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리뷰]
심기증이 만들어내는 공상적 윤리의 문제
수유너머N 회원 조지훈
1.
심기증은 필요이상으로 자신의 질병에 대해서 걱정하는 병이다. 사실은 병이 없는데도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신체 상태에 예민하고 염려하여 실제로는 없다고 할 수 있는 증상이 발생한다고 한다. 심기증이 심리적인 요인에 따라 발생하는 질병이라 한다면 자연스레 사회적인 것과도 연결될 수 있을 테다. 김신식은 <흉물스러운 선의: 심기증과 정치>에서 심기증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진단을 하고자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걱정을 통해서 사실은 있지도 않은 증상을 만들어내서 고통스러워 한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인 심기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사회적인 문제에 예민하다라. 이 말은 뭔가 이상하다. 사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존재하지 않은 사회적인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고민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사회적인 심기증에 걸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신식은 이러한 대표적인 사회적 심기증 환자로 마이클 센델을 꼽는다. 센델은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항상 극단적 선택이 가능한 항을 제시하고 지나치게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사스럽지만 굳이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달리는 기차를 멈추면 승객 전원이 사망하고 대신 철로에 묶인 한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반대로 달리는 기차를 놔두면 철로에 묶인 그 사람은 죽겠지만 승객 전원이 살 것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이 뒤에 센델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예시를 드는 방식 하나로 판단해보자면 심기증 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센델은 윤리적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상황을 설정하고 우리에게 선택을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선택을 실제로 해야하는 사람은 범죄자와 일반시민이 탑승한 배에 각각 폭탄을 설치하고 어디를 폭파시킬지를 묻는 조커 앞에 쩔쩔매고 있는 배트맨 정도가 될 것이다. 센델은 이런 가상의 양자택일 상황을 참 많이도 제시한다. 아마 혼자서 많은 공상을 통해서 사회적인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사회적 심기증 환자의 선각자로서 우리에게 공상적 양자택일의 순간을 통해 사회적 실천의 문제로 이끈다. 이러한 공상적 이분법의 접근은 다름아닌 심기증적 접근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
심기증은 타자에 대한 지나친 염려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유쾌하지는 않지만 이런 증상을 보이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짝사랑하는 X일 것이다. 심기증 환자 X는 Y에게서 버림받으면서 역으로 Y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필요이상으로 Y에게 적합한 관계가 되려면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한다. 상처를 주는 사람한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여기서 Y가 어떤 사람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쿨한 사람이어서 상처에 둔감하든 예민한 사람이어서 상처를 깊게 받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또한 어떤 상황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잘못해서 Y가 버린 것이든, 아니면 오로지 Y의 단순변심에 의한 해어짐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직 Y를 사랑하는 X가 Y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이다. 이때 X에게 나올 수 있는 분노와 슬픔은 어떤 이유로도 희석화될 수 없다. 그래, 문제는 Y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야, 아니 사실 우리 관계에 있는 것이지. 이런 성찰이 지속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기 십상이다. 그래, 사실 만나고 해어짐이라는 사건은 무수히 반복되는 것인데 여기에 끄달려서는 안 되지. 중요한 것은 Y가 나를 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이러한 만남과 해어짐에서 무엇을 배울지를 아는 거야. 그러니까 Y에 대해서 분노할 필요가 없어(이처럼 심기증 환자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특정한 상황에서 발생한 격렬한 감정을 휘발시켜 배움과 깨달음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 재주가 있다) . 심기증 환자가 자신의 신체 상태를 지나치게 염려하듯, 이별하는 X는 자신을 떠나려는 Y의 상태를 지나치게 염려한다. 물론 염려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한 지나친 염려가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즉각적인 분노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해탈도 깨달음도 아니다.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움직임에 불과하다. 타자를 염려하는 심기증 환자는 상황으로부터 도주하는 도망자다. 심기증 환자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분노를 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분노를 할 수 없음에 대한 되새김질에 불과하다. 차라리 분노 조절은 상대방에게 분노를 하는 자가 고민할 수 있는 문제다. 상대방에 대한 염려 때문에 분노를 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선택을 고민하는 윤리적 주체가 아니라, 심기증 환자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그 염려의 대상이 자신보다 힘에서 우위에 있는 자를 향한 것이라면 더더욱이나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3.
