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음악과 비극적 영웅의 테마
- 청년세대와 힙합음악, 그리고 비극적 영웅
류 재 숙 / 수유너머104 회원
1. 힙합HipHop을 알면 청년세대가 보인다
지금 한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장르를 꼽으라면, BTS 같은 몇몇 세계적 아이돌그룹을 제외하고는 단연 힙합이다. 지금은 분명 힙합시대다. 아이들은 아이돌이 아니라 성공한 래퍼를 꿈꾼다. 도끼, 더콰이엇, 빈지노, 제이팍, 쌈디, 그레이 같은 래퍼는 아이돌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대학축제에서 가장 환영받는 게스트이다. 최근 <쇼미더머니777> 인기영상들은 100만 조회를 가볍게 넘기고, 음원차트 4개 중 1개는 힙합이다. 일리네어, AOMG, 인디고뮤직, 하이라이트 같은 힙합레이블은 메이저기획사가 되었다. 여기에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언프리티랩스타> 같은 TV쇼가 힙합의 대중적 열기를 견인한다.
1990년대 이래 한국 힙합이 버텨온 방식은 양념처럼 쓰이는 ‘피처링’이었는데, 노래에 특이함을 첨가하기 위해 랩을 악세서리로 쓰는 것이다. 힙합이 주목받을 때조차 그것은 음악적 진정성이 배제된 패션스타일로 소비되어왔다. 따라서 힙합이 진지하게 취급되는 경우는 서브컬처나 블랙뮤직의 꼬리표를 달고 대중성과 거리가 먼 마니아의 전유물일 때였다. 이것이 몇 년 전까지 힙합씬의 풍경이었는데, 어떻게 힙합은 대세가 되었을까? 힙합HipHop은 어떻게 ‘힙hip’하게 되었나? 그것은 무엇보다 힙합음악이 청년세대를 자신의 대중적 토대로 확보하면서이다. 힙합을 알면 청년세대의 삶의 방식이 보인다고 했다. 힙합은 음악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힙합에는 청년세대의 감각ㆍ욕망ㆍ현실이 들어있다.
미국 힙합의 대중적 토대가 흑인이라면, 한국 힙합의 대중적 토대는 청년세대이다. 미국의 힙합은 1970년대 뉴욕 빈민가의 흑인집단에서 시작된 음악으로, 흑인들은 힙합을 통하여 백인 주류사회의 차별과 억압에 저항했다. 한편 한국의 힙합은 미국 힙합의 영향으로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메인스트림에서 힙합의 저항성은 제거된 채로 패션스타일로 소비되거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흑인힙합의 저항성과 소통하면서 마니아의 전유물이 되었다. 어느 경우나 젊은 층의 문화취향을 기반으로 하였다. 이렇게 1990년대 청년세대의 ‘서브컬처’로 시작된 힙합은, 2010년대를 거치면서 청년세대 전체의 문화코드로 부상하면서 지금의 ‘大힙합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힙합이 대세가 되고 돈이 되는 시대에 <쇼미더머니>나 힙합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런 비판에 비판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의미도 없다. 대중문화는 그 시대의 지배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동시에 대중문화는 대중이 그것을 즐기고 그것으로 숨쉬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중문화에 대립하는 것만으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긍정성이 부정성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대중문화가 작동되도록 하는 것, 대중문화의 부정성에 균열을 내는 긍정성을 포착하는 것, 니체적 의미의 ‘긍정적 종합’일 것이다.
이글은 첫째, 어떻게 힙합이 청년세대의 문화코드가 되었나? ‘힙합과 청년세대의 친화성’을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힙합의 신체성ㆍ자기 서사ㆍ접근성ㆍ경제성 같은 음악적 특성에서 청년세대가 자신만의 표현수단을 찾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힙합이 대중화되면서 ‘돈=성공’이라는 시대적 프레임이 청년세대의 욕망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의 힙합씬에서 반시대적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을까? 시대적 프레임에 속에서도 ‘힙합의 반시대성’을 보려고 한다. 이는 힙합씬에 등장하는 ‘비극적 영웅’의 테마를 분석함으로써, 청년세대의 문화코드 속에 포함된 특이성과 자기극복의 가능성을 보려는 시도이다.
2. 한국 힙합과 청년세대의 문화코드
: 어떻게 힙합은 청년세대의 문화코드가 되었나?
어떻게 힙합은 청년세대의 문화코드가 되었나? 왜 청년세대는 힙합에 열광하는가?
먼저 힙합의 음악적 특성은 청년세대의 감각과 잘 조응한다. 신체성ㆍ자기 서사ㆍ접근성ㆍ경제성의 관점에서 힙합은 다른 음악과 다른 특이성을 갖는다. 힙합의 음악적 특성은 청년세대가 기성의 방식과 다른 그들만의 감각을 구성하는데 적합한 표현수단이다. 기성의 방식과 다른 표현수단은 새로운 감각뿐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구성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주류가 된 힙합은 ‘돈=성공’이라는 방식으로 청년세대의 욕망을 반영한다. 1990년대 초기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학벌주의, 물질만능주의와 사회적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식을 노래했다. 또한 방송출연이나 대중친화적 태도를 꺼리면서 주류음악계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2010년대를 전후하여 특히 <쇼미더머니>의 영향으로 언더그라운드 힙합씬에 있던 많은 래퍼들이 주류음악계로 편입되면서 힙합의 가치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돈과 성공에 대한 욕망과 자기계발하는 주체 같은 기존의 가치를 대변하게 된 것이다.
