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앤리뷰]
‘세월호 시대의 문학’에 대한 말들에 대하여
수유너머N 회원/문화
1.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이 마당에 문학이 뭐냐"라는 탄식에 대하여
세월호 참사 1주기다. 여기저기서 추모 행사 소식이 들린다. 지난 10일 대학로에서 열린 <세월호 시대의 문학>(세교연구소 주최)도 그 중 하나다. 이 날 행사는 총 1, 2부로 나뉘어졌다. 먼저 함성호, 함돈균의 발표가, 그리고 다시 이들에 대한 강행숙, 양경언의 토론이 이어졌다. 2부는 심보선, 남상욱의 발표를 듣고, 원래 2부 토론으로 내정된 두 명의 토론자 한영인, 곽형덕을 포함하여 앞선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함께 나와 플로어 질문을 받는 방식이었다. 화창한 봄날에 백 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다. 대체로 서로 낯이 익은 문학계 인사들이 많은 것 같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인 것은 틀림없었다. 당초에 예상한 인원보다 청중이 많았던 것인지 주최측은 추가로 복사한 자료집을 나누어주었다.
이날의 발표를 들으면서 최근의 ‘세월호’에 관한 ‘문학들’ 혹은 ‘말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최근 몇 달 동안의 논의들을 되새겨 볼 때 세월호에 관한 말이나 문학들에 대해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먼저 이날 행사의 1부의 분위기를 상기해보자. 1부 발표를 한 함성호 시인과 함돈균 평론가는 두 사람 모두 세월호에 대해 말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각각 다르게 사태를 보고 있었다. 함성호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해보다면, 그는 세월호 사건이 미디어를 통해(그것이 개인미디어인지 혹은 공중파와 같은 언론인지는 분명치 않다) 지나칠 정도로 ‘생중계 되다시피 했다’고 진단한다. 발표문에 있는 그의 말을 옮기자면,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목격했고, 심지어는 희생자들의 휴대폰에 찍힌 마지막 영상까지 보았음에도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함성호, 「타인의 고통과 만나는 문학의 자리」, p.7) 분명 뭔가 많이 봤는데 본 게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이것을 SNS상으로 공유는 하는데, 이 바깥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 그가 말하는 ‘이상한 목격자들’의 현재인 것 같다. 대체로 평이한 진단이기는 하나 수긍 못할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5.18을 예로 든다. 그러면서 5.18은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떠돌아다니지 않았다.’면서 ‘그럼에도 그때, 진실은 너무나도 자명했다’라고 말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그러나 지금, 304명의 목숨이 차오르는 물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물이 턱에 차오르고 결국 숨이 끊어지는 과정을 낱낱이 보아온 지금,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발표문, 7쪽)란다.
그의 진단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날 다음 발표자인 함돈균이 지적했던 것처럼 사실 우리가 본 것은 ‘정지화면’이다. 그는 우리가 너무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혹은 너무 많이 직접적으로 접해버려서 사건과의 거리가 사라져서 문인들이 글을 쓸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관계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타자가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관계는 사라졌다. 문학이 만져야 할 삶이 사라진 것이다.(발표문 7~8쪽)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현대철학이 말하는 복잡한 타자 개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리하여 문학이 만져야 할 삶이 사라져버렸고, 하지만, 그래서 이어지는 문단에서 다시 문학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으로 발표를 마치면서 그러나 ‘문학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발표문 8쪽)라고 말했다. 다만 ‘단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한 사람을 호명해낼 수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이 말은 나중에 다시 토론회 장에 ‘문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없다’라는 소소한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대략 함성호의 발표는 대체로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 어려워졌다’로 요약된다. 물론 그래서 하지 말자 소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중요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뜻인 거 안다. 그 취지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순히 우리가 ‘너무 많은 정보 앞에서’ 고통스럽다거나 ‘304명의 목숨이 차오르는 물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물이 턱에 차오르고 숨이 끊어지는 과정을 낱낱이 보아온 지금’이라는 표현들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 끔찍한 순간을 봐버려서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상 그들의 고통을 상상한 것이다. 물론 이 상상이 그렇다고 ‘본 것’에 비해 수준이 낮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우리가 본 것의 끔찍함 때문에 쓸 수 없다는 말이 허용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쓸 수 없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본 것의 끔찍함 때문이 아니다.
