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 자유주의 무역과 호모에코노미쿠스
장 희 국 /수유너머N 회원
1. 트릴레마(trilemma)
한-중 FTA가 타결되었다는 기사가 온라인을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2014년 11월 16일에는 한-뉴질랜드 FTA 역시 타결되었다고 한다. Free Trade Agreement(FTA), 장벽 없는 국제 규모의 무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이 되고 있다. 정책적 변화뿐만 아니라 해외 유명 사이트의 물건을 직접 구매하는 이른바 ‘직구’ 열풍만 보아도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 국제무역의 시대에 눈에 띠는 문제점이 하나 있다. 소위 ‘트릴레마’라 불리는 현상이 그것이다. 두 가지 문제 상황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을 ‘딜레마’라고 한다면, 세 가지 상황을 모두 택할 수는 없는 현상을 ‘트릴레마’라고 한다. 이 시대 국제무역에서 관찰되는 ‘트릴레마’는 바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Financial Integration), 통화정책의 자율성(Monetary Independence), 환율 안정(혹은 고정 환율, Exchange rate stability)의 세 가지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셋 중 둘은 동시에 추구할 수 있지만 나머지 한 가지는 반드시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셋 중 한 가지 정책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라면 간단하겠지만 ‘트릴레마’를 구성하는 세 가지 조건은 전 세계적 국제무역을 위해 반드시 달성되어야 할 기본 정책이다. 환율 안정 없이는 국제적인 거래가 지속될 수 없으며, 안정된 화폐를 매개로 한 국제 거래 시장에서는 상품(물건)의 수출입과 화폐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동시에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무역 수출입의 주체인 각국의 국내시장이 안정되어야 하며, 생산과 소비의 연속성을 보장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달성되지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사회는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제들도 발생하게 된다.
(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leespider?Redirect=Log&logNo=150160358226)
2. 전 세계적 무역시장의 태동기와 ‘금 본위제’
우리 역사는 ‘트릴레마’의 문제가 극심해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이미 한 번 보여준 바 있다.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장된 세계무역시장은 칼 폴라니의 분석처럼 ‘금 본위제’를 신앙처럼 추구하며 발전된 세계였다. 폴라니는 상공업의 발전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산업과 자본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야 하는 구조로 바뀌며, 이를 위해서는 모든 세계의 자원이 이동 가능한 잠재적인 시장 형태로 변해야 함을 지적한다. 국내의 자원 규모를 넘어서는 기계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세계 각국은 특성화된 산업을 선택하고, 이 산업의 자원들이 활발하게 유통되게 만들었다. 자원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국제무역은 기계제-자본주의 생산체제가 태동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문화, 물가, 자원 등은 모두 다르기에 국제무역을 위해서는 단일한 통화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금 본위제’이다. 즉, ‘금 본위제’를 추구한다는 것은 환율 안정을 가장 강력한 형태로 실현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금 본위제’가 추구되는 가운데 세계 각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국제 환경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당시 급속도로 발전하는 산업을 금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필연적으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금 본위제’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추구하는 당시 사회에서는 이에 대처하기가 상당히 곤란했다. 특히 디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긴축 재정을 발휘하는 순간 국내 경제는 급속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디플레이션 방지정책의 무기력한 상태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노동자의 임금 상승 요구도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것이 되었다. 그 어떤 것이든 “개입주의적 정책들이 시장 메커니즘에 가져오는 해로운 영향들은 모조리 환율이라는 지표를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폴라니, 거대한 전환 554)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그저 휩쓸릴 수밖에 없으며,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이 임금 인상을 요청하는 순간,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복지’를 외치는 순간 환율의 변동과 국제무역의 조건 악화라는 명시적 지표가 이를 가로막게 된 것이다.
이처럼 폴라니는 우리에게 익숙한 “노조 운동은 나쁜 것”이며, “국가 경제를 뒤흔든다”는 생각, 그리고 “분배 위주 복지 정책이 국내 경제를 망친다”는 생각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무역을 신성시 할 때, 국제 거래를 위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모든 조건(특히 노동자)을 희생하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출현한다.
