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N에서는 분기별로 ‘이진경의 철학교실’(이철교)와 ‘인문사회과학연구원’(인사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철교는 철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의+세미나 프로그램이며, 인사원은 보다 높은 강도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세미나 형식의 프로그램입니다. 각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참가한 모든 학인들이 자신이 습득한 개념을 이용해 에세이를 써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명예의 전당]은 학인들이 발표한 에세이 중 그 내용이 참신하며 전개가 정연한 것들을 선별하여 게시하는 자리입니다.
빈고? 빙고!
: 자본과 화폐 너머, 새로운 관계와 시간을 위한 게임
살 림 / 수유너머N 철학교실 회원
마음에 드는 칸을 색칠해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 인간 본성,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
인간 이기심에 대해 마르크스는 어떤 언급을 남겼을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이기심으로 가득한 악덕 자본가들을 등장시키지만, 자본가는 그저 자본의 담지자일 뿐이라고 기술한다.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의 내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략) 이 운동의 의식적 담지자로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 된다. (중략) 이러한 유통의 객관적 내용[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이 되고 추상적 부를 점점 더 많이 취득하는 것이 그의 행동의 유일한 추진적 동기로 되는 한, 그는 자본가로 기능한다.”
칼 마르크스, 김수행 역, 『자본론Ⅰ(상)』 p.196~198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가치증식을 위한 착취의 과정이 그저 자본 자체의 내적 운동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이런 전개는 자본가의 악덕한 본성에 대한 질타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문제 삼음으로써, 자본가의 허울을 두둔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렇게 자본가의 악덕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탓으로 돌린 데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철학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
칼 마르크스, 최인호 역,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1』,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제6항, p.186
결국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사회와 관계하는지를 고려해야 하며, 그 사회란 생산능력과 생산관계로 규정되는 경제적 토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에 대한 논의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마르크스에게 있어 인간의 본성이란 독립변수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조건에 따른 종속변수로 다뤄진다.
▌ 스미스, 자비심에 자물쇠를 채우다
인간 본성에 대한 가능성을 사회적 관계 속에 남겨둔 마르크스와 달리 애덤 스미스는 노골적으로 이기심을 경제적 논의의 장으로 소환시켰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self-love)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애덤 스미스, 김수행 역, 『국부론』 p.19
(이로써 저 유명한 스미스의 문장은 칠천백만스물세 번째쯤 참조되고 있다.)
분업의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스미스는 인간의 자비심을 경제학적 논의 밖 1으로 밀쳐내고, 이기심을 한껏 품에 안았다. 스미스는 인간은 항상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타인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사실 스미스 이후 경제학자들이 전제하는 효용함수 속 ‘합리적 경제인’은 언제나 이기심과 ‘케미’를 쌓아왔으며, 모든 경제학적 논의(교환원리, 시장균형, 투자안 선택 등등)의 바탕에는 인간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 이기심 없이는 어느 것 하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주류경제학의 슬픈 현실이 된 데에는 이처럼 스미스의 탓이 크다. 더불어 우리는 경제학에서 인간의 자비심을 논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방법이며, 경제학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세뇌 당해왔다. 2 이렇듯 경제학자에게 자비심이란 일종의 풀 수 없는 방정식이며 견딜 수 없는 무리수가 아닐까?
이기심으로 단단히 묶여진 자본의 매듭 탓에 자비심과 배려, 협력이라는 주제를 경제학 안으로 끌어안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혁명이나 기획이 아니라 굳어버린 의식의 틈에 균열을 내는 사소한 계기들이 아닐까. 이를테면 빙고게임 같은 것?
6명이 참여한 빙고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참가자 A, B, C, D, E, F에게는 각각 1,000만원의 자금이 주어진다. 이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선택(가) : 3%의 수익이 발생하며, 그 수익을 전부 나 혼자 가진다.
선택(나) : 12%의 수익이 발생하지만 그 수익을 다른 참가자 5명과 균등하게 나눠서 받는다.
예를 들어, 참가자 A, B, C는 (가)를 선택하고 참가자 D, E, F는 (나)를 선택한 경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게임 | A | B | C | D | E | F |
선택 | 가 | 가 | 가 | 나 | 나 | 나 |
최초 수익 | 3% | 3% | 3% | 12% | 12% | 12% |
D의 나눔 | +2% | +2% | +2% | -10% | +2% | +2% |
E의 나눔 | +2% | +2% | +2% | +2% | -10% | +2% |
F의 나눔 | +2% | +2% | +2% | +2% | +2% | -10% |
합 계 | 9% | 9% | 9% | 6% | 6% | 6% |
이 경우, (가)를 선택한 사람들이 (나)를 선택한 사람보다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이는 경제적 선택에 있어 이기심의 발현 계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참가자들이 (가)를 선택한 경우의 결과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참가자들이 이기심에 따라 모두(가)를 선택할 경우 참가자들은 단 3%의 수익만을 얻을 뿐이다. 이유는 처음에 (나)를 선택한 D, E, F의 나눔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두번째게임 | A | B | C | D | E | F |
선택 | 가 | 가 | 가 | 가 | 가 | 가 |
최초 수익 | 3% | 3% | 3% | 3% | 3% | 3% |
D의 나눔 | - | - | - | - | - | - |
E의 나눔 | - | - | - | - | - | - |
F의 나눔 | - | - | - | - | - | - |
합 계 | 3% | 3% | 3% | 3% | 3% | 3% |
자, 그렇다면 좀 더 머리를 굴려보자. 이 게임에서 개인이 최고의 수익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방법은 참가자 A가 나머지 참가자들에게는 (나)를 선택하게 한 뒤 자기 혼자만 (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경우 A의 수익은 다음과 같다.
