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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_420 장애인차별 철폐투쟁] 사회적 장애인이 없는 사회를 위해!


 



사회적 장애인이 없는 사회를 위해!

화요토론회 후기 '나의 장애 운동 이야기-장애등급제를 중심으로'





지안/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지난 3월 25일 수유너머 N 화요토론회에서 박경석 교장쌤과 학인들.





신체적 손상과 사회적 장애


화요토론회(이하 화토)를 듣다보면 유독 반응이 뜨거운 날이 있는데, 이번 화토가 그런 날이었다. 이 날의 발표자는 노들야학 교장선생님이신 박경석 선생님이었고, 주제는 ‘나의 장애 운동 이야기-장애 등급제를 중심으로’였다. 나는 평소에 장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크게 없었다. 그건 나에게 장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장애가 뭘까? 박경석 선생님에 따르면 장애란 “신체적 손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손상이 곧 장애는 아니다. “손상의 정도에 따라 판별을 한 뒤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신체적 손상을 경험한다. 감기에 걸리거나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손상이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손상을 장애로 판단하는 기준이 따로 있다. 장애인의 사전적 정의는 “신체의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는 사람”이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신체의 손상이 바로 장애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생활에 제약이 될 때 ‘장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들이 신체적 손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들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설 수 없게 만드는 사회가 장애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이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체적 장애가 사회적인 장애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가령 하반신 마비는 신체적 손상이지만, 그가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끔 사회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 때 그는 집안에서 복지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사회적 ‘장애인’이 된다. 따라서 복지는 장애인이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박경석 선생님은 서비스에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다. 직접 서비스와 간접 서비스다. 간접 서비스가 지하철 무료이용 혜택이나 복지관에서의 재활훈련 같은 것들로 이루어졌다면 직접 서비스는 활동 보조 서비스와 같이 장애인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서비스다. 즉 간접 서비스가 개별 장애인들을 고려하지 않은 복지라면 직접 서비스는 그것을 고려한 복지다. 간접 서비스도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장애인들에게 직접 서비스가 중요한 것은 이 서비스를 통해 장애인들이 자신의 생활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장애등급제는 왜 문제가 될까? 박경석 선생님이 화토에서 지적한 것은 첫 번째로 장애등급제가 개개의 다른 장애를 가진 ‘장애인의 몸’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등급을 통해서만 행정편의적인 발상으로 복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박경석 선생님은 소수자의 이름 앞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현재 장애인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에게 여성의 미모를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거나 노인의 나이 듦을 기준으로 등급이 매겨지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하셨다. "노인 3등급 혹은 여성 2등급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말을 듣고 옆에 앉은 누군가 ‘확 꽂히는 데?’라며 웃었다. 누구도 자신의 존재가 등급이 매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텐데, 왜 우리는 장애등급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제껏 사회는 장애인을 관리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지를 전달하기 위해 장애등급제와 같은 법이 생겼을 것이다. 앞서 신체적 손상 자체가 장애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사회가 장애인을 만든다고 했다. 그들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은 장애인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어떻게 그들이 잘 “사회생활”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복지가 마련된다면 장애인들은 단순히 복지를 제공 받기만 하는 관리 대상이 아닌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적극적인 구성원이 될 것이다. 




“장애등급제는 사회적 관계를 무시한 행정편의적인 법입니다.” (화요토론회 박경석 선생님 발표 중)



사회적 장애를 넘어서는 사회


이런 측면에서 장애인 이동권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든 이동을 해야지 자기 생활을 만들 텐데, 현재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는 권리는 현재 투쟁의 대상일 만큼 보장되어 있지 않다. 생색내기 식으로만 운영되고 있는 저상버스 역시 장애인들의 지하철 연착 투쟁이나 버스타기 투쟁을 통해서 겨우 마련된 것이다. 버스나 지하철 시간표는 장애인 대중들을 철저히 배제하고서 배치되어 있다. 애초에 장애인이 버스타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인이 버스를 타려고 했을 때 이들은 시간을 지연시키는 장애물이 된다. 이것은 장애인의 몸, 신체적인 손상의 문제가 아니라 손상을 사회적 장애로 만들어버리는 시스템의 문제일 것이다. 만약 저상버스가 많아진다면, 모든 버스가 다 저상버스라면 하반신 마비 장애인의 신체적 손상은 이동하는 데 있어 장애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대중에 포함시켜서 버스 구조를 만들고, 버스 시간표를 배치하라는, 즉 사회를 다시 구성하라는 장애인들의 요구는 지당하게 보인다. 4/20일은 달력에 장애인의 날이라고 나와 있으나 장애인 차별 철폐 투쟁의 날이다. 장애인의 날에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에 대한 어떤 동정 어린 관심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할지 모르겠으나 장애인들은 장애인의 날을 거부한다. 이들은 동정이나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당신의 일상을 막고서 함께 살자고 요구하는 투쟁을 벌일 사람들이다. 버스 타고, 밥을 먹고 살아가고 싶은데 그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의 부당한 접근 제한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들이다. 이번 4/20일 장애인 차별 철폐 투쟁의 날에는 희망의 고속버스타기 투쟁을 한다. 고속버스는 구조 상 장애인들이 탑승조차 할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장애인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려면 장애인 콜택시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한 것이다.


이들이 쉽게 버스를 탈 수 있고, 활동 보조 서비스를 통해 생활을 만들어갈 때 복지 수혜자로서의 장애인이 아니라 자기 생활을 만들 수 있는 주체가 될 것이다. 따라서 관리 대상에 머무르게 만드는 장애등급제의 복지가 아니라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신체적 손상이 사회적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란 지금 희망의 대상이다. 장애인들은 그 희망을 향해 투쟁하려 한다

4/20일에 함께 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