썩 내키지는 않지만, 심기증에 대한 좋은 사례를 들기 위해서 나 자신을 표본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2012년에 재주도 강정마을에 내려갔었다. 거기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연구실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찾아간 것이었다. 운동과 거리가 먼 나로서는 강정마을에서 벌어지는 거친 상황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경찰의 폭언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의 폭언도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내가 강정에 내려갔을 그때 오랫동안 강정마을과 함께 싸웠던 문정현 신부가 경찰과의 실랑이 끝에 방파제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해 나로서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상황이 발생했다.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그때 다들 난리법석일 때 나 혼자 동화되지 않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더군다나 다소 삐딱한 정서를 가진 청년에게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갑자기 동화되는게 더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거리감으로 어떤 생각을 전개시켜나갔다는 것이다. 상황으로부터의 거리감은 사유의 특권적 장소가 아닌데(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데), 자신이 충분히 동화되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혹은 정당성을 찾고 싶은 것 때문인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판단을 하고자 했다. 그 당시 작성했던 강정마을 후기를 살펴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서울로 올라와서 기사를 확인하니,
사람들은 삼발이에 병력을 배치한 해양경찰 서장을 과잉진압으로 고발하고,
현장에 있었던 순경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가 아닌 업무상 과실치상으로 고발했습니다.
현장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순경의 얼굴이 떠올라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대치하고 있는 상대를 악마로 몰지 않고도
치열하게 싸울 수 있음을 보여준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2012.4.16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심기증 환자의 특징의 전형적인 대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년 전의 나는 방파제에서 경찰과의 실랑이 끝에 추락한 문정현 신부와 관련된 형사고소 사건에서, 기소된 순경이 살인미수가 아니라 과실치상으로 고발된 것에 대해서, 문정현 신부와 실랑이에 있었던 그 순경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 시름놓았던 것이다. 방파제와 같은 위험지역에서 경찰이 민간인과 실랑이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차지하더라도, 문정현 신부의 추락과 관련한 기소사건에서 가장 염려했던 대목이 기소된 순경이라는 사실이 놀라움을 안겨준다. 이에 대한 판단은 더욱 가관이다. 순경을 살인미수가 아닌 업무상 과실치상으로 고발한 대목이, 상대를 악마로 몰지 않고 싸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심기증 환자였던 내가 당시 기대했던 것은 강정마을에서 싸우는 주체들이 경찰들을 너무 험하게 대하지 않기를, 그리고 아무리 싸우는 대상이라도 악마로 몰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만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아니, 정확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을까? 싸우는 주체가 대치하고 있는 경찰들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지고, 같이 운동하는 동료를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데 원인 제공을 했을 때 이에 대해 격렬하게 분노하고 악마로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서, 과연 이러한 행동이 옳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묻는 것이 윤리적 고민이라 할 수 있을까? 당시의 강정마을 투쟁에서 투쟁의 주체가 대치하고 있는 경찰에게 너무 과하지 않게 싸울 것인지를 묻는 것이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염려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런 생각없이(과연?) 강정마을에서 대치중이던 전경들에게 마음이 써졌다. 이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이들은 무슨 죄가 있길래 여기에 나와 강정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걸까. 걱정이 된 나머지 다음과 같이 후기에 적었었나 보다.
사람들은 경찰에게 엄청나게 욕을 합니다.
일반적인 욕부터 시작해서 성적인 욕, 나이에 대한 욕까지 합니다.
경찰 뿐만이 아니라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욕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하다고 말합니다.
저기 서 있는 전경들은 그냥 시키는 데로 하는 사람들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가 있냐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고 말려서 뭐하냐고.
그만둔다 치더라도 또 누군가는 와서 일을 할 텐데.
사회구조를 욕해야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욕해봐야 제 살 깎아먹기 밖에 더 되겠냐고.
2014.4.16
나는 당시 전경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을 말리며, 그들도 사회구조의 희생양이고 피해자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공감했었다. 심지어 반가웠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람은 떳떳한 심기증 환자였던 것 같았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불필요한 염려를 윤리적 문제로 치환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종종 성찰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전경에게 욕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는 어떠한 쟁점도 형성하지 않는다. 센델이 제기하는 공상적 이분법과 똑같다. 센델이 제기하는 어떠한 선택항도 그러한 선택에 이르는 과정이 윤리적인 고민이 아님에도 않음에도 불구하고(왜냐하면 윤리의 문제는 어떤 쟁점 속에서 고민되는 것이니까) 진지하게 윤리적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전경들에게 욕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말인가? 아니. 욕을 하든 말든 이는 경찰과 대치중인 강정마을에서 투쟁중인 자들의 윤리의 문제와 무관하다. 오히려 이를 윤리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 더욱 비윤리적이다. 내가 경찰에게 욕을 하기 어려운 감정적 상태를 근거로 욕을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내가 욕을 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체로 욕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 기준이 될 수 없고, 또 한편으로 똑같이 분노할 수 없는 공감대 부족에 대한 무력감 내지 부채감으로 파악할 이유도 없다. 이 모든 생각의 흐름은 사건의 윤리적 문제를 개인화시키는 수법에 불과하다.