힙합은 청년세대를 시대적 가치에 저항하게 하지만, 동시에 힙합은 청년세대를 시대적 가치로 포섭한다. 전자는 현실에 대한 청년세대의 저항방식과, 후자는 현실에 대한 청년세대의 복종의지와 결합될 것이다. 이는 힙합의 반시대성이 청년세대의 저항의지와 결속하고, 힙합의 시대성이 청년세대의 현실욕망과 공명하는 과정이다. 전자가 힙합과 청년세대가 긍정적으로 종합되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힙합과 청년세대의 부정적 종합을 보여준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고, 의지는 원하는 것이다. ······ 힘에의 의지는 힘의 생성적 요소임과 동시에 힘들의 종합의 원리이다. ······ 니체가 우아함ㆍ고귀함ㆍ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능동적 힘이며 긍정적 의지이다. 니체가 저속함ㆍ비루함ㆍ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반동적 힘이고 부정적 의지이다.” 『니체와 철학』 p104, p105, p110
힙합과 청년세대의 긍정적 종합 :: 시대적 방식에 저항하는
힙합의 음악적 특성은 청년세대의 감각을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먼저, 힙합의 ‘신체성’은 표현형식에서 다른 대중음악과 다르다. 다른 음악이 대체로 가사와 멜로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힙합은 심장박동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리듬과 비트가 특징이다. 비트와 리듬이 힙합의 기본플로어를 구성한다면, 가사는 라임의 형태로 존재할 뿐 내용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자막 없이 가사를 알아듣기란 쉽지 않고, 가사가 들린다하더라도 비트와 리듬이 먼저 오고 가사는 뒤따른다. 가사와 멜로디 중심의 음악에 비해, 빠른 비트와 역동적 리듬의 힙합은 확실히 신체를 타격한다. 힙합은 직설적 가사와 사회적 메시지 이전에 이러한 신체성을 특성으로 갖는다. 진지함과 엄숙주의를 부정하는 청년세대는 비트와 신체성이 이끄는 힙합에 몰입하게 된다.
다음, 힙합의 ‘자기 서사’는 내용형식에서 다른 음악과 구별된다. 힙합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 뮤지션의 삶과 음악이 동일시된다. 일반적으로 대중음악에서 가수는 작곡ㆍ작사보다 대체로 목소리와 연주를 담당했다면, 힙합에서 래퍼는 벌스를 쓰고 플로어를 구성하고 랩을 하는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한다. 힙합에서 ‘다른 사람의 벌스’를 내뱉는 래퍼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래퍼는 자신의 생각과 삶을 ‘자신만의 랩스타일’로 정립한다. 가수가 자기 노래와 다르게 산다고 문제될 것은 없지만, 래퍼는 오히려 ‘자기 랩에 맞는 삶의 스타일’로서 음악적 정체성을 확보한다. 자기 이야기를 음악 속에 표현하고, 자기 음악처럼 사는 ‘자기 서사’가 힙합의 내용적 특이성을 구성한다. 보편주의와 일반적 가치를 거부하는 청년세대가 자기 서사에 집중하는 힙합에 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편, 힙합의 음악적 ‘접근성’은 많은 청년들을 마니아에서 뮤지션을 꿈꾸게 했다. 2018년 <쇼미더머니777>에는 1만3천명이 지원하여, 역대 최대기록을 갱신했다. 음악적 접근성은 힙합음악 이전에 청년문화를 대변했던 락음악과 비교해도 분명하다. 인디락은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라는 걸출한 밴드를 배출해냈지만, 현시점에서는 혁오밴드 정도가 독보적인 정도이다. 락밴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기타ㆍ드럼ㆍ베이스 같은 악기를 다루거나 보컬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락마니아들은 뮤지션의 음악을 통한 대리만족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힙합은 미리 녹음된 비트에 랩을 얹는 방식으로, 가사를 쓰는 벌스능력과 최소한의 박자감각만 있으면 가능하다.
또한, 힙합의 ‘경제학’은 음악의 생산방식에서 다른 장르와 확연히 다르다. 힙합은 어떤 음악보다 경제적인 장르인데, 많은 청춘들이 래퍼가 되고 싶어하는 건 무엇보다 경제논리에 근거한다. 락밴드가 트랙 하나를 녹음하기 위해서는 연습실도 빌려야 하고 녹음실도 대관해야 하는데 모든 게 돈이다. 그러나 힙합은 컴퓨터를 기반으로 좋은 마이크와 약간의 악기를 자기 방에 준비하면 끝이다. 노력과 열정만 있으면 끊임없이 데모테이프를 생산할 수 있다. 대학축제에 초대된 밴드는 여러명의 멤버로 이루어지고 악기를 나를 큰 차량도 필요하지만, 래퍼는 자기가 부를 곡의 비트만 USB에 담아가면 끝이다. 수익금을 나눌 필요도 없다.
