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철학, 정신의 비행사
쟈 스 민 / 수유너머104 세미나회원
1. 여성과 인간
니체를 공부하다보면 섬뜩할 때가 종종 있다. 여성에 대한 글을 접할 때도 그랬다. ‘그의 문체에 쉽게 휩쓸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지만 나를 이루고 있는 주요가면 중 하나인 여성이 공격받는다고 느껴지면, 쉽게 실패한다. 여성은 전부가 아닌 나의 일부일 뿐이고, 내가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참 이상한 일.
세미나는 이 이상함에 주목했다. 니체가 말하는 여성은 누구이고, 그가 여성을 언급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여성이 누구인가는 고병권의 ‘언더그라운드 니체’와 자크 데리다의 ‘에쁘롱’을 참고할 수 있다. 둘은 같은 맥락에서 말한다. “거세된 여성, 거세하는 여성, 긍정의 여성”이라는 유형은 꾸준히 강조되었던 니체의 삼단변신과 비슷하다. 낙타와 사자가 기존(시대성)의 틀에서 산다면, 어린아이는 시대가 포착하지 못하는 곳에서 논다. 여성 역시도 ‘거세’, 즉 기존의 남성권력이 주시하는 장에서 ‘여성’을 말한다면 기존 담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필요한 것은 탈주,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행정상 분류되는 female로서 긍정의 여성이 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세미나에서는 여성의 ‘여성–되기’, 생성으로서의 삶을 말했다. 계몽에서 벗어난 무구한 삶을, 그 편린을 창조하는 자, 타고난 예술가로서의 여성. ‘당연히 ~해야지’라는 생각에 균열을 내는 여성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갖고 있는 가면 중 ‘여성’이 너무 접착력이 강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다른 가면을 더 오래, 더 많이 써보면 ‘여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내가 개인으로서 ‘여성’ 분류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다.
다른 세상, 다른 사람과 소통해야 할 때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상대가 갖고 있는 시대적인, ‘여성’에 대한 퍼스펙티브에 맞추어/맞서서 내가 갖고 있는 퍼스펙티브를 어떻게 주장할까. 이 부분이 고민되는 이유는 연대의식 때문이다. 거창한 운동을 하거나 거대한 집회를 만들고 싶은 야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생각나버리는 내 주위의 여성들과 그 너머의 여성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것도 계몽일까?
분류하기 쉬운 이분법, 남-녀 대립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 어렵다. 나 혼자만 걸린 게 아니기에 더욱.
다시 세미나로 돌아와서, 니체가 여성을 언급한 이유-‘여성’을 소재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이것 역시도 다중적일 것이다. 파악한 바는 첫째로 말 그대로 생물학적, 사회적 의미의 ‘여성’에 대한 이해와 비판이고 두 번째는 엇결님이 말한 ‘인간’에 대한 스토리이다. 배우와 여성을 함께 읽으면 여성은 인간으로 바꿀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쓴 연기자, 배우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경직된 남성에 비해 자유자재로 자신의 가면을 바꿔 낀다. 이런 특성을 빌려 니체는 인간을 말하고자 했다고 읽을 수 있다. 본질과 가상의 경계를 허문-얼굴과 가면의 경계를 허문 여성(인간).
긍정의 여성이 필요에 따라 시대가 요구하는 가면을 연기하며 힘의 감정, 힘의 고양을 느낀다. 도덕적인 ‘그래야 한다’에 맞추지 않고 마치 놀이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수많은 가면들 중 하나를 잠시 꺼낸 것이다. 사고의 김이 위로 뻗는다. 여성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나’로, 어느 순간에는 ‘나’를 넘어선 무언가로.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 순차적이지도 단계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편의에 따른 순서도일 뿐, 나는 여성이고 인간이고 ‘나’이다. 여성이라는, 시대의 퍼스펙티브가 강요하는 약점을 나의 새로운 힘으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연민을 우리의 새로운 힘으로, ‘나’가 가지고 있는 시대에 맞지 않는 오류를 비시대로 향하는 키로-
2. 가면과 연기
나는 충분히 교활하지 못했다. 그래서 솔직해졌다. 정확히는 솔직한 척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고 믿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역할을 ‘나’라고 착각해버린 어리석은 배우였다. 하나의 극이 끝나면 역할의 가면은 벗어야 한다. 이제 그는 일상으로 돌아와 새로운 극을 준비해야 하므로, 벗지 못한 가면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다만 삶은 딱딱 정해진 극이 아니라서 우리는 동시다발적으로, 강제적으로, 자발적으로 여러 극에 선다.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보면 내가 쓴 가면이 이쪽이었는지 저쪽이었는지 잊게 된다. 이는 기억력과 순발력의 문제이다. 바꿔 끼기 귀찮다고 솔직한 척 하나의 가면만 고수하면 그는 진부한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동성, 멈추지 않는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성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상태-멈춘 사람을 재미없게 여기고 피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그의 역량만큼 존재하는 사람과 즐겁게 어울린다. 때로는 서로 자극하여 더 많은 힘을 얻고자하기도 한다. 이게 좋은 동료가 아닐까?
