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만드는 남자의 두번째 여행기
엇결과 순결 / 수유너머104 세미나회원
1. 무엇을 보았을까?
# 나는 추구하는 것에 지치게 된 이후로 발견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 [즐거운 학문] p37
누구나 그렇듯이. 그저 열심히 크게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게 남들과 속도를 맞춰가며 살다보면 내 인생도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평안해질거라 믿으며 살고 있었다. 커리어가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모른 채, 고민만 하다가, 그것도 어느 순간 잊혀지고 - 누구나 그렇듯이 -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다 잘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30대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크게 보면 불안한 삶이었으나, 하루하루를 분명 나는 ‘웃고’ 있었다.
그 말은 옳았다. ’니체의 위험한 책‘ 고병권씨는 니체를 그렇게 불렀다. 2015년 우연히 만난 니체로 인해 나를 지탱해주던 믿음들은 힘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고, 정말 피하고 싶었던, 30대의 시작을 함께 했던 그 고민들을 나는 40대 중반이 되어서 다시 마주했다.
2017년 17년간 다녀온 직장을 그만두고, 목수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가구는 내게 내 삶을 주체적으로 주도하고 그 누구의 것도 착취하지 않으며 나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삶을 의미했다.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을 추구했으며, 그 기술로 만드는 가구 곳곳에 니체의 철학을 담는 나 자신을 상상하며 또다시 하루하루를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
2019년, 내게는 세 번째 만남, 니체의 ’즐거운 학문‘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 니체는 서문에서부터 내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발견했느냐‘고. 목수로서의 새로운 삶은 내게 무엇을 발견하게 했느냐고. 그러나 니체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나는 먼저 내 자신에게 물어야만 했다. 혹시 나는 또 다른 목적을 ’추구‘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2. 목적없는 삶을 견딜 수 있는가?
# 아마도 웃음에도 새로운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이 궁극적인 해방과 무책임에 이르는 길이 개개인 모두에게 항상 열려 있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는 웃음이 지혜와 결합되어 ’즐거운 학문‘만이 남게 될 것이다. - [즐거운 학문] p66
회사를 그만두고 바로 다음 날부터 마치 회사를 다니듯 드나들었던 나의 공방, 그곳에서 나는 매일매일 가구와 씨름을 하고 있다. 신의 경지에 이른 날물 갈기 – 숫돌에 갈고나면 진짜 거울처럼 사물이 비춰지고 날물 위에 머리카락을 떨어뜨리면 스스륵 잘리는 그런 경지! 나뭇결 위에서 춤을 추듯 미끄러지는 대패질 – 잘린 단면은 실크보다 더 곱고 나뭇결의 뜯김은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런 경지! 귀신처럼 아귀가 딱 들어맞는 장부짜임 – 마치 기계로 만든것처럼 빈틈이라고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그런 경지!
오해말기를 바란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이루고자 했던 내 머리 속에 설정된 목표들이었다. 회사를 나왔어도 나의 삶에 대한 태도는 바뀐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 불안한 나의 삶에 위로이자 등대가 되어줄 ’목표‘가 필요했다. 나름 괜찮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 목표들 덕분에 하루를 웃으며 보낼 수 있었으니까.
니체는 계속해서 내게 원점에서 다시 생각할 것을 종용했다. 내 목수의 삶에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그래도 웃을 수 있는가? 궁극의 무책임에 다다를 수 있는가? 아!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니체는 나를 흔든다. 가만 좀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3. 수단으로서의 목공은 가능한가
#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겁고 진지한 인간이며, 인간이라기보다는 중량이기 때문에, 사물을 넘어서있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신나고 떠돌아다니고 춤추고 조소적이고 유치하고 황홀한 예술을 필요로 한다. - [즐거운 학문] p179
나무를 만지고 가구를 만들 때면 나는 곧잘 환각상태에 빠지곤 한다. 내가 엄청난 장인이라도 된 듯 진지해지며 철학적 성찰을 담아내는 도구로써 가구를 대한다. 나의 눈길은 점점 성스럽게 변하고 손놀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조금의 오차도 인정하지 않는 엄격함으로 나를 몰아대기 일쑤다. 니체가 이런 나를 제대로 저격한다. ’역시 너는 중량이었어......’
세미나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왜 목수가 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계속되는 사유 속에 점차 나는 주체적인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그 수단으로써 목수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목수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실험으로서의 목공은 가능한가
# 삶의 조건을 둘러싼 최후의 물음이 여기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실험을 통해 이 문제에 대답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어디까지 체화를 견딜 수 있는가? 이것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며, 이루어지고 있는 실험이다. - [즐거운 학문]
세미나 시간 중에 내가 ‘진리란 없다’ 라고 발제를 했다가 바로 지적을 받았다. “니체는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했을 뿐이며, 진리 그 자체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다.” 반장님이 엇결도 절대적 진리를 진리라고 설정하고 발제한 것이라고 편들어 주셨다. 이제 고백하자면 내게 지적해 주신 그 말씀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나는 니체가 진리 자체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이것을 고백하는 이유는 이 작은 사건이 내게는 즐거운 학문 전체를 보는 시각을 바꿔준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즐거운 학문은 내게 “절대적 진리가 없는 것, 목표가 없는 너의 삶 속에서 너는 무엇을 진리라고 믿고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이 얼마나 체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체화의 실험 속에 아직도 믿음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을 통해 ‘체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진리, 믿음은 결국 삶 속에서 체험을 통해 발견되고 수정되며 스스로 성장해 가는 것이라고. 다시 내 심연으로 끌려들어간다. 나는 과연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족과 이 자본주의의 시스템 안에서 가능하다는 그 믿음을, 목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체화시키고 있는가? 여전히 더 배워야 한다는 강박, 아직도 준비되지 않았다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에 나가길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나를 지하공방에서 매일매일 혼자만의 시간속에 갇혀있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나는 아직 나의 진리를 체화시키지도, 실험하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임을 깨닫고 있었다.
