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 그라쿠스는 슈바르츠발트에서 영양 한 마리를 쫓다가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그를 실은 죽음의 나룻배가 길을 잘못 든 바람에,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의 이곳저곳을 떠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죽었지만 또한 어느 정도 살아있기도 하다. 그는 이승에도 속하지 못하고 저승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 이중으로 추방된 자다. 카프카의 단편소설 <사냥꾼 그라쿠스>는 이처럼 ‘중천’을 떠도는 일종의 ‘귀신’에 대한 소설이다.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카프카의 이러한 서술이 기이한 꿈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관찰의 기록임을 알아챘던 것은 트위터에서 김진숙 씨의 문장을 보고 핑 눈물이 돌았을 때였다. “백일 이백일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이 생의 결단으로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내려가면 오히려 못살 거라는 그게 더 중요합니다. 김주익, 곽재규 두 사람 한꺼번에 묻고 8년을 허깨비처럼 살았으니까요. 먹는 거, 입는 거, 쓰는 거, 뜨뜻한 거, 시원한 거, 다 미안했으니까요. 밤새 잠 못 들다 새벽이면 미친 듯이 산으로 뛰어가곤 했으니까요.” 8년이란 세월을 죽지 않았어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유령의 공간 속에서 그는 떠다니고 있었던 거다. 죽음과 비죽음 사이의 공간 속에서 살고 있었던 거다.
지금 그가 있는 곳 또한 그렇다. 85호 크레인, 이미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동료가 죽어간 장소, 죽음이 가느다란 실낱 끝에 매달려 있는 장소.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바깥이다. 모든 편하고 익숙한 것이 사라진 장소고,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모든 일상이 중지된 곳이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자도 잤다고 할 수 없는 공간이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고, 쉽게 죽음을 선택할 수도 없는 곳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장소, 혹은 죽음과 비죽음 사이의 장소, 중천이다. 중천, 그것은 전근대적 미신의 공간이나 시적인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저기 저렇게 실재하는 현실의 공간인 것이다.
그것을 통해 그는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게 만든다. 그 중천의 공간, 아슬아슬하게 가느다란 실 끝에 매달린,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삶의 장소, 그것은 단지 하나의 크레인에 국한된 장소가 아니라, ‘정리해고’의 칼날이 노동자의 몸을 베는 모든 장소다. 이미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쌍용자동차의 해고자들이, 심지어 복직의 약속을 얻어낸 경우에조차 삶과 죽음 사이의 중천을 떠돌다, 바람이 세게 불면 뚝뚝 떨어져 죽고 마는 것을.
김진숙 씨가 중천의 공간에 자리 잡고 죽음과도 같은 삶을 시작한 것은, 바로 저 보이지 않는 중천을 보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중천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우리가 바로 그 중천의 입구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려 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우리를 그 그 중천의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죽음과 비죽음 사이의 장소를 수많은 사람들이 ‘대중’이 되어, 하나의 흐름이 되어 모여드는 특이점으로 만든다. 떨칠 수 없는 매혹의 목소리로 뱃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사이렌의 인어들처럼. 몇 자 안되는 트위터의 짧은 문장이 그런 마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을 것인가? 물론 거기에는 김여진 씨처럼 빠르게 말려든 사람, 그 매혹의 힘에 반응하며 유혹의 목소리를 증폭시킨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처럼 둔감하고 느린 자들, 의무감 같은 것 없이는 트위터나 인터넷을 하지 않는 고체 같은 분자들도 빨려들어가게 만들었다.
희망의 버스, 그 이름은 또 얼마나 역설적인가?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저 죽음과 비죽음 사이의 공간으로, 중천으로 실어나르는 버스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세상 바깥으로, 황무지 같은 곳으로 싣고 가는 버스, 그런 점에서 차라리 희망이라기보다는 절망의 장소로 끌고가는 버스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그 버스가 가는 곳이 절망의 황무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중천인 것은, 거기에 경찰이나 용역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기에 보지 못했던 것이 있고, 우리가 극구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저 가느다란 실 끝에 매달린 죽음이다. 그 장소에서 두 팔을 벌려 우리는 마중하고 있는, 죽음에서조차 추방당한 자의 모습이다.
바로 그것이 그 버스가 희망인 이유일 것이다. 희망이란 있지도 않은 안락한 세상에 대한 꿈 같은 것이 아니라, 도처에 널려 있는 죽지도 못하는 장소들을 눈 돌리지 않고 직시하고, 그 중천에 매달린 죽음 같은 절망들을 정확하게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절망의 장소에서, 죽음조차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 그곳에서 김진숙 씨의 절망을, 또한 자신이 불러들인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환한 웃음을 보는 것, 그리고 함께 웃으며 힘차게 손을 내뻗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글 /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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