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코너는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진경




얼마전 출간된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입니다. 여러 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2. 호칭의 문제와 인정욕망: <홍길동전>


<홍길동전>에서 가장 중심되는 테마는 이름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호칭의 문제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어린 홍길동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그가 집을 나가게 하는 것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설움 내지 한입니다. 뿐만 아니라 활빈당이라는 도적떼의 무리를 이용해 소란을 일으키고, 여덟 명의 가짜 홍길동을 만들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도 모두 이 한 때문입니다. 가족의 안위에 대한 위협으로 홍길동을 잡으러 경상감사로 파견된 형을 찾아가 하는 말도, 여덟 명의 홍길동이 동시에 잡혀가 임금 앞에 앉아 고하는 말도 똑같습니다. “신이 본디 천비 소생이라, 그 아비를 아비라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 하오니, 평생 한이 맺혔기에 집을 버리고 도덕이 무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홍길동전』, 42)[각주:1] 


이 말은 활빈당의 이름으로 행했던 ‘의적질’도, 관리와 임금을 농락한 둔갑술도 모두 아비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하는 호칭의 문제 때문이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사고를 치는’ 부정적 행위 뿐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아가서 율도국을 얻는 ‘긍정적’ 행위에서도, 그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일관되고 강력한 동기였음을 나중에 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텍스트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호칭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호칭의 문제란 이름을 부르는 방식의 문제고, 이름이라는 기표(signifiant)를 다루는 문제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간단히 몇 개의 개념을 설명하자면, ‘기표’란 쓰여지고 말해지고 표시되는 기호를 뜻합니다. 대쌍개념은 그 기호의 의미를 뜻하는 기의(singnifié)입니다(기표라고 번역된 단어 signifiant은 ‘의미하다’를 뜻하는 동사 signifier의 현재분사형이고, signifié는 그것의 과거분사형입니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는 기호의 두 측면이라고 보며,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 봅니다. 즉 기표는 그것이 지칭하는 지시체(referent)와 무관하게 선택되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표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기표와의 관계인데, 일단 정해져서 사용되기 시작하면 사회적 힘을 갖습니다. 누구도 그 정해진 바에 따라 써야 한다는 강제력을. 이런 강제력을 라캉은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명명합니다. 물질성을 갖는 기표들의 연쇄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기표를 그는 ‘남근적 기표’라고 합니다. 모든 기표의 의미나 의미작용의 중심에 있는 ‘주인’이기에 ‘주인기표’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기표의 의미작용은 ‘주인기표’인 ‘남근(phallus)’을 통해 직조되는 기표들의 연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나 국가 안에서의 ‘왕’이 그런 주인기표라는 건 쉽게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페르디낭 드 소쉬르. By "F. Jullien Genève", maybe Frank-Henri Jullien (1882–1938) - Indogermanisches Jahrbuch,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9173509



<홍길동전>에서 결정적인 위상을 갖는 것은 아버지나 왕이라는 ‘큰 타자(Autre, the Other)’[각주:2] 혹은 그것을 표시하는 ‘주인기표’입니다. 가령 홍길동은 어미를 어미라 부르지 못하는 일은 없었고, 부친 홍판서의 부인을 어미라 부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주인기표는 아버지와 형이라는 남성적이고 가부장적 선을 따라 이어져 있고, 이 선의 근원에는 ‘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이 주인기표의 요체임을 뜻하기 하고, 아버지가 바로 ‘왕인 기표’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른다 함은 제대로 된 아들로 ‘인정’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라 못 부르는 겁니다. ‘어르신’이라 부르겠지요. 호부호형의 욕망은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으려는 욕망입니다. 아버지를 향한 호부호형의 욕망은, 아버지 뒤에 있는 왕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올라갑니다. 왕의 인정을 구하고, 결국 왕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왕이 인정해주는 기표(‘병조판서’)를 구하고, 결국 ‘왕’이라는 기표를 얻고자 하는 것, 이것이 홍길동을 이끌어가는 욕망이지요.


