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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 '우리 편' 세대론의 불편함

우리 편세대론의 불편함

- 우리는 바보도, 도망자도 아니다.

 

 

 

 

정 우 준 / 수유너머N 회원

 

 

 

 

세대론을 말하는 방식이

단지 내가 원한 걸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것

을 바라는게 되어서는 안된다.

나의 유해를 바라보는 것은 그 자신의 일이 되어야 한다.

(임세화, 청춘의 세 가지 거짓말, 말과 활886p)

 

 

언젠가부터 내가 속한 세대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88만원 세대, 촛불세대, 20대 개새끼(), 3포 세대, 5포 세대가 바로 우리를 지칭한 다양한 이름들이다. 우리는 이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저항의 새로운 가능성으로(촛불세대) 지칭될 때도, 갑자기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3포 세대)하며, 또 비난의 대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20대 개새끼론) 내가 속한 세대는 도통 나 조차도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다종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는 것이다. 386이란 이름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세력, 경제적으로는 경제개발의 주역이라는 단일한 의미로 지금까지 대표되는 우리 아버지 세대와 다르게 우리는 거의 매해 다른 이름, 다른 성격으로 분류되고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누군가가제멋대로 호명하는 까닭에 세대론을 읽는 것은 참 골치 아픈 일이다.


이번 호 문화과학과 말과활의 세대론에 관한 글 역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달관세대라는 조선일보의 호명법과 내용이 불쾌한 탓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불편함은 이를 반박하는 이른바 우리편 논자들의 글 속에서 보이는 20대에 대한 일방적 오도 때문이었다.

 

<아프면 청춘이 아니고 환자다. 우리가 환자에게 먼저 해야할 것은 아픔에 대한 공감이지 닦달이 아니다.>

 

 

제는 달관 세대론이 아니야!

 

 

화과학의 오찬호 글과 말과활의 임세화, 홍명교, 류연미의 글은 조선일보가 기획 연재한 달관세대가 사는 법에 관해 논하고 있다. 달관 세대란 일본의 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개념화한 사토리 세대를 조선일보가 우리나라 버전으로 번역한 것이다. 사토리 세대란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더 이상 우직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사회에 희망을 걸어보지 않는 현상을 개념화한 것인데, 앞서 이야기한 네 명의 필자는 공통적으로 사토리 세대의 형상을 조선일보가 맥락 없이 오용 혹은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조선일보는 사토리 세대를 달관 세대로 번역하며 청춘들을 돈에 욕심 없는 자유로운 영혼, 변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노력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들로 달관하기를 바라는 듯이 묘사하고 있으며, 이 같은 조선일보의 보도는 청춘의 고통을 야기한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전략이란 것이다.


아프면 환자지 개새끼야 뭐가 청춘이야라는 유병재의 말처럼 청춘들은 취업전쟁이라고 부르는 피맺힌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그것은 올곧이 사회의 부조리에서 비롯된 문제인데, 달관을 하라느니 지금 행복을 느껴라와 같은 조선일보의 말이 개똥인 것은 맞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사태는 오도하고 있다면, 오찬호와 홍명교의 글은 사태의 오도를 비판하며 우리를 오도하고 있다. 홍명교와 오찬호의 글은 청년 혹은 20대를 무지무의지의 특성을 지닌 자로 고찰하는 듯 보인다.

 

 

달관도 못하는 무지한 청춘, 오찬호가 바라본 20

 

오찬호의 대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다.는 첫 소제목인 보시니 좋으면서 왜 답답해하는가?’처럼 20대가 극심한 불평등을 겪음에도 정치적 저항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지금의 기성세대가 우리를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 스펙 경쟁에 휩싸이도록 교육하고 훈육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난의 화살은 20대가 아니라 기성세대에게 가해야져야 한다며 20대를 옹호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불편함은 20대를 옹호하기 위해 오찬호가 전제하는 20대의 모습이다. 오찬호의 눈에 보기에 20대는 “‘객관적으로엉망인 이 상황을 엉망이라고 이해시켜 줄 주변이 없다라는 말처럼 사회의 모순을 바라볼능력이 없는 무지한 대상이다. 그러니 기성세대가 창출한 공간에서 그대로 순응하고 살아가는 현재의 비정치적인 청년들은 제목 그대로 정상적인행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찬호의 글은 이렇듯 기묘하게 꼬인 논리를 보여준다. 청춘의 비정치성은 죄가 없는데, 사면의 이유가 청춘들의 무지인 것이다. 이건 도통 옹호인지 응원인지 변호인지 알 수 없다. 마치 금치산자처럼 스스로의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너의 죄를 사면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찬호에 눈에는 우리가 진정한 사토리 즉 달관 세대조차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일본의 사토리 세대는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기에,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지 않으니 우리도 하지 않겠다라는 소극적 저항이라도 수행하는 반면 우리의 청춘들은 사회의 부조리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나를 책망하거나 타인을 책망하는 개인 탓에 머물러 있는 무지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저항과 적응의 이분법 속 무의지의 청춘, 홍명교가 경험한 20

  

