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 열기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투쟁 의미-
"최소한 영(0)의 수준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함께 연대투쟁을"
박 경 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장애인 이동권 투쟁으로 폭발적인 장애인들의 대중투쟁이 시작되었다. 2001년 장애인이동권투쟁으로부터 분출된 장애인운동은 그동안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구조를 폭로하고, 장애인이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해왔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2005년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고,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장애인등에대한특수교육법’이 만들어졌으며, 장애인활동보조가 시행되면서 장애인의 인권과 자립생활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장애인이 투쟁으로 만들어온 권리들을 빠르게 후퇴시켰다. 이명박 정권은 예산절감을 위해 장애인복지제도의 관리감독을 강화했는데,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다. 장애인연금법과 장애인활동지원법 모두 터무니없이 부족한 예산을 가지고 적은 복지를 나누려다 보니, 오히려 장애등급심사를 강화해 알량한 복지의 대상마저 잘라내는 공포정치를 펼친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도 마찬가지였다. 부양의무자 소득기준을 상향 조정해 빈곤의 사각지대를 줄이겠다던 정부는 오히려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벌여 민중을 벼랑에 내몰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이후 탄생한 박근혜 정부의 복지 슬로건은 '맞춤형 복지'였다. 새 정부가 출발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맞춤형’이라는 것이 ‘자본과 권력’에 입맛에 맞추어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폐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장애인인권과 자립의 새로운 패러다임
장애인운동의 과제는 장애인들의 생존권적인 요구뿐만 아니라, 장애인인권과 자립의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동정과 시혜로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장애인들의 삶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장애인운동이 요구하는 것은 장애인복지의 방향전환과 복지시스템의 근본적 개선이다.
이는 그동안의 장애인정책이 ‘불쌍한 장애인에 대한 동정과 시혜’라는 잔여적 복지와 차별적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복지의 목적과 방향이 언제나 ‘보호와 재활’이라는 의료적 영역에 갇혀 있었던 것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장애인을 시설 보호 또는 개인적 문제로 방치시키는 것이 아닌 개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구체적 지원체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동안 장애등급제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고 예산논리에 의한 폭력적 행정을 정당화시켜왔고, 부양의무제는 장애인의 자립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장애인의 삶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기능을 해왔다. 또한 의료적 기준의 획일적 복지제도는 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지의 사각지대를 만들어왔다.
10여 년 전부터 주창되어왔던 자립생활패러다임은 아직도 법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구체적 지원대책조차 없는 상태이다. 10년간 싸워서 만든 이동권과 교육권 관련법은 강제력이 없어 여전히 차별의 장벽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2012년 8월 21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빈곤사회연대 등의 단체가 연대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의 이름으로 두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광화문광장 해치마당 지하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농성투쟁을 시작했다. 그 투쟁은 10여 년간 치열한 투쟁을 경험으로 장애인운동의 역사적 과제인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로 대표되는 구시대적 장애인복지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인권과 자립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투쟁이다.
장애등급제는 무엇인가?
장애등급제는 1989년 장애등록제의 도입과 함께 시행된 것으로, 장애인을 신체적 기능손상 정도에 따라 1급에서 6급까지 등급으로 구분해 등록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제도 도입의 취지는 한정된 재원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서비스가 우선 필요한 중증장애인을 선별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되어왔다.
그동안 장애인에 대한 각종 감면·할인제도 등 간접 소득보장제도에서부터 활동지원과 장애인연금, 특별교통수단 이용 등 직접적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장애등급은 장애인에 대한 복지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서비스가 필요한 개인에게 장애등급이란 실로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2010년 정부가 장애등급심사를 강행하면서, 장애등급제는 장애인계의 최대 쟁점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장애인복지제도가 확대됨에 따라 정부는 ‘장애등급심사제도’를 만들어 장애등급제를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장애등급제가 유지되는 한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그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미 신체의 기능과 손상의 정도로 구분된 장애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장애인이란 결국 ‘몇 점짜리의 몸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이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또한 장애등급제가 유지되는 한 장애인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는 권리로서 보장되지 못하고, 행정편의주의적 획일적 서비스에 장애인이 맞추어 살아가도록 강요당하는 현실이 지속되고, 등급기준을 개정하여 예산을 절감하는 공포정치의 가능성은 항시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가족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아래 기초법)이 시행된 지 13년이 지났다. 국민의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이어야 할 기초법은, 법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제도의 수급자보다 더 많은 사각지대를 만들어놓고 있다. 빈곤층임에도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지 못해 사각지대에 방치된 사람들은 410만 명으로 전 인구의 약 8.4%나 되며, 이는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인구의 2.5배가 넘는다.