3. 노동의 상품화와 사회의 파괴
폴라니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일방적으로 희생되어야 하는 이러한 구조에 대해 반문한다. 노동력 역시 국제무역의 거래대상인 하나의 상품이라면,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상품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파업과 같은 정당한 협상 무기를 사용할 수 있건만 어째서 이러한 움직임은 진압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노동력은 본디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인데 강제로 상품화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된 것이다. 게다가 그 활동은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 수도, 사람 자신과 분리하여 동원할 수도 없다.”(같은 책, 243)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노동이 순전히 자기의 가격을 올리겠다는 이유 하나로 시장에서 철수해 버리면 사회는 생계 물품의 부족으로 금세 무너지고 말 것이다.”(같은 책, 555)
노동-인간 활동은 가격이 매겨지는 상품이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들의 삶에 기본적인 부분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사회를 유지시키고 순환시키는 필수적인 작용이었을 뿐이다. 노동력에 가격이 매겨지고 노동이 판매가 되기 때문에 인간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자연스러운 인간 활동을 강제로 상품화시켰을 때 발생한다.
노동-인간 활동의 상품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파괴를 가져온다. 다양한 노동-인간 활동들은 기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오랜 기간 쌓아온 가치를 담고 있다. 하지만 노동이 상품이 되면서 상품화되지 않는 것은 한순간에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예를 들어 몇 년 전부터 제주도에서는 흐드러지게 널린 귤을 아무도 따서 팔지 않는다고 한다. 귤을 따는 인건비가 판매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귤을 따서 먹는 것은 분명 인간이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는 행위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을 따는 행위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면서 그 행위 자체가 폐기된 것이다. 국제시장의 태동기, 즉 자본주의가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시기에는 이러한 상품화의 영역이 더 협소하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거리에는 빈민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상품화가 가능하다고 판단된 특정한 행위만이 사회에서 수용되었다. 그렇게 노동은 다른 산업 자원처럼 필요할 때마다 상품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했고, 이를 위해 다양한 폭력적 사건들이 벌어졌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앞선 글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참조)
하지만 사회의 파괴가 무분별하게 계속 진행될 수는 없다. 인간들의 삶의 터전인 사회가 해체된다면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결국 국제시장경제라 하더라도 국가적 보호장치가 가동되어야 하고, 노동자들의 생존 투쟁 등이 필연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트릴레마’의 난점은 국제무역 시대에 노동이라는 비상품을 상품화시키는 순간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세계시장 속 호모 에코노미쿠스
폴라니의 이러한 분석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현대 시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환율은 여전히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으며, 이 관리를 위해 노동력이란 상품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국제무역과 상품화된 노동력의 구조 속에 살고 있는 노동자는 자신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국제무역의 활성화와 노동자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은 정비례 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반비례 관계에 가까운 것이다.
이처럼 ‘직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희생은 생각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저 팔리기만 기다리는 반쪽짜리 상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더욱더 피폐해지더라도 향상되는 국제수지의 수치를 보며 자위하는 자, 자신의 권리에 대한 당연한 요구가 국제수지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불안에 스스로 포기하는 자, 바로 이러한 모습들이 세계시장 속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한 단면이다.
그렇다면 ‘트릴레마’의 난국에 갇힌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을 구원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적어도 두 가지 방법은 존재한다. 우선은 ‘트릴레마’의 기준축을 바꾸는 것이다. 금 본위제 붕괴 이후 전 세계가 취한 변동환율제 때문에 세계 각국은 다소간 정책적 자유를 얻었다. 따라서 수출과 수입 산업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만큼 국내 재정정책의 운신폭을 넓혀 ‘복지’와 ‘노동’ 정책을 강화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노동자 스스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부터의 탈피를 꿈꾸는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는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폴라니가 주장한 것처럼 그것이 우리 노동의 본질은 아니다. 먹고, 살고, 울고, 웃으며 쌓아가는 다양한 인간 활동의 총체가 바로 노동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노동의 상품화가 파괴해버린 사회의 파편들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것, 노동-상품화의 관계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품화된 인간 활동들을 적극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것, 더 나아가 상품화된 인간 활동들을 비상품화시키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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