세번째게임 | A | B | C | D | E | F |
선택 | 가 | 나 | 나 | 나 | 나 | 나 |
최초 수익 | 3% | 12% | 12% | 12% | 12% | 12% |
B의 나눔 | +2% | -10% | +2% | +2% | +2% | +2% |
C의 나눔 | +2% | +2% | -10% | +2% | +2% | +2% |
D의 나눔 | +2% | +2% | +2% | -10% | +2% | +2% |
E의 나눔 | +2% | +2% | +2% | +2% | -10% | +2% |
F의 나눔 | +2% | +2% | +2% | +2% | +2% | -10% |
합 계 | 13% | 10% | 10% | 10% | 10% | 10% |
고명하신 스미스의 사적이윤추구 계율 아래, 상대에게는 등가교환이라 떠벌리고는 뒤돌아서서 득실을 셈하는 ‘부’등가교환의 논리 안에서만 개인은 허상 속 평안을 얻는다. 하지만 함정은 참가자A만 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모든 참가자들은 서로를 속이고, 그래서 서로에게 속을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로 되돌아오고 만다. 결국 세 번째 게임은 두 번째 게임으로 귀결된다는 점이 이기심을 전제한 스미스의 논리이고 자본주의의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비심과 배려, 협력이 필요하다. 세 번째 게임을 반복하다 두 번째 게임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제 네 번째 게임을 해볼 차례이다.
네번째게임 | A | B | C | D | E | F |
선택 | 나 | 나 | 나 | 나 | 나 | 나 |
최초 수익 | 12% | 12% | 12% | 12% | 12% | 12% |
A의 나눔 | -10% | +2% | +2% | +2% | +2% | +2% |
B의 나눔 | +2% | -10% | +2% | +2% | +2% | +2% |
C의 나눔 | +2% | +2% | -10% | +2% | +2% | +2% |
D의 나눔 | +2% | +2% | +2% | -10% | +2% | +2% |
E의 나눔 | +2% | +2% | +2% | +2% | -10% | +2% |
F의 나눔 | +2% | +2% | +2% | +2% | +2% | -10% |
합 계 | 12% | 12% | 12% | 12% | 12% | 12% |
모든 참가자들이 (나)를 선택한 경우, 각각 12%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서로의 신뢰와 협력, 배려를 기반
으로 이제는 두 번째 게임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참가자 전체의 수익이다. 세 번째 게임에서 모든 참가자들의 수익의 합은 13%+10%×5명=63%이지만, 네 번째 게임에서의 수익의 합은 12%×6명=72%이다. (참고로, 두 번째 게임의 수익의 합은 3%×6명=18%에 불과하다.) 공동체의 이익이 최대가 되는 게임은 바로 네 번째 게임이다. 빙고게임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신뢰, 협력, 배려의 가치를 다시 새겨보는 데 있으며, 인간 이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경제적이라 단정한 스미스의 논리에 균열을 만드는 데 있다.
물론, 현실에서 우리는 손실을 보는 일이 허다하며, 12%의 수익이란 너무 낙관적일 수 있다. 우리에게 숫자가 전부가 아니며, 관계와 용법이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3%와 12%는 ‘공동체은행 빈고’에서 남다른 뜻을 지닌다.
