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갑자기 수백마리의 새떼들이 죽어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땅에선 천만에 가까운 동물들이 죽어, 그 핏물이 대지에 흘러넘치도다. 거대한 지진이 전에 없이 반복되고, 그로 인해 육지가 이동하며 지구의 지축이 흔들려 밤낮의 행로가 틀어지도다. 근대과학의 정수가 집약되었다는 원자력 발전소가 붕괴되고 폭발하여 방사능이 물과 음식은 물론 전세계의 대기로 퍼져가 죽음의 재가 되어 인간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그 미래마저 잡아삼키리라.” 정말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 것이 인간이 자행한 업보가 죽음의 인과로 되돌아오는 종말을 뜻한다면, 두 번째 것은 자연이 자신의 신체와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한 ‘정화’의 종말을, 세 번째 것은 과학이 만든 합목적적 세계가 그 근저에서 붕괴하는 종말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런 종말적 현상들 앞에서 종말론의 전문가들인 목사님들은 어떤 종말의 위협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다만 우상을 숭배하거나 여호와에 대한 신앙과 복종의 결여에 대한 신의 복수를 확인하고, 그로부터 ‘사함을 받은’ 자신들의 복락을 축복하고 있다. 반대로 종말론이라는 종교적 관념에 대해 비판하고 혐오하던 나 같은 사람들이, “이게 종말이지 종말론이 아니야”라며 농반진반 종말론자 흉내를 내고 있다. 이 역시 종말적 징후의 하나인지도 모를 일이다.
구제역에서 감지한 종말적 느낌이 이른바 ‘생명과학’에 의한 생명의 거대한 학살이라는, 다분히 생물학적인 형상을 수반했다면, 지금 일본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는 양자역학 내지 원자핵공학의 자기붕괴, 아니 자살이라는 물리학적 형상을 수반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단지 동물만의 죽음, 원자력발전소의 붕괴만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죽음의 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이미 방사능 물질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이르고 북극을 지나 다시 일본 인근의 한국과 중국에서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를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고 입을 모아 말하지만, 그 말이 단지 관리자들이나 당국자들의 잘못만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타당하지 않다. 그것은 관리상의 잘못 이전에, 방역을 위해 감염의 위험이 있는 동물을 죽여야 한다는 과학적 발상, 효율적이고 거대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원자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과학적 사고 자체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종말적 현상에 직면하여 나는 종말에 대해, 그리고 종말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신의 예정이나 분노에 의해 뜬금없이 닥쳐오는 그런 종류의 종말론처럼 종말에 대해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전국의 대지를 피로 흘러넘치게 한 종말적 비참에 대해, 전세계의 대기를 방사능 물질이 떠돌게 만든 이 종말적 사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종말이란 무엇인가? 내가 죽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를 구성하는 수백조개의 세포들의 공동체가 붕괴하는 것이고, 산소와 이산화탄소, 영양소와 배설물 등을 서로 주고받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가 종말을 맞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소, 돼지, 닭, 벼와 콩, 물과 대지, 미생물 등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 서로에게서 다른 무언가를 받는 하나의 순환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의 순환계가 해체되는 것이고, 더 이상 스스로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종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세계가 거대한 폭발 같은 걸로 소멸하거나 모든 생명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계를 존속하게 하는 지구적인 순환계가 해체되고 붕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이란 종교적이고 신학적 현상이기 이전에 자연적이고 자연학적 현상이다.
물론 자연적인 것이든 인공적으로 변환된 것이든, 어떤 순환계도 그저 국지적인 변환이나 절단에 의해 해체되지는 않는다. 끊어지거나 소멸된 무언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를 ‘잉여성’이라고 한다)이 있다면 그것은 변형된 형태로 지속된다. 잉여성이 부족하면 심지어 남의 장기까지도 끼워넣으면 살지 않던가? 종말이란 그 잉여성을 초과하는 강도의 순환계 파괴에 의해 닥쳐온다.