힙합과 청년세대의 부정적 종합 :: 시대적 가치에 포섭되는
주류음악으로 편입된 힙합은 청년세대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재현한다.
한국 힙합의 성공한 래퍼들은 ‘청년세대의 성공신화’로 자리잡았다. 래퍼 도끼는 TV에 나올 때마다 번쩍이는 금목걸이를 하고 여러 대의 외제차, 초호화 럭셔리하우스를 자랑한다. 한국에서 ‘돈 자랑’은 대개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성공한 래퍼들의 ‘머니 스웨거Money Swagger’는 노력의 결과물로 인정받는다. 이들의 서사는 이렇다. “금수저가 아니다. 나도 가진 게 없었으나 노력만으로 성공했다. 노력의 결과로서 돈을 자랑하는 것은 자신감이다.” 같은 세대로서 자기 재능으로 자수성가를 누리고 사는 래퍼의 모습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힙합을 통한 성공스토리는 청년세대로 하여금 현실의 참담함을 견딜 수 있는 판타지가 된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적 노력에 의한 신분상승을 뜻하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건은 실종된 지 오래다. 나의 앞날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부모의 재력에 의해 결정되어버린 ‘흙수저, 금수저’ 운명론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힙합은 아직까지 자수성가 스토리가 가능한 영역으로 보인다. 부모 잘 만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거나 공부해서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힙합을 통해 성공하는 것이 실현가능성이 높고 그 과정이 공정한 것처럼 보인다. 비정규직이 50%를 넘고, 청년실업자가 100만을 육박하는 우울한 한국사회에서, 이처럼 성공한 래퍼들은 청년세대로 하여금 대리만족의 포만감을 던져준다. 이 포만감이 성공에 도달한 래퍼들의 자기착취에 가까운 과도한 ‘노오력’을 감추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자본 축적에 무한자유를, 다수 인민에 무한빈곤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생산한다. 실업과 빈곤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별주체가 할 수 있는 것은 경쟁의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오로지 자기계발의 ‘노-오-력’뿐일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뚫고 성공에 도달한 래퍼들은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 주체’와 겹쳐치고, 성공한 래퍼들의 노력-성공의 서사는 이러한 ‘자기계발 서사’를 대변한다. ‘노력-성공의 서사’를 한국식 스웨거로 만든 도끼와 일리네어레코즈는 이제 한국 힙합의 주류가 되었다. 힙합음악의 대중화를 견인한 <쇼미더머니>는 무한경쟁 속에서 자기계발하는 청년 주체들의 전시장이 되었다. ‘돈과 성공’이라는 가치가 저토록 노골적이고 자연스럽게 울려퍼지는 동안, 아무도 그것의 가치에 대해 묻지 않은 채 말이다!
<쇼미더머니> Show me the Money ‘내게 돈을 보여줘!’ 얼마나 많은 돈을 획득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이 프로그램만큼, 돈이 인생의 목표이고 성공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린 우리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 또 있을까? 청년세대는 물질적 가치를 넘어서는 정신적 가치, 개인적 이해를 넘어서는 사회적 대의를 추구하던 기성의 가치관을 가볍게 ‘꼰대’로 규정한다. “돈이 삶의 목표가 되어도 좋은지, 돈이 성공의 표지가 되어도 좋은지, 그런 삶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런 질문 따위는 괄호 속에 묶어버리고, ‘돈 = 성공’의 등식을 내거는 데에 주저함 없다. 그래서 ‘힙합’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돈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는 쇼라는 비판에 <쇼미더머니>는 무기력하다.
3. 한국 힙합씬에 등장하는 비극적 영웅의 테마
: 힙합에서 반시대적 요소를 포착할 수 있을까?
힙합음악이 대세가 된 시대, 힙합이 돈이 되는 시대, 힙합에서 반시대적 요소를 포착할 수 있을까? 이미 주류의 가치에 포섭된 힙합 내부에서 시대적 가치에 반하는 다른 가치를 생성하는 것은 가능한가? 여기서 힙합의 자기극복, 청년세대의 자기극복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삶은 필연적으로 자기극복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니체는 모든 사물은 내부에 자기극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도덕에 의한 도덕의 극복, 기독교에 의한 기독교의 극복,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의한 차라투스트라의 극복이 모두 같은 방식을 말한다.
힙합음악이 기성문화의 보편가치와 일반성을 거부하는 한, 청년세대가 힙합에서 기존의 가치에 대한 저항과 탈출구를 찾는 한, 그것은 시대를 극복하려는 니체적 시도를 반복한다. 이러한 시도는 니체철학의 ‘비극적 영웅’의 테마로 극화된다. 비극적 영웅은 누구인가? 그는 특이성과 자기극복으로 정의되는 존재이다. 그가 영웅인 것은 무리적인 것들 중에 특이적 유형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비극인 것은 그가 자기몰락 속에서 되돌아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쇼미더머니>를 중심으로 한국 힙합씬에서 등장하는 비극적 영웅의 테마를 분석함으로써, 청년세대의 문화코드에서 반시대성을 포착하려고 한다.
