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칼 맑스,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1850, 신 라인 신문)
정우준 / 수유너머N 회원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플레옹과 왕정을 거친 1848년의 프랑스는 다시금 혁명의 열기에 휩싸인다. 1848년 2월 거대한 인민의 물결이 혁명을 통해 왕을 쫓아내고 공화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은 혁명의 열기로 가득한 48년의 2월부터 ‘보통 선거권 폐지’로 마무리되는 차가운 반혁명의 시기를 분석한 맑스의 작품이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은 “맑스가 자신의 유물론적 견지에서 현대사의 한 토막을 주어진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설명하고자한 최초의 시도이자”(『프랑스 혁명사 3부작』. 15p. 이하의 모든 인용은 소나무 출판사본의 인용임)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노동자 계급의 혁명의 완성이 불가능함을 48년 혁명의 경험을 통해 입증하는 텍스트이다.
2월, 모든 계급이 하나된 아름다운 혁명
1830년 7월 혁명 이후 탄생한 7월 왕정의 사라사육, 흉작, 그리고 영국의 상업/산업 혁명은 프랑스 인민에게 “위대한 혁명적 열정과 기억을 일깨워”준다. 금융 귀족, 왕족들에 맞서 부르주아지, 농민, 노동자, 자영업자들이 힘을 합쳐 봉기한 것이다. 이에 힘입은 2월의 바리케이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바리케이드의 ‘동지’들은 빠리 시의 모든 벽에는 “프랑스 공화국! 자유, 평등, 박애!”라는 문구를 눈부시게 수놓는 것으로 혁명의 완수를 선언한다. 공화정 수립과 더불어 혁명의 결과로 노동자들은 “노동의 권리의 선언”과 “국민작업장”이라는 공황과 혁명 기간에 거기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소득 보장의 성과를 만들어낸다.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부르조아지와 공동으로 2월 혁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임시 정부 자체내에 부르조아지의 다수파와 나란히 노동자 한 사람을 입각시켰듯이 부르조아지와 나란히 자기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조아쥐 곁에서 자신들이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꼭 같이, 다른 부르조아 국가들이 존재하더라도 프랑스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같은 책, 49p)
<2월 혁명의 '박애'라는 구호 취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조아와의 날카로운 계급 대립을 잊는다.>
6월, 우리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맑스가 말했듯 1848년에서 49년까지의 혁명 연보는 중요한 부분마다 ‘혁명의 패배!’라는 표제를 달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혁명이 성공하자 부르조아들이 재빨리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공화국의 모토를 공존공영으로 삼았지만, 그들의 박애는 부르조아들 이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가 융화되었을 때만 가능했다. ‘노동의 권리’, ‘별도의 노동부!’, ‘노동을 조직하라!’라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외침이 부르조아가 만들고자 했던 공화국에서 허용할 수 없는 것임이 판명되자 부르조아는 공화국이 ‘자신들의 것’임을 선포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질서’를 외치며 국민작업장을 폐지하고, 새로운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기동대를 설립하는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응답한 것이다.
하지만 둘의 날카로운 대립을 당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1848년 5월 4일 직접 보통 선거로 선출된 국민의회, 그리고 그들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 즉 보통 선거권은 “프랑스 인 전체를, 아니 적어도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을 동일한 이해관계와 동일한 견해 등을 가진 공민”(같은책, 61)로 보이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는 관념이나 공상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아직 부르조아 공화국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으며 실제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 모든 곳에서 부르조아 공화정에 봉사하는 행동을 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보증된 약속이 새 공화국에게는 유지할 수 없는 위험이 되었으며 임시 정부는 존립 기간 내내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하였다.”(같은책, 62p)
박애, 공존공영, 보통선거권을 통하여 가려져 있던 부르조아지, 프롤레타리아트 두 계급의 날카로운 대립은 ‘1848년 6월 22일 노동자들의 봉기’를 통해 드러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회를 갈라고 있는 두 계급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대전투의 날이 벌어진 것이다. 2월을 수놓은 ‘박애’의 외침 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계급 관계는 단지 공상 속에서만이 그랬던 것이었다. 그날의 혁명은 계급 대립이 감춰졌기에 아름다웠던 혁명이었다. 하지만 사실 2월 이후의 “박애의 진정하고 순수한 산문적 표현은 내전, 그것도 가장 가공할 형태의 내전인 자본과 노동간의 전쟁”이었으며, 부르주아지의 빠리가 2월의 혁명과 함께 빛나던 순간, 그들이 ‘추악한 혁명’이라고 부른 6월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빠리는 불타고 피흘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6월의 혁명은 프랑스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공민'이 아니라 날카로운 두 계급임을 알려준다>
1848년 2월 혁명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쟁취한 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적 해방을 위한 투쟁의 진지만을 얻은 것이다. 바로 부르조아지의 공화국이라는 투쟁의 진지 말이다. 1848년 6월 혁명을 통하여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사실을 깨닫고, 대담하고도 혁명적인 투쟁 구호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부르조아지 타도! 노동자 계급의 독재!”(같은책,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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