에 참가한 김민우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들뢰즈의 파리8대학 스피노자 강의를 녹취한 원문 중 처음부터 9번째 문단까지의 번역입니다.
(DELEUZE / SPINOZA Cours Vincennes - 24/01/1978 원문 바로가기)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 명강의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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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속된 변이(variation continue)에 대해 [이제껏] 다루었던 것을 잠시 미루고, 철학사 수업을 위하여 매우 분명한 어떤 사항에 대해 임시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이는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의 요청으로 하는, 어떤 중단 같은 겁니다. 매우 분명한 사항이란 이것과 관계있는데요. 즉,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감정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에게 있어 관념과 감정(Idée et affect chez Spinoza). 오는 3월에는,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의 요청으로, 칸트에게 있어 종합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도 또한 [강의를] 잠시 중단할 겁니다. 철학사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제겐 조금 이상한 일인데요. 저는, 여러분이 철학사의 이 부분을 그저 단순히 하나의 역사로 생각해주기를 바랍니다. 요컨대 철학자란 단지 개념들을 발명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는 아마 지각하는 방식들 또한 발명하죠. 저는 거의 순번 매기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려는데요. 우선은 용어법에 관한 고찰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강의실이 [많은 분들로] 상당히 뒤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스피노자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가 자신의 책 속에 들어온 것들과 관계하는 방식은 필적할 만한 게 없으니 말이죠. 여러분이 그를 읽었든 읽지 않았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니까요. 일단 용어법에 대한 예비 고찰로 시작해보죠. <윤리학>이라고 불리고 라틴어로 쓰인 스피노자의 주요 저작 속에는, 두 가지 단어가 발견됩니다. 아펙티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 몇몇 번역가들은 매우 이상하게도 [이 단어들을] 똑같이 번역합니다. 이건 최악이죠. 그들은 그 두 용어를, 아펙티오와 아펙투스를, “아펙시옹(affection)”으로 번역하고 있죠. 저는 이게 최악이라고 말하는데요. 왜냐하면 철학자가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할 때는 원칙적으로 그는 어떤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어가 우리에게 아펙티오와 아펙투스에 엄밀히 대응하는 두 개의 단어를 손쉽게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펙티오에는 아펙시옹이 있고, 아펙투스에는 아펙트가 있으니까요. 몇몇 번역가들은 아펙티오를 아펙시옹으로 번역하고 아펙투스를 상티망(sentiment)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똑같은 단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경우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어가 아펙트란 단어를 보유하고 있는데 굳이 상티망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므로 제가 아펙트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것은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를 가리키는 것이고, 아펙시옹이란 단어를 말할 때는 이것은 아펙티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하의 번역문에서 아펙시옹은 ‘변용’으로 옮기고, 아펙트는 ‘감정’으로 옮깁니다.]


첫 번째 사항: 관념이란 무엇인가? 관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걸 알아야] 스피노자의 가장 단순한 명제들이라도 이해할 텐데요. 이 점에 관하여 스피노자는 독창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던 의미로 관념이란 낱말을 이해하려 하죠. 철학사에서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던 의미에서 우리가 관념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표상[재현]하는 사유 양태입니다. 표상적인 사유 양태. 예컨대, 삼각형의 관념은 삼각형을 표상하는 사유 양태죠. 용어법의 관점에서, 중세 시대 이래로 관념의 이런 측면이 “객관적 실재”(réalité objective)라 불리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매우 유용합니다. 17세기 혹은 그 이전의 텍스트에서 우리가 관념의 객관적 실재와 마주칠 때, 그것은 항상 이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것의 표상으로 생각된 관념 말이죠. 관념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한에서,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해집니다. 관념과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인 것이죠.


따라서 아주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보죠. 관념이란 자신의 표상적 성격에 의해 정의되는 사유 양태입니다. 이 정의는 이미 관념과 감정(아펙투스)을 구별하기 위한 첫 번째 출발점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죠. 왜냐하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 사유 양태는 감정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든지 감정이라 부르는 것을 아무거나 취해봅시다. 가령 기대, 불안, 사랑 같은 것들, 이것들은 표상적이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것에 대한 관념은 물론 존재하고, 기대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물론 존재하지만, 기대는 그 자체로서 또는 사랑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비표상적인 한에서 사유의 모든 양태는 감정이라 불릴 것입니다. 의지력, 의지는 엄밀히 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 이건 표상의 대상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어떤 관념 속에 주어지죠. 하지만 의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표상적인 사유 양태이기에 감정인 거죠. 잘들 따라오고 있죠. 어려운 게 아니에요.


