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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 면역시대의 정치 : 메르스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이슈&리뷰]



면역시대의 정치 

: 메르스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면역적 민주주의>, 번역/해설 : 김상운 (문화과학 83호)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홉스 패러다임


      에스포지토에게 “면역화시대에 ‘공통’(common)을 어떻게 사유하고,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은 중요하다. 그는 푸코의 생명정치론에 비어있는 ‘면역’이란 범주를 통해 정치와 민주주의, 공동체의 문제를 사유한다. 

      면역과 민주주의 혹은 면역과 공동체는 다소 뜬금없는 결합일 것 같지만 지난 6-7월 한국사회를 야단스럽게 휩쓸고 지나간 메르스 사태를 떠올려보면 대충의 문제의식은 감지할 수 있다. 

      그 때만큼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공포스럽고 불안했던 적이 있었던가. 언론은 되려 메르스 환자들이 무차별적으로 대중을 공격하는 가해자인양 교묘하게 피해-가해 구도를 역전시켰다. 보건당국과 언론은 메르스 환자들에게 번호를 매겨 그들의 궤적을 추적하며 마치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뒤쫓듯이 집요하게 그들의 모든 동선을 복원해냈다. 메르스 의심환자로 분류되면, 72시간을 외부와 단절한 채 고독하게 보내야 했다. 고독의 근원은 나의 곁을 이루던 사람들, 사물들과의 난폭한 단절 때문이었다. 그것은 "무엇엔가 손이 닿을 때마다 나를 묻히는 것" 같은 불안이었다. 



      "1시간30분쯤 지나 보건소에서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다른 세계가 내 앞에 있었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의 모든 행동에 신경이 곤두섰다. 무엇엔가 손이 닿을 때마다 나를 묻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바이러스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은 예민한 자기검열로 이어졌다. 자발적 통제와 강제적 통치는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기자가 겪은 ‘메르스 자가격리기’> 

      /한겨레 21(2015.6.15), 이문영 기자. 



      [사진] 광주지역에서 자기 격리 중인 메르스 환자가 격리장소에서 이탈하자, 보건당국이 추적, 체포(?) 하고 있다.

       



      면역(력)이란 “척추 동물이 자신의 생화학적 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항체를 만듦으로써 이물질이 체내 조직에 도입되는 것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에는 자기가 아닌 것, 바깥은 자기를 침투하는 적으로 간주되고, 이에 대해 방어하고야 말겠다는 타자에 대한 태도가 깔려있다. 그래서 면역은 “‘자기’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 ‘자기’를 보존하고 보호”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면역을 둘러싼 이러한 인식은 곧장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념들과 공명한다. 홉스 이래 근대정치사상이 전개해왔던 단일한 주권이 통치하는 국가란 무엇보다 면역화된 정치의 표본으로 등장했다. 이 글을 번역한 김상운의 설명에 따르면, 홉스의 리바이어던 국가는 개인이나 국가를 외부로부터 지켜내는 동시에 자기 내부의 갈등을 중화시키려고 하는 자기 면역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적 신체로 그려내면서 국가의 통치를 신체와 질병의 은유로 이야기한다. 



      ‘각부 장관들’과 사법 및 행정 ‘관리들’은 인공 ‘관절’이다. ‘상벌’은 모든 관절과 사지를 주권자와 연결시켜 그 의무의 수행을 위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므로 자연인의 신체에서 ‘신경’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 구성원 개개인 모두의 ‘부’와 ‘재산’은 그의 ‘체력’이다. ‘인민의 복지’와 ‘인민의 안전’은 그의 ‘업무’이다. ‘조언자들’은 그가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을 제안하기 때문에 그의 ‘기억’이다. ‘공평’과 ‘법’은 인공 ‘이성’이며 ‘의지’이다. ‘화합’은 ‘건강’이다. ‘소요’는 ‘병’이다. 그리고 ‘내란’은 ‘죽음’이다.

      - 홉스, <리바이어던> 1권, 22쪽 



      홉스에게 평화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인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평화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의 문제이므로 개인들만 놓여있는 자연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국가라는 단일한 주권하에서만 평화는 보장된다. 이때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방위체계를 구축해야하며, 이를 통해 국가로 통합된 국민들, 아니 국민들이 모여 거대한 신체를 이룬 국가의 자기보존은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는 외부로부터만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내란의 위험은 늘 잔존한다. 오늘날 법에 의해 정당화된 폭력이 국가방위 뿐만 아니라 더욱 빈번하게 대중들을 향하는 것은 국가의 종기인 반란을 일으키는 인민을 도려내고 주권적 신체를 완성하고 싶은 홉스의 의지와 공명한다. 이질적인 것에 감염되지 않은 신체, 외부의 적과 싸워 동질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그런 상태란 완벽한 자기 면역적인 신체이자, 홉스의 정치적 유토피아다. 




      그런데 주권적 면역신체-국가는 ‘자기보존’을 위해 인민(multitude)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힘(역량)을 제거해야만 했다. 

