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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 왜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정치기획은 부재하는가?

[이슈&리뷰] 기획 시작합니다. 

이 기획은 철학/사상/문화/예술 분야에서 이슈로 다루어지고 있는, 혹은 이슈화하고 싶은 내용을 추려서 소개하는 꼭지입니다. 주로 잡지에 실린 짧은 글을 다룰 것입니다. 잡지에 실린 짧은 글이지만 전하는 메시지가 간결하고 유효한 주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단행본으로 나온 묵직한 사유도 다룰 수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고전이 된 완결적인 사유를 소개하기 보다는 지금 시기에 중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글들을 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과 틀린 답들, 풀어야할 문제들을 모으고자 합니다. 일종의 오답노트가 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 와중에 우리가 평생 가지고 가야할 물음들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짧고 경쾌한 발걸음, 이제 시작합니다.




왜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정치기획은 부재하는가?  

「삼중운동?-폴라니 이후 정치적 위기의 속살을 파헤친다」

(낸시 프레이저, <뉴레프트리뷰·5>)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투쟁은 물리도록 많이 했건만...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책으로 엮는다면 어마어마한 분량이 될 것이다. 우선 영국 철도, 광산노동자들을 중심으로한 ‘불만의 겨울’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벌어진 사유화와 노동유연화에 맞선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있다. 1999년 시애틀 WTO 반대행동을 필두로한 반세계화 투쟁들이 뒤를 이었고, 최근 금융자본주의에 맞선 월가 점령시위와 같이 금융세계화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격렬하게 터져나온 사례들이 뒤따를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그처럼 공세적이었다는 것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낸시 프레이저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대중들의 저항의 지점에 서서 하나의 거대한 물음을 던진다. ‘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대중들은 하나의 대안적 세력으로 결집하지 못하는가?’ 

돌이켜 보건대,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일상과 미래, 우리들의 공동체를 치밀하게 파괴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단말마적 비명만을 반복해왔던가.





‘시장이냐 사회냐’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개뿐?


흔히들 정치기획의 부재에 대한 대답으로 정치적 지도력의 구성-‘당’을 포함해 ‘반신자유주의 연합 전선’-을 대안으로 내놓는다. 이러한 오래된 습관같은 대안은 한국사회의 진보세력만의 답변은 아닌 듯 하다. 낸시 프레이져는 이러한 종류의 대안이 폴라니가 제시한 ‘이중운동’의 전략에서 제출된 것이며, 이러한 모델은 오늘날의 사회운동의 변화를 포괄하고 있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폴라니가 제시한 ‘이중운동’은 20세기 전반기에 위기를 둘러싼 여러 사회적 투쟁들, 특히 여러 정당과 사회운동이 ‘시장이냐, 사회냐’를 둘러싼 단순명쾌한 대립구도 속에서 시장의 파괴 행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자 폭넓을 전선을 구성했었던 역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이론화한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뉴딜, 러시아의 스탈린 체제, 유럽의 파시즘, 그리고 훗날 전후의 사회민주주의 등 좌우파의 운동을 막론하고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된 운동들이 폴라니의 ‘이중운동’의 개념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이 운동들은 그 다양한 양상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유하는 지반이 있는데, 즉 ‘자기조정’ 시장은 사회를 파괴하므로, “사회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시장에 맞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광범한 연대전선으로 결집했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폴라니의 분석틀을 따르자면 오늘날 지속적이고 정치기획이 가능한 반신자유주의 연대전선은 형성되고 있지 않다. 이 지점에서 낸시프레이져는 두 가지를 지적하는데, 첫째 오늘날 반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정치기획은 부재하다. 둘째 폴라니가 분석한 1930년대와 오늘날은 표면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른 위기의 동학을 그린다. 따라서 폴라니의 이론틀로 현재를 분석한다는 것은 현재의 위기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보지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정치기획의 부재라는 현실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운동주체가 공히 지적하는 지점이지만, 그렇다고 낡은 이론틀에 기대어 고장난 레코드과 같은 반복된 대안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보게해주지 못할 뿐더러, 오래된 전망만을 제시할 뿐이다.  





 

해방운동 : 자본의 공세 앞에 사회의 배제된 영역을 들춰내기


그렇다면 낸시 프레이저의 가설과 주장은 무엇일까?

