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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 "세상은 아름다워(Die Welt ist schon)"

아이패드2가 출시된 11일, 뉴욕 피프스 애비뉴 애플스토어는 밤 늦은 시간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두 시간 넘게 줄을 서야 매장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파는 계속 몰려들었다. 애플에 따르면 일부 매장에서는 아이패드2를 사기 위해 늘어선 줄이 지난해 아이패드 출시 때보다 두 배 이상 길었다고 한다. 이날 아이패드2를 가장 먼저 구입한 사람은 러시아에서 온 정보기술(IT) 전문가였는데, 그의 행운이 단지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 그는 전날 낮부터 비를 맞아가며 28시간 동안 줄을 선 결과였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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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을 선두로 하는 디지털 아이템들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열광하고 있다. 그 작고 앙증맞은 기기들은 가볍고 편리한데다가 또 어찌나 섹시한지! 콤팩트한 디자인, 쉽게 흠집이 나지 않는 강철 유리 커버에, 매끄럽고 광택이 흐르는 피부의 감촉은 부드럽게 손안에 감겨오기에 충분하다. 아! 만지고 싶어, 소유하고 싶어! 널 내 품에 넣고야 말겠어! 한 달 치 월급을 쏟아부어 마침내 손에 쥔 그 소중한 것을 지하철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마치 보들레르의 ‘여행으로의 초대’에 응답하듯, 온통 보랏빛과 금빛의 세상, 사치와 고요, 관능뿐인 세계로, 그 환상적인 판타스마고리아로 넋을 잃은 채 빨려들어간다.

 

차가운 금속성이 뿜어내는,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막 건져올린듯한 기계 생산물의 아름다움에 이토록 매혹당한건 우리가 처음은 아니었다. ‘신즉물주의’라고 불리었던 1920년대 독일의 사진가들은 이 기계의 외관에서 새로운 시대의 미학을 발견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히틀러에게 권력을 내주게 된 1933년까지의 시기, 즉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이었다. 독일의 산업화는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나 프랑스와 같은 다른 서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하여 상당히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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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지가 충만했던 온건 좌익의 사회민주당은, 여러 새롭고 긍정적인 정치제도들을 도입해 신생국 독일의 좌표를 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정치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시급한 경제문제의 해결이었다. 1,320억 마르크의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패전국 독일이 아니라 승전국이었어도 갚지 못할 금액이다. 공화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찍어’ 해결하는 최악의 방식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인플레에의 늪에서 허덕이는 공화국을 건져주었던 구세주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독일에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경제가 살아나도록 도와주면, 독일은 그 돈으로 공장을 돌리고 산업을 일으켜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갚아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 미국은 유럽 경제를 살려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고, 유럽 경제가 살려면 독일이 살아나야 했으니, 모두들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1923년 미국의 경제적 원조로 독일은 ‘통화 안정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동시에 여러 분야에서 미국의 강한 입김이 독일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경향은 구체적으로는 ‘과학기술 낙관주의(Technikoptimisumus)’로 발전했다.

 

특히 미국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의 자서전을 통해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열광적 반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전쟁을 겪은 독일인들은 처음에는 기술, 과학, 산업 등에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포드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과학낙관주의’로 지난날 지녔던 과학부정론이 눈 녹듯 사라졌을 뿐 아니라, 본격적인 과학숭배로 발전했다. 사진기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환상 속에서 도시주의와 기술적 유토피아니즘’을 탄생시키는 주요 매체였다. 이 사진들에는 그 때까지 기술을 대하는 적대적인 태도, 공포의 그림자가 이젠 거의 행복감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즉물주의를 대표하는 사진가 랭거 파치(Albert Renger-Patzsch, 1897-1966)는 이 작품들을 담은 사진집 『세상은 아름다워 (Die Welt ist schön)』(1928)를 출간했다. 그의 사진들은 기술적 풍경을 대상으로 하여, 그 일부분을 극단적으로 자르거나, 날카로운 초점으로 형태를 묘사하고, 혹은 다양한 부감법을 사용하거나, 명암을 극대화시킨 드라마틱한 구성 등을 지닌 독특한 기법을 통해 산업화되어가는 근대 세계를 ‘객관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치는 각 소재의 독창적 형태에 관심을 쏟으면서, 자연은 물론 산업에서도 그런 미학을 추구하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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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기계의 낭만적 풍경화’라고 불린 이 사진들은, 공장과 나란히 배치되어 자연스러운 풍경화처럼 생명성을 부여받았다. 공장에서 생산된 기계의 외관이 또 하나의 자연처럼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 매끄러운 감촉에 이끌렸다.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산업 발전과 테크놀로지는 이 사진들에서 다시 재현되면서 아름다운 테크놀로지의 풍경화로 자리매김 되었다.


