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강 다섯 번째 강의





녹취 및 정리: 황호연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는 총 5회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강 한 강이 한 편의 글이 되기에는 매우 긴 편이라, 독자분들이 보기 편하시도록 세분하여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이번 글은 정화스님 강좌 4강의 다섯 번째 부분임을 알려드립니다. 그 전의 강의는 이 웹진의 지난 글을 확인해주세요.
















*정화 스님께서 강의 교재로 사용하신 책은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백석현 옮김, 야그 출판사, 2007년)입니다. 현재 절판되었고, 이 책을 개정해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있습니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박성현 옮김, 심볼리쿠스 출판사, 2012년)입니다.

*강의를 직접 들으신 분들은 Ⅰ.『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와 Ⅱ.『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 니체편집위원회 감수, 책세상 출판사, 2000년), 그리고 그 외 번역본들 중 편한 것을 참고하셨습니다.

*녹취록에서는 강의 중에 언급된 위 책 두 권(Ⅰ,Ⅱ)의 해당 부분을 스님이 말씀 하신 것을 참조하여 재구성해서 옮깁니다. 페이지 표시는 가독성을 위해 옮긴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하였습니다.

* 페이지 표시의 예: Ⅰ번 책의 36쪽, Ⅱ번 책의 38쪽은 아래와 같이 표기합니다. -> (Ⅰ:36, Ⅱ:38)






[4강의 책 범위| Ⅰ번 책:87~104쪽, Ⅱ번 책:89~107쪽]



(42부 시작)

 

이어서 , 그리고 한개의 목표장을 계속 하겠습니다. 개인이라는 사건이 가치평가를 통해서 창조주가 되는 사회가 있었다면 요즘은 조금 달라져서 대중이라는 네트워크가 하나의 창조주가 되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전에는 책에서 말하는 대로 인민이 창조자였고, 개인이 창조자가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인데, 유럽에서 개인이라는 존재가 한 개체로서 우뚝 선 것이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세계에 대한 폭이 옛날과는 달리 엄청 가까워지면서 멀어진 그런 상태지요. 전자제품의 네트워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축이 많이 달라져있습니다. 예를 들어 근 10년 사이에 형성된 모든 인류의 지적 정보는 아마 다른 세기에 만들어진 지적 정보보다 훨씬 많고, 하루하루 만들어지는 정보는 앞으로 어떤 사람도 절대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질 겁니다. 요즘 전 세계에서 하루에 만들어진 지적 정보량을 우리가 음악을 듣는 CD에 담아서 그 CD를 쭉 늘어놓으면 달까지 갔다가 다시 왔다가 다시 달까지 갈만큼 양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어떤 사람도 그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다 파악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지적인 정보를 닦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고독자로서 홀로, 그것을 다른 양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굉장히 필요한 체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혼자 이뤄지는 일이 아니고 다중을 통해서 함께 이뤄지는 일들입니다. 이렇듯 개인과 다중이 다른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가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적 정보의 전환과 다중이 가지고 있는 지적 정보의 융합은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데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전까지 우리 사회를 규정지었던 선과 악, 찬양과 비난의 가치판단은 어떤 의미에서는 별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려놓으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그런 사람들을 괴물들이라고 부릅니다. 선과 악, 칭찬과 비난의 가치체계를 온전히 손에 쥐고서 내려놓지 않으려는 그런 힘과, 개인과 다중이 공모해서 새로운 가치체계를 끊임없이 창조해가는 그런 힘들이 지금 부딪히고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의 시대에도 니체가 봤을 때 우리 목에 걸려있는 괴물이 만들어놓은 그런 목줄을 치워낼 사람이 필요한데, 오늘날은 그런 게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 목이 천개나 달려있는 이 괴물의 목에 목줄을 걸 사람이 누군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쌓여있는 모든 삶의 정보들을 통틀어서 새로운 것을 창발적으로 만드는 능력을 길러낸 것이야말로 삶의 다른 가치체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이처럼 세계가 굉장히 네트워크화 돼있으면서 우리 생각조차도 알게 모르게 지배하는 힘들이 너무나 강력해서 나는 그런 것에 의해 전혀 지배받지 않고 목에 맨 밧줄에 끌려 다니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틈에 그런 일이 자기에게 벌어지는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그런 것을 잘 살펴서 다른 목표를 잘 설정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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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보기에 사람들은 많은 가치평가와 찬양과 비난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한 가지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인류를 위한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류라는 것은 다만 사람만을 뜻해서는 도대체 해당되지 않겠습니다.