홍길동이 아비를 아비라 부를 수 없다함은 아비와 형을 잇는 가부장적 기표들로 직조되는 기호들의 망 속에서 좋은 ‘기표’를 갖지 못함을 뜻합니다. ‘아버지’라는 좋은 기표를 갖는다(사용한다)는 말은 ‘아들’이란 기표를 갖는 것을 뜻합니다. 그걸 갖지 못함은 ‘아랫것’이란 기표를 갖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좋은 호칭으로 표시되는 좋은 자리를 갖지 못함을 뜻하지요. 양반가문의 가족관계 안에 자리를 갖지 못함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사실 호칭의 문제는 단지 호칭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즉 그저 기호나 이름을 입으로 말하고 소리내는 문제만이 아니란 겁니다. 집을 떠날 때 홍판서는 길동에게 “오늘부터 호부호형을 허락하노라”라고 말하고, 길동은 “소자의 지극한 한을 풀어주시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26) 답하지만, 그건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서자로서의 신분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집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길동은 그 후에도 소란을 일으키곤 형이나 임금 앞에 잡혀가서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반복하여 하소연하는 겁니다.


앞에서도 말한 적 있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친족 체계를 ‘호칭의 체계’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 이모, 조카 등의 호칭은 가족관계 안에서 그 호칭을 사용한 이와 호칭으로 명명된 이의 관계를 표시합니다. 그 호칭은 개인의 선호에 따라 좌우되지 않으며, 개인의 탄생 이전에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할지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사용하도록 강제됩니다. 이를 ‘호칭의 물질성’이라고 한다면, 이 물질성(강제성)이란 사실 ‘물질’이 아니라 친족관계, 사회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 그 사회적 관계의 강제고, 그 사회적 관계 안에 명확한 자리를 갖지 못함에서 오는 제약입니다. 그렇기에 홍판서는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한을 듣고 길동의 처지가 측은히 여기지만 “재상가 천비 소생이 비난 너뿐이 아니거든, 네 어찌 방자함이 이와 같으냐? 앞으로 다시 이런 말을 하면 눈앞에 두지 않으리라”(18) 꾸짖습니다. “위로하면 마음이 방자해질까 걱정”하여 그랬다고 하는데, 그것의 실질적 의미는 자신이 그를 위로하고 심지어 호부호형을 허락하더라도, 가족 바깥의 세계에선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그 경우 그 설움이 바깥 사회에 대한 ‘방자함’으로 나아갈까 걱정했던 것일 겁니다.


어떤 기표를 갖는다는 것, 즉 어떤 호칭으로 불리고 어떤 호칭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런 기표로 표시되는 ‘주체’가 됨을 뜻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적자(嫡子)로 주체화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적자로 주체화되지 못합니다. 아들이지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즉 아버지에게서도 제대로 된 아들 대우를 받지 못하는 주체, 서자라는 나쁜 주체가 됨을 뜻합니다. 서자의 자리는 강제적이고 ‘물질성’을 갖지요. 안 그러면 누가 그 나쁜 주체의 자리를 받아들이겠어요. 천민이나 평민 같은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길 그런 걸 어쩌겠어’라는 포기가 그런 주체의 자리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나 홍길동처럼 양반의 피와 천민의 피가 섞인 경우, 천민임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습니다. 하여 양반의 자리를 욕망하고 그걸 표시하는 기표를 요구하지만,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길동은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가 되는데 실패합니다. 반쪽이지만 양반의 피을 받은 데다 뛰어난 재능마저 타고 났기에, ‘귀함이 없는’ 자리에서 행해지는 주체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란의 개입이 있기 이전에 이미 모친에게 남의 천대를 받는 것은 당치 않다며 “어머님 슬하를 떠나려 하옵니다”고 고합니다. 천한 주체 말고는 허용되지 않는 가족을 떠나려는 것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홍길동전 / 사진출처: By Heo Gyun (d. 1618) - [1],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2293