유기적 자연의 옛 정물화, 풍경화의 자리에 이제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일 얼굴을 바꾸는 두 번째 자연, 새로운 자연의 풍경화와 정물화가 자리잡았다. 산업과 테크놀로지가 이루는 새로운 자연 풍경이 생산수단의 차원에서 실제적인 진보를 보여주며 위용을 자랑하고, 대중들은 여기에 도취되고 매혹당했다. ‘진보’라는 믿음이 대중들 사이에 확산되는 현상이 이 신즉물주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날개를 타고 파급되었던 것도 충분히 상상할만하다.

 

그러나 역사가 전진할 때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산업의 진보가 출발점으로 간주된다면 자연에서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으로 오해하는 신화적 오류가 발생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 허구적 진보 개념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어떤 노동자의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채 기술이 일구어낸 낭만적인 도시풍경의 등장! 벤야민이 랭거 파치의 사진들을 분석하면서 ‘비참한 상태를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유행적 사진술의 방법’에 관한 지적은 잘 알려져 있다. 신즉물주의에 담겨있던 정치적 의미는 많은 경우 혁명적 반영들을 전환시킴으로써, 소비수단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산업과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풍경은 생산수단의 차원에서 실제적인 진보를 보여준다. 그러나 자연과 역사의 혼동은 오류를 낳는다. 산업의 진보가 출발점으로 간주된다면 자연에서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으로 오해하는 신화적 오류가 발생한다. 생시몽주의자들이 ‘진보가 가까운 미래의 전망이라는 동화 속에서 모든 사회적 대립이 사라진다’라고 외쳐도 생산관계의 차원에서 계급착취는 변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후기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 노동계급은 테크놀로지의 진보와 역사의 진보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잘못된 정치적 목표를 설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이 기술적 유토피아 속에서 모두가 행복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 땅에서 인류의 행복한 지상낙원이 실현될 수 있을까? 독일 노동계급의 오류는 여기에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는 방향과 자기 계급이 움직이는 방향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오류와 착각!

 

이런 생각은 공장노동 자체가 정치적 성과라는 환상으로 이어졌다. 공장 노동은 기술적 진보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노동자의 것이 아닌 (공장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간과되었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통제력이 진보했음을 인정할 뿐 사회가 퇴행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회적 퇴행이 2011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 또한 마치 기술의 발전이, 우리 자신의 계급이 움직이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과대망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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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blog.naver.com/prologue님의 블로그 ‘강남역’ 모습

 

 

‘대도시가 발하는 근대성의 광채가 진보의 물질적 증거를 눈앞에 들이대고 있었는데, 이런 환등상의 정체를 어떻게 간파할 수 있었을까? 공적 담론에 침투한 진보의 신화적 비유가 대중의식의 신비화임을 어떻게 폭로할 수 있었을까? 반증을 기록한 사료를 뒤지면서 벤야민은 모든 학문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보의 의미론을 거스르는 저항 이미지(counter-image)를 발견하려 했다.’ (수잔벅모스, <아케이드 프로젝트>) 불행히도 나는 아직 저항 이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판타스마고리아에 도취되어 달콤하고 매혹적인 꿈의 세계를 허우적 댈 뿐, 아직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글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웹진 <Weekly 수유너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