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최전선
상빈 / 수유너머N 세미나회원
최근 트위터가 업데이트 되면서 트위터에서 동영상을 업로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서드파티 앱을 통해서 업로드 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간 트위터 이용자들은 늘 결핍에 시달렸었다. 트위터의 타임라인 상에서 볼 수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움짤 정도였고, 동영상을 보기 위해선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140자라는 제한을 둔 트위터 답게 영상의 길이를 30초로 제한해 두긴 했지만, 이 전과 비교했을 때 좀 더 풍부한 가상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된 업데이트였다.
한편 @nomadchang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한 트위터 이용자는 이 업데이트를 대단히 반긴 것처럼 보였다. 그는 평소에도 트윗을 많이 날리기로 유명했었고, 이번 업데이트 이후 거의 매일같이 일상의 동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다. 그리고 굴뚝 위의 시인이라는 그의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가 업로드 하는 동영상은 우리의 평상시에선 절대로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들 중 내 시선을 붙잡았던 건 70미터 상공에서 “흰머어리~ 나알리며언서어~”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면서 밥이 연결된 줄을 끌어당기는 영상과, 커다란 빨간 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켜졌다 꺼질 때 마다 그의 옆얼굴이 드러났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하는 영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두 개의 영상이 가진 엄청난 깊이와 독특한 색깔이었다. 여기서 ‘깊이’와 ‘색깔’이란 단어는 영상의 어떤 분위기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영상이 내려다보고 있는 곳의 심연에 가까운 깊이와, 영상이 담고 있는 곳의 선정적인 색깔을 말한다.
엄마가 고향에서 올라왔다. 하얀 세월앞에 까만염색약도 소용없다. 고향떠나 다른 피부색으로 살아가는 이주민들에게도 세월은 사납다. 다른 사랑하는 이들은 또 홀로 고향역 기적소리 듣는다. 고향역에 모두가 가 닿자 pic.twitter.com/Ac47HI3yjN
— 이창근 (@Nomadchang) 2015년 2월 20일
땅 위의 밥은 엄청나게 깊숙한 곳에 있어 밧줄을 통해 꾸역꾸역 끌어올려져야만 했다. 처음 그 영상을 봤을 땐 30초라는 짧은 시간동안에 밧줄을 다 당기지 못할 줄 알았고, 밥의 어렴풋한 형체도 당연히 발견해내지 못했다. 때문에 그 인상은 밥이 있는 곳이 너무나도 깊어 꾸역꾸역 잡아 당겨도 밥은 영원히 보이지 않고, 그래도 그 트위터 이용자는 밥줄을 꾸역꾸역 끌어당기지 않으면 밥을 영원히 먹을 수 없는 시지푸스적 딜레마의 인상이었다. (영상을 다시 보았을 때 화면 하단에 도달한 밥이 들어있는 빨간 가방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처음의 그 인상은 너무 강렬해 여전히 잊혀지질 않는다.)
끝없는 심연처럼 보이는 그곳에 늘어뜨려진 밥줄을 꾸역꾸역 잡아 당겨야 한다는 사실, 전혀 보이지 않지만, 혹 그렇게 잡아당긴 끝에 아무 것도 없을 지도 모르지만, 혹 잡아당긴 끝에 매달려있는 것이 밥이 아니라 우리들을 그대로 집어삼킬 거대한 입을 가진 절망의 덩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잡아 당겨야 한다는 이미지. 그러나 그것은 영원의 허무이거나 점멸하는 희망 그 사이에서의 활동으로서의 이미지이고, 줄을 당김이 선사하는 활기참, 이어짐, 힘들에의 낙관에 관한 것이다.