이로부터 즉각 관념이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리고 이는 17세기의 모든 사람들에겐 상식이었죠. 하지만 우리는 스피노자만의 고유한 것에는 여전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관념은 감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아무리 미규정적이라도, 있어야만 한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러하죠. 원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아무리 미규정적이라도,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내가 무얼 느끼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할 때, 대상에 대한 어떤 표상이,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있는 것입니다. 혼란스럽긴 해도 어떤 관념이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감정보다 관념이, 다시 말해서 비표상적인 양태들보다 표상적인 양태들이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독자가 이런 논리적 우위를 환원으로 바꾸어버린다면, 아주 불행한 오해가 생길 겁니다. 감정이 관념을 전제한다는 것, 이는 무엇보다도 감정이 관념으로, 혹은 관념들의 조합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즉 관념과 감정이란, 본성상 서로 다르고, 상호간에 환원될 수 없으며, 다만 감정이 관념을,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러울지라도, 전제하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받아들여질 뿐인 두 가지 종류의 사유 양태들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항입니다. 관념-감정의 관계를 제시하는 보다 덜 표면적인 두 번째 방식. 우리가 관념에 대한 아주 단순한 성격에서 논의를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해보세요. 관념은 표상적인 한에서의 사유입니다. 표상적인 한에서의 사유 양태이죠.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관념의 객관적 실재를 말할 겁니다. 관념은 단지 객관적 실재만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널리 인정된 용어법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형상적 실재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객관적 실재란 관념이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한에서 그 관념의 실재라고 한다면, 관념의 형상적 실재(réalité formelle)란 무엇을 말할까요?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해지고 있고 그래서 더욱 흥미로워지는데요― 관념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인 한에서 관념의 실재라고 말해질 것입니다. 삼각형 관념의 객관적 실재는 삼각형으로 된 사물을 표상하는 것으로서의 삼각형 관념이지만, 이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것인 한에서, 나는 그것에 대한 관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 관념에 대한 관념을 만들 수 있죠. 그러므로 저는 모든 관념은 단순히 어떤 것의 관념인 것만은 아니라고 ―모든 관념이 어떤 것의 관념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모든 관념은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모든 관념은 무엇인가를 표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관념은 그것이 그 자체 관념으로서 어떤 것이기 때문에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이 수준에서는 더 멀리까지 계속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따로 제쳐둘 필요가 있죠. 관념의 이러한 형상적 실재란, 스피노자가 관념이 관념으로서 지닌 실재 혹은 완전함의 어떤 정도라고 매우 자주 이름 붙인 바로 그것이라는 점을 곧바로 덧붙여만 합니다. 개개의 관념은, 관념으로서, 실재 혹은 완전함의 어떤 정도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는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관계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혼동되지 않습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 즉 관념이라는 사물 내지 관념이 자기 안에 소유하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란 그것의 내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객관적 실재, 즉 관념이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맺는 관계란 그것의 외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외재적 성격과 내재적 성격은 근본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의 관념과 개구리의 관념은 상이한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즉 그 관념들은 동일한 것을 표상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것들은 동일한 내재적 실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동일한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한 관념은 ―여러분은 그것을 잘 느끼고 있을 텐데요― 다른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실재의 정도를 갖고 있는 것이죠. 신의 관념은 어떤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유한한 사물의 관념인 개구리의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내재적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이해했다면 거의 모든 걸 이해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의 형상적 실재가 있습니다. 즉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고, 이런 형상적 실재는 내재적 성격이며, 관념이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관념을 그것의 객관적 실재로 혹은 그것의 표상적 성격으로 규정하였을 때, 감정은 정확히 표상적 성격을 갖지 않은 사유 양태라고 말하면서 저는 곧바로 관념을 감정에 대립시켰죠. 이제 저는 관념을 이렇게 규정하고자 합니다. 즉, 모든 관념은 어떤 것이다, 단지 어떤 것의 관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에 고유한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수준에서 저는 관념과 감정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삶에서는 과연 무엇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을까요?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흥미로운데요. 여러분은 <윤리학>이 명제, 증명 등등의 형식을 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책은 더욱 수학적인 만큼 비범할 정도로 더욱 구체적이기도 하죠. 제가 말한 모든 것은, 그리고 관념과 감정에 대한 모든 주석들은 <윤리학>의 2, 3권에 관련됩니다. 이 2, 3권에서 스피노자는 우리 삶에 대한 일종의 기하학적 묘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제게 아주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이 기하학적 묘사는 우리의 관념들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진다는 점을 대략적으로나마 우리에게 말해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한 관념은 다른 관념을 내쫓습니다. 한 관념은 다른 관념을 대체합니다, 예컨대 순식간에 말이죠. 지각은 특정한 유형의 관념인데요, 우리는 곧바로 그 이유를 보게 될 겁니다. 좀 전에 나는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강의실 구석을 보았죠. 다시 고개를 돌립니다. 또 다른 관념이 있죠; 나는 길거리를 산책합니다. 거기서 사람들을 알아보기도 하죠. 피에르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폴에게 인사합니다. 또는 변화하는 것은 [지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물들입니다: 나는 태양을 쳐다봅니다. 그러다 태양이 점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이는 따라서 일련의 연속들, 관념들의 일련의 공존들, 관념들의 일련의 연속들입니다. 그러나 이 외에 또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우리의 일상적 삶은 연속되는 관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아우토마톤”(automa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우리[인간]이 정신적 자동기계라고 이야기하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관념들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관념들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념들의 연속들을 제외하고, 또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즉, 내 안의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죠. 관념들 그 자체의 연속과 동일하지 않은 변이(variation)의 체재가 있는 것입니다. 변이들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쓸모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변이라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이런 변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든 예를 다시 취해보면. 나는 길에서 내가 매우 싫어하는 피에르와 마주칩니다. 그를 지나치면서 피에르에게 인사합니다. 혹은 그걸 꺼림칙해 하면서 곧이어 내가 매우 좋아하는 폴을 봅니다. 그리고 폴에게 인사하죠. 거기에 내심 안도하고 만족해하고요. 자. 이것은 무엇일까요? 한편으로는 두 개의 관념, 즉 피에르의 관념과 폴의 관념의 연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죠. 내 안에서 어떤 변이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스피노자의 말은 매우 정확한데, 저는 그걸 인용해보겠습니다. “나의 실존하는 힘의 (변이)”, 또는 동의어로서 그가 사용하는 또 다른 말인 “비스 엑시스텐디”(vis existendi), 즉 실존의 힘, 혹은 “포텐샤 아겐디”(potentia agendi), 즉 행위 능력―그리고 이 변이들은 영원합니다. 