문학이라는 게 우리의 ‘말’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정말 끔찍하고 말도 안되는데 그것을 상상하고 다시 기록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껏 우리의 문학과 말은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가 무력하다면, 너무 많이 봐버려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너무 많이 봐버려서 타인과의 거리가 제로가 되어버려 못 썼다면,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미 많은 곳에서 문학과 말의 경계를 넘어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2. ‘왜 세월호 시대의 문학을 말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이날 심포지움 종합토론 시간에 누군가는 ‘세월호 시대의 문학’이라는 호명 자체가 불편하다고 했다. 그의 질문의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거칠게 재구성하자면 다음과 같다. <밖에서 무릎 깨지게 투쟁하는 유가족들이 있는데... 세월호 시대의 문학이라는 포스터를 보고 $(%^^@ 했다. 왜 세월호 시대의 바느질은 없는데 세월호 시대의 문학은 있느냐> 대체로 뭐 이런 뉘앙스였다. 이 질문 자체도 자체지만 더 의아했던 것은 행사장 내에 감도는 어떤 당혹 같은 것이었다. 물론 나의 감각이 틀린 것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질문의 적절성을 판단할 권한은 없다. 하지만 왜 세월호 시대의 문학이 필요하냐고, 혹은 이것에 대해 논하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제대로 답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날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세월호 시대의 문학’이라는 호명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호명이 괜찮으려면 두 가지 조건의 충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세월호 시대의 문학을 정의하는 방식의 문제다. 나는 몇몇 평론이나 언론 기사에서 ‘세월호 시대’가 마치 어떤 소재인냥 쓰이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세월호 시대의 문학이란 뭘까. 아이가 화자일 때?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이가 등장할 때? 배 침몰 사고를 소재로 할 때?
만약 세월호 시대의 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혹은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아이가 화자라고,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이가 등장하니까, 배 침몰 사고가 소재니까 세월호 시대의 문학이라고 붙일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화자가 어른이면 어떻고 아이이면 어떤가. 이렇게 단순히 소재를 가지고 붙이는 딱지는 애써 창작한 작가나 작품 모두에게 실례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경험하는 파렴치한 사태에 대해 그것을 직접 겪지 않은 다른 시공간의 누군가가 그것을 상상하게 한다면 되는 것이 아닐까. 단순한 소재주의나 식상한 비유는 이제 그만 할 때가 아닐까. 이것은 지난 2011년에 있었던 ‘문학의 정치’에 관한 일련의 논쟁을 상기해봤을 때도 이상한 후퇴다.
‘세월호 시대의 문학’을 말할 때 염두해야 할 또 다른 조건은 이것이 단순히 ‘문단’이라는 제도안에서 생산되는 것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세월호 시대의 문학’이 기존의 ‘문학’이라는 개념 자체-대략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의된 실정적 개념-를 문제제기 하는 방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문학’이 재정의되고, 기존의 작품도 다시 읽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 역시 문단의 누구누구가 아니라 세월호 시대의 모든 이들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심포지움의 세번째 발표자였던 심보선의 「국가폭력과 말」이라는 글을 읽어 볼 수 있겠다.
세월호에 대한 우리의 '말'들
3. ‘당사자들의 말에 더 큰 관심을’이라는 요청에 대하여
심보선은 「국가폭력과 말」에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말을 담은 르포 『금요일에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창비, 2015.1)를 언급했다. 그는 이 책을 말하면서 왜 『눈 먼자들의 도시』(김애란 외, 문학동네, 2014.10)보다 판매량이 높음에도 이 책을 읽었다는 사람이 적은 것인지, 인터넷 등에 서평 쓴 서평은 적은 것인지에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추측하기를 ‘그분들의 말은 말이 아니다’라고 간주하며 희생자 가족들을 ‘절규하는 존재로 보는 시선’(37)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우리와 같은 청자들의 잘못된 편견이다. 『금요일에 돌아오렴』 이 책의 희생자들의 말은 수사학적 관점에서는 부족할 지 몰라도 ‘진실’을 요구하는 공적 존재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심보선이 이 날 『금요일에 돌아오렴』 의 희생자들의 말이 단순한 절규가 아님을 지적하고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의 말임을 짚은 점은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대로 세월호 희생자들은 ‘국가 폭력의 사건들 전체를 소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행진이 ‘대통령과 정치인들에게 하소연하기 위해서가’아니라, ‘국가가 갖고 있지 못한 의지와 이성을 품고 국가기계의 본부인 청와대와 국회로 향하는 것이다’라는 지적들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가 『금요일에 돌아오렴』 을 말하면서 강조한 ‘당사자의 말’에 대해서는 어쩐지 선뜻 내키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가 ‘당사자의 말’을 말할 때, 이는 물론 선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맞다. ‘당사자의 말’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당사자’가 아닌 자, 다시 말해 그것을 ‘겪지 않은 자’는 말 할 수 없는 것일까? ‘당사자의 말’은 ‘당사자의 말’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이 역시 우리를 가르는 선은 아닌지. 그렇다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혹은 어디까지 당사자인가?
