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학: 환경과 생물의 변화, 그 사이에 대한 언어
단감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1. 기린의 목은 왜 길어졌을까
중학교 때였을 겁니다. 생물학 교과서에서 한 가지 눈길을 끄는 이야기를 봤습니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것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기린의 조상의 조상 때에 높은 곳에 있는 잎을 먹어야 했고, 목을 높이 뻗다보니 목이 길어졌고, 그렇게 길어진 목이 앞으로 태어날 기린들에게도 유전된다.”
그걸 ‘용불용설’이라고 하더군요. 왠지 모르게 그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이야.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그런 게 있나보다. 게다가 그게 태어날 아이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니!’ 한참 맘에 안 들던 모습들이 많던 시절, 좀 더 좋은 쪽으로 바꿀 여지가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게 나 혼자만의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멋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한 노력이 좀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문단에 이런 요지의 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그러나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은 후천적인 변화가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는 부분을 부정한다. 현대 유전학에 근거하여 볼 때, 표현형의 변화는 그 세대에서 끝나고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1)
이 관점에서 보면 기린이 아무리 이번 생에서 목을 늘려놓아도 이것은 그의 아이와는 유전적으로 무관한 일이 됩니다. 오늘날 기린의 목이 긴 것은 단지 그때 태어났던 기린들 중에서 좀 더 목이 긴 유전 정보를 가진 아이들이 높은 곳에 있던 잎을 더 잘 먹을 수 있었고, 좀 더 잘 살아남아 아이를 더 많이 낳았고, 오늘날까지 그런 과정들이 반복됐기 때문인 것입니다.
출처: http://ask.nate.com/qna/view.html?n=8515345
이처럼 후천적인 변화가 유전될 수 없는 것은 기린 형질의 유전형과 표현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물이 가지고 있는 모양이나 성질을 형질이라고 합니다. 형질에는 세대를 넘어서 전달되는 유전형이 있고, 그 유전형을 바탕으로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드러나는 표현형이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유전형이란 생물의 모든 세포에 있는 DNA서열이고, 표현형은 그 DNA서열이 만들어내는 단백질 같은 생화학적인 분자들의 합을 말합니다. 머리카락 색, 눈의 색 등 유전형이 발현된 결과 역시 표현형이라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표현형이 아무리 달라져도 유전형의 변화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환경과 생물의 변화 그 사이를 설명하는 언어, 후성유전학
하지만 최근 등장한 ‘후성유전학’은 이게 전부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이 글에서는 두 권의 책과 함께 후성유전학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성유전학은 후천적인 변화가 유전될 수 있다는 용불용설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후성유전학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표현형에 불과한줄 알았던 몇몇 단백질이 사실 DNA의 발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단백질들을 특별히 ‘부착물’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둘째, 부착물의 변화는 생애 과정에서 획득됩니다. 셋째, 부착물의 변화는 유전되기도 합니다. 이제 『쉽게 쓴 후성유전학』2)과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3)라는 책과 함께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동물의 세포 그림
출처: https://t1.daumcdn.net/cfile/blog/197B97454DF1995721
1) DNA에서 생물까지: 유전자 발현을 장기적으로 조절하는 ‘부착물’
기린은 물론이고 우리 몸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DNA는 유전자라는 정보를 담은 채로 세포 안에 있습니다. 세포들은 상황에 따라 필요한 DNA서열을 켜거나 끌 수 있습니다. 어떤 DNA서열이 켜지면 어떤 유전자가 발현되는 것이고, 그 유전자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만들어져서 그 상황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유전자 조절gene regulation’이라고 합니다.4)
생물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유전자 조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몇 시간에서 하루 정도의 시간에 걸친 단기적 유전자 조절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었을 때 일어나는 과정이 그 예입니다. 밥을 먹으면 혈당 수치가 올라가고, 췌장의 한 세포가 그것을 감지해 어떤 호르몬을 혈액으로 내보내줍니다. 그러면 이 호르몬이 다른 세포들의 핵에 가서 인슐린 생산 유전자를 발현시켜줍니다. 그러면 인슐린이 나와서 우리 몸의 혈당을 낮춰주는 것입니다.
