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_철학.사회

[이슈] 아이스버킷 첼린지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

『문학과사회』취향, 계급, 문화: 사회학주의를 넘어서

(이상길, 『문학과사회』106호)





조지훈/수유너머N 회원





 얼마 전에 배우 유아인이 근래에 유행하고 있는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대한 비판어린 시선에 명쾌하게 대응을 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대한 비판의 논조는 간단한다. 루게릭 환자를 돕기 위한 기금마련으로 온 몸에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퍼포먼스가 (진정성이 있기 보다는) 너무 가볍고 기부가 마치 유행을 타는 신상품처럼 소비되는 현상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불평에 유아인은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유행이면 어떻고 소비면 또 어떠냐고. 행위의 진정성을 유행이라는 현상으로 다 도매금할 수 있냐고. 더군다나 설령 유행이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이번을 계기로 루게릭 환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또한 실제로 기부가 성황리에 이루어짐으로써 루게릭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냐고.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설령 유행이고 소비면 어떻냐는 유아인의 반문이다. 이는 기부도 유행을 타는 소비의 한 유형일 수 있다는 암묵적인 사실에 대해 속된 말로 쿨 하게 인정한 것이다.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돕는 일을 유행타 듯 소비할 수 있는가라는 도덕적인 정서에 유아인은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당당하게 되물은 것이다. 이는 단지 기부가 유행이고 소비되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혹은 기부 문화마저도 유행적인 소비문화로 만들려는 기업의 마케터들의 냉혹한 계산논리에서 나온 말도 아니다. 또한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평판을 높이기 위해서 고아원에 생색을 내며 기부를 하면서 하는 말이, 어찌되었든 고아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니 그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라고 되묻는 뻔뻔한 태도도 아니다. 유아인이 말하고 싶은 바는 유행적인 소비라는 하나의 잣대로 환원될 수 없는 아이스버킷 첼린지의 참여자들의 각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루게릭 환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거나 기부문화에 대해서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유행적 소비라는 구름 속에서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누군가에게는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도울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안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중 다수는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려는 스타와 명사들의 진정성 없는 자기 마케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유아인의 반박은 진정성 논의로 누군가에게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폄하하지 말자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생각해봐야 될 지점은 행위의 진정성이라기보다 문화를 둘러싼 논의의 시각이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는 문화를 사회적인 기능의 차원에서(예컨대 하나의 문화는 그 사회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따져묻는)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현대 사회에서 문화에 대해 접근하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유통되고 있다. 비록 유아인의 반박이 직접적으로 이러한 문화에 대한 사회기능적 접근을 겨냥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시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문학과 사회 106호>에 수록된 이상길의 <취향, 계급, 문화: 사회학주의를 넘어서>에서는 문화에 대한 접근을 오로지 사회적인 기능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을, "문화에 대한 사회학주의적 접근"으로 규정하고 이를 해명하려고 한다. 이상길의 설명방식에 따르면 문화에 대한 사회학주의적 접근이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 판본이 있다. 하나는 문화가 계급적으로 층지어져 있으며, 계급 간 구별짓기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클래식을 즐겨듣고자 한다면 클래식이라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소양과 지식 및 자금이 필요한데, 때문에 클래식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상류층의 문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음악이 아닌 클래식이라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계급적으로 자신을 다른 계급과 분류짓는(예컨대 별다른 소양과 비용이 필요하지 않는 뽕짝을 듣는 민중과 구별지어지는) 사회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사회학주의적 접근의 또다른 판본은 문화가 탈근대화와 전지구화적 흐름 속에서 계급의 경계를 넘어 집단형성이 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문화가 단지 계급 간의 구별짓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과 무관하게 특정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취향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애플의 제품에 열광하는 팬덤은 계급간 구별짓기 기능을 한다기 보다, 애플을 향유하는 집단을 심미적인 취향의 공동체로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향유하는 자들로부터 아래로 만들어지는 공동체라기보다는 기업집단에 의해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특정한 취향의 공동체는 이미 그러한 취향을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인) 상품을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중요하게 고려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상품을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취향과 경향을 면밀히 조사하고 고려한다. 사회과학적 지식이 자본의 프리즘을 통해 광고, 마케팅 기법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상길은 이러한 사회학적 지식과 자본주의의 전유방식이 지식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공론장과의 연결을 사회적 앎의 기묘한 삼각편대라고 표현한다. 문화는 그저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구성되고, 담론으로 유통되며, 시장을 통해 상품 생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유행처럼 소비되는 것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문화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으로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아이스버킷 첼린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부문화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소비할 수 있는 유행상품처럼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사회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유행적 소비보다는 진지한 기부문화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에 대한 다른 시각은 없는 것일까? 문화는 오로지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능한지의 여부에 따라서만 평가되어야 하는 걸까? 이상길은 역사학자 폴 벤느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문화의 사회적 활용이 문화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인 인간 주체 구성의 문제를 은폐시킨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읽지도 않을 제임스 조이스의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만 두는 것은 사회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구별 지어진 높은 수준의 문화 내지는 교양인의 규범을 좇는 행위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조이스의 책을 통해 자신이 익숙한 것과는 다른 어떤 감각을 길러내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자리를 배분하는 기능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 개개인을 육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아이스버킷 챌린지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단지 유행에 동참하고자 하는 휩쓸림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루게릭 환자 혹은 기부에 대한 감각을 길러내고자 하는 계기를 얻으려는 열망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아인이 소비면 어때? 라는 반문 속에 이어지는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 할 수 있다. 아이스버킷 첼린지가 유행처럼 소비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다른 감각을 길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행처럼 소비된다는 하나의 현상만을 가지고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단죄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무래도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대한 유아인의 입장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반박은 또다시 유아인의 입장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이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 아이스버킷 첼린지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감각을 길러줌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적으로는 유행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좋은 일이 유행하는 것이 뭐가 나쁜데 라는 반문까지 답하기에는 이 글이 너무나도 짧다. 다만 유행은 유행되지 않는 다른 요소들을 침묵시키면서 생산된다는 롤랑 바르트의 명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루게릭 환자가 아닌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장애인, 에이즈 환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 등등)에게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안겨주는 문제만이 아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유행이 되면서 가장 먼저 소외되는 것은 다름 아닌 루게릭 환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이스버킷 첼린지를 통해서 주목을 받는 것은 도움을 받는 루게릭 환자가 아니라 루게릭 환자를 돕는 기부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스버킷 챌린지라는 유행에 동참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감각을 길러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소비와 육성, 어떤 것에 방점이 찍히든 간에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주인공은 기부를 하는 주체가 된다. 소비가 단지 나를 만족 시키는 것처럼 낯선 감각도 새로운 자기 자신이라는 이름의 개인으로 돌아올 뿐이다.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불편할 수 있다면 이는 그 어떤 자선행사보다도 다양한 영역의 여러 사람이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자선행사보다 기부하는 개인에 집중된다는 것일 테다. 나는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기부를 하고 루게릭 환자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게 된 유아인이라는 한 개인을 반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감각의 육성마저도 개인이라는 한 울타리에 가두어 두는 데에서 머무르게 만드는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대해서 찬성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