5. 무지의 상태로서 ‘미래’를 긍정할 수 있는가
# 나의 사상은 내가 어디에 서있는가를 내게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내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를 알려줘서는 안 된다. 나는 미래에 대한 나의 무지를 사랑한다. - [즐거운 학문] p264
나는 가구학교 전문가과정을 일년동안 수료하고 지금도 3년째 공방에서 수련을 계속하고 있다. 무엇이 나를 이런 충동으로 이끌었을까? 배움이 너무 좋아서? 아쉽게도 나는 그렇게 학구적인 인간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보다 확실하게 준비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 3학년을 철저히 준비해야만 했고, 다시 대학에서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시간을 쪼개쓰며 4년간 훈련을 해왔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나를 몰아세운 생활이었다. 회사를 나왔어도 삶에 대한 나의 태도는 변한게 없었다. 목수로서의 미래가 근의 공식처럼 완벽하게 준비되어야만 했다. 나는 미래 설계자였으니까.
# 이 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아마 다른 일이 성공하겠지.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성공보다 실패에 더 감사해야 할지도 몰라. - [즐거운 학문] p280
나는 과연 삶 자체를 시도로서 실험으로서 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은 어떤 논리의 문제도 아니며 그저 니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기질의 문제일 뿐이다. 그럼 이렇게 물어야 하겠다. 나는 과연 그런 부류의 인간일까?
6. 나는 나를 다시 사람들 속으로 보내야겠다.
# 우리는 인식을 위한, ‘진리’를 위한 기관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무리, 종에 유익한 만큼만 ‘안다’ - [즐거운 학문] p342
# 그대들 이주자들이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면 그대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도 또한 신앙일 것이다! - p386
니체가 즐거운 학문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전작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그 이면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밖에 없음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즐거운 학문」을 통해서는 네가 믿는 진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경험을 통해서 생성되며, 다시 경험을 통해 수정되고 새로운 진리를 얻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니체 역시 그렇게 경험을 통해 ‘힘의 의지’와 ‘영원회귀’에 이르는 사상의 여정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노예로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그로부터 주체성과 자유를 찾아 회사를 떠났다. 나의 새로운 믿음은 다시 내가 떠나온 무리들 속에서 그들과의 ‘부딪힘’을 통해 깨어지고 고쳐지며 또다른 믿음으로 나를 이끌어줄 것이다. 결국 체화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자.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지만 크게 보면 무엇이든 성공할 것이다. ’목수의 삶이든, 철학자로서의 삶이든 뭐든 하나는 이루겠지’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비로소 나만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7. 즐거운 학문을 마치며
공교롭게도 2019년을 시작하며 나는 두가지 목표를 세웠었다. 하나는 즐거운 학문이라는 새로운 니체 텍스트를 세미나를 통해 읽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목공기술과는 전혀 다른 그린우드워킹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린우드워킹이란 건조되지 않은 생나무(greenwood)를 이용하여 가구를 만드는 것으로서 주로 윈저체어나 스푼, 바구니 등 생활잡화를 만드는 영역이다. 주요 특징이라면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local wood를 사용하여 생활속에 바로 사용할 목적의 도구나 가구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과정의 특성상 기술적 엄격함보다는 조금 불완전해 보이더라도 제작자의 자유분방함을 더 가치있게 평가하고 오히려 추구한다는 점이 기존 가구제작 방식과는 다른 점이다. 그린우드워킹을 배우면서 나는 가구가 흠하나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닐 수도 있음을 배웠다. 나는 지금 처음의 가구 제작의 중요한 목표를 잃어버린 상태다. 아마 평소의 나라면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즐거운 학문」과 더불어 목표를 잃어버림으로써 또 하나의 무한의 자유가 내 앞에 놓여있음을 느낀다. 이제 비로소 또다른 방식의 목공이 존재할 수 있음도, 그것이 내게 또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사랑도 가능하게 함을 깨닫게 한다. 이제야 공방 밖으로, 세상 속으로 나올 ‘용기’가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 우리는 이 길고 위험한 극기 훈련을 거쳐 다른 사람이 된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몇 개의 더 많은 의문부호를 갖게 되고, 삶에 대한 신뢰는 사라져버리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을 필연적으로 우울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지는 말라! 삶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가능하다. 다만 사랑의 방식이 바뀌는 것일 뿐이다. - [즐거운 학문]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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