번역 / 김민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초중급 불어강독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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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78285.jpg  * 러시아어판 <천 개의 고원>

 

최근 러시아를 다녀온 선배의 블로그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Tysyacha plato : kapitalizm i shizophreniya)이 작년 말 러시아어로 완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Yakov Svirsky 옮김, U-Faktoriya, 2010). 코뮨에서 생활하며 부딪혔던 사유와 삶이라는 문제 외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중요한 인용 전거 중 하나였다. 그때 “혹시나 이제라도 러시아어로 번역된다면 직접 번역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하며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감이 들었다. 이제 <천 개의 고원>이 러시아어로 출판됨으로써, 들뢰즈의 거의 모든 저술들을 러시아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듯하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들뢰즈와 러시아는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글을 쓸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해명을 잠시 늘어놓는 것, 아니 그 해명이야말로 현재의 러시아 지성사적 상황을 조감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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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위부터 <경험주의와 주관성/칸트의 비판철학/베르그손주의/스피노자>(합본), <차이와 반복>, <주름>, <키노>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유입된 지적·문화적 경향이지만, 많은 문학 연구가들은 러시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1960-70년대 소츠-아트(Sost-Art)로 대변되는 개념주의 예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더 멀리는 체호프 등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엽으로도 밀고갈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탈린주의가 균열을 빚은 해빙 이후의 문학과 예술에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입장들에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던이 서구보다 ‘앞서’ 존재했다거나, 혹은 적어도 서구와 ‘동시대적인’ 문화적 경향이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직접 사용되진 않았어도 러시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주장들에는 여하한의 문화사적 흐름에서도 결코 뒤지고 싶어하지 않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지는 듯하다(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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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안티 오이디푸스>, <니체>, <니체와 철학>, <의미의 논리>, <프루스트와 기호들(초판)>

 

그러나 철학적인 문제 설정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살펴본다면, 러시아에서 그것은 분명 소련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로 밀려들어오고, 그에 대한 반응 및 성찰의 결과로서 포스트모던‘한’ 러시아 사유도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기 산정의 문제를 갖고 오래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들뢰즈, 러시아 현대 사상의 관계만이 관심사인 탓이다.

