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의식
- 칼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1845-6)
이 종 현 / 수유너머N 회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맑스의 저작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의 제목은 강철 같은 투사의 느낌을 준다. 철두철미한 독일인의 이미지 그리고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한 이데올로기의 아우라가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조합어를 둘러싸고 있다. 영어 ‘아이디올러지(ideology)’는 ‘어린쥐(orange)’와 같이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독일어 ‘이데올로기’는 마음을 가다듬고 발음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이 신성한 이데올로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말씀처럼 소중히 받들어 모셔야만 하는 것일까? 맑스가 보기에 헤겔과 청년헤겔파(포이어바흐, 슈티르너, 막스, 슈트라우스 등)가 전개한 독일의 철학, 즉 ‘독일 이데올로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여기에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즉 인간들이 말하고 상상하고 표상하는 것에서, 또한 말해지고 사유되고 상상되고 표상된 인간들에서 출발하여 살아 있는 인간들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202)[1]
포이어바흐에게 인간은 ‘인간(der Mensch, the man)’이다. 그에게 인간이란 누구랄 것 없이 무릇 이러저러해야 하는 유적 존재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6번에서 포이어바흐의 ‘인간’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본질은 ‘유(類)’로서만, 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오직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일반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2]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와 500년 전에 살았던 마르틴 루터의 본질은 같을까? 루터와 나는 같은 ‘유’라고 할 수 있을까? 어째서 나는 ‘자연스럽게’ 루터와 나를 같은 유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맑스는 포이어바흐를 비롯한 19세기 초반 독일 철학자들의 사유 방식이 무언가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관조적으로 도출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사실 맑스가 윗문단에서 묘사하고 있는 독일 철학이 가공하는 자료들은 성서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은 아니다. 우선 인간이 말하는 것(sagen)은 일상의 대화와 문학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상상하는 것(sich einbilden)은 어떤 형상(bild)을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표상하는 것(sich vorstellen)은 눈 앞에(vor) 무언가를 세우고(stellen) 그것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일인데, 이 방식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활용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에서 인간의 언어, 상상, 표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보면서 종교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도출해 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지고, 상상되고, 표상된 ‘인간’이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들을 온전히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맑스는 이렇게 언어, 상상, 표상으로만 파악되는 ‘인간’은 아직 허공에 붕 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어떻게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부터 착수한다.
그림자로서의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맑스는 땅에서 먹고 살아가는 인간을 어떻게 관찰하는 것일까? 인간의 일상사를 모두 긁어모아 묘사하고 그것들 중에서 중요하게 보이는 것을 추려내는 것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일까? 맑스는 다음과 같이 ‘활동하는 인간들’과 ‘현실적 생활 과정’을 분석대상으로 강조한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서 출발하며, 또한 그들의 현실적 생활 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들과 반향들의 발전을 표현한다. […]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202)
우선 인간은 땅 위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밭을 갈기도 하고, 장사를 하기도 하고, 밥을 짓기도 한다. 광포한 자연에 둘러싸인 인간은 가만히 앉아 굶어 죽거나 짐승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하여 움직이며 ‘활동’하고 있다. 맑스는 이러한 활동들을 단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으로만 놓아두지 않고 하나의 ‘생활 과정’으로 엮어서 파악한다. 어떤 생산력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활용하기에 적합한 생산관계들이 함께 개발된다. 예를 들면, 물의 엄청난 위력을 깨닫고 그 물을 활용하는 방식들, 즉 물레방아나 나룻배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그들의 관계 자체도 바뀐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은 인간의 삶 전체의 양상을 바꾸는 과정이기도 하다. 맑스는 바로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들과 반향들’이 표현된다고 말한다. 생활 과정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는 형태로 인식된다. 하나의 생활 과정이 갖는 의미는 인간이 생활 과정을 겪으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활동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의식의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 속에서 생활 과정의 물질성을 걷어내고 하늘로 올려 보낸 것이다. 생활 과정 자체가 변화되면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반영, 즉 의식의 내용 역시 바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결코 만고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신성한 숭배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어떻게 이데올로기의 총체로서 스탈린의 동상은 전 소연방의 하늘 높이 세워지게 되었을까?
물질적 교류로서의 언어
그런데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것은 생활 과정뿐만이 아니다. 맑스는 “이념들, 표상들, 의식 등의 생산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물질적 활동과 물질적 교류 속에, 현실적 생활의 언어 속에 직접적으로 연루된다.(201)”라고 말하면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언어는 분절된 기호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것일 텐데, 어째서 물질적 활동, 물질적 교류와 함께 나란히 놓이는 것일까? 게다가 맑스는 인간의 현실적 생활 과정으로부터 거기에 반영된 이데올로기를 파악하는 일을 ‘인간이 말하는 것’, ‘말해진 인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때의 ‘말하는 것’, ‘말해진 것’은 기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의 ‘그 인간’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본질적인 인간’이 그 예다. 하지만 맑스는 특이하게도 언어를 다음과 같이 물질적 교류의 한 형태로 파악한다.
‘정신’은 애초부터 물질에 ‘묶여’ 있다는 멍에를 짊어지고 있으니, 여기서 그 물질이란 진동하는 공기층, 음성, 요컨대 언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언어란 의식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이다 - 언어는 실천적인 의식, 즉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고, 그런 연유로 또한 비로소 나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현실적인 의식이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타인과의 교류의 필요성, 욕구로부터 발생한다. 어떠한 관계가 존재할 경우, 그 관계는 나에 대해서 존재한다. 동물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신을 ‘관련시키지’ 않는다. […] 동물에게, 다른 동물들에 대한 자신의 관계는 관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은 애초부터 사회적 생산물이며, 일반적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렇게 존속한다.(210)
애석하게도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더 이상 언어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이 인용문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정신의 물질적 옷이라는 것, 그리고 언어는 나와 타인을 관계 짓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언어는 의식의 현실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타인과의 언어적 교류 활동 속에서도 탄생할 수 있다. 타인과 언어를 교류하는 과정에서 나는 타인을 인식하고 그 타인이 나를 어떻게 인식할 지 상상하면서 나에 대한 표상을 만든다. 생활 과정에서 나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나는 왜 이 특정한 생활 과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는 언어활동이라는 교류를 통해서 고민된다. 의식을 규정하는 생활이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밝혀 준다면, ‘현실적인 언어’는 그 생활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내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드러내 준다. 그런 점에서 맑스의 저작들을 읽어가며 언어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에도 착목해 보아야겠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고 무결한 대화란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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