비극적 영웅 :: 무리적인 것들 중에 특이적 유형 “Real Style, Real Me, Real MC”
“니체는 공리주의자의 유사성의 원리뿐 아니라 칸트의 보편성의 원리를 거리감 혹은 차이의 느낌(차이적 요소)으로 대체한다. <이 거리감의 고상함으로부터 가치를 창조하거나 그것을 결정할 권리를 키운다.> p18 ······ 니체에게서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이 측면에서 힘은 의지volonte로 불린다. 의지(권력의지)는 힘의 차이적 요소이다.” 『니체와 철학』 p18, 26
“니체에게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이며, 무엇이 정당하고 부당한가를 알고자 하는 도덕적 물음은 이렇게 제기된다. “무엇이 병들었고 무엇이 건강한가? 무엇이 무리적이고 무엇이 특이적인가?” ······ 두 개의 세력이 존재한다. 하나는 무리적 사유를 하는 평등주의적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독특한 사례들의 위계적 세력이다. ······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예속성에 기반한 ‘무리적’ 문화가 아니라, 감응들의 행동에 따른 ‘특이적’ 문화이다.” 『니체와 악순환』 p25, 26
비극적 영웅은 무리적인 것들과 구별되는 특이적 유형으로서 ‘힘에의 의지’를 극화한다. 니체철학에서 ‘힘에의 의지’는 무리적인 것들과의 차이를 확보하려는 ‘거리의 파토스’를 말한다. ‘힘에의 의지’란 자기 스타일과 자기 특이성을 구축하려는 의지에 다름아니다. 무리적인 것과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가에 의해, 스타일은 독특해지고 특이성은 강화된다. 그래서 니체에게서 참과 거짓, 정당함과 부당함은 무리적인 것과 특이적인 것으로 대체된다.
2017년 <쇼미더머니6>는 특이성에 대한 2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준다. <쇼미더머니6>에서는 직전에 끝난 <고등래퍼1>의 영향 탓에 우승자 영비(양홍원)를 흉내낸 참가자들이 유독 많았다. 영비의 트레이드인 십자가 귀걸이를 한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그의 독특한 딕션까지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이런 ‘영비 현상’에 대해 프로듀서 지코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영비가 있으니까, 다운그래이드된 영비를 뽑을 이유는 없다.” 한편 다크랩 계열의 이그니토와 우원재가 맞붙었을 때 대체로 다크랩의 일인자 이그니토가 이길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경력 1년 남짓의 풋내기 우원재가 승리했다. 스킬에 있어서는 이그니토를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우원재의 독특함은 이그니토를 능가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와 같은 래퍼는 없었던 것! 아무리 스킬이 뛰어나도 누구를 흉내내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테크닉에서 미숙하더라도 자기 스타일을 가진 존재야말로 진정한 강자일 수밖에 없다.
2018년 11월에 끝난 <쇼미더머니777>은 한국 힙합씬의 특이성에 관한 하나의 분기점으로 보인다. “랩은 그냥 빠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랩에 대한 이런 통념을 깨면서, <쇼미더머니777>은 한국 힙합씬을 랩스킬에서 해방시켰다. <쇼미더머니>가 시작되고 나서 대세는 빠른 비트에 ‘박자 쪼개기’에 바빴던 트랩스타일이었다. 일명 속사포랩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러다보니 ‘귀에 때려박는’ 가사 딜리버리 같은 랩스킬이 돋보였다. <쇼머더머니5>의 비와이, <고등래퍼2>의 영비는 이러한 트랩스타일에 정점을 찍었다. <쇼미더머너777>는 붐뱁의 강자 나플라와 싱잉랩 스타일의 루피가 각각 1등과 2등을 차지하면서, 스킬 중심의 트랩감각을 한순간에 올드하게 만들었다.
