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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_사회와 인간형성] '강요된 (필요)취향'으로서의 빈곤

‘강요된 (필요)취향’으로서의 빈곤 





장봄 / 수유너머 N 회원




 



근대의 특징 중 하나로는 봉건사회의 붕괴로 인한 신분제 폐지를 꼽을 수 있다. 이제 정치적 신분 세습은 사라지고 제도적으로 만인이 평등한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라는 틀로 경제 질서가 재편되면서, 개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축적된 자본의 양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개인의 능력은 소비에 따라 표현되며, 어떤 소비를 하느냐가 개인의 계급을 대변하게 되었다. 이를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에 의한 계급적 소비’로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아비투스(habitus)는 사회구조가 체화되어 내면화된 것으로, 세대, 성, 계급과 같은 계층구조에서의 객관적 분할을 반영한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세계를 구조화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세계에 의해 구조화된 구조이다(부르디외, 2006 : 311-312). 이처럼 ‘사회적 정체성은 차이를 통해 규정되고 확인된다(312)’. 그렇기에 아비투스 안에는 여러 조건의 체계들이 지닌 구조 전체가 각인되고, 이렇게 구조화된 원리는 차이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개인들은 이 차이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각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소비문화 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부르디외는 소비의 차별화는 계급적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구별짓기 전략이이라고 말한다. 소비와 생활양식에서의 취향이 특정 계급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취향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인 것이다. 부르디외는 취향을 필요취향과 사치취향으로 나누는데, 필요취향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해야 할 필요성(부르디외, 2006 :324)’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즉자적인 의미의 생활양식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취향이다. 이것은 그래서 민중계급/하층민의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기에 계급상승을 소망하는 행위자들 혹은 하층민과 구별되고 싶어 하는 행위자들은 차별화를 통해 필요취향에서 벗어나려 하고 하층민의 문화와 끝없는 구별짓기를 시도한다. 또한 계급과 취향은 고정되어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경계를 이동해 가며 경계를 재구성한다. 따라서 구별짓기는 나와 너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넘어 각 계급이 누려야 할 문화에 대한 규범적 차이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르디외의 논의는 과연 유효한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로 이야기되는 현대사회에서 계급은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단적으로 계급은 소비에 의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소비문화는 다양한 문화장에서 등장하여 부유층, 중산층, 빈곤층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해냈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를 경유한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은 사라지고, 상류층과 ‘그 나머지’라는 양극화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취향과 문화로 계급을 드러내기엔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소비의 형태로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계급을 드러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부르디외가 이야기한 소비의 차별화가 계급적 차이를 드러내는 구별짓기 전략이라는 논의는 폐기되어야 할 이야기인가? 그리고 우리 사회에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가? 



출처 :네이버 웹툰 쌉니다 천리마마트 

한때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학생들의 패딩과 계급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소비는 자신의 계급을 드러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최근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 불리는 ‘백사마을’에서 현장연구를 하고 있는 나는 기초생활보장제에 대해 자료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접한 신문기사에서 누군가에게는 ‘(필요)취향’이 강요되고 있음을, 그리고 이 강요된 취향을 통해 모두가 불안정한 오늘날, 우습게도 누군가는 ‘어떤’ 위안을 얻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 기사는 간단명료했다. 새누리당의 김현숙 의원이 기초생활비 수급권자를 조사해 보니 308억 원에 달하는 액수가 잘못 수급되었다는 것이다. 부정수급 액수가 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시선을 끈 구절은 김 의원이 부정수급을 언급하면서 그 근거로 제시한 ‘해외여행’과 ‘자동차 소유’라는 두 가지였다.  부정수급권자가 이 사회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수급자에 대한 근거가 해외여행과 자동차 소유로 대표되어 제시된 것은 소위 ‘가난한 사람’,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소비와 생활양식에 대한 어떤 기준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기준에서 벗어날 때 너무도 쉽게 그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희미해진 계급의 경계가 사회의 한쪽 끝인 최빈곤층에게는 너무나 명료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왜 그럴까?


김의원의 발표에서 드러나듯 해외여행과 자동차는 특정 계층이 누려야 할 문화와 경제자본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최약층이라고 법으로, 제도로 규정된 기초생활수급권들에게 취향은 ‘강요된 선택으로 필요취향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순진한 몽상으로서 배제해 버리는 생활조건의 산물(부르디외, 2006 : 325)’이 된다. 이들에게는 강요된 취향으로서 필요취향만 강조되며, 이는 ‘신체 속까지 새겨진 낙인(부르디외, 2006 :326)’이 된다. 이는 김 의원의 발화와 이를 중심으로 한 네티즌들의 논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다음은 김현숙 의원의 부정수급 문제가 불거지면서 수급권자의 해외여행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한 인터넷 카페에 수급자가 올린 글의 일부이다. 


