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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 달관을 선택하는 삶에 대한 거부

달관을 선택하는 삶에 대한 거부

류연미, <달관이라는 이름의 자기보존>을 읽고

 

 

 

수유너머N 회원 조지훈





 올해 초 조선일보에 달관세대가 사는 법이라는 기획기사가 실렸다. 내용인 즉, 취업난이 극심한 시대에 적게 벌며 적게 쓰는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기존에 회자되던 88만원 세대와 다른 점은 이들은 험난한 세상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달관하는 삶을 자신들 스스로가 선택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88만원 밖에 벌 수 없는 세다가 어떻게 삶을 꾸려나가는지, 그리고 어떠한 윤리적 자세를 보여주는지가 바로 달관세대라는 용어로 담고자 했다. 기사는 상당히 적나라했다. 현재 달관세대의 젊은이를 인터뷰하여 월 100만원으로도 월세, 생활비, 유흥비, 쇼핑, 데이트 비용, 심지어는 그중에서 20만원은 저축까지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달관세대 젊은이 중 한명인 박씨는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 부럽지 않다. 부모님은 걱정하시지만 정말 알차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내용을 소개하기까지 했다. 조선일보가 보기에 달관세대는 험난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삶의 양식인 것이었다.



 이 기사에 대한 비판은 쏟아졌다. 오마이뉴스, 한겨레 신문, 프레시안, 경향신문 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매체에서는 조선일보의 달관세대 론에 대해서 기만적이라고 논평했다. 많은 비판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말과 활> 8월 호에 실린 류연미의 달관이라는 이름의 자기보존은 제목에서부터 달관세대 담론의 허점을 잘 보여준다. 달관이라는 이름의 자기보존. , 달관세대의 달관은 개인의 윤리적 실천으로 도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선택이 박탈된 사람들이 할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게 되는 태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보존을 달관으로 치환하는 태도가 사회적인 현상임을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조선일보의 기사가 달관을 하고 있는 세대들이 마치 자신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된 것처럼, 그러한 선택에 의해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가 그러한 세대들에 달관세대라는 이름을 명명한 것에는 문제가 있더라도, 이른바 달관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대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저자 역시 몇몇의 젊은이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의 삶을 드러낸다류연미의 글에서 인터뷰이로 나오는 젊은이들도 조선일보에 소개된 젊은이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취업의 굴레에서 빡빡하게 살았던 시절과 정규 코스의 인생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긍정한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과감히 몸을 던지고, 그런 일들을 같이 하기 위한 친구들을 만나고 작은 그룹들을 조직한다. 비록 적게 벌더라도 소비를 줄이면서 다른 방향으로 욕망을 충족시킬 방편들을 찾는다. 심지어 간간히 투쟁현장도 방문하면서 정치적 실천을 꾀하기도 한다. 이른바 대안적인 삶의 유형이라고 불릴만한 삶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학교-직장의 이행경로에서 빠져나와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려는 청년들의 시도는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안으로서 많이 논의되어왔던 공동체적(혹은 코뮨적)인 삶이 사회적인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사회는 우리가 탈주하는 것에 대해서 막지 않는다. 심지어 탈주하여 대안적인 삶을 사는 것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아마도 사회는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는 인구들이 어떻게 살든, 자신들의 체제에 위협되지 않는 선에서라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탈주가 윤리적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압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탈주자들은 빈곤한데, 이는 자발적인 빈곤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달관세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빈곤을 마치 자신이 선택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저자가 보기에 자신이 인터뷰한 달관세대 청년들은 다소 분열적이다. ,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긍정하가다가도 자기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삶에서 어두운 면이 있다고 해서 그 삶이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방식이 허구적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 자신들처럼 하고 싶은 것을 택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빈곤한 조건에 처할 수밖에 없고, 반면에 사회적 조건이 어느 정도 넉넉한 사람들은 자신들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빈곤을 욕망에 대한 기회비용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이는 허구적인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선택할 만큼 풍요로운 조건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주자들에게도 사회적 조건의 문제는 중요하다. 탈주함으로써 자본주의 바깥으로 튀어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탈주가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조선일보와 같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탈주하는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소개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저자의 말대로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압력에 의해서 탈주되어진다고 한다면, 역으로 사회가 풍족했을 때 탈주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탈주자이고, 대안적인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탈주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되었기 때문에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실천해야 될 지점은 한 개인이 사회에 편입될 수도 있고, 아니면 사회로부터 탈주할 수도 있을 만큼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조건을 갖춘 사회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로만으로도 기본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프리터 족과 많은 욕심을 가지지 않고도 기본적인 생활은 영위할 수 있는 사토리 세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여기에 성공적으로 도달한다면 조선일보 기사에 소개된 100만원으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만으로도 200만원 남짓 벌어서 행복하게 사는 법이 소개될 것이다


 과연 이게 문제해결의 답일까? 물론 기본시급을 올리는 문제는 중요하다. 다만 그 문제가 선택을 강요당했음에도 선택했다고 믿고 있는 기만적인 달관 세대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달관적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토리 세대로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할런지는 의문이 든다. 탈주자들에게도 노동의 문제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비단 내가 얼마나 돈을 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노동시장의 재편이 어떻게 지배체제와 맞물리는지를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탈주의 주체가 개인으로서의 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사회의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