이는 역으로 홍판서의 가족이 길동을 자신들이 할당한 자리에서 주체화하는데 실패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홍판서의 첩인 초란이 개입하여, 주체화를 교란하는 이 간극을 확대하고, 이를 계기로 길동은 집을 떠나게 됩니다. 가족이나 신분 같은 틀을 벗어난 삶을 향해 떠나버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흔히 ‘은둔’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이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길동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좋은 기표에 대한 욕망, 좋은 주체의 자리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그 기표의 가치에 강하게 매여 있었던 것이겠지요. 집을 떠나서도 귀한 주체의 자리에 대한 욕망에 매여 있었기에 아버지나 왕이라는 주인기표로 반복하여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주어진 주체의 자리를 거부하는 길동의 주체화는 새로운 탈주선을 그리며 시작하는 탈기표적인 주체화가 아니라, 아무리 멀어져도 주인기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표적인 주체화에 머물고 맙니다.[각주:3]


아비를 아비라 못하는 길동의 한(恨)은 아들이면서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는 설움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자리가 갖는 양가성(兩價性)에 기인합니다. 그는 양반의 아들이지만, 양반의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양반의 아들인 동시에, 천민의 신분인 노비의 아들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정체성(identity)’은 모호합니다. 양반도 아니고 천민도 아닌, 뚜렷한 위상을 갖지 못하는 불안정한 정체성. 여기서 그가 호부호형을 욕망한다 함은, 단지 아버지나 형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인 지위에서, 양반의 아들로 인정받고자 욕망함을 뜻하고, 그 불안정하고 모호한 정체성을 양반의 자식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으로 고정하고자 욕망함을 뜻합니다. 


길동이 호부호형을 그토록 욕망하는 것은 그를 양반의 신분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천한 신분이 아니라 귀한 신분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만물을 내심에 오직 사람이 귀하오나, 소인에게 이르러서는 귀함이 없사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18) 모친에게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소자 팔자가 기박하여 천한 몸이 되오니 품은 한이 깊사옵니다.”(19) 길동이 임금을 만나서도 호부호형 못하는 한을 반복하여 호소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는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동이 병조판서를 실제로 할 뜻도 없으면서도 굳이 병조판서를 시켜주면 소란을 중지하겠다고 강변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병조판서라는 호칭을 얻는다는 것은 사회적 인정을 얻음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호부호형을 허한다고 해도 실은 해결되지 않는 것을 왕에게 호소하여 해결하는 것이지요. 이게 길동이 반복하여 왕에게 다가가고, 반복하여 호부호형 못하는 한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1. 이하에서 분석의 중심은 경판30장본으로, 문학동네의 번역본을 인용합니다. 완판36장본과 동양문고본을 언급하기도 할 텐데, 완판본과 동양문고본은 글솟대에서 나온 『홍길동전 전집』에 있는 것을 인용합니다(완판본은 65~80, 동양문고본은 154~171). 특별한 표시가 없이 숫자만 표시한 것은 모두 경판본의 인용입니다. [본문으로]
  2. 큰 타자(대문자 타자 Autre)란 아버지나 왕, 법, 규범 등 나를 둘러싸고 나의 욕망이나 행동을 규정하는, 나 아닌 ‘타자’들을 지칭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나의 욕망이란 엄마로부터 ‘남근’으로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망’이고, 바로 그렇기에 아버지에 동일시하게 만드는 욕망입니다. 즉 이러면 엄마/아빠가 좋아할 거야 하며 그걸 욕망하는 겁니다. 그걸 자신의 욕망이라고 오인하는 거지요. 공부 잘 하는 것, 돈을 잘 버는 것, 명예를 얻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이는 엄마/아빠의 욕망일 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이 제시하는 욕망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나의 욕망을 규정하는 엄마/아빠나 법, 규범 등을 ‘큰 타자’라고 합니다. 나의 욕망이란 이런 타자의 인정을 구하는 인정욕망이고,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된 타자의 욕망입니다. [본문으로]
  3. 기표적 주체화와 탈기표적 주체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Deleuze/Guattari(2000) 5장 및 이진경(2002) 5장 참조. [본문으로]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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