3. 예술과 범죄
예술이 말했다. “삶은 무구하다”
세미나는 예술 너머의 메시지를 자꾸만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태도,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를 우상화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대신 그 무엇이든 먼저 ‘-되기’를 해보라고, 다양한 가면을 만들어보고 위부터 아래까지 거침없이 걸어가라고 했다. ‘너무 막 살라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위험한 말. 이 말과 삶이 무구하다는 메시지의 의도는 무엇일까?
어떤 산을 보고자 할 때 사진과 그림 중 무엇이 더 그것과 일치하는가? 아니, 무엇이 더 그것에 가까운가?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속은 것이다. 사진기의 렌즈가 보여주는 빛의 굴절에 말이다. 애초에 하나의 사물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 모습 외에도, 그림이 보여주는 그것의 특징적인 모습-예를 들어 뾰족함의 강조, 무성한 나무의 강조, 마을과의 조화를 강조 등 말이다. 이것을 보여주었을 때 그 사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진이 찍어내린 그 순간만이 그 사물인가?
멀리서 본 것, 가까이 본 것, 추상화 한 것, 사실적으로 그린 것, 모든 것이 그것(itself)이었다.
예술의 문제로 돌아오면, 예술은 무엇일까? 뒷골목 낙서로 취급받던 그라피티가 예술이 되고 전시장에 몰래 걸은 무명의 그림이 예술이라 말할 때, 소변기가 예술품이 되고 찰나의 행위가 예술이라 칭해질 때 예술이라는 말은 흐릿해진다. 클래식하고 권위있는 것이 고급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고 영화를 대중 예술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이미지는 기존을 전복하는 혁명이고 시대에 대한 불편함 혹은 조롱이기도 하며 순수에 대한 열망, 반대로 다양성에 대한 시도, 감상하는 자와 만든 자가 벌이는 해석의 줄다리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어떤 정의에 갇히지 않고 그 무엇으로도 가면을 바꿔 낄 수 있다. 창녀를 그릴 수도 있고 성녀를 그려내기도 하며 인간의 렌즈를 끼기도 하고 3차원 렌즈를 쓰기도 한다.
예술은 모든 것이 –되어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니체에게도 예술이 중요한 소재였겠지.
“예술은 위장하거나 은폐한다기보다 변형시킨다. 어떤 결점이 있을 때 예술가의 역량은 그것을 가리고 속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의 힘과 덕으로 인도하는 통로로서 그것을 변형시키는 데 있다.”
솔직히, 사람들은 지루한 도덕보다 나와 다른 존재로 ‘–되기’를 좋아한다. 범죄가 나쁘기에 범죄자를 잡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쾌락 때문에 범죄자를 쫓는 셜록은 매력적이다. 신데렐라 스토리와 재벌에 대한 권선징악을 늘어놓는 한국 드라마보다 찢어 죽이고 뒤엉키고 타락하는 왕좌의 게임이 더 재미있다.
삶이 무구하다는 것은 삶에 모든 것-약한 것, 강한 것, 나쁜 것, 좋은 것-이 섞여있다는 말이고 강/약, 좋음/나쁨에 대한 기준은 ‘있다’ 이후의 것이며 그것을 설정하는 것은 세상-타인, 혹은 나-세상이라는 것이다. 도덕을 세우는 것은 좋다. 다만 그 도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저 편하니까 쉽게 생각하고 무작정 복종하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더 즐겁게 다른 내가 –되기 위해서, 그 이후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도덕으로 심판하는 내가 아니라 그가 되어봄으로써 다가가 손을 잡는 내가 되기 위해서.
4. 진리와 오류
여기서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오독, 하나는 진리들에 대해서.
자아감정이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이고 그것이 자아의 한계라면, 너무 좁고 퀴퀴한 냄새가 난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그게 골방에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들에 사람이 짓눌리는 것처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나의 제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을까? ‘나’가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만 설명된다면 얼마나 허무한지 모르겠다.
이게 전부라고? 이게 다야?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새로운 오독, 상상력이다. 나는 ‘나’ 이상이며 변신할 수 있다는 믿음과 힘! 이전의 허물을 벗고 골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다. 영원히 치는 파도를 삶으로서 받아들이고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고, 기대하는 나. 그 변화가 외적으로 거대할 수도 혹은 고요할 수도 있다. 남들이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힘의 감정을 누릴 수 있느냐를 예민하게 살피자.