또 다른 문제는 ‘당사자의 말’을 재현하는 것의 문제다. 그것은 얼마나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 것일까. 그의 순수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당사자 주의’는 그들의 말을 기록하는 이에게 또 다른 왜곡은 아닌지 또 다른 검열을 낳고, 결국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당사자’의 말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소설이나 시가 될까? 이것들은 당사자의 말이 아니므로 무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5.18도 4.3도 모두 그것을 직접 겪고 희생당한 이들의 수기나 이들에 대한 르포를 읽을 것이지. 왜 문학은 그렇게 그 언저리에서 그것을 직접 소재로 삼아 글을 쓰거나, 혹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쓴 것인가. 그리고 만약 ‘당사자’라는 것이 있다면, 그 ‘당사자’의 말은 르포나 기록들로 그들의 말이 충분히 기록되었는가? 글쎄. 그 무엇도 충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많은 ‘말’들-시, 소설, 르포, 수기 그리고 흩어진 형태로 존재하는 수 많은 말들-이 있지 않나. 그리고 그 ‘말’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다시 ‘상상’해 온 것은 아닐까.
‘르포=당사자의 말’, ‘문학=당사자가 아닌 자 혹은 작가의 말’ 이라는 이분법은 되려 ‘세월호’에 대한 무수한 말들의 생산에 장애가 되지는 않을까. 오히려 『금요일에 돌아오렴』이 계기가 되어 ‘당사자의 말’과 ‘당사자 아닌 자의 말’이라는 경계 혹은 비문학과 문학이라는 경계, 비문인과 문인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발화자가 문단 밖에 있는 ‘당사자’이기에 그들의 말이 더 ‘진실’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결국 이렇게 문학하는 이들이 스스로 무력감을 말하고, ‘당사자의 말’을 강조할 때 돌아오는 것은 그날 심포지움에서 있었던 서툰 힐난 밖에 없지 않을까.
4. 최대한 많이 상상하고 말할 것.
‘문학’이라는 것이 뭔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말하는 사람마다 정의도 다를 것이고 그 바람직한 상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문학의 능력은 ‘당사자’와 같아지는 능력이 아니다. 『한비자』에 따르면 있지도 않은 코끼리 뼈를 보고 코끼리를 상상했던 유례를 따라 코끼리 상象자가 상상想像의 유례가 되었다. 우리가 문학을 통해 실현하는 상상想像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결코 지금 시간과 장소가 아닌 것.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을 상상想像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결코 한가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과 장소가 아닌 것을 상상想像하는 일인데, 이 시공간을 도약하는 일인데 그게 어떻게 쉬울까? 그리고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다른 시공간의 사람에게 그때 그 순간을 다시 상상하게 하는데 왜 이것이 무용한 짓일까?
아이를 잃은 사건은 이미 시작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을 매번 다시 상상想像한다. 마치 지금이 그 순간인 것처럼. 지금 살아남아 말하는 우리는 물리적 시공간을 따진다면야 그 순간 거기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 거기 없었다’고 그러니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우리는 지금 있지 않은 것을 상상想像한다. 감히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想像 한다. 그리고 그래서 이 상상은 중요하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다른 사건의 희생자 가족들과 연대할 수 있는 것이나, '국가의 상징 폭력을 거부한 것'은 어디에서 나온 힘일까.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고통에 대한 상상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서로가 서로의 타자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계속 서로의 고통을 상상할 뿐이다. 그리고 이 상상을 통해 우리는 연대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으로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상상의 결과물인 ‘말’들이 문단내에서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발표되건 아니건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다만 이 상상이 말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무리 더 많이 상상하고 말한다해도 충분치 않을테니까.
그리고 그래야 이 ‘말’들을 통해 나중에 먼 훗날 지금 이 순간에 없는 그들이 지금 우리의 고통을 좌절을 상상할 테니까. 그래서 그것이 비록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일지라도 계속 상상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저 멀리 초월적 신이 보기에는 다 틀린 것으로 보일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핑계로 또 다른 누군가는 우리의 ‘말’을 흠집내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웃기지 마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상상의 힘을, 우리의 말의 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는 장님 인간이기에 누군가의 험담에도 굴하지 말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상상한 코끼리 뒷다리에 대해 말하는 것 뿐. 어쩔 수 없다. 먼 훗날 우리의 고통을 상상할 또 다른 장님 인간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한 코끼리 뒷다리에 대해 최대한 많이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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