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어떻게 공동체와 만날 수 있을까?
『문학과 사회』 「이토록 아둔한 취미의 인간을 보라」
(서동진, 『문학과 사회』 106호)
정 우 준 / 수유너머N 회원
취향 존중(취존)이 의미하는 것 : “너님, 꼴리는대로 사세요”
카페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언제나 나오는 말들이 있다. ‘난 이런저런게 좋더라’, ‘저건 딱 내 스타일이야’, ‘걘 나랑 코드가 안맞아’와 같은 취향에 관한 말들이다. 너나 나나할 것 없이 자신의 취향과 그 독특성을 자랑한다. 취향은 단순히 개인이 선호하는 어떤 것을 뜻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취향은 친구 관계나 동아리 같은 여럿을 묶어주는 관계에서도 필수적이다. 서로의 취미를 공유하는 각종 동아리 활동과 SNS를 통해 내가 관심 있는 것들을 공유하고 그 공유를 통해 관계를 맺어가는 양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취향의 세계 속에서 만약 개성이나 취향을 무시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몰상식한 사람이 되거나 권위적인 사람으로 몰려 욕먹기 십상이다. ‘개인의 취향’은 ‘고유한’ 나, 그리고 내가 맺는 관계를 표현 해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언제나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존중이라는 태도들 속에서 무리 짓고 생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취존(취향 존중)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취존과 비非교류 : “나는 너가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런 개인의 취향과 취향 존중이 시쳇말로 ‘나도 꼴리는대로 살테니, 너도 꼴리는대로 사세요’라는 서로간의 거리두기에 불과하다면? 서동진은 「이토록 아둔한 취미의 인간을 보라」를 통해서 취향의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취향 존중의 태도가 “서로에게 개입할 필요가 없는, 간섭하지도 간섭받지도 않는 안전한 거리 밖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의지”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태도는 “사악한 윤리적 기회주의”이고 반反 공동체적 행동이란 것이다. 표면상으로 취향과 취향 존중은 SNS, 동아리, 친구관계의 핵심적인 연결고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취향을 둘러싸고 맺는 관계의 심층에서 우리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취향과 너 취향 사이의 비非교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취향 존중이라 말할 때, 우리는 그 취향의 좋고 나쁨을 묻지 않는다. 각자의 여러 좋은 취향이 있고, 가끔 더 좋은 취향이 있을 뿐이다. 왜 취존의 세계는 좋은 취향과 더 좋은 취향만이 존재할까? 그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취향을 부정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면 몰상식하거나 권위적인 ‘나쁜’ 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취향의 세계에는 각자의 취향에 대한 부정만 없는 것일까? 아니다. 취향에 대한 이해도 없다. 그저 각자의 취향들이 있기 때문에 그냥 그걸 거리를 두며 바라볼 뿐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취향에 대한 부정도, 이해도 없는 취존의 세계는 침범할 수 없는 개별적인 취향들의 범람에 불과한 것이다.
감각의 공동체 : 감성은 어떻게 공동체를 구성하는가
그렇다면 취향이라는 주제 속에서 공동체는 어떻게 사유될 수 있을까? 서동진은 공동체를 취향을 통해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공동체라는 것은 함께 있음을 상징화하는 몸짓과 더불어 실존할 수” 있으며, 그 상징화하는 몸짓이 ‘공동의 취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들이 바로 문화적인 의와 습속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쉽사리 ‘상상의 공동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공동체에 대한 파악 속에서 개인의 취향만 있되, 공동의 취향이 없는 취존의 세계가 공동체와 거리가 멀다는 말이 이해될 수 있다.
그럼 공동의 취향은 어떻게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한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를 위해 서동진이 끌어들이는 사람은 실러와 랑시에르이다. 그들이 취향과 같은 감성적인 것에서 공동체를 창안할 수 있는 가능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즉 둘 모두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합치려는 사고를 수행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취향과 공동체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랑시에르는 공동체와 관련하여 감성의 문제가 매우 핵심적임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감성의 분할을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성은 공동체와 공동의 것을 규정하는 것인데, 그것의 재분할의 과정은 기존의 공동체 내부의 균열을 만들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 들리지 않았던 것을 열어내 보인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감각의 공동체’이며, 감각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그 감성의 분할 과정은 공동체의 균열을 만들어내기에 이의와 불화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실러에서 랑시에르에 이르는 미적 공동체라는 문제의식을 통해 저자는 세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먼저 공동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조건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공동체의 문제에 있어서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공유될 수 없는 취향의 세계, 즉 취존의 세계 혹은 그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는 결코 미적 공동체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감각의 공동체의 조건 : 차이의 윤리에서 적대의 정치로
취존의 세계에서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감성의 재분할을 통한 감각의 공동체를 통하여 취향이 공동체의 문제와 긴밀하다는 것을 안 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성의 분할 과정’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까?
이는 저자가 글 말미에 어렴풋이 남겨놓은 힌트를 바탕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힌트는 바로 저자가 논문의 마지막 소제목의 타이틀로 붙여놓은 ‘취미-차이의 윤리와 적대의 정치’이다. 차이의 윤리란 취존의 세계에서 개인의 취향을 이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취향을 인정하되 간섭하지 않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적대의 정치란 무엇일까? 그것은 취향 혹은 감성을 둘러싼 영역에서의 치열한 분쟁과 이의, 그리고 불화를 의미하는 것일 테다.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감성적인 영역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라는 이름으로 그것에 간섭하는 것. 그리고 그 간섭 속에서 나타나는 지금껏 보지 못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적대의 정치’라는 개념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할 테다. 취존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인의 취향에 간섭하고, 그 간섭으로 인한 불화를 견뎌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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