또, 그 영상에서 줄의 끝이 닿아 있는 곳으로 보이는 그 땅의 빨간 색깔, 그리고 @nomadchang의 얼굴을 규칙적으로 가시화시켰다가 금새 사라져 버리는 그 색깔은 일전에 이 트위터 이용자가 ‘피’ 같다고 표현했던 빨간 조명이 켜진 땅의 색깔을 말하는 것이다. 왜 굴뚝 밑에 그런 조명을 켜둔 것인지는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게 그 색깔은 마치 경보를 표시하는 경광등의 색깔 같았고, 여기는 선정적입니다, 모두 여기서 멀어지세요, 혹은 여기가 바로 전쟁지역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쌍용자동차 대량해고 사태와 그에 관한 투쟁에 관하여 처음 접한 것은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당신과 나의 전쟁>에서였다. 나는 그 영화에서도 역시 어떤 색깔에 대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 색깔은 굴뚝 위에 오른 두 사람이 매일같이 내려다보는 공장의 천장 색깔인 초록색이었다. 경찰 특공대가 헬기를 타고 내려와 공장의 노동자들을 때려잡는, 말 그대로 때려잡는 그 영상의 색깔은, 위험의 빨간색이나 무심한 회색, 혹은 선정적인 살색 같은 색깔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초록색이었다. 전쟁의 색깔이 초록색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 초록색 화면은 평면의 스크린 속으로 까마득히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스크린과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이미지와의 간격이 선사하는 감각은, 당신과 나의 아주 다른 깊이에 관한 것이었다. 겹쳐 놓을래야 겹쳐질 수 없는 당신과 나의 위상학적 차이를 표시하는 깊이. 스크린과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이미지는, 나와 피할 수 없는 하염없는 깊이를 지닌 절망 앞에 선 자와의 차이에 등호를 매겼다.
그때 그 장면을 촬영한, 나에게 전쟁을 보여줬던, 그 카메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마도 지금 그렇게 때려 잡혔던 노동자들 중 두 사람이 올라가 있는 굴뚝-망루였을까. 아마도 카메라는 세계의 경계를 지키는 그 망대 위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의 세계가 총체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상황 자체를 마주했었을 것이다. 어떤 심정이었던 걸까. 그 무심하기 짝이 없는 때려잡음, 폭력이라는 심연에 집어삼켜진 공장-세계를 지켜보던 자는. 그가 몸으로 생생히 느꼈을 절멸에 관한 입체적인 감각은, 어쩌면 전달되기 위해선 일단 아주 평평해질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포장지의 평평함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렇게.
지난 1월,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을 찾았다. 평택에 가면 심연 앞에 나란히 마주 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만을 볼 수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거기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두 개의 굴뚝이 있는 공장에 대한 평평한 이미지였다. 또 수백 대의 티볼리를 지키는 철조망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몇 개의 형광 초록색이었다. 게다가 천막을 쳐 놓고 굴뚝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예전에는 자동차를 만들었고, 스스로 자동차를 만든다는 걸 자랑스레 여겼었고, 여전히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생각하고 있으나, 지금은 자동차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망원경을 빌려 굴뚝을 보았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 가스 뭉치와 바람에 가격당하고 있는 비닐 천막만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함께 공장을 찾은 친구들은 밥을 지었고, 밥은 굴뚝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엔 친구들이 지은 밥의 사진이 업로드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같은 밥을 다른 장소에서 먹었다. 여기와 거기는 동일한 평면일까? 라는 질문이 들었다. 이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통해서 세계의 경계를 깨닫는 사람은 카메라맨과 가상 이미지만큼이나 다르고 또 그만큼 똑같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입체적으로 상상해내질 못하고 있었다.
6년 전 망대 위에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던 그 카메라는, 거기서부터 모든 것들을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는 강요에 짓눌렸을 것이다. 강요는 그가 만들어낸 사진적 영상을 통해서 우리들에게로 이어진다. 어떤 세계가 총체적으로 부정당하고 난 뒤 우리가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는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점점 더 명확해 져 가는 저 깊은 심연을 점점 더 정확하게 내려다보는 일. 그러나 저 쩍 벌린 빨간 아가리 속에서 밥줄을 끌어당겨 꾸역꾸역 힘을 길어 올리는 일. 그러므로 전혀 다른 것을 위해 매일 매일을 등정하는 일.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매일 매일을 만들어 나가는 일일까.
우리가 만나게 되는 끝이라는 이미지, 그 이미지의 한쪽에선 가상을 뒤집어 쓴 허무가 손짓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 경계라는 이름이 되는 같은 자리에선,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그려지는 미지의 지도가 모색되고 있다. 그렇게 지도로 모색된 힘들은 이제 우리들에게 입체적으로 강요되어야 한다. 마치 줄을 당기듯이, 당신에게서 나에게로, 힘은 이어져야 한다. 트위터 계정 @nomadchang의 타임라인에 업로드된 그 영상들이 내게 늦게나마 선사했던 깊이에 대한 체감은, 그와 같은 강요의 연쇄 속에서였다. 내가 만약 그 트위터 계정 사용자의 영상을 어떤 최전선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 이글은 R-view, 굴뚝일보와 함께 기획한 글입니다.
굴뚝일보https://www.facebook.com/gultukilbo, R-view82호http://commune-r.net/r-view/Rview082.pdf 에서 쌍용차 고공농성 관련 다른 글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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