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밖에서 욕구하기
칼 마르크스,『경제학-철학 수고』(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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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을 금속이여, 그대는 국민들을 모욕하는 창녀로다’ -아테네의 티몬
맑스의『경제학-철학 수고』는 국민경제학이 자명한 것이라 가정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가장 먼저 칼날을 들이대는 곳은 국민경제학의 전제라 할 수 있는 ‘사적소유’다. 국민경제학은 ‘사적소유’를 경제의 당연한 시작지점으로 가정한다. 그런데 어째서 ‘사적소유’를 인간의 본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명한 것으로 놓고 시작하는가? 맑스는 우리들의 이러한 오래된 믿음을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개념적으로 설명할 것을 전제로 놓는 명백한 오류다.
국민경제학이 은폐한 것
국민경제학이 필연적인 과정으로 제시하는 ‘분업’과 ‘교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가공의 ‘원시상태’를 전제로 하고 설명한다. 하지만 경제학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들의 활동을 다루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맑스는 이러한 가공의 ‘원시상태’ 대신에 ‘현재 존재하는 사실’을 고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에만 국민경제학이 은폐하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드러난다. 가장 대표적으로 임금 노동자가 겪는 ‘소외’가 있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노동자 자신’으로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생산하는 낯선 자본을 위해서만 현존한다. 이때 생산되는 자본이 ‘낯선’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로 부터도 낯선 존재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소외’론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노동 행위나 노동 행위를 통해 나온 노동산물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맑스는 이러한 본질적인 물음에 대해 쉽게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맑스는 화폐제도라는-국민경제학이 사적소유와 함께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형식을 개념적으로 파악한다.
‘표상을 현실로, 현실을 단순한 표상으로 만드는 수단이요 능력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p.179)
‘뚜쟁이’로서의 화폐, ‘신’으로서의 화폐
맑스에 따르면 화폐는 뚜쟁이이다. 인간이 무슨 음식을 먹고 싶거나 무엇인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실현시키는가? 화폐를 통해서다. 화폐라는 뚜쟁이가 없다면 인간은 일련의 욕구들을 실현시킬 수 없다. 반대로 화폐가 있다면 어떤가. 단순히 공상에 그치는 욕구까지도 화폐를 통해 한순간에 실현 시킬 수 있다. 화폐는 ‘표상을 현실로, 현실을 단순한 표상으로 만드는 수단이요 능력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p.179)
“금?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순금? 아니, 신들이여!
헛되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은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만든다네.”
(셰익스피어, 『아테네의 티몬』,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재인용)
뿐만 아니다. 화폐는 신이기도 하다. 맑스가 인용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처럼 화폐는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만드는 연금술을 행한다. 나의 힘은 내가 가진 화폐의 힘이요, 화폐의 힘은 곧 나이다. ‘화폐는 나의 모든 무능력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전환시킨다.’(177) 이렇게 화폐는 전지전능한 힘으로 신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화폐의 ‘전도’가 일반화 될 때 인간의 욕구와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적어도 화폐의 가치가 작동하는 현실 세계 안에서 우리의 욕구는 모두 화폐의 힘에 따라 좌지우지 될 것 같다. 우리는 화폐 없이는 욕구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욕구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화폐로 환산 할 수 없는 것
그렇다면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말한 ‘급진적 욕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적어도 맑스가 비판하는 국민경제학이라는 토대에서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맑스는 아예 불가능한 요구를 한 것일까? 아예 전제를 바꿔보면 어떨까. 맑스가 말하는 ‘급진적 욕구’는 화폐가 일반화된 국민경제학에서 통용될 수 없는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닐까. 즉 화폐로 환산할 수 없는 것 말이다. 물론 이를 발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맑스가 말하는 ‘급진적 욕구’가 무엇을 말하는지 한 가지 구체적인 조건이 추가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발명할 새로운 욕구는 무엇인가. 화폐라는 일반화된 가치로 측정될 수 없는 것, 그것을 욕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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