DNA메틸화(하얀 화살표)
출처: http://medicalxpress.com/news/2011-10-patterns-dna-methylation.html
또 다른 유전자 조절은 몇 달 혹은 몇 십 년, 평생에 걸쳐서 일어나는 장기적 유전자 조절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세포들은 모두 같은 유전자를 갖지만 피부에 있는 세포는 평생 피부가 되고, 간에 있는 것은 간세포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장기적 유전자 조절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기적 유전자 조절에 대한 연구가 후성유전학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기적으로 유전자를 조절하는 부착물들이 어떻게 붙고 떨어지는지에 대한 연구5)’가 후성유전학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부착물로는 ‘메틸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메틸기는 DNA서열 중 특정 부위(오른쪽 그림의 하얀 화살표)6)에 붙어서, 그 서열에 암호화된 유전자가 장기적으로 발현되지 않도록 합니다. 이 과정을 ‘DNA메틸화’라고 부르는데 한번 메틸화 된 부위는 특별한 환경적 자극이 없는 한 장기적으로 지속됩니다.7)
정리해보면 장기적 유전자 조절로 ‘몸의 생화학적 과정들’의 대략적인 범위가 한정되고, 그 범위 안에서 단기적 유전자 조절이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후성유전학이 정립되기 전에는 부착물을 통한 장기적 유전자 조절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개념들을 통해서 기존의 관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존의 관점에서 DNA는 모든 생물학적 과정을 주도하는 감독으로, 그리고 DNA의 발현인 우리의 모습들은 단지 그 감독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보입니다. 특히 한 생물이 일생동안 아무리 환경과 소통하면서 변해가도 DNA가 변하지 않는 이상 생물의 물리적인 본질은 그대로인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후성유전학을 통해 본 생명의 변화 과정은 보다 총체적이고 역동적입니다. 환경과 생물의 상호작용들이 생물학적 과정의 감독이 되며, DNA는 다른 생화학 물질들과 함께 움직이는 배우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생물의 ‘물리적 토대’가 DNA만으로 한정될 수도 없고, 고정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 부착물의 변화는 생애 과정에서 획득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착물의 작용은 장기적이긴 하지만 평생 고정된 채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생물이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양상의 차이’ 역시 부착물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때 그 ‘차이’는 한번 정해지면 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된 쥐의 사례가 인상적입니다.
-> 출처: http://scienceon.hani.co.kr/34651
쥐의 경우 핥아주고 털을 손질해 주는 것을 ‘보살핌 자극’이라고 하는데, 이런 자극을 많이 주는 어미 쥐의 새끼는 생물학적인 면에서 어미 쥐의 특성을 닮은 경우가 많습니다. 세포의 DNA에 붙은 ‘부착물’의 수준까지 말입니다. 안 핥아주는 어미 쥐에게서 자란 새끼 쥐 역시 부착물의 수준까지 비슷해집니다. 이 두 집단은 특히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방식(스트레스 축)에서 차이가 납니다.
어떤 쥐가 다른 쥐들과 같은 사건들을 겪을 때, 다른 쥐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장기적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는 것은 생애 초기에 스트레스 축이 다르게 설정됐기 때문입니다. 생애 초기에 보살핌 자극을 적게 받은 새끼 쥐는 스트레스 축이 ‘민감’쪽으로 편향되어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 반응(장기적 불안, 공포, 우울 등)을 보이며 자랍니다. 보살핌 자극은 특정 뇌세포 영역들의 DNA메틸화 패턴에 영향을 미치고, 그러면 스트레스 호르몬 수용체를 암호화한 유전자의 발현이 달라집니다. 그 결과 시시각각 변해가는 환경적 자극에 대해 장기적이고 과도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 어미 쥐의 보살핌 자극은 부착물의 변화를 가져와서 아이 쥐의 200~300개 정도 유전자 발현의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8) 다만 이때 스트레스 축이 ‘민감’으로 편향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민감’ 편향이 자라나는 생물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생물학적 영향도 있기 때문입니다.9)
중요한 점은 생애 초기(쥐의 경우엔 태어난 후 8일)가 특히 스트레스축의 편향에 예민한 시기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향이 나중에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반응이 ‘민감’쪽으로 편향된 쥐가 반대쪽으로 편향된 또래 쥐들과 어울린 결과 부착물 수준에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10) 이 밖에도 고릴라, 붉은털원숭이의 사례에서 유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11)
3) 부착물의 변화는 유전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쥐의 사례에서 부착물의 변화는 ‘세대를 넘어서 전달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부착물의 변화는 표현형의 영역에서 어미 쥐로부터 ‘유발된’ 것일 뿐, 생물학적으로 ‘유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엄격한 의미로 생물학적으로 유전되었다고 하려면 유전형 즉, DNA서열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게 기존의 관점이었습니다.