또다른 오독은 형편없는 나를 우상처럼 생각하거나 면죄부를 줄 때의 일이다. 나의 잠재성은 대단하지만 ‘지금’의 나를 정확하게 살폈을 때, 내가 끄덕일 수 있을 만큼 대단한가? “고독한 사람들에게-우리가 다른 인간들의 명예를 공적인 장소에서 존중하는 것처럼 자신과 대화하는 경우에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례한 자들이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내가 나를 보았을 때, 너무 쉽게 당황하고 너무 쉽게 나에게 상처를 준다. 내 마음은 저 멀리 가있는데 현실의 나는 콩알만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여기밖에 오지 못한 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다. 이는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을 꺾어버리는 위험한 오독이다. 나는 충분히 잘해왔고, 그럼에도 부족한 점은 있다. 당연하지, 내가 목표로 하는 곳은 저 멀리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우리 스스로는 위대한 점이 꽤 있다. 그것을 잊지 말기.
진리와 오류, 진리들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오면 여기도 재밌다. 오답이 없기에 정답이 없다. 진리는 진리들이 되고 오류는 그것대로의 힘을 갖는다. 오라클님의 진행에서 좋은 문장을 찾았다. 어떤 옳은 진리가 있다고 해도 생의 활력을 위한 그것을 부정하고 비진리를 말하는 것. 무도덕이나 무정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 밖에서의 다른 도덕과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그것들이 틀린가? 틀리다라고 말하는 자는 시대이다.
더불어 생동감을 위한 적의 존재도 상상해보았다. 과거 공부를 할 때 라이벌이 있어서 더 배우고 싶었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부딪치는 즐거움이 있었다. 몇 개 더 맞았는지, 누가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정도의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재밌었다. 내 인생의 신념과 내가 갈고닦은 역량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인의 문제. 다만 내가 계속 세상에 있으면 언젠가 끌리듯이 누군가 말을 걸 수도 있겠지. 친구만큼 중요한 적.
5. 떠남과 기다림
떠남은 곧 기다림이다. 언젠가 도착할 나를 기다리는 나, 그를 향해 떠나는 나.
이 부분은 이전에 먼저 읽었던 책, ‘다이너마이트 니체’와 계속 연결되었다. ‘언더그라운드 니체’가 떠남의 대상을 시간, 장소, 나로 지목했다면 ‘다이너마이트’는 좀 더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번 세미나의 책은 시대성과 비시대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고 다른 책은 기다림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나는 함부로 살 수 없게 되었기에. 마치 영원회귀의 감동처럼, 저 높은 곳에서 멈추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다. 그자는 신이 아니며 또다른 절대자도 아닌, 그저 나. 내가 가능한 최고의 나이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모습은, 나이는 무엇인지 그 무엇도 알지 못하지만 단 하나, 그가 ‘나’라는 것은 안다.
정직한 기다림. 그 어떤 술수도 통하지 않는 과정 속에서 나는 묵묵히 산을 올라야 한다. 나를 기다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생의 실험을 통해 다양한 나를 만나보면서 최고의 나를 향해 간다.
이를 위해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다시 시대성의 문제로. 그 속에서는 진부한 나만 반복하기 때문에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없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경험? 교육? 시행착오? 그리고 이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 비시대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애초에 나 스스로도 아직 시대성과 비시대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막연하게 니체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을 뿐이지. 시대성은 다수의 논리인가? 감정인가? 비합리성? 애초에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한병철의 책을 참고하면 지금을 우울의 시대, 과잉의 시대로 말할 수 있지. 너무나 자유로운 ‘할 수 있음’에 절망하는 인간들, 마치 SF를 보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그려지고 있는 오늘날, 서로 적대하는 명확한 진영 대신 모호한 갈등만 커지고 있는 세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고 개인이 개인을 책임져야 하는, 가벼운 척 하는 무거운 세상.
혹은 AI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불안, 인간의 ‘쓸모없음’에 대한 노동 관점의 생각도 시대성의 일부일까? 도태될까봐,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나의 일부.
그럼 여기서, 시대 속 비시대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같이 얘기해보고 싶은 지점이다. 요즘 불거지고 있는 자본의 흐름이나 운동처럼 정치적 올바름, 임팩트 투자 등 사회적 영향력을 염두에 둔 콘텐츠 기획, 사업 투자, 사회 운동, 제품/서비스 선택 같은 것? 하지만 이미 우리 시대가 이것을 포착하고 있는데, 그럼 이것은 반시대성이라고 말해야 하나.
비시대, 여기는 어디일까. “네가 아직도 적대받는 한 너는 너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너의 시대가 너를 전혀 알아볼 수 없어야 한다.”
번외) 좋았던 아포리즘
“철학은 부드러운 태양과 밝고 생동하는 대기, 바다의 숨결, 가벼운 식사, 따뜻한 음료, 조용한 산책, 신중한 독서, 청결하고 질박하며 거의 군인 같은 생활습관의 정신적 번역이라고.”
이렇게만 다시 살고 싶다. 다시 살 것이다. 정말 아름답고 따뜻한 글이다. 발음할 때부터 리듬을 타며 톡톡 자극하는 단어들이 아름답고, 신체의 번역을 철학이라는 말에 감동했다. 내가 먹는 것, 감정을 토해내는 것/쌓는 것, 내가 갖고 있는 생활습관 등이 모두 나의 철학의 일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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