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속의 국가, 현실속의 혁명
-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태양계는 유기체일까?
헤겔에게 국가는 유기체이다. 아무리 크고 복잡해도 유기체는 '하나'로 셈 해진다. 왜냐하면 유기체란 수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아래 통일되어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지는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헤겔 자신이 아무리 복잡심오하고 이율배반적인 사유들로 뒤엉켜 있다고 하더라도 '헤겔'이라는 유기체는 오로지 하나다. 그 헤겔을 360토막을 내고 조각들을 믹서기에 갈아 햇볕에 말려 고운 가루로 만든다고 할 지라도 n개의 헤겔은 될 수 없다.
헤겔에게 국가란 바로 이런 것이다. 국가는 국가라는 절대 이념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동어반복이라고 비난하지 말자. 그런 비난이라면 맑스가 이미 지겹게 반복한 데다가, 헤겔에게는 이 동어반복이 매우 중요하다).
헤겔의 위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위장은 '헤겔의' 위장에 불과한 것처럼, 가족과 시민사회는 (이미) 국가의 부분들로서 '국가'라는 절대정신의 실현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러나 맑스는 헤겔의 주장대로 '과연 국가가 유기체인가'라고 반문한다. <헤겔 법철학 비판>은 헤겔의 유기체적 국가관에 메스를 들이대는 책이다. 맑스가 보기에 국가가 유기체라고 말하는 것은 헤겔의 '경험'일 뿐이지 철학적으로 해명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맑스는 헤겔에게 묻는다. '국가가 유기체라고 한다면, 태양계는 유기체라고 왜 말 못해?' 물론 유비적으로 설명은 가능하다. 국가와 동물의 공통적인 특성을 추출해 그 중 유기체적인 특징과 부합하는 것을 말하면 된다.
하지만 맑스에게 문제는 동물적 유기체와 정치적 유기체가 어떻게 다른지가 중요하다. 두 유기체 사이의 '차이'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국가가 왜 정치적 유기체인지 설명한 것이 아니다. 헤겔에게 끊임없이 '어떻게'를 추궁해대는 불만스런 맑스의 물음을 보자면 헤겔의 공백을 보충한다고 불만이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맑스의 질문은 애초에 헤겔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안에는 국가가 없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쓰는 맑스는 아직 청년이니까 계급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말자. 그가 어떤 단어를 쓰던, 심지어 청년헤겔주의자로서, 포이어바흐주의자로서 자신을 기꺼이 그들 옆에 세우던, 오늘 우리는 스물 일곱의 맑스가 무엇과 대결하려고 하는지를 보자. 그는 지금 '가족'과 '시민사회'라고 하는 국가의 재료들이 과연 헤겔의 말대로 국가가 되기 위한 '필연성'에 놓여있는지를 따져묻고 있다.
헤겔의 머리 속에는 '가족'과 '시민사회'와 같은 국가의 재료들이 놓여있다. 하지만 이러한 재료들이 모인 결과가 국가는 아니다. 국가의 영혼은 자신의 육신이 탄생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다. 헤겔에게 국가의 신체는 가상에 불과하다. 여러 권력들이 국가를 구성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들은 '이미' 국가의 체제들로서 필연적으로 국가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맑스의 눈은 국가 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탐색한다. 맑스는 가족과 시민사회를 '여러 권력체'들이라고 말한다. 헤겔에게는 국가의 재료들이었던 것이 맑스에 와서는 국가와는 다른 욕구와 심성을 가지고 있는 '활동적인 것들'이 된다. 헤겔은 국가의 심성을 애국심으로 정의하며 국가의 정신적 이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맑스가 보기에 가족과 시민사회는 '애국심'과는 다른 자체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다. 맑스가 더 이상 진전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심성'이라고 했을 때는 욕구들이나 습관들, 집단적인 무의식 등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헤겔의 국가를 맑스가 들여다 보았을 때, 그 안에는 국가로 통합되기 힘든 이질적인 권력체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점진적 이행'이라는 상상, '단호한 혁명'이라는 현실
헤겔에게 국가는 국가에 앞서 이미 주어진 하나의 관념이다. 반면 맑스에게 국가는 여러 권력체들이 활동하는 현실적인 계기로서 나타난다.
맑스가 헤겔을 비판하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국가가 '국가'라는 관념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외부적 규정이 덧씌워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헤겔의 주장이 아닌가. "국가는 필연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산출한다." 헤겔은 단일하고 고정된 국가라는 이념으로 이질적인 활동들을 규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맑스는 헤겔의 주장에 감춰져 있는 이면을 발견한다. 헤겔의 말대로라면 여러 권력들은 자신들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라는 낯선 본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에게 낯설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헤겔의 '외적 필연성'을 자기 자신에게는 없는 '낯선 것'으로 다시 정의한다. 맑스의 정의에 따라 이제 시민사회는 국가의 외부에 놓여진다. 그리고 이 상이한 권력들의 활동은 헤겔의 '변화의 형식을 갖지 않는 변화'로서 국가화를 향한 관념적인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요구들이 생겨나고 낡은 것이 붕괴하는 실질적인 운동이 된다. 헤겔의 '점진적 이행'은 폐기된다. 맑스는 이 운동을 '혁명'이라고 말한다.
맑스가 독일의 때늦은 정치적 현실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재적인 두뇌의 역할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기괴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 눈은 저 멀리 프랑스 혁명이 무엇을 붕괴시켰는지(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 새로운 요구였다)를 볼 수 있는 망원경과 같은 눈이다. 다른 쪽 눈은 독일의 낡은 현실을 간파할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눈이다. 진정으로 기묘한 것은 이 두 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망원경으로 현미경을 보거나, 현미경으로 망원경을 보거나.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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