동물은 DNA서열을 전달하는 난자와 정자를 신체의 나머지 조직과 완전히 별개로 만들며, 수정 과정에서 그나마 붙어있던 부착물들을 떼어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후천적인 변화가 유전형의 변화에 관여할 여지가 차단됩니다. 이 차단을 ‘바이스만 빗장’이라고 부르는데, 후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후천적인 획득형질을 유전시키지 않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는 게 생물학자들의 생각입니다.12) 하지만 최근 후성유전학의 성과들을 통해 이 바이스만 빗장이 열리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13) 다시 말해서 DNA서열상의 직접적인 변화가 없더라도, DNA에 붙은 부착물이 계속 유전되어 DNA서열상의 변화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착물의 변화가 유전되는 사례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임신한 쥐가 독성 농약인 빈클로졸린에 노출되면 이 동물의 후손은 수컷일 경우엔 생식은 가능했지만 일반적인 쥐들보다는 새끼를 훨씬 적게 낳았습니다. 호르몬을 파괴하는 독이 생식세포의 형성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부분은 그 다음인데, 생식세포 형성을 방해하는 효과는 부계(父系)를 따라 거의 모든 수컷 자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때 그 쥐의 유전자 암호(DNA서열)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DNA서열들 자체가 아니라 DNA메틸화 패턴, 다시 말해 부착물의 패턴이 변했던 것입니다.
포유류와 식물에서 볼 수 있는 ’유전체 각인genomic imprinting'이라는 과정도 직접적 후성유전의 증거 중 하나입니다. 유전체 각인이란 난자와 정자 같은 생식세포에 있는 몇몇 유전자가 침묵하도록 부착물이 붙는 것을 말합니다.14) 그리고 이런 부착물들은 바이스만 빗장을 열고 난자와 정자에 붙은 채로 아이의 염색체에 도달합니다. 이때 수컷과 암컷이 유전자에 서로 다른 부착물을 붙여서 아이에게 비대칭적으로 물려줍니다. 사람의 경우 이런 각인 유전자가 100~600여개 정도로 추정되며, 유전체 각인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태아가 지나치게 자라는 벡위스 비데만 증후군 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유전체 각인은 태아 발생에 오래 전부터 이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관련된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남성과 관련된 사례입니다. 남성이 사춘기가 되기 전(열 살 때쯤)의 시기에 적당히 소식小食했다면 그의 자식이나 손자들이 더 오래살고 성인병에도 더 드물게 걸립니다. 반대로 그 시기에 남성이 대식으로 비만했다면 그 자식이나 손자들의 수명이 짧고 당뇨나 심근경색에 더 많이 걸리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여성과 관련된 사례도 있는데,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대기근을 겪은 여성의 손주들은 과체중과 성인병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됐습니다. 후성유전적 정보가 후대에 전달되는 데 중요한 것은 그 정보들이 프로그래밍 되는 삶의 시기와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15) 물론 사람과 관련된 부착물의 양상은 아직 입증단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쥐의 스트레스 편향 사례를 참조해보면 꼭 불가능한 이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부착물이 생애 과정들에서 획득되고 유전되기도 함을 살펴봄으로써 크게 두 가지 포인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환경의 변화는 생물에게 보다 깊은 수준의 생물학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관점에서 환경의 변화는 생물의 변화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생물의 본질’인 DNA와 유전자까지 영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 유전자 조절이라는 후성유전학적 관점에서는 환경이 DNA를 켜고 끄는 것이 일상적이고, 가역적입니다.
또한 그런 변화의 결과인 부착물이 유전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 세대에 유전될 수 있는 물질’로 DNA만을 생각했던 기존의 관점이 수정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는 곧 생물 유전의 본질을 DNA로만 한정할 수 없음을 뜻하고, 부착물이라는 또 다른 물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부착시킨 상호작용들 역시 함께 생각해야 함을 뜻합니다.
3. 후성유전학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후성유전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부착물’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설명을 위해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렸지만 사실 부착물의 종류와 역할, 효과는 정말 다양하고 총체적입니다. 그래서 그 중 하나를 요소로 골라내기가 어려운 때도 많습니다. 후성유전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부착물들의 작용 양상을 ‘제 2의 암호’라고 합니다. 제 1의 암호인 유전자처럼 어떤 정보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유전자가 모든 생명적 과정을 지배하는 유일한 시스템이 아니며, 또 하나의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전자는 신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생물분자에 대해 말해주지만, 이들 생물분자 중에서 언제, 어디에서 어떤 분자를 실제로 만들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은 제 2의 암호인 부착물 시스템입니다. 또한 제 1의 암호가 수만 년이라는 시간 척도로 작용한다면(돌연변이 발생으로 인한 진화), 제 2의 암호인 후성유전학적 정보들은 몇 년 혹은 몇 십 년 사이에 변하면서 환경의 변화에 역동적으로 반응합니다.16) 이런 점에서 우리는 후성유전학을 통해 유전자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기존의 시각에서 유전자는 생물학적 발생 과정을 안내하는 감독으로 기능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유전자는 ‘세포가 활용하는 하나의 자원’이면서 ‘반응결과’입니다.17) 생물학적 과정의 감독은 세포차원에 존재하고, 그 감독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환경과 생물의 상호작용인 것입니다.