길거리에 걸인이 불쌍하여 몇 푼의 동전을 주었더니 이 걸인이 우연히 나와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습니다. 나는 허접한 국밥을 주문하여 먹는데 이 걸인이 나보다 더 비싼 밥을 먹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정말 기분 더러울 겁니다. 아마 대다수의 국민이 기초수급자가 해외여행을 간다는 말을 들으면 걸인에게 동냥을 준 사람의 마음 같을 겁니다. (중략)

우리가 국민의 혈세로 받는 기초수급비를 당연히 받는 권리로 착각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적어도 대한민국이란 이 나라에 기여는 하지 못할망정 민폐를 끼치고 있는 우리가 사치스런 해외여행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수급자A씨)

http://beminor.com 2014.9.25일자, 강혜민, '수치심을 기르는 복지, 과연 옳은가'에서 재인용  


자신을 수급자로 밝히면서 쓴 글은 수급권자에게 어떤 사회적 낙인이 새겨져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수급자의 실천은 마치 경제적 조건 때문에 이와 같이 인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필요한 것의 선택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급자에게 해외여행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해외여행은 ‘사치스런’ 것이 되고, 국가의 ‘도움’을 받는 이들이 누려야 할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더 나아가 경제적 조건으로 인해 누리지 못했던 해외여행은 ‘누려서는 안 될’ 것으로 치환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급권자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작업, 즉 자기검열을 시작한다. 자기검열은 수급권자로서 보여야 할 행위를 하지 않을 때, 혹은 마땅히 해야 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때 그마저도 있던 ‘혜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서 작동된다. 바로 이러한 자기검열은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가 주장하는 ‘필요의 취향과 순응의 원리’가 수급권자의 선택을 현실주의적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뜻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는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스스로를 타인의 신체와 언어의 소유대상으로 노출시켜 버리고 만다(부르디외, 2006 : 372).’ 







빈민층에 대한 기준은 각각의 국가나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빈민층이라는 어떤 범주를 만들어낼 때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계층은 국가에 의해 법으로, 제도로서 규정된 기초생활보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제도적으로 규정된 빈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도덕성을 검증받아야 하고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기초생활보장법은 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을 사회권으로 규정한 법으로, 하나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권리로 작동하기보다는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들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제한하고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대상화된 이들에게는 강요된 (필요)취향만이 그들의 문화가 될 수 있다.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계층에 대한 고정된 시선과 소비 수준에 대한 통념적 요구는 매우 폭력적이다. 가난하기에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불행해야 하며,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물질을 기준으로 신분을 재구성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갖는 새로운 폭력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폭력구조는 이중의 효과를 가져온다. 국가에 의해 규정된 빈자는 자기검열과 순응적 주체로 살아가는 동시에 ‘그 나머지’의 사람들 역시도 그 사회에 순응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우리 사회는 수급권자로 명명된 빈민층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불안정성이 지배하고, 가장 불안정하다는 프레카리아트족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최빈민층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에 싸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은 빈자로 구분될 수 있는 특정한 범주에 있는 사람과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 나머지’에게는 상대적 위안을 제공한다. 특정한 범주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취향을 강요하는 것은 빈자와 비(非)빈자를 구별하는 지점을 만들어 자기를 위로하고 동시에 자신은 그들과 다름을 증명하는 폭력화된 방식이다.


  다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의 정의로 되돌아가 보자.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객관적으로 분류 가능한 실천들의 발생원리인 동시에, 이 실천들의 분류체계(부르디외,2006 : 311)’라고 설명한다. 즉 사회세계를 ‘구조화하는 구조’임과 동시에 ‘구조화된 구조로 설명한다.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쉽게 ‘너 자신을 알라’ 혹은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라’ 등의 말로 필요취향을 강요한다. 이미 규정되어버린, 자신의 취향이 사회적 위치에 의해 정해진 이들에게 아비투스는 이제 원리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구조 안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춰야 하는 것이 된다. 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빈곤층의 도덕성 논란과 그들에게 강요되는 문화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 부의 양극화 현상을 은폐한다. 또한 복지는 국민의 혈세를 갉아먹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그리고 명확해진 최빈곤층의 경계는 ‘그 나머지’ 사람들이 불안정한 삶의 질서를 승인하게 만들고, 빈자라는 가시적인 적을 설정함으로써 위태로운 사회를 ‘그럼에도’ 유지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참고문헌

피에르 부르디외 저, 최종철 옮김,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상,하 』, 새물결,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