      자신의 역량을 포기한 채 리바이어던의 재료가 된 인민은 국민(nation)이 되고, 오로지 타인으로부터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국가라는 신체의 일부가 된다. 국가-신체는 자신에게 위험이 되는 혹은 이질적인 것들은 모조리 소독하고 방어해야하는 강박적인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면역과 공포라는 감정은 뒤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홉스가 말한대로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에 대한 공포 때문에 면역신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면역의 과잉이 불안과 공포를 일으킨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연상태의 공포와 면역화된 국가에서의 공포는 다르다. 면역화된 국가에서의 공포란 늘 특정한 대상을 겨눈다. 자기가 성립되고 나서는 자기가 아닌 것에 대한 공격은 늘 '자기'라는 신체를 고립시킨다. 이 개인에게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외부란 모조리 적이므로, 이들의 역량은 점차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수백명의 국민들로 구성된 거인 리바이어던은 면역신체-면역화 정치의 역설을 보여주는 듯 하다. 만인을 향해 전투의지를 불태우던 인민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역량을 포기한채 난쟁이가 되어 거인의 몸을 이루었다. 면역화의 끝은 외부에 대한 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죽음으로 향한다. 자기로부터 출발했으되 자기가 성립하기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한 순간 면역의 과잉으로서 근대정치의 모순은 폭발한다. 



      면역화 : 죽음으로 달려가는 생명정치


      면역화 사회는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다. 근대국가는 주권과 소유, 개인과 국가의 개념들을 통해 내부의 갈등을 소거하거나 중화시키려는 모색과 함께 설립되었다. 하지만 내부의 갈등은 늘 소거되지 않거나 중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을 마치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외부에 대한 공포로 치환하는 것이 면역의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에스포지토는 근대적 면역화 메커니즘이 오히려 현대에 와서 본격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가 푸코의 생명정치에 주목하는 이유다. 신자유주의에서 생명은 정치의 외부가 아니라 생명이 곧 정치의 장소다. 생명에 대한 위험은 무차별적이며 당혹스런 공포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언제가 통제하고 조절가능한 리스크로 간주되고, 위험의 요소들은 분류되고 조절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전이 일어나는데 리스크가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은 역으로 통제하기 위해 리스크를 인위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보험을 팔기 위해 특정 질병의 위험성을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사회의 불온한 담론을 유포하는 자들을 차단하기 위해 인터넷 상의 프라이버시 침해사례를 집중적으로 유포하는 식으로 말이다. cctv가 대대적인 범죄의 위험성과 함께 일반화된 것처럼. 

      면역화된 정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전지구적 질서와 생명정치와 결합되어 더욱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진화 중에 있다. 가령 에이즈 감염은 성소수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동반한다. 중동호흡기질환(MERS)과 IS는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기묘하게 얽힌다. 일찍이 나치즘이 "자기 면역화에 대한 완벽한 지향" 속에 자기와 타자의 파괴를 실천했던 것처럼 면역화사회란 죽음으로 달려가는 생명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면역의 또 다른 길은 가능한가?



      이제, 면역은 의학적인 문제를 넘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태도와 감수성으로 확장되고 있는 듯 하다. 따라서 면역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는 단순한 유비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 생명과 정치의 문제다. 

      에스포지토는 면역에 대한 통념과 지배적인 정치질서를 전도시키기 위해 면역에 대한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면역’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이무니타스(immunitas)’이다. 원래 ‘이무니타스’는 법과 관련된 용어다. ‘의무를 면제받다’, ‘직무에서 자유로워지다’, ‘세금을 면제받다’ 등의 의미다. 이 말은 무누스에서 파생됐다. 무누스는 의무, 책임, 선물 등을 뜻한다. 여기에 부정을 나타내는 ‘인’이 붙어서 만들어진 것이 ‘이무니타스’이다. 반면 ‘코무니타스’는 ‘무누스’와 ‘더불어/함께(cum)’ 있음을 뜻하며, 이것이 ‘공동체’의 어원이다.(김상운 해설 중)



      얼핏 보면 에스포지토의 공동체론은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 그는 바타이유와 블랑쇼, 낭시의 공동체, 내부로만 갇히지 않은 공동체의 이념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번역자에 따르면 그에게 공동체는 "단일한 개체이기를 포기하고 주체를 가로질러 주체의 변화로 향하는 것, 감염과 상처에 노출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것은, 고유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역설이다."


      다만 김상운이 지적한 것, “에스포지토가 이 글에서 언급되는 니클라스 루만을 비롯해 포스트휴먼에 대한 선구적 논의자인 도너 해러웨이나 페터 슬로터아이크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점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적 몽상을 단호하게 배격한다는 점에 있다”는 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즉 “면역과 자기보존 욕망이 리스크의 감각을 부추기는 그런 시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보존과 리스크가 악순환을 이루고 있는 시대”에서 포스트-휴먼 혹은 포스트-자기(SE)란 무엇인가?