끝으로 후성유전학이 갖는 일상적인 의미를 고민하면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참고한 책의 저자 중 한명인 페터 슈포르크가 말하듯이, 지금의 후성유전학자들은 일상적인 차원에서 단지 “건강한 생활, 스트레스 없는 생활을 위해 노력하라. 먹을거리에 신경을 쓰고 신체가 원하는 만큼, 더 좋게는 그보다 조금 더 운동하라. 자녀들에게 늘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고,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도 확보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18) 부착물들의 작동 양상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성유전학이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몸의 외부적 상황이 우리와 다음 세대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는 점 말입니다.
후성유전학을 통해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기린의 목이 노력으로 길어지고 그게 유전되는’ 완전한 용불용설은 아니더라도, 개체의 일상과 그 일상을 만드는 중요한 차원의 과정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말입니다.
출처: http://yeonmiso.com.ne.kr/text1/indranet.htm
후성유전학자 예른 발터가 강조하듯이 ‘거의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유전자 조절에 영향을 미칩니다. 음식, 행동, 유독물질, 스트레스, 기후변화도 말입니다. 외적인 요인들은 신경계와 호르몬계를 거쳐 우리의 생리학에 영향을 미치며, 세포의 신진대사까지도 좌우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부착물 조절의 도구를 가지고 있고, 그로써 장기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힘을 갖습니다.19) 이러한 점들을 알게 됐을 때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부착물 변화를 유발하는 식품첨가물, 화장품, 화학적 분자들을 만들어내는 그물에 걸리지 않을 수 없고,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이 나(我)라는 개인을 넘어서는 ‘물리적‧현실적 상호작용들’이 거쳐 가며 변해가는 장(場)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그물에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일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 후성유전학으로 보이는 인과의 그물은 생각보다 넓고 깊게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끝)
1) 큰 따옴표 안의 문장은 [네이버 지식백과] - 용불용설 [用不用說]을 참조했습니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1831&cid=3440&categoryId=3440
2) 『쉽게 쓴 후성유전학』, 리처드 C. 프랜시스, 김명남 옮김, 시공사 출판, 2013.12.10.
3)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페터 슈포르크, 유영미 옮김, 갈매나무, 2013.08.20
4) 『쉽게 쓴 후성유전학』, p.25.
5) 『쉽게 쓴 후성유전학』, pp.7~8.
6) 시토신(C)과 구아닌(G)이 여러번 엇갈려 놓여있는 곳, CpG섬(CpG-Island). 인간은 p.54.
7) 현재 밝혀진 후성유전적 과정으로는 DNA메틸화 말고도 ‘히스톤 조절’이나 마이크로 RNA에 의한 ‘RNA간섭’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pp..52~67 참조.
8)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p.115.
9)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과 비슷한 물질을 찌르레기의 알에 주사하면 그 알의 배아는 거칠고 위험한 주변 세계에서 부화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부화한 지 3주 후에 날 수 있게 됐을 때 강한 근육으로 훨씬 더 능숙하게 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p.115 참조.
10) 『쉽게 쓴 후성유전학』, pp.119~120.
11) 『쉽게 쓴 후성유전학』, pp.108~114.
12)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p.243.
13) 식물은 생식세포 계열이 체세포의 발달과정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식물의 생식세포는 일반 조직세포(동물의 체세포에 해당하는)로부터 발달하고, 따라서 후성유전적 부착물들을 그대로 물려줄 여지가 많습니다.
14) 이러한 각인이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각인’이 진화를 가속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진화적 이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생식세포계열 유전자가 지닌 분자적 구조의 비교적 작은 변화로 자손의 유전자 활성화 패턴을 아주 효율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장점입니다.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p.268.
15)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p.253.
16)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p.19.
17) 『쉽게 쓴 후성유전학』, p.11,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암 역시 세포의 유전자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부착물의 변화에 의한 것입니다. 때문에 적절한 부착물 조절 조건을 찾으면 암세포도 정상세포로 되돌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쓴 후성유전학』, p.230.
18)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p.305.
19)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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