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유’롭습니다!”
- 한국형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대한 단상 -
노의현 / 수유너머N 회원
맑스는 자신의 책 <자본>에서 다음과 같 슬픈 언어유희를 한다. 임금노동자는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롭다. 첫째, 그는 자신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 즉 어떤 생산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free of) 자유롭다. 둘째, 그는 자유인(free individual)으로서 자신의 노동력을 하나의 상품으로 판매하면서 마음대로 직장을 구하고 바꿀 수 있기에 자유롭다.
나에게 이건 마치 ‘난 누구나 만날 수 있기에 자유롭다!’라고 부르짖는 모쏠 김모 씨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 ‘자유’들이 짠한 이유는 이 둘 앞에 광활한 선택지가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자유롭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김모씨의 경우와는 달리 임금노동자의 자유가 씁쓸한 이유는 김모 씨는 사실 이 자유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현실의 노동자는 이 자유를 ‘책임’이라는 말로 바꾸어 받아들인다는 사실 때문이다.
묘하게 설득되는 솔로부대의 찌라시들. 하지만 난 전향하지 않을거다.
사실 임금노동자의 두 가지 자유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다.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 주위에 누가 물레를 가지고 실을 뽑으며, 어떤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들어 팔기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매하는가? 요새는 붕어빵 아저씨들도 다 붕어빵 기계를 빌려서 장사한다고 한다. 결국에 먹고 살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건 내 시간과 몸뚱이, 즉 ‘노동력’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열심히 알바를 뛰고, 이력서를 쓴다.
이는 직업 선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다가 지겨워지면 옆 동네 김치찌개 집으로 이직해 서빙을 할 수도 있고, 그러다 잘리면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맡으며 합정역 앞에서 김밥을 팔수도 있으며, 돈이 좀 더 필요하면 설렁탕집에 가서 뚝배기 설거지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투잡, 쓰리잡으로 한꺼번에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누구라도 이러한 현실이 '자유'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것을 알고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한 것은 모두가 이런 이야기에 씁쓸한 웃음을 짓지만 딱히 반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어느순간 투덜대는 것에 불과해져버리고, 그마저도 허용되는 것은 친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뿐이다. 하지만 안주 삼아 이런 세상을 씹고 뜯고 맛보다가도, 때마침 등장한 ‘자기 경영’에 능한(지난 주 푸코에 관한 글 참고!) 친구의 진심 어린 충고 앞에서 나는 책임감 없는 나약하고 게으른 루저가 된다. 막잔에는 결국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우리가 열심히 하자!’를 외치며 건배하기 십상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세상은 험난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재고의 여지가 없는 ‘자연법칙’처럼 느껴진다.
"그래, 내일은 더 열심히!", 근데... 술값 좀 빌려주라 ^_^;
맑스의 글은 이러한 ‘자연법칙’이, 실은 절대로 자연법칙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자유와 책임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다. 바로 15세기부터 유럽에서 벌어진 유혈낭자한 '본원적 축적'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이전의 노동자들, 아마도 대부분 농민이었을 봉건시대의 노동자들은 우리와 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던 땅의 소유자인 지주에게 귀속되어 있었으며, 땅이라는 생산수단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하지만 15세기 이후, 수차례에 걸쳐 벌어진 ‘엔클로저 운동’은 수많은 '자유 노동자'들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이들에게 자유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평생 살던 농촌을 떠나야 했고, 도시로 내몰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도 낯선 새로운 생활방식에 적응해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새 삶에 적응하지 못해 굶어죽거나, 거지, 부랑자, 도둑이 되어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국가와 법 앞에서 이들은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자발적인 범죄자"(<자본> 1권, p.1009)였다. 국가는 농촌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제 발로 도시로 이주해온 것으로 간주하며, 도시에서 노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법령들을 통해 채찍질과 고문, 낙인을 찍었다. '자유로운 노동자'들은 지금 당장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지워진 ‘자유’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이것이 15~16C에 걸쳐 유럽에서 벌어진 ‘피의 입법’이다. '수요-공급 법칙'과 같이, 다분히 이성적인 경제적 법칙만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는, 이와 같이 강제적인 법과 폭력이 동원된 수세기에 걸친 ‘본원적 축적’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칼 맑스, 그리고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과정 없이도 자연스레 자본주의의 법칙에 수긍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초기에는 노동자를 '자본주의화'시키는 과정, 노동자로 하여금 그 ‘자유’를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 국가 폭력을 중심으로 너무나도 솔직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세련’되어 질수록, 이러한 직접적인 폭력의 형태는 점차 예외적인 것이 된다. 전에는 국가 권력이 폭력을 통해 해내던 일들을, 이제는 교육/전통/관습의 영역에서 떠맡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학교, 가족, 회사, 사회라는 일상적인 영역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책임을 군말 없이 ‘자연법칙’으로서 받아들이는 노동자 계급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맑스는 바로 우리들이 이런 정교한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맑스주의자이자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1970년대 이후에는 세계 자본주의가 충분한 성장을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원적 축적의 방식, 그의 표현대로라면 약탈적 축적 방식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노동 조건이 '자연 법칙'이 아니라는 증거가 다시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최근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국가폭력의 사례들만 생각해 보아도 일리 있게 다가온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오늘날, 누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가?
이는 동시에 우리가 교육/전통/관습을 통해 '자연법칙'으로 습득해 낸 자본주의적 사고방식들이 깨져나갈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약탈적 축적'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폭력들이, 그리고 옛날 옛적 벌어졌던 '본원적 축적'의 과정이, 우리의 일상적 노동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힘들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조건들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이해함으로써 말이다. 그 안에 있는 강제성과 폭력성이 드러나는 순간, 즉 우리가 '자유로운 노동자'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이 '자유'라는 단어 속에 어떤 의미들이 담겨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묻게 될 것이다.
맑스는 자신의 많은 글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종교, 법률, 철학, 정치가 그 물질적 토대라 부를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반영하여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회 속에 있는 개인들은, 여기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자신의 물질적 토대, 경제적 조건을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부당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맑스의 글을 읽음으로써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자연법칙’에 질문을 던지는 인간, 계속해서 이에 거스르는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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