2010년 말 장애인 자녀를 둔 아버지의 자살 사건, 지난해 새해 벽두에 동반 자살한 60대 수급자 노부부의 사연, 지난해 여름 정부의 부양의무자 일제조사과정에서의 노인들의 잇따른 자살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빈곤 사각지대로 말미암은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양상이다. 그러나 기초법의 비현실적 규제로 수급자 수는 3% 수준에서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축소되고 있으며, 최저생계비의 수준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2012년 기준 최저생계비는 1인가구 기준 55만 원 남짓이며, 그나마 현금으로 지급받는 급여는 45만 원 수준이다. 평균소득과 비교하면 30%밖에 안 된다. 하지만 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아프거나, 소득활동을 하기 어려운 이들에게는 이 낮은 최저생계비마저도 절박한 목숨줄과도 같다. 낮은 최저생계비 문제, 노동능력 여부를 심사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비인간적인 잣대와 일선 행정의 팍팍함 등 개선되어야 할 과제들이 숱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낳고 있는 것이 바로 부양의무자 기준이다.
우리는 가난의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양산하는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할 것을 보건복지부에 끊임없이 요구하였지만, 복지부는 가족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복지예산의 증가이다. 오히려 부양의무제는 가족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있는 현실이다.
2005년 보건사회연구원 조사를 보면 수급권 탈락 사유의 약 25%가 부양의무자 기준에 의한 것이지만, 절반 이상이 ‘부양의무자’로부터 사적이전소득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9년 <기초생활보장권리찾기행동>과 곽정숙 의원이 공동으로 시행한 '기초생활보장 수급가구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신청탈락가구의 경우 부양의무자기준으로 탈락한 사례(43%)가 가장 많았다. 이어 소득기준(23.8%)과 재산기준(19.0%)으로 탈락했다. 한편 중도탈락한 가구는 본인가구의 소득증가 때문인 경우가 가장 많았고(50.0%) 이어 부양의무자가구의 소득 혹은 재산의 증가로 탈락한 사례가(22.2%) 뒤를 이었다. 수급탈락의 사유 중 부양의무자기준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빈곤에 대한 부양의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빈곤한 사람은 ‘정부’에서 일차적으로 부양해야 한다는 의견이 74%가 넘어서고 있음에도 여전히 복지부는 국민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이유를 내세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자체는 대표적인 잔여적 복지 제도이다. 기초법의 핵심적인 문제가 부양의무제 폐지와 최저생계비 현실화 문제인데, 그 중 부양의무제 폐지는 복지가 ‘가족’의 책임에서 ‘국가’의 책임으로 이전시키는 핵심적인 고리이며, 복지패러다임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과제이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는 장애인들에게 2열 종대 선착순 복지의 굴종을 강요하는 낡은 기준이다.
이 두 가지 기준을 폐지하기 위한 투쟁이 현재 광화문광장 지하도에서 450여 일 넘게 진행되고 있다. 긴 세월을 견디며 투쟁하는 것은 지치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견디는 만큼 전진하리라는 것을 안다.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은 현재 기준에서 마이너스(-)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투쟁하는 만큼 삶은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이너스(-)의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당하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 영(0)의 수준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함께 연대투쟁을 제안한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는 마침내 폐지될 것이다.
* 이 글은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에 기재되었던 글입니다.
<사진으로 보는 광화문 농성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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