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리뷰]
파업전야와 홍어택배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파업전야
‘상영시간 105분을 사수하라’.
1990년 3월부터 시작이었다. 꽃샘추위를 밀고 진달래가 올라오고 있었다. 학생들은 교문 안으로 밀려드는 전경들을 막기 위해 모여들었다. 꽃샘추위에 아직은 추워보이는 청색옷의 백골단들이 필름을 탈취하려고 교문을 뜯어냈고, 학생들은 목에 두를 빨간 띠를 손목에 매고 허공에 휘둘렀다. 머리에 질끈 묶고 신념을 다짐할 틈도 없었나보다. 아니면 신념은 머리가 아니라 허공을 향해 쭉쭉 뻗어내는 손목에 있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파업전야’는 200여명이 일하는 공장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가난해서 부자가 되고 싶은 공돌이들이 노동자가 되어 파업의 전날 밤을 맞이한다는 단순한 줄거리로 기억한다. 사실 마지막에 파업을 했는지 파업 직전에서 끝이 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잘생기고 유명한 배우 하나 없는 이 영화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발표되었을 당시 노태우 정권이 ‘상영을 하면 형사처벌하겠다’는 발표를 해준 덕이 크다. 실제 전남대에서 파업전야를 상영하려고 하자 경찰 당국이 사복경찰 12개 중대와 경찰 헬기까지 동원해 아작을 낸 덕에 더욱 유명해졌다.
봄이 다가올수록 파업전야를 둘러싼 싸움은 남도에서 전국으로 번지며 밀고 올라왔다.
학내에 최류탄이 터지고, 돌멩이가 하얀 안개 사이로 날아간다. 모두가 지칠 때쯤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강당까지 밀린 학생들은 꽃병을 집어들었다. 진은영 시인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꽃병을 토마토라고 노래했었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그 날, 상영시간 105분을 바깥에서 사수한 학생은 1만여명이었고, 부글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영화관람을 사수한 관객은 20명이었다는 그 영화, ‘파업전야’
여기까지 자랑스런 무용담이 늘어지면 선배의 눈가는 살짝 촉족해져 그날의 토마토를 그윽하게 바라보듯이 저 먼 곳을 응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침을 꼴깍꼴깍거리며 한마디로 ‘뻑’이 갔다. 그날의 치열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던 언니 오빠들 덕에, 우리는 ‘파업전야’를 맘껏 볼 수 있는 세상을 맞이하는구나.
빈 강의실을 빌려 파업전야 영화상영을 한다는 선배를 쫓아갔던 우리는 자못 비장했다. 하지만 한껏 무용담을 늘어놓던 그 선배는 영화상영 10분 만에 골아떨어졌다. 아마도 토마토를 꿈꾸고 있을거야. 영화를 사수하기 위한 무용담은 다이내믹했지만 실제 영화는 반전이었다. 결국 우리도 선배의 뒤를 따라 하나 둘 꾸벅꾸벅 조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끝내 파업을 했는지, 파업을 결의한건지, 파업을 하고나서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만족했다. 강의실 창문 밖에는 벗꽃이 흐드러졌고, 우리는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지켜냈으니까. 하하하.
거리로 나온 일베가 외치는 건 표현의 자유일까?
90년대까지의 표현의 자유는 교문의 안과 밖처럼 대치의 전선이 명확했다. 우리는 요구했고, 저들은 억압했다. 노동자 대중들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언론의 자유를 외쳤고, 지배권력은 있는 힘껏 막았다.
하지만 요즈음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은 다이빙벨 상영 문제부터 일베 판사의 댓글까지 다양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논란이 표현의 자유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지형이 이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논란’인 것처럼 전선은 단일하지 않고 논란은 꼬임에 꼬임을 거듭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일베의 어묵인증샷과 엉켜 ‘개나 소나 표현의 자유’로 희화화 되거나,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니던 386 전사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일베 사이트를 폐쇄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자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움의 핵심은 민주화의 경험을 부정하고 여성이나 이주노동자, 세월호 피해자들을 증오하는 대중들의 출현이다. 이들은 집단화되어, 집단의 힘으로 표현의 자유를 외친다. 과거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온 대중들이 이제는 ‘홍어택배’로 민주화를 조롱하고, 폭식투쟁으로 세월호 사건을 물타기하는 난봉꾼이 되어 돌아왔다. 요즘 이들의 난장은 더 신나보인다. 폭식투쟁을 해도 ‘광장은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막지않았다. 이들의 반동적인 행위들은 제압되지 않았고 대신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토론과 논란이 되레 풍성해졌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알고, 일베 자신들은 더 잘 알 듯이 그들은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지 않는다. 민주화를 정반대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표현의 자유를 맥락과 역사에서 떼어내어, 그 무게와 의미를 휘발시켜버리는 것이 그들의 의도다.
따라서 마치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둘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기가막힌 삑사리다. 일베는 표현의 자유에 담겨진 대중들의 투쟁의 흔적을 삭제하고 싶어한다. 지배권력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외치던 역사를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다.
스피노자, 불경한 대중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하라!