      에스포지토는 면역의 부정이 아니라 면역의 다른 방법을 고민하는 듯 하다. 자기보존에 대한 욕망이 없이 생명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감염과 상처에 노출되는 것을 무한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따라서 모든 사회화의 회로를 차단하는 면역, 공동체의 의무와 관계로부터 배제되는 이무니타스가 아니라 다른 공동체를 구축하려고 할때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코뮤니타스라는 이념이다. 

      즉 면역화의 과잉으로서 이무니타스 이전에 코뮤니타스가 민주주의의 원리로서 작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작동의 도착적 양상이 이무니타스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코뮤니타스를 경유해 다른 공동체, 다른 민주주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면역이란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는 갈등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시간이다.  

      이때의 면역이란 주체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늘상 갈등의 요소들 사이에서 구성되는 주체의 다른 길을 모색할 때에만 역전될 수 있다. 그래서 면역화의 부정이 아니라 면역의 과잉이 가져온 면역의 부정적인 방식과 단절해야 한다. 사회의 모든 회로와 단절하고 자기 자신의 역량을 소멸시키는 그러한 면역이 아니라 외부의 이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으로서의 면역, 그래서 자신을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코뮨적 영량으로서의 면역 말이다. 



      메르스가 무엇이었냐고 묻거든


      이런 의미에서 메르스 사태가 무엇이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메르스라는 사건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에 대항한 것인가로 질문을 바꿨을 때 좀 더 구체적인 답들을 발굴해낼 수 있다. 우리가 대항한 것은 박근혜인가, 아니면 바이러스인가? 

      바이러스를 제대로 물리치지 않은 박근혜의 무능한 통치에 대한 불안은 종종 노무현의 신종플루 대응과 비교되곤 했다. 하지만 '자가격리'라는 극단적인 이무니타스적 조치가 노무현의 신종플루 대응부터 진행되었다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바이러스의 공포 앞에서, 공공병원의 턱없는 부족 앞에서 자가격리가 차선의 합리적 선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응들이 실상 근거없는 통념이나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에 기댄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치중립적인 과학이란 몽상에 불과하기에 오늘날의 미신은 늘 과학의 입을 빌린다. 


      신종플루가 전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2009년, 각국의 대응들은 어떠했던가. 레바논은 뺨에 키스를 금지시켰다. 서구의 각 나라들은 신종플루의 진앙지를 멕시코로 지목했으며, 멕시코의 국경을 봉쇄했다. 물론 그 진앙지가 미국이냐 멕시코냐는 여전히 논란거리이지만 미국을 (감히) 봉쇄할 수는 없었으므로 멕시코가 신종플루의 진앙지로 지목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종플루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멕시코 여권을 소지하지 않고도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점이 비극이었을 뿐이다. 

      이집트 정부는 돼지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모든 돼지들을 잠재적 적으로 간주해 30만마리를 모조리 도살시켰다. 멕시코 정부의 초기대응 실패는 너무도 유명하지만 박근혜 정부를 두고 멀리까지 비난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이 모든 사례들은 재난에 대한 지배 엘리트들의 아노미상태를 보여준다. 그들은 오로지 면역화정치의 과잉만을 경쟁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바이러스라는 낯선 손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에 대한 훈련이 안되어 있다. 외부의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차단하는 것이 정치능력을 한없이 무능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지배 엘리트들의 엉뚱한 대응들이 잘 보여준다. 

      다만 뼈아픈 것은 우리의 문제다. 메르스 사태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에 대항한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2008년 촛불집회로 발전한 광우병 사건에서 찾아야 할 듯 하다. 촟불 집회는 무엇에 대항한 것인가.

      2008 촟불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금지'의 요구는 작은 출발이었을 뿐이다. 그때 우리는 대체 우리에게 '광우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집단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냈다. 촛불을 켜는 시간이란 우리에게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의 본질까지 도달하는 시간의 생성이었다. 

      우선 '미국산 소고기가 싫으면 개인적으로 먹지 않으면 된다'는 비난에 반발했다. 개인의 현명한 소비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장되었고, 소가 왜 머리에 구멍이 뚫리는 병이 걸리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게 되었다. 광우병에 걸린 소가 국제기구의 합법적인 틀에서 유통되면서 모든 위험이 개인화되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광우병 사태의 원인은 미쳐버린 소가 아니라 소를 미치게한 보다 깊은 원인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게되지 않았던가.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난폭하게 단절하는 면역화 정치에 대항해, 광우병이 의미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신체는, 역량은 좀 더 증대되었다. 에스포지토라면 코뮤니타스의 이념이 실현된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사건이란 없다. 그러한 이념은 여전히 먹거리만의 문제, 비싼소고기와 싼소고기의 문제, 낯선 것에 대한 공포와 배제의 충동과 함께 충돌하며 2008년 촛불을 형성했던 것이다. 

      메르스의 야단 법석을 겪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다. 메르스가 무엇이었는가를 물으려면 2008년 광우병이라는 낯선 손님과 함께 뒹굴던 그 해의 광장을 함께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