홍명교는 달관마저 강요당하는 청년의 미래를 통해 달관 세대라는 지칭뿐만 아니라 모든 청년담론의 종언을 요청한다. 외부에서 불우한 세대로서 청년 세대를 호명한 까닭에 청년 담론에서 이미 청년은 소외되어 있고, 청년세대론 이면에 은폐된 본질적인 갈등, 즉 계급갈등을 포함한 세대 내 갈등 같은 여타 요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홍명교의 글에서 홍명교는 스스로가 사회 참여적 활동을 하는 젊은이기 때문일까? 우리를 특정한 선택지 앞으로 소환한다. “더 나은 삶(공동체)을 만들어가기 위해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을 재생시킬 것인가, 유동하는 달관자혹은 체념하는 이등시민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일종의 사회에 대한 저항이냐 적응이냐의 이분법으로 말이다. 물론 현장에서 전자의 선택하고 헌신하는 그의 활동은 고귀하고 가치 있는 활동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홍명교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내가 윤리적 결단을 할 수 있는 주체였는지 묻고 싶다. 적응을 선택한 이들은 부도덕한 자들인가?


정희진은 과거 백화점 모녀 사건(알바에 대한 고객의 갑질)에 관한 칼럼에서 알바가 부당하게 갑질을 하는 손님에 대해 저항하지 못한 젊음의 패기 없음을 이야기한 사람에게 저항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런 말을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약자가 저항하면 이익을 보는가. 아니면 약자는 도덕적이어야 하므로 이익보다 대의를 추구해야 하는가. (...) 약자들이 저항할 줄 몰라서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저항하면 더 큰 피해가 있기 때문이다. (...) 저항해도 저항하지 않아도 비난 받는다.” 물론 약자는 저항할 수 없다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홍명교 질문의 이분법 속에는 우리들이 왜 저항이 아니라 적응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결정적 질문이 빠져있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와 같은 우파 이데올로그의 술책에 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홍명교 자신은 어떻게 이런 우파의 이데올로그의 술책에서 빠져나왔을까? 홍명교 글은 스스로의 결단을 통한 정치적 선택과 그에 따른 성과물은 서술되어 있지만, 어떻게 그 자신이 그런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나오지는 않는다. 단순히 지면의 제한 때문일까? 아니면 정치적 저항이라는 결단을 내린 자신이 보기에 다른 청춘들의 처지는 저항이 아니라 적응을 택한 윤리적 결단을 회피한 의지 없는 이들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이글레시아스(오른쪽)와 같은 혁명적 정치인을 꿈꾸기 이전에

갑질에 무릎꿇는 내 동료/친구를 보았고, 그래야만이 살아남는다는 법을 배웠다>

 


훈수와 질타가 아닌 공감을 바라며

 

최근 몇 달간 영어 점수를 따기 위해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 방학 때가 되면 나 같은 이들로 강남역 주변은 가득 찬다. 삼성그룹의 거대한 본사 앞에 있는 수많은 어학원, 그리고 성형외과와 옷가게들. 강남역에 가면 신자유주의 경쟁의 극심함을 비로소 격하게 느낀다. 하지만 그 앞에 나와 함께 영어 학원에 다니는 이들은 무지하고 적응이라는 이기심에 물들어 있는 이들일까?


청춘은 무지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헬조선임도 알고, 청춘만 꼭 아파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따위도 알고 있다. 20대는 현재의 상황이 비정상적이며 사회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 책임을 왜곡된 방식으로 민주노총이나 외국인 노동자에 돌리고 거친 대응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이 무기력하고, 무지해 보이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스스로 원한 것이다. 우리는 무지한 것이 아니라 무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를 바꾸는 것보다는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보다 쉽기 때문이다. 면접에서 노조에 가입할 것인가라는 사상검증 질문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보다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보다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결단을 회피하고 외면하고 있지 않다. 사회는 비판하지만 고치려고 하지 않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점차 커지는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기성세대의 위선을 답습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우리의 결단은 정치를 통한 해결의 가능성을 스스로 사멸시키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경쟁에서의 낙오는 곧 다시금 도약할 수 없는 아픔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청춘은 스펙 쌓기에 몰두함으로서 언제든지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토대를 더욱더 구축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청춘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쉽사리 그들을 무지하고 의지 없는 이들로 몰아가는 것처럼 쉬운 방법을 택하는 것보다 당장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어학원에서 영어공부에 몰두하고, 열정페이니 뭐니하며 난리를 부려도 인턴에 시달리는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개발하는 것이 더 긍정적이지 않을까? 세대론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자로서 청춘을 소환하며 그들에게 훈수하고 조언하고 비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알면서도 그토록 처절하게 스스로를 파괴적인 양상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한 공감을 시작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분투는 훈수와 질타가 아닌 공감에서 비롯된다.


시작처럼 임세화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취업준비생이라는 투명한 명함을 만들고 열정페이를 받아가며 장그래 법에 압살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조건에 반항하는 희생자들이 아니라, 노동이 어떻게 조직되고, 보수를 받아야하며

존중되어야 하는지를 똑같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