 

 

2000년대 후반의 유학 시절에 내가 놀랐던 것은,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식상해져 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제적인 것으로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서구에 소개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두 지성, 미하일 바흐친이나 유리 로트만을 프랑스 철학자들과 연관시켜 논의하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흔한 반론이 있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점으로는 러시아 지성의 고유성을 논할 수 없다”는 강한 반발감이 그것이며, 이에 따라 문제 의식은 언제나 “고전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수렴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아카데미 전통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해야 할 적(敵)이든지 혹은 적극 끌어안고 과거(‘러시아 전통 혹은 소비에트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할 원군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다소간 완고한 아카데미의 철학부들은 전자를 대표했고, 후자는 발레리 포도로가(Valery Podoroga)와 같은 서구 지향적 철학자들로 대표되었다.

 

52629.jpg  * 발레리 포도로가

 

1970년대에 이미 푸코의 <말과 사물>이 소개되었고, 소련의 붕괴 즈음과 그 이후로 현대 서구 철학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 철학서들이 물밀듯이 번역되어 나왔다. 보드리야르는 진작에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었고, 데리다나 라캉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들뢰즈의 책들은 번역도 느리고 논의도 적어 보였다. 가령 <천 개의 고원>의 1부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포도로가의 친구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이 90년대 초에 요약본을 선보인 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완역본이 나올 수 있었다. 서구의 모든 책들이 번역될 이유는 없겠으나, 포스트모던 사회와 사상의 가장 논쟁적인 고전이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라면, 다른 책들의 번역 속도에 비추어 확실히 늦다는 생각이 든다.

 

ryklin.jpg 8976823257_1.jpg  * 미하일 리클린과 그의 책

 

내게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정할 만한 경험이 있었다. 유학 초에 러시아 철학의 현재성을 살펴본답시고 우연히 고른 책의 하나가 이고르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Zhil' Delez: vvedenie v postmodernizm, 2005)이었다. 내 호기심을 끈 것은 이 책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이었기 때문인데, 한편에는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놀라움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들뢰즈=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등식이 통용된다는 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탓이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심오한 체계성이야말로 비체계적이라고 비난받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한 하나의 ‘경지’요, 최종적 결산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착지처럼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1000262036.jpg  *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현재적으로 활용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사상의 격차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짚어본다면,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통용되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다. 러시아 서점에 <천 개의 고원>을 주문해 두고 아직 받아보지 못한 상태라 단언하기는 이르지만(*오늘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서평이나 리뷰 등을 검색한 결과 이 책이 더 이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제 의식과 관련되어 논의되지는 않는 듯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근의 러시아 논저들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 내 지적 흥미를 잡아당기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당초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와 등가의 함의를 갖고 러시아로 ‘수입’된 사조였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든 옹호하든, 여기엔 러시아가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서구 콤플렉스가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말할 근거가 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러시아 연구자들은 서구에 대한 별다른 콤플렉스 없이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시킬 때 이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을 마치던 시기에, 꽤나 급진적인 관점에서 서구 사상을 번역·소개하는 잡지를 사본 적이 있는데, 마침 거기 <천 개의 고원> 중 한 장(章)이 번역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읽다가 원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으로 번역되어 있음에 깜짝 놀랐는데, 그것은 ‘잘 다듬어진’ 번역(해석)이었다기보다 사상의 ‘새로운 가공’이라 할 만한, ‘창조적’ 번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그 유효성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는 아닐까? 더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련의 붕괴 이후 맞부딪혀야 했던 서구 콤플렉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러시아 사유의 향방을 보여주는 징후라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책 한 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별별 몽상을 다 한다는 망설임이 들지만,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러시아 사유에 관해 조금씩 지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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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 2011.03.25 0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고 궁금합니다. 궁금한 건, 여전히 러시아에 대해 모르는 게 많기 때문.
    <천 개의 고원> 러시아어판 표지는 참 이쁘네요.^^

  2. vizario 2011.03.30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죠? 표지가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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