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녀에게 '도끼'를 들게 했는가?
-류진희, 「‘무기 없는 민족’의 여성이라는 거울」, (문화과학 83호)
문화(수유너머N 회원)
류진희는 「‘무기 없는 민족’의 여성이라는 거울」(문화과학 83호)에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혐오의 역사성을 추적한다. ‘여성혐오’의 원천이 산업화를 내세운 군사독재 정권에서 추동되는 것은 왜일까. 이것은 실로 긴 역사가 있는 것인데, 이 글은 ‘해방기’ 소설들을 통해 식민과 해방이후의 건국과정에서 겪은 남성성의 위기와 여성이 타자화된 순간들을 살펴본다. 해방기는 건국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에 앞서 계속해서 적과 나를 구분하는 어떤 경합의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국가’나 ‘부국강병’이라는 목표에 걸맞지 않는 대상은 타자화 되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공포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무기 없는’남성에 비해 여성에게는 ‘섹슈얼한 육체’라는 무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당치 못한(?) 무기를 가진 여성들이 자본주의에 끼어들어 경제를 교란하고 민족을 망신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문제시되었던 것이다. 이는 해방기 소설들이나 전후 소설들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당대 소설에서 ‘퍼머넌트’를 한 여성들은 ‘무기없는 남성’ 혹은 ‘지사적 남성’에 비해 얼마나 철없고 해로운 존재로 묘사되었던가.
주요섭의 「눈은 눈으로」
물론 반대의 경우, ‘민족국가’나 ‘부국강병’이라는 목표에 걸맞는 여성들은 칭송의 대상이며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우리에게는 「사랑손님과 어머니」(1935)라는 소설로 유명한 작가 주요섭의 작품에 당대에 장려되던 여성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할 만한 것이 있다. 주요섭의 「눈은 눈으로」(1947) 1라는 작품을 보자.
때는 해방을 몇 달 앞둔 시점이다. 평양의 한 동리에는 ‘김소사’라 불리는 과부 여인이 살고 있다. 그녀는 몸뻬를 입어도 맵시가 나는 여자. 동네에서 인정받는 품행방정한 여자다. 동리 사람들은 그녀가 몇 살인지, 무슨 사연으로 과부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여자는 삯바느질을 하면서 혼자 살고 있는데 솜씨도 좋고 값도 싸서 인기가 좋다. 그런데 평소 말을 별로 안 하는 이 여자는 말할 때면 언제나 조선말만 고집하였다. 때는 ‘국어상용(일본어 전용)’을 강요하는 일제 말기인데 말이다.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도 그녀는 조선말을 고집하면서 되려 사무원들에게 대들기 일쑤다. 뿐만 아니다. 그녀는 신사참배 또한 고집스럽게 거부한다. 이 역시 관청에서 알고 따진다면야 문제가 될 일이지만, 동리 사람들이 대신해서 신사참배 명부를 내어주는 등의 도움으로 화를 모면한다.
그러던 중 해방의 날이 온다. 그리고 만세소리와 함께 만주 등지에서 피난민들이 밀려온다. 그런데 피난민이라고 모두 같은 피난민이 아니다. 작품속에서 피난민은 조선인/일본인으로 나누어진다. 김소사나 다른 동리 사람들 자신들도 역시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나, 조선인 피난민은 있는 힘껏 거두어줄 대상이며, 일본인의 경우는 골칫거리요, 배척의 대상이다.
바로 이날 아침까지 들이밀리는 일본인 피란민 사태는 평양 조선인 시민들의 큰 두통거리요, 염려요 절망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동포 피란민을 맞는 시민들은 멀리 떠나있던 친지들을 맞아들이는 기분으로 돌변했다. 바로 아침까지 누구나가,
“요놈의 왜종자들이 자꾸자꾸 쫓겨와, 바로 저희 나라로 가지 않구 여기서 주저앉기만 하니 어떡헐 작정이란 말인구.” 하고 짜증을 내던 시민들이 오후부터는,
“아, 동포 여러분! 어서오십시오....(중략)”
그리고 김소사의 과거사가 밝혀진다. 알고 보니 김소사는 관동대지진 때 남편과 자식을 잃었다. 이러한 과거사는 김소나나 동리 사람들이 피난 온 일본인에게 배타적인 것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 여자? 한복으로 변장한 왜년!
김 소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젊은 여인을 왈칵 떼밀었다. 뒤로 밀쳐진 여인은 엎드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에이, 이 비겁한 종자!”
하고 김 소사는 유창한 일본어로 소리질렀다.
...
김 소사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감각했다.
복수!
눈은 눈으로 갚고, 이빨은 이빨로, 도끼는 도끼로 갚고!
...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잃었던 그때를 생각하며, 일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복수를 할 것을 다짐하고 도끼를 든다. 하지만, 그 순간 동네 신사神社에 불이 나고 김소사는 개인적 복수를 거둔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김소사는 도끼를 거두었으나 그렇다고 일본 여성에 대해 복수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복수를 위해서라고 다짐하는 것 뿐이다.
무엇이 몸뻬만 입어도 맵시 있는 그녀에게 얌전한 바느질 솜씨를 가진 김소사에게 자식을 데리고 피난 온 일본 여성을 향해 도끼를 들게 했을까. 그것은 혹시 해방기라는 혼란한 정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성의 몸부림은 아닐련지. 이는 다른 누군가를 '적대'시할 수 있을 때에만이 조선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당대의 여성들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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