프로듀서 스윙스는 변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시즌6까지만 해도 ‘누가 랩을 기술적으로 더 잘하냐’가 평가기준이었다면, 이번 시즌에는 기술을 넘어 ‘얼마나 나를 더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게 됐다.” 그래서 스킬에서 손색이 없으나 빠르기만 한 참가자들은 “잘하는데 개성이 없다, 과거에 멈춰있는 느낌이다. 뻔하다, 올드하게 들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속도와 스킬에서 자유로와진 한국 힙합씬은 이제 보다 다양한 스타일을 수용할 태세가 된 것 같다. <쇼미더머니777>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보야, 문제는 스타일이야!” 그랬다, 문제는 스킬Skill이 아니라 스타일Style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힙합은 ‘Real Style, Real Me, Real MC’로 정식화한다.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자가 Real MC이며 진정한 래퍼라는 거다. 2018년 한국 힙합씬에 떠오르는 새로운 영웅들의 자격을 말하자면 이렇다. “플로우가 얼마나 신선한가? 스타일이 얼마나 유니크한가? 스웩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디보 - 디보 자체] 스타일의 유니크함으로 말하면 디보를 따라올 자는 없는 것 같다. 디보는 자기 스타일의 유니크함으로 승패를 우습게 만든다. “나플라나 수퍼비나 루피나 아무나 와도 상관없다. 난 내 음악을 보여줄 거니까.” 그는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지만, ‘갓디보’라는 영예를 얻으며 <쇼미더머니777>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프로듀서 더콰이엇은 래퍼평가전에서 ‘가사를 절은’ 실수까지 그의 독특함으로 평가한다. “진짜 독자적이다. 랩과 음악이 전혀 정교하지 않은데, 투박함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경지라고 해야 할까? 물론 실수를 안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너무 완벽하면 그건 디보가 아니다.” 여기에 프로듀서 딥플로는 덧붙인다. “저거(디보 공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 된다. 그래서 저게 예술이 맞는지 아닌지를 토론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디보를 보면서 느끼는 “저게 뭐지?” 하는 당혹감은 음악과 음악이 아닌 것의 경계에 있는 디보의 규정불가능성을 표현한다.
[EK - GOD GOD GOD] 한편 EK는 자기에 대한 믿음으로 경쟁의 순간들을 돌파해나갔다. 그는 우승후보였던 키드밀리를 배틀상대로 지목하면서, 우승을 위한 손쉬운 방식 대신 매번 인생을 거는 강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어 다른 래퍼들이 유명 뮤지션의 피처링으로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는 동안, 그는 함께 활동하는 자기 크루 MBA와 무대를 구성했다. 이 선택에 대해 EK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버텨온 크루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 ‘어떤 피처링진을 가지고 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EK는 자기 크루를 새로운 종교로 표현하고, 스스로를 GOD으로 불렀다. “GOD GOD GOD call me. GOD GOD GOD now call me. / 기억해 EK MBA 이건 새로운 종교.” EK의 ‘GOD, GOD, GOD’은 힙합크루의 군무와 화려한 래핑, 중독적 훅으로 관객들을 매혹시켰다. 결국 ‘GOD, GOD, GOD’은 <쇼미더머니777>의 레전드 무대가 되었고, 경쟁에서 패배함으로써 EK는 보다 극적이 되었다. 프로듀서들은 한결같이 ‘EK만이 할 수 있는, EK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소름 돋는’ 무대라고 극찬했다. 무대전략의 승리라기보다, 자기 스타일에 대한 신뢰의 결과였다.
[오르내림 - i] 오르내림은 지금 힙합씬에서 가장 힙합스럽지 않은 래퍼 중 하나이다. 자극적인 말장난, 폭력적인 가사, 무의미한 허세가 힙합의 트레이드처럼 취급되는 가운데, 오리내림 특유의 아기자기한 스타일, 따뜻한 음악감성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낯설다. 하지만 오르내림은 쿠기를 꺾고 본선에 진출함으로써 <쇼미더머니777>의 가장 커다란 반전을 연출했다. “아무도 내가 6명까지 남을 거라고 생각 못했을 거다. 그런데 이게 나고, 나는 여기까지 와 있다. 또 나는 변함없이 내 음악을 할 거다. 이게 나고, 나는 이런 내가 좋다. 나다운 걸 찾아서 계속 뭔가를 만들어 볼테니 지켜봐 달라.” 주변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오르내림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르내림은 ‘i’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Who am I? 나는 내가 될래! / 잘 하려고 하지 마, 남 다르면 돼! / 다 똑같은데, 난 나인 게 좋아. / 철이 들기에는 멀어서 너무나 다행이야. / who am I부터 받아들이고 만든 음악. / 모두 조금씩은 다른 우주에서 비행하는 우린 애쓰지 않아도 같을 수 없기에 애써 다를 필요 없어.”
특이적 스타일은 단지 이것저것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미학적으로 완성된 것일 때 의미가 있다. <쇼미더머니777>을 포함하여 기존의 것과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래퍼들이 있다. 이들의 시도가 얼마나 멀리 갈지, 그리하여 특이적 스타일을 구축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 중의 어떤 래퍼는 더 멀리 갈 것이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유쾌하다. 무리적인 것은 시대적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당장에 특이성을 획득하지 않더라도, 무리적인 것에서 멀어지려는 시도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무리적인 것에서 멀어지려는 시도들은 그 만큼의 실패 속에서 시대적 방식을 뚫고 반시대적 특이성을 구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크 피셔는 힙합에서 리얼real이 갖는 2가지 의미를 구분한다. 먼저 주류 음악산업을 거부하는 ‘진정성’있고 비타협적인 음악을 의미하는 한편,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안정성이라는 ‘현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힙합의 비타협적 ‘진정성’이 자본주의적 시장성에 포섭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이처럼 힙합의 리얼real은 한편에서는 ‘진정성’으로 다른 한편 ‘현실’이라는 2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 힙합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어 왔는데, 논란의 배후에는 리얼real에 대한 퍼스펙티브가 있다. 문제는 리얼real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종합할 것인가 하는 거다. 리얼real의 ‘본질적 의미’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어떤 퍼스펙티브 아래서 어떤 방식으로 종합할 것인가’에 의해 리얼real은 시대적이거나 반시대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적 시장성을 의미하는 ‘자본주의적 현실성real’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비타협적 진정성real’에 의해서만 극복될 것이다.
