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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기계는 인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최 유 미 / 수유너머N 철학교실 회원
기계는 가치중립적인 것일까? 맑스는 19세기 초에 일어난 영국의 기계파괴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가 기계와 기계의 사용을 구별하고, 따라서 물질적 생산수단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이용하는 사회형태를 공격하는 것으로 옮길 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자본I, 575p
맑스도 기계가 문제가 아니라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맑스는 생산 수단이 사적소유의 형태가 아니라면, 전인민이 기계생산의 풍요로운 결실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하지만 노동자가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에서만 소외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노동의 결실을 나눠가질 수 있다고 해서 하루 종일 콘베어벨트에 앞에서 납땜만 하는 삶이 행복할까? 맑스가 이 생각을 안했을 리야 없겠지만 기술이 더 발전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소위 완전자동화가 이룩되면, 인민의 노동해방도 가능하리라고 말이다. 그런데 완전 자동화는 정말 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일까? 완전한 기계는 어떤 기계일까?
1. 자동화의 기술성
맑스는 “완전히 발달한 기계는 어느 것이나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세 부분, 즉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로 이루어진다.”(자본I, 501p)고 분석하였다. 이런 기계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도구와 기계는 자연스럽게 구분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망치는 기계가 아니라 도구다. 도구는 혼자서 스스로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도구로서의 망치는 인간이 손에 들려 있던지, 전동망치의 작업기로 달리던지 해야 비로소 작업을 하는 것이다. 망치가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을 따져보자. 전동망치라면 전기에너지가 동력원이겠지만, 인간은 탄수화물을 소화시키면서 발생시키는 힘이 동력이 된다. 전동망치라면 에너지를 축의 상하운동으로 전환하는 전동장치가 있겠지만, 인간은 팔이 전동장치다. 거기에 작업기로서 망치가 장착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망치질이 되기 위해선 언제나 동력과 전동장치가 필요하고, 망치는 언제나 기계의 일부인 작업기다. 그리고 망치가 장착된 것이 유기체인가 무기체인가는 망치질이라는 기술성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망치를 들고 작업하는 대장장이는 은유가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로 이루어진 기계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1
그렇다면 기술의 완전성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맑스의 완전한 기계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면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가 유기적으로 맞물려서 잘 작동해야 할 것이다. 기계가 잘 작동 된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만일 어떤 기계가 유럽에서는 잘 작동했는데, 브라질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면 2 그 기술의 완전성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기계의 완전성이란 어떤 외부환경과 만나더라도, 약간의 조율만으로 잘 작동될 수 있느냐로 가늠될 수 있다.
망치질을 하는 노련한 대장장이를 하나의 기계장치로 생각해 보자. 그는 어떤 쇳덩어리도 멋진 칼로 만들 수 있다. 그가 내리치는 망치는 벌겋게 단 쇳덩이로부터 순간순간의 신호를 전달 받아 근육에 전달하고 다시 피드백을 받아서 내리치는 세기를 조절한다. 망치 자체는 어떤 고정적인 작동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쇳덩이의 미세한 재질의 변화가 망치에 전달되는 신호를 자신의 근육으로 감지하고, 그 변화에 맞는 내려치기의 동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새로운 동작은 그 망치와 그 팔 근육이 여태까지 함께 작업하면서 만들어온 강도들에 근거해서 어떤 조절의 형태로 만들어 진다. 이렇게 대장장이-망치 기계 장치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언제나 훌륭한 완성품을 낼 수 있다. 그건 전적으로 기계장치의 작동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외부 여건의 변화에 맞추어서 새롭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동망치는 어떨까? 고정된 외부환경을 전제하고, 최적의 망치질 동작만을 뽑아내어 반복하게 하는 것이 전동망치의 자동화다. 자동화는 어떤 특정 환경에 최적화라고 간주되는 한 가지 동작외의 다른 모든 동작의 가능성을 배제시켜야 구현될 수 있다. 그래서 자동화는 특정조건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것이고, 외부환경에 대한 조절력과는 반비례관계일 수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기계의 완전성, 혹은 기술의 완전성은 완전자동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가조절능력(autopoiesis)이 얼마나 우수하냐에 따라 가늠된다. 왜냐하면 기계는 기본적으로 늘 외부환경과 연결되어 있고, 외부환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련한 대장장이-망치로 구현된 기계장치와 전동망치의 기술성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후자가 더 낮은 기술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3
대공업적 기계가 매뉴팩쳐시대의 기계에 비해 훨씬 진보된 기술이라는 생각은 자동화 기술에 대한 애매한 이해에 근거한 착각인 듯하다. 대공업의 시기를 가능하게 한데는 아무런 기술적 성취도 없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기술적 요소, 말하자면 동력기, 전동장치 등은 분명히 추가된 기술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대공업시대에 매뉴팩쳐나 그 이전의 장인들의 공방에서 구현되던 기술성 자체가 본질적으로 향상된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기술요소의 추가와 대체에 의해 최종 결과물을 생산하는 총체적 기술성은 오히려 하락한 것이다. 대공업적 거대 기계장치는 기술적 진보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욕망이 기술에 구현된 일종의 하락이고, 변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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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를 기반으로 한, 대공업적 기계는 기술성도 낮을 뿐 더러 그 기술성 자체가 이미 자본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그래서 그 기계장치의 소유권만 바꾼다고 해서 기술이 인민의 복리에 전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 대공업적 기술은 대량생산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곧 자연에 대한 부단한 착취를 욕망하게 하고, 과잉 소비를 풍요라고 착각하게 한다. 자본주의적 욕망과 자동화라는 기술성이 품고 있는 욕망의 방향은 그래서 동일하다. 뿐만 아니라 자동화의 기술성은 인민을 콘베어벨트 앞에 서야하는 자와 기계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자로 위계 지을 것을 욕망하게 한다. 그러니까 19세기 초 영국노동자들의 기계파괴투쟁을 무지의 소산으로 폄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기계자체, 그 기술성 자체를 파괴하지 않으면 어떤 새로운 관계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자리 박탈의 일차적인 분노도 있었지만, 기계를 점거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으로 나간 것은 어떤 본능적인 ‘해로움’을 직감한 것은 아닐까?
