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세월호 참사, 그리고 안전권력과 저항담론'
(사토 요시유키-김상운 대담, <말과 활> 5호)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모두에게 닥친 재난
누가 굿을 한 것도 아닌데 또 재난이 왔다.
지난 9월 27일 일본 나가노현에 위치한 온타케산(御嶽山) 화산폭발로 현재까지 4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재난 대응과 관련해 일본정부와 우리나라 정부를 비교하는 언론 보도를 보면 일본 정부는 참으로 재난에 대해 대응을 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 눈을 끈 것은 일본 관광청의 발표이다.
"일본관광청은 지난달 27일 발생한 온타케산 화산 분화와 관련, 소재지인 나가노현과 기후현의 주요 여행지는 피해가 없다고 1일 밝혔다."(머니투데이, '나가노, 기후 관광지는 OK', 10월 1일자) 덧붙이자면, 나가노 공항도 정상영업 중이란다.
세월호 사건과 비교해보면 이 얼마나 말끔한 처리인가. 신자유주의적 위기의 폭발이라는 둥, 재난앞에 인간의 무기력함이 어떠하다는둥, 애도가 불가능하냐 가능하냐 온갖 분노와 사유가 넘실대는 우리상황에 비추어볼 때, 세월호는 여전히 떠나지 못한 채 이순신 장군과 함께 결박되어 있는 복잡한 시국에 견주어볼 때, 일본의 화산폭발은 '밤사이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마감뉴스 마냥 차분해 보이기까지 하다.
재난강국(?)으로서 일본 정부가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인지, 아니면 3.11 이후 여전히 재난상황 중에 있는 일본의 총체적인 상태 때문인지, 아니면 이웃나라의 불행을 먼발치서 보고 있는 나의 시선 때문인지 몰라도, 이제 재난은 극복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관리되어야할 '상황'이 된 듯 하다.
이것이 재난과 신자유주의가 만나는 접점에서 나타나는 달라진 양상이라면 아마도 일본은 우리보다 열 걸음쯤 먼저 가고 있을 것이다.
얼마전 내한한 일본의 정치철학자 사토 요시유키는 "나는 일본의 경우,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방사능에 오염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고, 그 세계를 직시하면서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고 일본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설명했다.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재난-중인-일상.
이러한 일상을 어떻게 사유할 것이며, 또 이러한 일상을 놓고 어떤 투쟁을 만들어낼 것인지가 재난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의 또 다른 숙제가 되었다.
그런데 과연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한가?
안전 높낮이를 조절해주는 친절한 과학
사토 요시유키는 김상운과의 대담에서 후쿠시마 이후의 일본을 푸코의 안전권력 개념과 연결해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대담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에 일본 정부가 피난 지역을 설정할 때 동원된 권력-지식을 분석했다. 말인즉슨, 3.11 직후 일본 정부는 과학적 분석을 통해 방사선 오염의 수치를 1밀리시버트로 정했으나, 뒤이어 ‘경제적, 사회적 비용 계산에 기초하여’ 20밀리시버트로 조정했다는 것이다. 이 기준선이라는 것은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파전 뒤집 듯이 뒤집어졌다는 데에 현대 과학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이 조정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 일본 정부가 “사회적 경제적 비용 계산을 통해 기준선을 새로이 제시함으로써 주민들을 피폭의 언저리에 서 있도록 강요하는 권력”이며, 이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전권력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 속에 내던지는’ 권력이며, 더 나아가 피폭 자체를 강요하는 권력이라고 말한다. 안전권력이란 비-안전권력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안전선이 너무 높으면 지배엘리트들이 무능력해지기 때문에 과학은 친절하게도 높낮이를 자유로이 조절해주면서 맞춤하게 통치할 수 있도록 작동하고 있다.
기민(棄民) 또는 버려진 인민
사실 여기까지의 대담 내용은 새롭거나 더 날이 선 주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한국의 사상가들도 이미 그 정도의 통찰력으로 이야기한 내용들이니까. 대담 내내 주권권력과 통치, 예외상태와 푸코, 벤야민, 들뢰즈, 라깡으로 이어지는 현대 정치철학의 최전선의 사유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과연 저 내용과 개념을 다 외우고 있단 말인가'라는 소소한 감탄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중 사토 요시유키가 말한 '기민' 혹은 '기민화'의 내용은 흥미롭다. 물론 기준선 밖의 인민은 사회적으로 배제된다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기민'의 존재는 기준선 안의 사람들을 '시민'으로 분할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기민 혹은 '기민화'하고 있는 출발선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사토 요시유키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장을 쫓아가다보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분할선은 시민과 기민 사이에 그어지지 않는다.
‘버려진 인민’ 이라는 뜻의 '기민(棄民)'은 비용의 적정선에서 조정되며 적정선 이하로 배제되는 인민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머지 인민들이라도 잘 먹고 잘 살수 있으면 좋으련만 기민은 곧 나머지 인민들을 ‘기민화, 버려지게 될 인민들’로 만든다. 이렇게 작동하게 되는 메커니즘은 국가권력의 폭력에 의해 강제 되는 것만이 아니라 인민들의 암묵적 동의 위에 작동한다는 점에서 기민의 존재에 대한 사회적 승인은 기민화를 촉진시킨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김상운은 기준선을 설정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국가 권력이 자행한 폭력이라고 단언하기 전에, 기준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절대악이라고 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기준선이 존재한다는 소망’이 오로지 핵마피아나 국가만의 문제냐는 것이다. 적정한 기준선이 없다면 오히려 불안은 더 커질 수밖에 없고, 현실적인 기준선은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국가가 그러한 기준선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하는 수준에서(물론 이것도 명확한 대안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았다.) 기준을 마련하는 문제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사토 요시유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던진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일본의 경우 원전은 항상 지방에서만 만들 수 있도록 법률상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발생할 경우 피해를 당할 인구가 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후쿠시마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는 후쿠시마에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도쿄에서 소비된다. 또 하나,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촉탁직이거나 파견직, 비정규직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별구조 위에서 재난은 발생했다. 따라서 재난의 피해는 평등하지 않다. 이러한 차별 위에서 핵발전소를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두고 시민참여를 논하는 것 자체가 비민주적이며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준선을 설정하는 지반이 어떠한 지반위에 놓여있는지, 근본적인 차별구조를 포착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기민’의 번호표를 나눠갖는 꼴이 될수도 있다.
세월호의 유가족 중 한분은 자신의 금쪽같은 딸을 잃고, 비통하기 그지 없은 후회의 말을 남겼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성수대교가 내려앉았을 때, 자신은 TV를 보며 그저 구경하기만 했었다는 것이다.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했었더라면,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생각했었더라면 자신의 딸이 이렇게 허망하게 버려지지는 않았을 거란 이야기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순간에 알아버린 통찰이 담긴 후회이다. 이것이 버려진 인민으로서의 '세월호'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지긋지긋하다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 곁을 지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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