비극적 영웅 :: 몰락 속에서 되돌아오는 자 “누가 드라마를 쓰는가?”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을 것이 있다면,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17, 20, 193
“차라투스트라는 서문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몰락을 원하는 자>의 찬가를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파멸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보존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저없이 다리를 건널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가 인간을 극복하는가>이다. 위버멘쉬는 새로운 감각방식에 의해서 정의된다. ······ 니체에 따르면 영웅들의 비극은, 그들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노리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격렬한 정념에 희생된다는 데 있다. <영웅은 명랑하다.> 바로 그 점이 비극의 저자들이 회피해왔던 것이다. 비극, 그 순수하고 역동적인 명랑성.” 『니체와 철학』 p135, 285, 48
무엇보다, 비극적 영웅은 몰락 속에서 되돌아오는 자로서 ‘위버멘쉬’의 극화이다. 위버멘쉬는 몰락을 원하는 자이며, 자기극복으로 정의되는 존재이다. 당연하게도 위버멘쉬의 자기극복은 자기정체성의 ‘발전이나 진화’가 아니라 ‘몰락과 변신’의 과정이다. 자기정체성의 철저한 몰락만이 위베멘쉬-되기의 전제조건이다. ‘새로운 나’를 위해서는 ‘지금의 나’는 몰락해야 한다. “사람에게는 최선의 것(위버멘쉬)을 위해 최악의 것(심연)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위버멘쉬는 심연을 건너온 자, 자기 심연을 넘어서 새로운 자기가 된 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기 파토스(열정)의 희생자이다. 자기 파토스에 의한 희생이 우울하거나 엄숙하지 않고 유쾌하고 명랑한 것은 당연하다.
<쇼미더머니>는 힙합을 매개로 하는 자기극복의 드라마이다. 힙합의 자기 서사적 특징 때문에, 힙합은 ‘음악 자체’보다 힙합이 보여주는 ‘Real Story’ 삶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쇼미더머니>의 돈과 성공이라는 노골적인 컨셉에도 불구하고, 문신 뒤에 가려진 래퍼들의 스토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래퍼들의 Real Story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식상한 코드가 되어버린 ‘사연팔이’와 쉽게 혼동된다. 실제로 드라마와 사연팔이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어느 깊이에서 자신을 끌어내는가 하는 진정성이라는 양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사연팔이가 얕은 깊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드라마는 자신의 심연을 끌어올리는 힘의 강도에서 구별된다.
<쇼미더머니777>은 처음부터 ‘누가 우승하는가?’ 보다 ‘누가 드라마를 쓰는가!’에 주목했다. 예를 들면, 패배가 예상되는 래퍼들에 대한 이런 리액션을 보면 그렇다. “이름 뒤에 우승후보라는 수식어가 붙지는 않았지만, EK는 무대적인 드라마가 있는 친구다.” (딥플로우) “이전 같으면 수퍼비가 더 유리하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지금은 드라마를 쓸 수 있는 오디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차붐) 우승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지만, 드라마는 자기 이야기이다. 승패를 넘어 드라마를 쓰는 자, 그런 방식으로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자가 바로 비극적 영웅이다. 그런 의미에서 <쇼미더머니777>은 승패를 떠나 자기를 넘어서려는 영웅들의 비극적 서사로 풍성했다.
[차붐 - 죽어도 좋아] 차붐은 고통과 질병을 넘어 <쇼미더머니>에 섰다. 그는 갑작스럽게 길랭바레 증후군이라는 급성마비질환, 희귀성 난치병에 걸렸다.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여기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서 이 병한테도 고맙다.” 그는 루피와 대결에서 예견된 그리고 참담한 패배 후에 이렇게 말한다. “이런 무대를 꼭 하고 싶었고 얻을 걸 모두 없었으므로, 이 이상은 없다. 죽어도 좋다.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에, 장렬하게 전사하겠다.” 차붐의 ‘죽어도 좋아’는 고통의 긍정과 비극적 미학이 그대로 살아있다. “난 알면서도, 난 뵈는 게 없어. 뛰어드는 붉은 태양 I can feel it's too hot, 죽어도 좋아.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난 춤을 출래.”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것에 뛰어드는 그는, 자기 파토스의 비극적 희생자를 자처한다.