자유를 열망하는 대중들이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자유가 아니라 거꾸로 예속을 열망한다면 어떨까? 이러한 대중의 정서는 자유를 향하는 것일까? 예속을 향하는 것일까? 이러한 예속에의 자유 역시 추구할 권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쉽지않은 문제다.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자신의 예속을 향해 질주하는 대중들을 보며 깊은 사유에 잠긴다. 그리고 이 엉덩이에 뿔난 대중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당대의 시도들에 맞서 표현의 자유를 가장 먼저, 단호하게 주장한다.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스피노자가 대중들을 무한하게 신뢰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그는 대중들이 늘상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우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학정치론>은 ‘사람들은 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싸우는 것인 양 자신의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평생을 사유했지만 ‘대중’이라는 집단이 자신의 본성과 달리 서로를 증오하고 예속을 열망한다는 현실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절대적인 자유를 말한다. 막으면 막을수록 대중들은 더더욱 말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중들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국가는 전제적으로 흐른다. 이러한 국가에서 대중들은 더더욱 예속된 주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규제보다는 자유의 실험을 택한다. 나아가 개인의 자유의 증대가 공동체의 번영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주장한다.
“나는 자유가 공공의 안녕을 훼소하지 않고 용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유 없이는 공공이익과 신앙심은 번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신학정치론> 서문.
국가 혹은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공동체 속에서 자신과 동료의 자유가 증대되기위한 삶을 위해서는 사유하고 실험해야 한다. 정치적 주체는 한 무더기의 우연한 군중이라 말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욕구와 힘에 의해 좌우되는 군중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함께 구성하는 '정치적 대중'의 형성을 희망했다. 자유를 제약하는 전제정부 하에서는 대중은 예속된 신체와 정신을 보유할 수 밖에 없다. 스피노자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유’라는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자유로운 행위를 통한 자유민, 자유를 열망하고 스스로 형성해낼 줄 아는 주체의 출현이다. 자유는 부여되거나 도달해야할 이상이 아니라 그 원리를 구성하고 체현하고 있는 공동체의 신체 속에 각인된다.
“노예인지 아닌지 여부는 행위의 목적에 달려있다. 행위의 목적이 행위자의 선에 있지 않고 국가의 선을 위한 것이라면 행위자는 노예인 셈이며.... 통치자가 아니라 민중 정체의 복리가 최고법인 나라에서라면 (대중을) 신민으로 변화시킨다.” <신학정치론>
행위의 수위나 표현의 과도함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노예이냐 신민(자유민)이냐가 된다. 일베들의 행위의 목적은 ‘국가’ 훼손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다. 이들에게는 국가라는 단일한 정신과 단일한 신체를 훼손시키는 어떠한 단체행동도 용납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내란(혁명)은 국가의 죽음이다’라고 말한 것은 홉스였다. 홉스에게 국가는 대중들의 절대적인 복종위에 군림하는 절대권력이다. 일베에게 특정한 국가의 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이상적인 국가를 위해 그들은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국가는 훼손되면 안된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어떠한 도발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들은 만인에 대한 공포를,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을 국가라는 상상적인 절대권력으로 대체했다.
진짜 괴물은?
문제를 '일베' 자체가 아니라 우리 사회속에 놓여진 일베의 의미와 효과로 돌려보자. 일베의 준동은 일베라는 정치적 대중이 가지는 위험보다는, 일베가 사회에 던지는 미묘한 파장에 의미가 있다. 일베를 둘러싼 사회의 술렁거림은 '대중'의 이미지를 위험하고 혐오스럽게 변형한다.
최근 일베와 테러리즘에 대한 비난은 좌우익의 입을 하나로 모으고 있다. 김기종씨의 미대사 폭행이나 일베의 혐오표현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반동적인 대중을 저격하는 여론의 비난이 특정한 대중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은 선동자의 요란한 말에 동요되고, 통제 불가능한 루머를 퍼트리며, 쉽게 전염되는 공포를 유포하고, 그 공포에 감염되어 급기야 극단적인 폭력에 이른 군중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생산한다. 무지한 대중의 출현.
이 무지하고 위험한 군중의 이미지를 앞세워 등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민의 안전과 ‘적정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규제하는 국가다. "국가는 대체 뭐하고 있는가?"라는 국가의 무능력에 비난은 좌우익의 입을 하나로 모은다. 대중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괴물이 되었고 국가는 공동체를 수호하는 ‘정의’의 화신이 된다.
홉스의 국가를 상징하는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의 몸은 수백개의 얼굴들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공포에 떨며 리바이어던의 머리를 향해 경외심을 보내는 군중들이다. 위험한 군중들이라서 국가라는 절대권력이 호출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리바이어던의 몸을 구성해야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무지한 군중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일베라는 대중들의 공포를 국가라는 더 큰 공포로 제압하는 길은 최악의 선택이다. 이에 대한 중립적인 ‘규제 운운하는’ 제스쳐 또한 국가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행위로 나아갈 위험이 다분하다.
차라리 일베에 맞서 보다 극악무도한 군중이 되는 것은 어떨까? 105분 짜리 영화를 20명에게 상영하겠다고 1만명이 무리를 지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베에 분노해 거리와 광장을 메우고, 표현의 자유의 역사적 맥락을 다시 복원하는 '과도한 투쟁' 을 일삼는 공포스러운 대중 말이다. 그래야만 그들 뒤에 숨어 경제위기와 실업의 불안정함을, 공포를 지속적으로 유포시키고 있는 국가를 끄집어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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