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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_이진경 칼럼] 재난, 혹은 물질성의 저항

종종 우리는 뜻하지 않은 존재자가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예전에 그것은 네스호의 괴물이나 UFO, 혹은 영매의 몸에 갑자기 내려 앉은 귀신처럼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던 것들,혹은 과학의 시선 바깥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것이 별로 남아나지 않게 된 지금, 그런 신비한 사실 자체도 별로 남아 있지 않거니와, 어쩌다 귀에 들어온다 해도, 일축의 감탄사와 함께 쉽게 묻혀버리고 만다.


그래도 종종 당혹을 야기하는 뜻밖의 존재자들이 있다. 전에 태평양의 어딘가에 있는,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가 떠돌다 모여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쓰레기의 섬 얘기를 인터넷서 보았을 때 그랬다. 이때의 놀라움과 당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던 것이었다는 점에서 전과 달랐다. 그래, 이렇게 먹고 쓰고 버려대는데, 그게 어딘가 그렇게 모여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럼에도 그런 것이 있음을 알았을 때, 당혹하게 되는 것은, 그 정도까지 였나, 이후에는 더 할 텐데 어쩌지 라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쉽게 보여주는 미래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일본 후쿠시마 지역을 대지진이 덮쳤을 때, 우리를 놀라고 당혹하게 했던 것은 지진이나 쓰나미라는 거대한 자연의 힘이 아니었다. 그건 비록 인간의 힘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이미 과학의 시선 안에 있다. 정작 놀라게 했던 것은 과학과 기술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냈던 원자력 발전소가 붕괴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된 사실이었다. 실은 그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하던 것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지적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경악은 그렇게 지적되던 일이 정말 일어났다는 점에서 연유했다.


거기에 더해, 무기로든 에너지로든, 과학의 첨단지식의 산물인 원자력이 사실은 지진 이상으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당혹을 주었던 것 같다. 아무리 보호복을 입어도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사고의 확대를 막기 위해 투입된 사람들--비정규직 노동자였다!!--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고, 그래서 한때는 영웅으로 칭송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처리할 수 있는 한계선은 분명했다. 더 놀라운 것은 원전 주변에서 사고로 죽어 방치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는데, 이들 시신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땅에 묻으면 땅이 오염되고, 태우면 방사능이 분진이 되어 대기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원전의 폐기물이 모두 그런 것 아닌가? 폐기장이 있지만, 그것이 잠시 안보이게 치워두는 것일 뿐, 실제로는 폐기한 것이 아니며, 이번 경우처럼 사고로 인해 인간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체르노빌처럼 시멘트로 묻어둔다 해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고 보이지 않을 뿐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사능, 아니 원자력은 과학이든 뭐든 인간의 손이 아무리 해도 가 닿지 못하고 처리할 수 없는 어떤 한계지대를 보여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는 단지 원자력 같은 극단적인 것만이 아니다. 태평양에 떠있다는 거대한 쓰레기의 섬도, 중국 연안의 서해 바다를 메우고 있다는 엄청난 양의 배설물도 정도는 다르지만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다를 확장하거나 지구를 늘려갈 수 없는 한 그것은 조만간 처리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이번에 알려진 미군의 고엽제도 그렇다. 한숨이 나오지만, 베트남의 정글을 오염시킨 수천만 리터의 고엽제, ‘식물통제계획이라는 과학적 작전명으로 한국의 비무장지대에 뿌려진 고엽제야 목적에 맞게 쓰여졌다고 치자. 다 쓰지 못한 것들이 폐기물로 남았을 때, 그것을 계속 보유하고 있을 게 아닌 한,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을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된 지역이 아니라도 어딘가 묻어가 바다에 버리거나 등등 해야 했을 것이다. 오염된 지역만 달라질 수 있을 뿐, 어딘가 오염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게다. 이는 고엽제만이 아니라 모든 화학적 폐기물에 대해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손쓸 수 없는 어떤 한계, 제거할 수 없는 어떤 거리가 있는 것이다.


예전에 딜타이는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의 의지 바깥에 있기에, 인간의 의식이 저항으로 느끼는 사물의 물질성을 저항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의지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를 외부라고 명명한다. 사고로 드러난 원전의 방사능이나 고엽제, 쓰레기 등은 모두 인간의 의지대로 변형되어 사용되고 남은 것이다. 이런 사고들은 인간이 과학의 힘을 써서 사용한 것조차 이렇게 처리할 수 없는 물질성을 가짐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물질은 이처럼 인간의 의지에 저항한다. 문제는 처리할 수 없는 한계가, ‘저항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그것이 있음을 부정하고 모두 인간의 뜻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아니었을까? 거꾸로 그런 저항과 한계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인정할 때, 모든 것을 인간의 뜻대로 사용할 순 없음을 수긍하고 물질성의 영역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때, 물질성의 사후적인 저항이나 복수를 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재난이야말로, 정복할 수 없는 어떤 불가능성의 도래야 말로 우리가 사물, 자연과 맺은 관계를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기회가 아닐까? 학인의 머리를 후려치는 선사들의 방망이질 같은.



글 / 이진경(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법보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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