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 부는 ‘공정해고’ 바람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헬조선의 딸과 아들
“이제는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지난 8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의 다짐이다. 한달이 조금 더 지나고 노사정위는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냈다고 발표했다. 이 합의안의 백미는 무엇보다 ‘일반해고’의 도입이다. 계약과 계약해지가 일상이 된 불안정노동자들에게는 별 관심을 못끄는 ‘일반해고’는 과연 철밥통 정규직들만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일까? 계약기간과 무관하게 저성과자가 되면 언제든 퇴출이 가능하다는 것은 계약과 계약해지라는 제도적 약속마저 무화시킨다. 퇴출이란 쌍방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자의 명령권이다. 따라서 이번 노사정합의는 IMF로 시작된 노동에 대한 집요한 공격이 마침내 정점을 찍은 모양새다.
대통령이 결단하고 실천할 때마다 재앙이 되는 이 나라를 두고 언젠가부터 ‘헬(hell=지옥) 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한국사회는 가난이 대물림되어 역병처럼 퍼져나가는 조선으로 퇴행 중에 있다. 헬조선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무형의 족쇄와 굴레의 촘촘한 망에 청년들을 가두는 감옥사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은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한”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들을 대신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얼마전 상영한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황정민)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내는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꼬”
덕수의 가슴벅찬 헌신과 선한 호의에는 오만한 비수가 숨겨져 있다. ‘내가 이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는 독기 가득한 독단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라 왼쪽가슴에 오른 손이 자동으로 올라가던 시대를 추켜세웠을 때, 그것은 아버지 시대에 대해 딸이 가질 수 있는 존중의 감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번도 아버지의 딸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나라를 일으켜 세운 아버지였고, 국가였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은 무능력한 아들 딸들을 대신해 결단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한번도 국가의 미래를 젊은 세대들에게 맡긴 적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국가의 미래를 넘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건국신화는 아버지 세대의 몫이다.
파독광부로, 베트남 전사로, 사우디 수출 역군으로 세운 한국은 그들이 수출한 청춘에 대한 보상물이 된지 오래다. 그들의 딸 아들은 아버지의 국가에서 시민이 될 자격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딸 아들을 대신해 결단을 내리면 내릴수록 그들은 무능력하고 패기없는 조국의 루저들이 된다. 헬조선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국가에 대한 조롱이다. 국가로부터 배제되었지만 청년세대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을 맹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제된 장소에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그려내는 지옥도를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냉소와 조롱으로 뒤범벅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자리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다시 아들, 딸들을 국가로 호출했다. 청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기득권을 챙기던 아버지들을 정리하겠다고 나섰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채 밥만 축내고 있는 무능력한 아버지들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노동개혁의 목표는 청년들의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보다 쉽게 구하고 더 많은 청년들이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있는 공정하고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임금피크제와 공정해고에 대한 해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 9월 7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회의, 김무성 대표의 발언.
박근혜 대통령의 잔혹한 평등주의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에 청년의 자리는 없다. 더불어 아버지의 자리도 사라지고 있다. 그들은 국가에서 추방되어 헬조선의 난민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에는 대체 누가 있는가. 누구를 위하여 대통령은 입술을 앙다물며 다짐을 했을까?
그것은 바로 국가 자신이다. OECD 회원국으로서의 국가, 수출대국으로서의 국가, 경제대국으로서의 국가. 화폐가 24시간 막힘없이 흐를 수 있는 국가 말이다. 화폐가 흐르는 자리에 아버지의 장시간 노동이 있었고, 청년세대들의 ‘노오력’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허리띠를 졸라매도 즐거운 나라사랑은 불가능하다. 노오력은 ‘괴로우나 괴로우나 나라사랑’하라는 국가의 명령이다. 헬조선 사이트 대문에는 태극기와 함께 이 문구가 박혀있다.
‘각자도생’이란 각자 노력해서 살아남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 유행어가 된 ‘각자도생’에는 각자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일어서라는 폭력이 포함된다. 여성혐오와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 동성애자 혐오,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혐오가 일어나는 이유다.
오늘 박근혜 대통령은 ‘무능력한 꼰대’라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공정한 기준이란 기준에 대한 합리적인 척도를 마련한다는 뜻도 있지만 기준선의 이하를 처리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있다. 그리고 이는 종종 현실에서 역전된다.
