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적 비판
-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이종현/수유너머N 회원
청년 맑스는 1843년 3월에서 8월까지 『헤겔 법철학 비판』을 쓰고, 1843년 말에서 1844년 1월에 그 서문을 쓴다. ‘헤겔 법철학’이란 너무 거창하니 이 쪽글에서 함부로 다룰 수 없겠다. 그런데 ‘비판’이란 무엇일까? 칸트는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분석하고 고찰하는 데 ‘비판(Kritik)’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맑스의 서문에 나오는 ‘비판’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선동적이다.
독일 상황과의 투쟁에서 비판은 두뇌의 열정이 아니라 열정의 두뇌이다. 비판은 해부용 칼이 아니라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 반박하고자 하는 적이 아니라 절멸시키려 하는 적이다.(11) 1
칸트에게 ‘비판’의 대상은 이성의 능력을 하나하나 따져보는 차분한 것이었던 반면, 맑스의 ‘비판’은 상당히 섬뜩하다. 1840년대 독일의 상황이 바로 비판의 대상이다. 1840년대 독일은 어떠했을까? 1818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동맹이 체결되어 연방 내 국가들끼리는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보호무역제도가 확립되었고 국민경제의 이념이 대두되면서 독일의 민족의식은 고취되었다. 맑스는 이러한 상황을 “어느 날 아침 우리 독일의 면화 기사들과 철의 영웅들은 애국자로 변해 있었다.”(15)라고 비꼰다. 그러면서 이 ‘면화 기사들’과 ‘철의 영웅들’은 시장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독점이라는 이 문제적 상황을 맑스는 어떻게 비판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이 적을 단지 명철한 ‘두뇌’와 ‘해부용 칼’로 분석해서 ‘반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 적을 ‘절멸’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맑스에게 비판은 ‘육박전’이며, “이 육박전에서는 상대가 고상한지 대등한지 흥미로운 상대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이 중요하다.(12)” 그럼 맑스는 비판을 어떻게 활용해서 상대를 ‘넉다운’ 시키려는 것일까? 신기하게도 맑스는 1840년대 독일의 상황을 문학적 은유로 설명한다.
비극과 희극
구체제가 자신의 정당함을 믿었고 또 믿으려고 했던 한에서, 구체제의 역사는 비극적이었다. [...] 따라서 구체제의 몰락은 비극적이었다.(13)
구체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시골 융커들과 속물들의 무조건적 노예”(21) 상태를 정당화하는 체제다. 하지만 이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한 세계에서 시골 귀족인 ‘융커’들이 자신들의 우월함과 고귀함을 부르짖는 것은 비극적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세계와 어긋난다. 그는 세계의 정해진 움직임에 거슬러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펼쳐 보이며 그 힘이 소진될 때 장렬하게 전사한다. 강화된 자본주의 세계에서 쥐뿔도 없으면서 ‘자연적 신분’, 즉 귀족 계급만을 내세우는 융커들도 사라진다. 그런데 이 비극적 내러티브의 껍데기는 현대에서도 계속된다. 맑스는 이것을 ‘희극’이라고 규정한다.
현대의 구체제는 현실적인 주인공들이 죽어버린 세계 질서를 연기하는 희극배우일 뿐이다. 역사는 철저하고, 낡은 등장인물들을 무덤으로 보낼 때 많은 국면을 거쳐 간다. 세계사적 등장인물의 마지막 국면은 희극이다. [...] 역사의 진행은 왜 이러한가? 인류가 즐겁게 그들의 과거와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독일의 정치 세력들에게도 이 즐거운 역사적 숙명을 청구한다.(14)
신분을 따져서 인간을 규정하던 구체제의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이어진다. 구체제에서는 태생에 따라 신분과 계급을 구분했다면, ‘현대판 구체제’는 1840년대에 팽배했던 독점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자본의 축적에 따라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을 구성한다. 고전적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함량 미달인 자본가들이 구체제의 영웅들, 즉 융커의 흉내를 낸다니 상당히 웃긴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일련의 희극들에서 영웅과 철학자를 발정 난 남정네 또는 궤변가로 만들거나, 평범한 아저씨들이 자신을 영웅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맑스가 바라본 1840년대의 상황은 웃긴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정치 세력들에게 희극을 보다 더 재미있게 만들기를 요청한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상황은 아직 덜 웃기기 때문이다.
서사적인 부르주아
개인들뿐만 아니라 계급들의 독일적 도덕과 견실함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오히려 바로 저 겸손한 이기주의인데, 이는 자기 자신의 편협함을 주장하고 또 자신에 대해 주장을 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독일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의 관계는 모두 다 극적인 것이 아니라 서사적인 것이다.(25-26)
맑스는 독일의 상황이 아직 서사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왜 그것은 서사적일까? 독일의 여러 계급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지면서 상황에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그럴 권리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렇게 나섰을 때, 이익이 침해당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각 계급들은 자신의 방 안에 갇혀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서사시는 플롯이 빈약하며, 여기에는 잡다한 이야기들이 각자의 방을 지닌 채 들어간다. 소설이 뚜렷한 플롯을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들을 재배치한다면 서사시에서는 별의별것들이 느슨하게 망라되어 있다. 독일의 각 계급들은 다른 계급들의 이야기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별개의 것들로 존재하기에 맑스는 독일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서사적이라고 본다. 맑스는 이것을 ‘극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드라마의 본질
독일 민족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려면 그 민족이 자기 앞에서 경악하게 해야만 한다.(13)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극예술(drama)의 본질을 ‘행위(drao)’라고 정의한다. 그리스 비극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두면, 처음에는 인물이 한 명이었지만 이것은 그다지 극적 행위를 발생시키지 못하여 또 다른 한 명을 추가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인물의 수는 늘어났다. 그렇게 인물을 추가한 이유는 독백이란 재미가 없고, 인물들 간의 대화와 갈등이 재미와 함께 행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 역시 독일의 각 계급들이 독백을 멈추고 서로 부딪혀 행위를 만들어 내기를 바란다. 맑스는 아직 그 충돌과 갈등이 현실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철학을 통해 그들 간에 발생‘해야’ 하는 갈등의 극한을 보여주고자 한다. ‘면화 기사들과 철의 영웅들’이 벌이는 모습이 사실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이론적으로 폭로하고 그 코미디를 모두들 진지하게 여겼다는 점에 대해 ‘경악’하게 만들고자 한다. 상대방의 옳지 못한 점을 조목조목 따지는 비판보다는 상대방의 내적인 모순을 모두들 웃게 만들 수 있는 ‘희극적 비판’이 더 강력하지 않을까? 맑스라는 연출가가 그려내는 희극을 보고 한바탕 웃고 놀란 독일 민족은 웃음에서 심신의 힘을 회복하고 대단원을 향하는 새로운 극적 행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20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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