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의 향기로서의 사랑
담연(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1 모를 뿐
장자의 덕이 무엇인지 말해보라면 나는 사랑이 떠오른다. 새벽 호숫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피어오르는 물안개 같은 그런 사랑. 물론 사랑(愛)이라는 단어는 인(仁)과 더불어 유가가 선점해버린 어휘여서 장자는 덕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덕을 지닌 장자의 이상적 인간들(眞人)이 모두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며 살았다고 본다. 다만 표현이 매우 수동적이고 은밀하며 은유적이어서 사랑받는 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뿐이다. ‘모를 뿐.’ 어쩌면 장자는 이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알 듯 모를 듯한 이 사랑을 장자는 어떤 어휘로 표현했을까?
2 솔직한 마음 살이
다산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덕(德)이라는 글자를 行 + 直 + 心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덕이란 사람이 무언가를 할 때 미리 재거나 계산하는 일없이 툭 튀어나오는 ‘솔직한(直) 마음(心)을 따른다(行)’는 의미다. 여기서 솔직한 마음이란 선한 도덕적 본성이 아니라 충동적 욕망에 가깝다. 이렇게 계산없이 솔직한 마음을 따라 살다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 내면에 어떤 힘이 생기는데 장자는 이것을 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말이 쉽지 솔직한 삶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의 평가나 사회적 가치관을 따르기보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진심도 알기 어려운 데 그대로 산다고? 그러다가는 남에게 문제아나 반항아, 돌아이로 간주되어 은따 당하기 쉽상이다.
3 고독, 덕을 위한 시간
하지만 장자는 은따 되기, 혹은 기꺼이 고독(獨)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솔직한 진심을 따를 때 그 사람 고유의 충만한 생명력과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벗어나 진심이 이끄는 길을 가는 것은 남의 인정 외부를 걷는 행위이기에 고독하다. 하지만 이 고독 속에서 덕은 깊어지고, 자기만의 세계는 영글어 실한 열매를 맺는다. 여기서 말은 잠들고 치열한 실행만이 지속된다. 엥거스 그레이엄은 이 고독한 수행 속에서 차츰차츰 형성된 인간 내면의 덕을 힘(Power)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강요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절로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일종의 카리스마, 감화력이다. 뭘 했길래 사람들은 그가 좋아 따르는 걸까? 문제는 그가 ‘자기 의도대로 무엇을 하지 않았다(無爲)’는 것이다.
4 덕의 효과
뭘 딱히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따르는 이 현상을 장자는 ‘무위자화(無爲自化)’라고 말한다. 여기서 무위는 덕을 갖춘 진인이 자기 뜻대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조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가 누구든 무엇이든 생긴 그대로(自然) 살게 하고 스스로 변하게(自化) 둔다. 그러면 진인은 뭘 하는가? 그저 제 삶에 충실할 뿐이다. 장자는 「덕충부」 편에서 덕을 ‘내면에 기의 조화를 완성하는 수양(德者, 成和之修也)’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만물이 떨어질 수 없다(德不形者, 物不能離也)’고 본다. 진인은 만물이 생긴 그대로 살게 두고 진심이 여는 길을, 기의 조화를 유지하며 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자기 길을 가다보면 사람들이 절로 그를 따른다. 이것이 감화력이며, 자기 의도대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無爲而無不爲) 무위의 궁극 경지다. 참 묘하다.
5 빛을 품은 온기로
만물은 저마다의 색과 꼴로 다양한 향기를 전하며 이 세상에 잠시 피고 사라진다. 장자의 진인은 이러한 만물의 다양성을 자기 존재를 비우는 방식으로 아끼고 살려준다. 자기를 강요하기보다 상대를 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살리며 기의 조화를 유지한다. 만물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그가 이처럼 만물을 제 몸같이 아끼고 자유롭게 살도록 두기 때문이다. 이것을 장자는 보광(葆光)이라는 빛으로 표현한다. 과시하듯 눈부신 빛은 감추고, 빛의 잔영인 온기를 나누며 만물과 더불어 겸손히 상생한다. 이것이 덕의 향기로 세상을 따뜻히 감싸는 장자 진인의 은근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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