공정한 해고의 기준이란 특정한 집단을 기준선 이하의 사람들로 지목하고, 여론은 이들을 주목한다. 이들의 무능력함은 불공정한 무임승차의 파렴치함이 되어 대중들의 분노를 산다. 그렇게 되면 공정한 기준에 따라 기준선 이하의 사람들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된다. 다시말해 공정한 기준 다음에 기준선의 위와 아래가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공정한 기준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청년들의 일자리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말인줄을 알면서도 그들, 나와는 다른 그들의 ‘기득권’은 불공정하다는 정서를 박근혜 정부는 간파했다. 노사정합의까지 박근혜 정부가 집요하게 공격한 것은 ‘무능력하지만 시대 잘 만나 밥만 축내고 있는 꼰대들’에 대한 불만이었고, 이 최전선에 국가의 아들, 딸들을 불러낸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을 찬양하던 대통령은 이제 헬조선의 딸과 아들이 들고 있는 죽창으로, 오늘의 새로운 적으로 지목된 무능력한 노동자들을 겨누고 있다.(헬조선 사이트 대문에는 ‘죽창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구호가 박혀있다.)
대통령이 감복한 것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던 덕수와 덕수의 처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 였던 것이다.
이렇게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다시금 입증했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때 국가는 사건의 피해자였던 세월호 유족들과 메르스 감염자들을 사회의 질서를 헤치는 가해자로 역전시켰다. 보상금을 타먹으려는 불공정한 사람들, 안전한 사회를 위협하는 ‘슈퍼전파자들’이 된 피해자들은 비난과 협오의 대상이 되었다. 각자도생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는 게임의 법칙 앞에 정작 국가는 제외된다.
박근혜 정부의 평등주의는 잔혹하다. ‘공정해고’라는 말은 잔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나도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열망의 불가능함이 너도 나처럼 같이 짤려야 공정하다는 자기 파괴적 욕망으로 전화되고 있다. 노동시장 양극화를 해소하는 방법은 격차를 줄이는 방법도 있지만 한쪽의 극을 없애는 길도 있다. 정규직은 시대에 뒤쳐진 공룡으로, 모두의 어깨에 짊어질 짐으로, 염치없는 기득권을 지닌 희귀한 인종이 되었다. 공정해고는 그 극을 없앨 것이므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욱 기우뚱해졌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귀퉁이에 헬조선이 모두를 향해 평등하게 입벌리고 있다.
축 내는 자들의 정치
노상정위 합의문에는 ‘세대간 상생 고용’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정규직의 시간을 뺏어 일자리를 더 많이 늘리겠다는 것이다. 정규직의 임금을 줄여 새로운 일자리를 늘리겠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미 정규직들조차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권고사직, 고과성적 미달자 퇴출, 대기발령 등의 형태로 노사가 맺은 단체협략이나 취업규칙들의 정년은 이미 파기되고 있다. 취업포탈 잡코리아가 2015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이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퇴직 예상 연력은 52세다. 20대의 경우 48세가 되면 노사합의와 취업규칙으로 제도화된 정년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고용이 종료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일반해고는 이미 일반화된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번 노사정위는 무엇을 합의했는가? 은수미 국회의원에 따르면 회사의 사정상 해고할 때는 위로금과 명예퇴직금을 지급해왔으나, 개인의 무능력으로 인한 해고에는 그럴필요가 없다. IMF 위기때 노동자들을 해고하며 건네준 위로금과 명퇴금을 절약하면 총자본은 10조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다. 이 10조는 주식의 배당금이나 사내보유금으로 축적되어 화폐의 흐름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다.
세대간 상생고용이란 오아시스가 아니라 잔인한 신기루다. 고용을 세대의 문제로 만들고 서로에게 가해자, 사회를 좀 먹는자, 밥만 축내는 자들로 겨누게 만드는, 국가가 만들어낸 굴절된 환영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이란 비용절감과 같은 말이다. ‘비용절감’이란 ‘축내는 자들’로 인해 정당화된다. 장애인과 노숙자가 나에게 돌아올 실업수당을 축 내고 있고, 노인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연금 때문에 오늘 나의 세금이 축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청년들의 일자리가 모자라고, 아버지들의 이기적인 장시간 노동이 청년세대들의 노동시간을 빼앗고 있다. 3D 업종을 기피하고 놀고 먹는 청년실업자들 때문에 피땀흘려 일구어온 국가가 위태롭다. ‘축 내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자도생의 정치’는 각자의 시간을 둘러싼 싸움이다. 이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각자의 노동시간은 강탈당할 것이다. 노동이 가능한 시간은 초과적인 착취로 강탈당하고, 노동에서 배제된 시간은 삶의 시간 전체를 훼손시킨다.
하지만 다른 정치는 불가능한가? 지옥에서 부르는 모두의 노래는 불가능한가? 축내는 자 각각자의 정치가 아니라 축내는 자들 끼리의 연대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기묘한 평등주의로 인해 헬조선으로 고여든 축 내는 자들은 이미 다수이지 않은가!
* 이글은 오마이뉴스 10월 8일자에 실린 원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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