우리 지구상에서 지금과 같은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5억 년 전에 지구상에 무성했던 시아노 박테리아가 산소를 만들어내는 획기적인 사건으로부터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산소라는 독특한 원소가 지구상에 풍부해져 지구에 변화를 일으키게 됐고, 그것에 의해 지구의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점점 다른 생명체들이 나오는 그런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류를 위한 목표가 아니고 생태계 전반을 조화롭게 만드는 목표가 설정되지 않는다면 인류조차 살기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 우리는 이웃 사랑을 굉장히 변호합니다. 그런데 니체는 너 정말 이웃사랑, 제대로 알아?'라고 묻고 있습니다.(:97, :100) 모든 사람들을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이때 자유는 니체가 봤을 때 ‘~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늘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존재의 이유가 되는 사람이야말로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요. 공부 잘하는 사람을 원하는 학교에서는, 학생은 학교가 원하는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맞춥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면 굉장히 잘 사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스스로가 삶의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남편에게 칭찬받는 아내는, 아내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존재의 이유가 없습니다. 남편의 칭찬이 없어지는 순간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다고 하게 됩니다. 반대로 아내에게 칭찬받는 남편이 되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통해서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한 것처럼 보여도, 다시 자신을 구속하고 그것이 상대를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자유롭지 못한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가 존재의 이유가 되는 사람이야말로 다른 사람도 그 삶 자체로서 존재 이유가 되게 만들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이 온전히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관이 자유자재한 사람이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공에 대한 대표적인 경전 중 하나인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라는 사람을 앞에 등장시켜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할 때 이 보살이라는 것은 각유정'이라고 부릅니다. ‘깨달은 유정입니다. 유정이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입니다. 이때 인식 분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유정은) 이 감정이 무엇인가 잘 살펴 알 수 있고, 인식이 무엇인가를 잘 살펴 알아서 그것이 자기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힘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온전히 존재의 이유가 되는 사람이야말로 그러한 것인데, 그때 자신에게 묻는 것이지요. ‘마음이 무엇인가?'라고 봤더니 마음의 활동, 마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외우고 있어도 결국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라고 내부로 시선을 돌리니까, 마음 또한 마음의 외부가 없으면 마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부는 더더구나 마음과 더불어서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외부가 됩니다. 따라서 그 자체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의 흐름과 인식 분별의 내용을 명징하게 들여다보고, 들어가보면서 자기 스스로가 온전히 존재의 이유가 될 때, 오히려 자신은 마음에도 걸리지 않고 이미지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고 이타적으로 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타적이라는 것이 사실상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모든 생명체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으로 산다고 해서 아무도 '나는 삶을 뭔가 잘못 살았어.'라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기적인 삶을 살 때 어떤 것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이로움인가?’ 하는 것을 잘 살피지 않으면 이롭게 살았다고는 했는데 그것이 전혀 이롭지 않는 일들이 많게 됩니다. 아까 어린아이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부모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온전히 이롭게 한 이타적 행위를 충실히 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아기에 대해서도 정확히 잘 모르고 있고, 내 행위 자체가 정말로 이타적인 줄을 잘 모를 때, 나는 온전히 이타적으로 살았는데 나중에 살아보니까 아 부모님 왜 저한테 그랬어요?'라고 말을 듣게 되면 아마 황당한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이타적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자기 내부에 다른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의 수단으로 등장하게 되면 형태성으로 보면 이타적인 내용일지라도 근본적으로 보면 자기 자신도 이롭지 않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상태를 명징하게 살피는 감정과 인식 분별의 내용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은 이 사회의 만들어진 모든 가치체계에 의해 물들지 않고 온전히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이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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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반대로 여기서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사람은 나를 알기 전에 너를 먼저 알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린 아이를 보면 이 말이 분명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보니까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나면 다른 여러 신체 조건에 의해 눈이 확실히 잘 안보이기는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말이 저에겐 훨씬 와 닿았습니다.


병아리가 태어났을 때 옆에 기차가 이렇게 돌아갑니다. 어미를 숨기고, 병아리를 놓아두고 기차가 돌아가면 병아리의 눈이 기차를 완벽하게 구별합니다. 그때부터는 장난감 기차가 엄마가 됩니다. 새끼 오리를 사람이 잘 부화시켜서 보면 그때부터는 사람이 자신의 부모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새끼 오리들은 태어나자마자 항상 부모가 옆에 있는 것이 자기를 키워주는 생존의 개연인건데 사람은 좀 그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때 바로 눈에 띈 것을 자기 엄마로 알면 의사나 간호사를 자기 엄마로 착각해서 이제 그것을 엄마로 구별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다가 계속해서 엄마아빠의 냄새나 이야기를 잘 듣게 되면 어느 세월이 지난 다음에 아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삶을 책임져 줄 사람이구나.'하는 느낌이 일어날 때 눈이 확 깨어서 자기 엄마아빠의 얼굴을 구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때 누구를 먼저 알았습니까? 나를 알기 전에 엄마아빠를 먼저 알았습니다.