낸시 프레이저는 폴라니의 ‘이중운동’이 포괄하지 못하는 새로운 운동이 역사적으로 등장했으며, 이러한 운동이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삼중운동’이라 이름붙인 개념을 제안한다. 그녀는 폴라니의 이중운동을 수정하면서 폴라니에게 빠져 있는 세 번째 운동인 ‘해방운동’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해방운동’은 폴라니의 틀에서는 검토될 수 없었지만 현실에서 존재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투쟁들, 예컨대 1960년대 이후의 해방운동들 즉 반인종주의 운동, 반제국주의 운동, 반전운동, 신좌파, 여성주의 2세대, 성소수자해방운동, 다문화 운동 등을 가리킨다. 이들 운동은 ‘시장이냐, 사회냐’의 선택에서 제3의 운동을 구축해왔다고 평가한다. 언뜻보면 이들 운동은 ‘사회’의 편에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 운동들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결집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전선의 형성에서 배제되거나 비가시화된 영역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60년대 이후 등장한 해방운동의 주요한 역할은 사회에 내면화된 각종 규범들에 진저리를 쳤고, 각종 위계를 비판했으며 ‘사회적 배제’의 문제를 전면화 시켰다. 이들의 운동은 폴라니의 이중운동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따라서 낸시프레이저는 시장화의 신봉자들, 사회적 보호를 고수하려는 자들, 해방의 편에 서려는 자들 사이에 생겨나는 3면의 갈등을 3중 운동으로 그려낸다. ‘3중 운동’의 이론적 목표는 제3의 운동인 해방운동이 일구어 낸 다양한 투쟁들을 포괄하려는 것이 아니라,이 세 힘들 사이의 관계와 ‘관계의 이동’의 양상에 따라, 즉 3중의 운동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 정세적 우위와 주도권이 변화한다는 점을 보려주려고 한다는 것에 있다. 낸시 프레이저에게 ‘시장’은 절대악인 반면, ‘사회’는 절대 선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는 보호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떤게 구성되고 해체되는 사회인가가 중요하다. 이에 따라 해방운동 역시 시장 혹은 사회와의 관계속에서 양면적인 특성을 띤다. 

60년 당시 출현한 해방운동은 ‘사회의 보호’라는 미명아래 이루어진 사회의 지배 혹은 위계를 비판하면서 ‘사회’에서 이탈했지만 그렇다고 ‘시장’의 편에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해방운동은 시장화를 선호하는 쪽으로 결합면이 강화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자본축적을 위한 카리스마적인 합리화 혹은 ’새로운 정신’의 일부를 제공하여 이를 ‘유연한’, ‘차이 친화적인’, ‘아래로부터의 창의성을 장려하는’ 등의 말로 선전하는 것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삼중 운동의 갈등 접점에서 해방운동의 축은 시장화의 축과 힘을 합쳐 사회 보호 쪽 세력을 협공하고 있는 상황, 이것은 오늘날 반신자유주의로의 대항 세력의 구축이 가시화되고 있지 않은 지점이라 진단한다. 







수세에 몰렸다고 대충 모이지 말자. 


복잡한 논의를 이끌어왔지만, 결국 낸시 프레이져는 예전에는 우리편이었던 그네들이 이제는 적들의 수중으로 전향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섣부른 패배감에 뒤이은 보다 똑똑한 패배감으로 마감하지 않는 것은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일단 그녀는 이러한 상황이 일정한 전망과 진보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우리는 다시 이중운동의 상태를 회고적으로 희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전략을 새로 짜야한다는 것이다. 수세에 몰린 운동진영이 범진보진영으로 결집하여 폭넒은 연대전선의 구축으로 위기상황을 돌파하자는 전략-뭉쳐야 산다-이 새롭지도, 힘이 나지도 않는 김빠진 대안에 불과하다는 냉소적 비판은 냉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낡은 대안은 대안이 아니다. 우리들의 감각은 이미 그러한 회고적인 방식으로는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자.

더불어 작은 투쟁, 끝까지 싸우는 투쟁에 용기와 박수,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낙관에 기대는 망상도 접을 때가 됐다.-작은 것은 아름답기만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미 어떤 선을 넘었고, 이제는 예전 그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집단적인 각성이다. 이는 해방운동이 가져온 신체의 흔적이나 각인 같은 것이라 관념적으로 망각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시장편에 결합력을 강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해방운동이 아니라 사회의 편에서 사회를 다시 구성하며 결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때 낡은 사회의 보호주의자들은 해방운동의 젊은 동력을 격하게 환영하며 끌어안으려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회의 보호라는 것을 위계적이고 배제적이며 공동체 지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태도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점을 확인해야 하며, “해방이 없는 사회 보호란 있어서는 안된다”는 공동의 전망을 수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까놓고 말해, 궁지에 몰렸다고 궁색하게 만나지 말자는 것이다. 각자 자신들이 일구어낸 운동의 최대치를 갖고, 한치도 버리지 말고 만나자는 것이다. 함께 모이기 위해 내 것을 양보하고 버리는 통큰 단결은 실상 운동의 최소치만을 모아논 것에 불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