[루피 - Save] 루피는 <쇼미더머니777> 참가자 중에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다. “트렌디하고 부드러운 싱잉랩의 끝판왕 / 스킬적인 랩보다 무드와 그루비한 랩을 즐기는, 부드럽고 차가운 감성의 래퍼. / 남자를 게이로 만드는 남자, 남게남 / 퇴폐미가 매력적인 래퍼” 하지만 그는 LA 메킷레인 레이블의 수장으로서 고독과 쉽지 않았던 한국생활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는 너무 확신에 차서 한국에 들어왔다. 어느날 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미래가 창창한 동생들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내가 무슨 자신감, 무슨 근거로?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그 고생 혹은 고통, 고민에 관한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Save’는 그의 고독과 불안감이라는 심연에서 끌어올린 곡이다. 이제 그는 ‘구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졌다.
[매드크라운 - 마미손] 마미손은 래퍼평가전도 넘지 못하고 초반에 ‘광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내내 화제를 몰고 다니면서 <쇼미더머니777>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주방용 고무장갑을 연상시키는 분홍색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마미손’이라는 캐릭터로 등장했을 때, 그가 ‘매드크라운’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쇼미더머니5> 프로듀서 출신 매드크라운은 이 바닥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래퍼. 그는 ‘속이는 사람만 있고 속는 사람은 없는’ 진실에 대한 은유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매드크라운’의 행동을 기이하게 쳐다보던 사람들도, 차츰 ‘마미손’의 놀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미손이라는 캐릭터로 이전의 자기 캐릭터를 넘어서고 싶었던 것. “내 안에는 표현하고 싶은 수많은 ‘나’가 있는데 한계가 느껴졌다. 남의 눈치 안보고, 내 눈치도 안보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 이 마스크는 온전히 나를 위한 즐거움, 나의 놀이다.” 자기 캐릭터를 넘어서는 이 과정을 유쾌한 놀이로 만든 그는 니체적 의미에서 비극적 영웅, 명랑한 영웅이다.
[쌈디 - Me No Jay Park] 사이먼 도미닉 ‘쌈디’는 ‘Me No Jay Park’을 발표하면서 AOMG 공동대표를 사임했다. 직접적인 해명글이나 말보다는 노래와 가사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여, 래퍼다운 행보로 평가받았다. 제이팍(박재범)과 AOMG의 공동대표였던 그는 이 곡을 통해 공동대표로서의 한계를 솔직히 드러내며 제이팍에 대한 열등감과 자의식을 넘어서고 있다. “AOMG는 JAY빨, 그 다음은 로꼬-그레이빨. 점점 기울어지는 책임감의 무게. 히트 몇개로 재탕하는 양심없는 나의 무대. 한명은 늘 확실한 계획이 있어. ‘사장님, 대표님' 소리도 징그럽게 들려. 난 Park의 속도를 따라가는 게 힘들었네.” 쌈디는 여기서 자신의 열등감과 자의식을 노골적이고 정직하게 드러내면서 부정의 감정들을 돌파한다!
한편, <고등래퍼2>의 빈첸과 <쇼미더머니6>의 우원재는 자기 상처를 통해 시대의 상처를 드러낸다. 우원재는 <또>, <진자>, <시차> 등을 통해 밤과 낮이 바뀌어버린 자신을 ‘시차 부적응자’ 곧 ‘시대 부적응자’로 묘사하고, 자살이나 약물 등으로 내면의 불안과 상처를 드러낸다. 한편 빈첸의 <바코드>는 상품과 소비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청소년의 손목자해를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다. “끊어버리고만 싶어, 이거 다 / 그만 놔버리고 싶어, 모두 다 / 엄마는 바코드 찍을 때 무슨 기분인지 묻고 싶은데, 알고 나면 내가 다칠까 / 난 사랑받을 가치있는 놈일까 / 방송 싫다면서, 바코드 달고 현재 여기 / 흰색 배경에 검은 줄이 내 팔을 내려보게 해 / 이대로 사는 게 의미는 있을지 또 궁금해” 무엇이 그들의 신체에 상처를 내고 허무의 심연으로 끌어내리는가? 그들은 불안에 사로잡힌 신체, 우울에 잠식당한 신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병든 시대를 증언한다. 격렬하게 시대를 비판하거나 시대에 섣부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반시대적이다.
이 밖에 래퍼 김효은은 나플라와 ‘제대로 된’ 붐뱁 대 붐뱁의 대결에서 패배한 후에 자신을 넘어선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무대를 멋있게 하고 싶었다. 우승 그런 건 애초에 상관 없었고, 나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쇼미더머니>에 지원했다. 계속 도전일 거다. 결과에도 만족하고 내 자신에게 너무 만족해서, 이걸 밟고 좀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 한편 쿠기는 집안의 반대와 사회적 가치를 넘어, 안정적인 대기업 대신 랩을 선택했던 갈등을 고백한다. “대기업 취직을 꿈꾸는 대학생이었다. 부모님은 공기업을 원하셨고, 누나도 공기업에서 일하고 있고, 집안에 나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처럼 <쇼미더머니>와 한국 힙합씬은 다양한 유형의 자기극복의 테마를 연출한다. 넘어서야 할 그것은 때로 차붐처럼 신체적 질병일 수도 있고, 마미손처럼 고정화된 자기 캐릭터일 수도, 루피처럼 리더로서의 책임감일 수도, 쌈디처럼 열등감이나 자의식일수도, 우원재와 빈첸 같은 내면의 상처나 불안일 수도 있다. 나를 넘어서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자신의 상처와 대면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렇게 나를 병들게 하는 것들을 넘어서는 가운데 내 안의 위버멘쉬는 깨어날 것이다.