이때 엄마아빠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에, 자식은 엄마아빠를 완전하고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니까 엄마아빠가 완전한 신성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아온 과정 중에서 그런 분들을 아주 신성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고의 이미지가 깨어진 자리에 추상적으로 신의 존재를 만들어 냈습니다. 따라서 의식이 보편적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는 한, 완성된 분별의 이미지와 그 분별의 이미지의 영원성이 결합되어 신과 같은 사유 영역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실상 이것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 잘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도 잘 알지 못하고 이웃도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행위이지만 본질적으로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인 행위도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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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니체는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더 숭고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머나먼 곳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머나먼 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방금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를 알기 전에 너를 먼저 알았습니다. , 내가 가장 늦게 아는 것은 자신입니다. 앎에 있어서 가장 머나먼 존재는 이웃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책에서 말은 머나먼 곳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는데,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이전에 우리는 너를 알고, 그리고 나를 너에게 맡겨왔기 때문에 나를 억압합니다. 억압했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이웃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도 사랑하지 못했다고 즉, 숭고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의 존재의 이유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어서 숭고한 것은 먼 훗날 태어날 사람에 대한 사랑이지.'라고 합니다. 이때 먼 훗날은 내일이나 그 이후에 태어날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살아가면서도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늦게 알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주 뒷날 태어나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더군다나 이와 같은 일들은 그냥 그 시대에만 그치는 게 아니고, 다른 양상으로 계속해서 후대에 영향을 줍니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는 DNA등등의 유전물질을 전해주지만 문화적으로는 그 시대의 다른 연결을 끼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문화적 양상은 공진화라고 해서, 다른 것도 비슷합니다만,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무언가 이미지가 갑자기 그런 식으로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 하기로 축의 시대라고 해서 2500년에서 2천 년 사이에 인류의 지적 성장이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먼 훗날을 위한 사랑이라는 것은 필요한 시기에 완전히 지적 축을 다른 식으로 바꿔낼 수 있는 문화적인 양상을 함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더 숭고한 것은 일이나 사물에 대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만났을 때 굉장히 추상적인 일들에 비춰서 일대일 대응 관계를 넘어서서 너는 무엇으로 존재해야하고 어떻게 일해야 한다는 사전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물과 일 속에는 내가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요구만 일어나는 것이고 이것을 내가 어떤 식으로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충족되는 일이 훨씬 줄어듭니다. 따라서 자기 욕망을 잘 보게 되면 일이나 사물에 대한 것을 온전히 자기 일로 하고 있게 됩니다. 반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기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일이 아닌, 이 사람의 눈에 비춰진 자기가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져서, 이때 사랑한다는 것은 별로 숭고하지 않는 상황이 되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일이나 사물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꿈꾸는 것(환영)을 사랑하십시오.'라고 합니다. 꿈이야말로 이뤄지지 않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환영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현존의 자기로서는 가장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만일 그것이 꿈이 아니라면 이미 현실적으로 드러난 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신의 현재적 상황으로 드러나는 일이 아니지요. 따라서 숭고한 일은 자기 자신의 일로서 존재하고 있는 꿈을 그대로 사랑하는 일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욕망의 끼어듦이 훨씬 덜한 일과 사물에 대한 접근성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장 멀리 있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면서 얻은 배경을 공진화를 통해서 사회적 양상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무엇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했지요? 이기적이라는 것은 어느 것이 이기적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기적이라는 것이 너도 이롭고 나도 이로운 쪽으로 가게 하는 것이 그 시대적 평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시대적 평판은 자신을 그 시대의 군중과 더불어 발을 맞춰서 적당한 양상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배경도 되긴 하지만, 나중에 오래되면 평판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 양상을 규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평판을 따르거나 평판을 따르지 않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면밀한 관을 하지 않으면, 굉장히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정작 자신에게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점점 멀어지는 사람은 실제로 이웃 사랑조차도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받는다는 입장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평판을 통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일들이 형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요. ‘누가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분은 '나는 일생동안 괴로워하겠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를 구속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사랑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내는 데 그치는 것, 그 이외의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제로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뭐하고 있어?'라고 하면 실제 나도 사랑을 못했고, 너로부터의 사랑은 기약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들은 평생 이뤄지지 않을 확률이 99.99%정도가 됩니다.


따라서 평판을 너무 따를 것도 없고 너무나 이타적일 것도 없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살펴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은 자기 자신을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나를 가장 잘 알아.'라고 연속극에서 나오는 말을 하시는 분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거짓말은 이웃들과 사귈 때 자기 스스로 모르는 자신에 대해 마구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나는 이래.'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가장 완벽하고 지독한 거짓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온전하니 절대 무의 상태를 경험하지 않으면, 또는 누군가가 나에게 망치로 자기의 사유 체계를 완벽하게 뒤흔드는 일들이 내부적으로 발생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모르는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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