2. 완전한 기계
그런데 정말 인간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항구적인 자기조절력을 완벽히 갖춘 기계는 불가능할까?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아닌가? 생물학에서 외부환경에 대한 자가조절력을 완벽하게 갖춘 기계를 ‘생명’이라 부른다. 자가조절력이 상실되어, 각 기관의 동일성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것이 생물학적 죽음이다. 기계도 마찬가지다. 자가조절력을 가진 기계는 잘 작동하는 것이고, 그 능력을 잃게 되면 고장이 나서 작동을 멈춘다. 인간이 매개해서 자가조절력을 유지하거나 신속히 회복할 수 있으면 그 기계는 자가조절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술의 완전성은 높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가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기계도 아무리 인간이 매개하고 변화할 수 있는 비결정성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환경에 완벽한 자기조절력을 가질 수는 없다. 자신이 수용하기 힘든 압도적인 변화는 생명체든 기계든 죽을 수밖에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멸의 안드로이드 로봇을 희망하는 것은 기술의 완전성이라는 의미에서도 망상이다.
기계는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엄청나게 확장시켜준다. 분자스케일 이하의 아름다운 세상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우주의 생명체에 대해 갑론을박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기계덕분이다. 하지만 인간이 기계를 발명했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필요에 의해 기계를 특정한 방향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기계는 자신의 조절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인간을 몰아간다. 비생명체 따위가 어떻게 감히 생명체를 행위 하게 만든다니! 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생각하지 마시라. 기계는 작동을 멈춰버리거나 엉뚱한 결과를 산출하는 방법으로 기술의 방향을 지시한다. 그래서 기술은 애초에 인간이 계획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버리기 십상이다. 이건 인간의 욕망이 기술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하고 상당한 정도로 상관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인간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면, 지금과 같은 기술들의 논리적인 발달구조를 따라갈까? 전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굳이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않아도 동양의 과학기술과 서양의 과학기술의 서로 다른 발전상이 이미 증명하고 있는 바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투영된 기계가 아니라 어떤 기계를 상상해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기술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는 기계와 어떤 관계이어야 할까? 이에 대해 시몽동은
“인간은 기계를 이해한다. 그 인간은 기계들 위에서가 아니라 기계들 사이에서 행위하는 기능을 가지며, 거기에서 진정한 기술적 앙상블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한다.”
시몽동,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197p
라고 말한다. 기계가 자가 조절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기계의 관리자가 아니라, 정보의 번역자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완전한 기계일수록 어느 정도의 비결정성을 늘 보존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 인간이 그들 기계간의 매개자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계의 발전에 전면적인 자동화 기술이 들어설 여지는 아주 희박하다.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기계의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기계를 가지고 작업하는 사람들은 “전자동”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자동을 언제든 수동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계가 더 완전한 기계이고, 더 잘 작동하는 기계다. 전자동이란 대개는 하나의 기능에만 특화 시킨 방식으로 통합되어 있어서, 부분에 문제가 생겨서 뭔가를 개선해야 할 때 다른 부분이 그 개선을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수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기계 쓰레기가 점점 쌓여가는 이유 중 하나다.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다른 기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어떤 기계를 반대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대규모 콘베어형 기계, 고장이 났을 때 인간이 그 기술에 삽입되어 매개해 주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게 되어있는 기계, 전자동이어서 고장 나면 통째로 버려질 수밖에 없는 기계, 인간을 한없이 수동적으로 만드는 기계들이 그것이다.
고장이 났을 때, 완전히 대책이 없어지는 기계 중 대표적인 것이 핵발전소라 할 수 있다. 항구적인 자기조절능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그래서 이건 더 기술이 발달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핵발전소의 건설 뿐 아니라 이것에 연구비가 투입되는 것 자체도 반대해야 한다. 요즘은 사물 인터넷이 떠오르는 기술 중 하나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를 둘러싼 전자기기가 나의 상태를 자동적으로 감지하고 바깥의 날씨, 스케쥴등을 파악해서 입을 옷도 제안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이게 파라다이스일까? 내 신체는 점점 서비스를 받아야 사는 수동적인 신체로 화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계도 당연히 반대해야 한다.
완전한 기계는 잘 작동하는 기계다. 잘 작동한다는 것은 조절력이 잘 유지되고, 혹 문제가 되더라도 쉽게 조절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계를 말한다. 이때 인간은 기계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기계 사이를 잘 번역해 주고, 그가 조절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때야 비로소 인간은 기계를 이용해서 뭔가를 생산하지만 그 기술성에서 소외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능동적인 활동을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착취도 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진경선생은 이렇게 확장된 기계개념을 <불온한 것들의 인문학>에서 ‘태초에 사이보그가 있었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 실제 남미에 수출된 와트의 증기기관이 그곳에서 잘 작동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 움베르토 마뚜라나의 오토포이에시스는 기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오토포이에시스라는 개념의 기원이 로버트위너의 사이버네틱스에서 왔으므로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오토포이에시스는 안정상태로 향해가는 네거티브 피드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격변을 거쳐서 새로운 안정상태로 도달하는 창발적 성질을 말한다. 시몽동은 안정상태에서 새로운 안정상태로 전이해가는 오토포이에시스적 기계적 앙상블을 준안정상태로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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