<쇼미더머니> 같은 서바이벌 경쟁프로그램에서 이들은 ‘타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넘어서는 것’에 집중한다. 이는 ‘경쟁과 승리’라는 시대적 가치로부터 비껴나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다. ‘경쟁의 우승자’가 아니라 ‘자신의 드라마’를 쓰는 자가 되려는 그들에게는 비극적 영웅이 숨쉬고 있다. 우리가 우승자가 아니라 그들을 기억하는 것도 자기의 몰락과 변신이라는 비극적 서사 때문이다. 즉 ‘승리’라는 시대적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몰락’이라는 반시대적 가치가 아름다운 것도 이 때문이다.
4. 힙합 속에서 청년세대의 다른 가능성을 본다
: 비극적 영웅의 도래를 기다리며!
청년세대는 힙합음악 속에서 시대와 공명하거나 시대에 저항한다. 그들은 돈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며 시대적 가치에 복종하지만, 동시에 자기 세대의 특이성과 자기극복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성공한 래퍼들이 한편에서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의 서사’를 노래하는 동안, 다른 한편 힙합의 건강함은 Real Style, Real Me, Real Story의 ‘자기 서사’를 써내려간다. 무리적인 것을 넘어 특이적 스타일을 생성하려는 시도는 ‘다수적 방식’에 저항하고 있다. 또한 승패를 넘어 자기극복의 드라마를 쓰는 방식은 ‘성공이라는 가치’를 넘어서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힙합의 반시대적 요소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청년세대의 저항성으로 읽는다.
전체 노동자 2000만의 절반인 1000만이 비정규직이고, 전체 실업자 400만 가운데 청년실업자가 100만이다. 정규직은 줄어들고 정년은 짧아져서 ‘직업의 안정성’이 좋은 직장의 절대적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정규직이나 건물주가 청년세대의 꿈이 되었다. 무엇보다 대학졸업생 3명 중에 1명만 취업되고 2명은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되는 현실, 그래서 취준생이 70만명, 공시생이 50만명에 육박한 것이 청년세대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중산층의 꿈으로 이어지는 ‘행복의 가치계열’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행복의 가치계열이 불가능할수록 여전히 많은 청년세대는 그것에 더욱 집착하지만, 점점 많은 청년들이 이 가치계열에서 이탈하고 있다.
대학졸업장으로도 밥벌이가 힘들어진 상황은, 대학을 포기하는 것을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선택사항으로 만든다. 이전에 제도교육에서 이탈하는 것은 가족의 반대는 물론 스스로도 특별한 결단이 필요했다. 제도교육의 메리트가 사라진 지금, 고등학교를 자퇴하거나 대학을 포기하는 것은 훨씬 가벼워졌다. 실제 고등래퍼의 많은 참가자는 고등학교 자퇴자이다. 대기업ㆍ공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정규직조차 힘든 상황은, 자발성과 상관없이 취직을 포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한다. 이전에 대학졸업하고도 백수로 지내는 것은 개인적 무능력이나 노력부족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일자리가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로 드러난 지금, 취준생ㆍ공시생 대열에 추가되기를 거부하고, 알바ㆍ프리랜서로 있으면서 자기일을 하려는 시도가 늘어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 좌절된 마당에, 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중산층의 꿈까지는 너무 요원하다!
힙합에 집중하고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시대가 만든 ‘행복의 가치계열’에 균열을 낼 수는 없을까? 힙합의 열정 속에서 건물주ㆍ공무원ㆍ정규직의 꿈이 초라해질 수는 없을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취업준비생에 이르기까지 ‘행복해지기 위해 끝없는 준비’를 하는 대신에, 힙합이 ‘지금 여기서 행복’을 노래할 수는 없을까? 모든 가능성이 닫혀버린 현실에서 “내 삶은 이미 정해져버린 게 아닐까? 이번 생에는 틀렸어!” 허무주의 대신 힙합이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까?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얼마나 많은 것이 아직도 가능한가!”
다수 인민의 무한빈곤에 근거해서만 자본축적이 가능한 신자유주의는 청년세대에게 실업과 불안 외에 어떤 것도 제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신분상승의 사다리, 중산층의 꿈이 좌절된 청년세대를 더 이상 이 시스템으로 포섭할 수 없다. 이제 어떤 메리트도 제시할 수 없는 무능체제로서 신자유주의는 자기 가치에 반하는 세대를 길러내고 있다. 힙합의 내부에서 신자유주의로부터 이탈하는 청년세대의 가치유형들을 본다. 시대적 가치에 포섭되지 않는 특이적 존재, 스스로 몰락하면서 되돌아오는 자, 한국 힙합씬에서 더 많은 비극적 영웅의 도래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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