▌ 공동체와 ‘썸’ 타는 은행, 빈고
빈집 4 공동체를 위한 빈고의 시작은 보증금의 소유권과 전월세전환율의 법칙으로부터다. 한국의 주택임대시장의 현실에서는 보증금이라는 목돈이 필요한데, 빈집에 모인 사람들의 상황이 저마다 달라 누군가는 더 많은 보증금을 내게 되고 어떤 이는 보증금을 내지 못한 채로 같이 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보증금을 낸 이가 떠나야 하는 경우, 빈집의 지속성에 큰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보증금의 소유권에 구에 받지 않고 빈집을 계속해서 꾸려갈 수 있는 구조적인 장치가 필요했다. 더불어 전월세전환율 법칙에 따라 전셋집과 월세집 사이의 균형도 고려할 필요가 생겼다. 왜냐하면 월세집의 경우 전셋집보다 주거비 부담이 서너 배에 이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빈집이 갖는 공유지라는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더 많은 빈자 다중과 함께하기 위해 다양한 상황에 처한 여러 빈집들을 서로 잘 엮어줄 무엇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민들을 바탕으로 공동체은행 빈고가 만들어졌다. 5
기본적으로 빈고는 보증금에 대한 소유권을 개인에게서 공유지로 옮기면서 출자자와 빈고, 이용자의 삼자관계로 변환시켰다. 보증금을 낸 사람은 빈고의 출자자로 지위가 바뀌고, 여러 빈집들은 빈고의 이용자로서 보증금을 이용한다. 보증금의 소유권을 공유지인 빈고로 넘김으로써 이제 빈집은 구성원이 바뀌어도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기심의 발현 계기가 되는 화폐(보증금)의 소유권을 생활수단(빈집)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투기대상이 되기 십상인 주택을 온전한 삶의 공간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6
다음으로 빈고의 수익구조와 잉여금의 배분을 살펴보자. 우선, 빈집은 이용한 보증금에 대해 연12% 이자를 빈고에 제공한다. 연12%는 전월세전환율과 동일하다. 사실 좀 더 낮은 이자를 책정할 수도 있었지만, 빈집 사람들은 빈고의 보증금을 이용하지 못했더라면 어차피 누구에게든 냈어야 할 돈이므로 연 12%를 내는 것에 개의치 않아 했다. 그리고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빈고가 이용수입을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공동체 은행 빈고의 운영구조
위 그림은 빈고가 이용수입을 어떻게 나누는지를 잘 보여준다. 12%의 이용수입은 먼저 출자자에게 출자지지금이라는 이름으로 출자금의 3%, 이용자인 빈집에게 공동체기금이라는 이름으로 3%, 지구분담금이라는 이름으로 외부공동체에 3%, 마지막으로 빈고적립금으로 3%씩 똑같이 나누고 있다. 여기서 수입을 나누는 빈고의 남다른 특징은 이용자인 빈집에도 수입을 다시 돌려준다는 것과 아무런 관련 없는 외부 공동체에도 수입을 나눈다는 사실이다. 빈고 활동가인 좌인 님은 “사실 빈고가 12%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출자자의 출자뿐만 아니라 이용자가 보증금을 이용했던 덕분이며,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알지 못하는 어떤 이의 호의와 배려 덕분이라는 생각을 실현한 것”이라며 이들과 함께 빈고의 수입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빙고게임에서 (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가 일하고 받는 수입이 오롯이 내 노력만의 결과가 아니라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알게 모르게 배려해준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마땅하며, 그런 협력과 배려의 과정이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더 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빈고의 나눔은 자본주의적 가치증식과 잉여가치 착취 논리를 비껴가며, 나눔으로써 더욱 풍요로울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 공동체를 위한 호혜적 기술
빙고게임과 공동체은행 빈고는 일종의 호혜적 기술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기심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비심과 배려, 협력이 충분히 ‘경제적’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호혜적 기술에 대한 제럴드 A. 코헨의 인용으로 글을 마친다. “나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직면한 주된 문제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장치를 어떻게 고안할지 모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주된 문제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에게 (배려와 협력을 위한) 적절한 조직과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 경제학적 논의의 안과 밖은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경제학적 논의인가? 자비심을 다룬 경제학자는 없는 것일까? 마르크스 또한 인간 본질에 대한 논의를 종속변수로 미뤄두면서 이 논의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어 보인다. [본문으로]
- 자비로운 사람이 경제학적 논의에 등장하는 경우는 치밀한 경제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가 아니라 항상 예외적인 상황에서이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사랑, 배려, 자비 같은 주제를 학문적 담론 밖에 방치해온 것은 아닐까. [본문으로]
- 지음, 「대안금융 수업」 빙고게임2, 거시경제학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용의자의 딜레마의 변형된 사례이다. 용의자의 딜레마란, 이기심에 따른 개인의 최적 의사결정이 사회 전체적으로 최적의 결과를 달성하지 못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고집불통 경제학자들은 이기심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 이기심의 전제를 수정하는 대신 선택안의 조건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용의자의 딜레마를 해결해왔을 뿐이다. [본문으로]
- 해방촌에 자리한 빈집은 손님들의 집을 뜻한다. 머무는 사람들의 무늬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이곳에선 삶의 욕망을 재배치하고 새로운 시간과 관계를 엮어간다. [본문으로]
- 흔히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0만원이라 셈하는 보증금과 월세 사이의 전환율을 말한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0만원인 경우 추가로 보증금 1,000만원을 더 마련할 수 있다면 월세 10만원을 아낄 수 있다. [본문으로]
- 대출 받은 이, 즉 채무자를 뜻하는데 빈고에서는 대출이라는 말 대신 이용이라는 말을 쓴다. 따라서 빈고에서 채무자란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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