4.
이처럼 심기증은 과도한 염려를 통해 가상적 선택의 순간을 만들어놓고 이를 윤리적인 문제로 파악하고자 한다. 집회 시 도로를 점거하는 것은 옳은 행동인가 아닌가,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 집회란다면 이처럼 대중교통을 방해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집회시 도로점가가 도로를 점거할까 말까라는 선택의 순간 속에서 행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집회 도중에 특정한 상황적 국면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고 있다. 법적인 문제와 관련된 책임소재를 물을 수 있을 지언정(그 역시 쟁점이 되는 부분이다), 집회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책임소재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세월호 집회에서 평화 집회 이상의 과격한 행위를 한 것은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 이 역시 같은 질문의 방법이다. 어느 종편의 패널은 자신은 (다른 극우파 패널과 같이) 그토록 세월호 집회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냥 평화롭게 세종대왕 앞에서 목소리를 내고 멈추면 되었는데, 왜 굳이 차벽을 넘어서 움직이는 불법시위를 벌인 건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넘는다고 청와대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청와대를 갈 수 있다 한들, 가서 뭘 할 겁니까?" 결국 그 패널의 말은 세월호 집회 참가자들이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종편의 패널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아마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회 내부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라는 표현이 과격할 수도 있겠다. 집회에 참여하는 것만 해도 어딘데, 여기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게 아닐까 싶을 수도 있다. 맞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각자 상이한 강도만큼 집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누군가는 가장 앞 선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가장 뒷 선에서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행동을 하지 않은 자들이 자신들이 행동하지 않음에 대한 윤리적 이유를 부여하는 방식에 있다. 추모는 추모로 끝나야지 그렇게 폭력적인 집회로 번져서는 안 되지. 세월호 집회가 왜 폭력적인 국면으로 갔는지 평가하는 것은 둘째 치자.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본인은 자신의 행동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보는가? 폭력적 상황에서는 방어를 하거나 폭력적으로 응수하는 것은 가능한 반응의 기본이다. 이것 자체만으로 윤리의 영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폭력적 상황에서 폭력적으로 반응하지 않은 자신의 행동을 "선택했다고" 말하면서 이를 비폭력을 실천하는 윤리로 생각한다면 정신승리법과 다를 바가 없다. 행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무서울 수도 있고,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내일 일정이 있어서 몸을 사려야 되서일 수도 있고,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일 수도 있다. 그러면 그냥 그걸 받아들이면 된다. 행동하지 않음에 대해 윤리적 성찰을 하는 것 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세월호 집회의 한 장면. 젊은 친구들이 집회 참가자와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자 열심히 말린다. 그러면서 경찰이 무슨 잘못이 있냐고,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세월호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 사회에 대해 분노해야지, 그저 시키는 데로 일하는 경찰이 무슨 죄가 있냐고, 이들은 우리와 같은 국민이니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성찰적 주체들은 도리어 경찰을 시위대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나는 그 순간 한 편의 사무라이 만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살생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무라이가 전장에 나와서 적대하는 두 세력의 폭력을 막아내는 그 만화 같은 순간이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성찰적 주체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그렇게 분노하게 만드는 사회의 물질적 인적 구성요소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회에 분노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실질적인 인간(경찰)이나 물질(버스)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묘한 논리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집회 현장에서 있는 자신을 특정한 개인으로 생각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경찰이나 집회에 참여하는 자나 모두 집회 현장이라는 장소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집회 현장은 "나"라는 개인이 자신의 세계관에 따른 윤리적 실천을 실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이 아니다. 만약 윤리를 따지고자 한다면 먼저 펼쳐진 장을 고려해야 한다. 집회에서 폭력이 발생했다면 이는 집회 참여자가 폭력을 윤리적으로 실천한 것이 아니라(폭력적 행위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상황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폭력적 상황이 발생한 맥락이지, 자신의 세계관에 따른 윤리적 판단은 아니다. 더군다나 힘이 불균형한 상황에서의 그러한 윤리적 판단은 사실상 심기증에 다름 아니다. 경찰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경찰이 다칠까봐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힘에 대한 과분한 확신이다. 걱정할만큼 힘이 세지도 않고, 상황이 여의치도 않다.
이처럼 사건의 발생을 선택의 순간으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것은 사건이 발생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가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세월호 집회 현장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에 답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을, 윤리적 질문이라고 제기되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이다. 우리는 심기증이 초래하는 공상적 이원론의 선택의 순간과 이러한 순간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불필요한 염려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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