그렇다면 ‘종말론’이란 의식적이진 않아도 그런 종류의 종말을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그런 점에서 강한 의미로 그런 종말을 ‘예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입론’들, 그런 사고, 그런 발상들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순환계가 계속하여 생존하고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특정 목적을 위해 순환계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요소를 이용/착취(exploitation)하려는 발상이나, 순환계의 지속조건을 초과하면서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개발’하고 바꾸어버리려는 사고방식, 그것이야말로 정확하게 종말론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단지 “생존과 지속을 고려하지 않고 순환계를 착취하려 한다”는 말을 하는지 확인하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심지어 그런 말을 강조표시를 달아 강변할 경우에도 실제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약간 ‘과학적’ 방식의 조작적 정의를 덧붙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은 목적과 수단을 연결하는 관계 속에 네거티브 피드백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 혹은 그 관계에 반작용하는 항이 없는 선형적 관계 속에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 정의되고 작동하는 경우, 그 이론은 종말론적이다. 왜냐하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의 이용과 그것을 통한 ‘개발’ 내지 변환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든 내부적 요인에 의해서든 그 개발의 속도를 제한하고 브레이크를 걸며 때로는 마이너스의 방향을 향하게도 할 수 있는 되먹임의 구조나 비선형적 항들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어떤 입론도 실제로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주어진 모델을, 즉 착취와 개발을 그대로 밀고 갈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방사능처럼 뒤먹임하고 싶어도 ‘처리’는커녕 접근조차 난감한 경우라면, 이론적 되먹임이 실제로는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이론 종말론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이 순환계의 ‘운명’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 순환계는 종말론적 순간 이전에 이미 예정된 종말을 갖게 될 것이며, 종말 이전에 이미 종말을 맞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종말론’이라는 관념 또한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종말론은 대개의 경우 종말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니 종종 그런 종말이 생각되고 말이 되어 나올 경우에도, 그런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부정한다. 종말에 대해 말하지 않는 종말론, 종말을 부정하는 종말론이다. 그런 방식으로 종말론은 종말을 만들어내고, 그런 종말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종말이란 말이 종말론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종말론이 종말이란 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근자에 빈발하고 있으며, 얼마전 일본의 거대한 재난을 야기한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거대한 재해들은, 심지어 그것이 어떤 순환계의 종말을 야기할 경우에조차 종말론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종말을 함축하는 어떤 변환의 기획도, 순환계의 착취/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종말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반면 구제역으로 인한 동물들의 ‘학살처분’은, 소, 돼지의 멸종이라는 종말을 포함하지 않고 있음에도 명확히 종말론적이다. 심지어 그것은 ‘방역’이라는 방어와 보호의 논리를 명시적으로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이다. 왜냐하면 그 ‘방역’조차 사실은 판매나 수출을 통해 인간들이 얻을 이익의 계산적인 목적을 위해, 동물들의 순환계를 파괴하는 것을 ‘매뉴얼’화된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생산성을 위해, 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공장 같은 좁은 축사 속에 집어넣고 사료를 투입하여 고기를 생산하는 기계로 만들어버린 공장형 목축 자체 또한 종말론적이다. 거기에선 소나 돼지가 다른 것들과 맺는 순환계를, 투입하는 요소와 산출하는 요소 간의 이항적인 관계 속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근본에서 해체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폭발적 힘을 제거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 종말적인 힘을 제거할 수 없을 일본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는 종말론이 어떤 식으로 종말을 만들어내는지를 종합적인 형태로 아주 잘 보여주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효율적이고 ‘값싼’(이는 극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용이 인근의 생명체들의 다양한 순환계를 파괴할 가능성은 이미 이론적으로 명확한 것 아니었던가?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기계적 및 건축학적 장치의 안전성이, 거기에 함축된 파괴와 종말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연기할 수 있을 뿐임 또한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거기에 더해 시공과 운영상의 오류, 노화 등에 따른 ‘종말’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던 것들에 대해, 그럴 리 없고, 그럴 수 없으며, 그럴 일 없다며 반복해서 부정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3만명에 가까운 일본의 인민들을 죽음으로 밀어넣은 것은 쓰나미가 아니라 바로 그 ‘안전한’ 원자력 발전소 아닌가? 그리하여 일본 전체를 종말적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그리하여 거기 살고 있지도 않은 나 같은 사람조차 종말론적 상황으로 떠밀어 넣고 있는 것은 바로 현대과학의 秘典과도 같은 원자력의 과학 아닌가?
이미 방사능 물질로 ‘오염’된 자연과 대지, 대기는 물론, 오염되어 죽은 시체조차 어찌 처리해야 할 줄 모르고 있다는 사태에서 종말론적 상황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직 어떤 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거대한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모든 종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원자력 과학이나 관료들의 발상에서, ‘원자력 르네상스’를 내걸고 그걸 전세계로 팔러다니겠다는 장사꾼 대통령의 태도에서 종말론적 상황을 보는 것은 아직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것 또한 종말론의 일부, 종말론적 상황의 일부일 것이다.
어떤 사태가 닥쳐오기 전에 그것의 징후를 알아보는 자를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고, 사태가 닥쳐왔을 때 그것을 알아보는 자를 지혜롭다고 한다. 사태가 닥쳐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를 ‘눈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닥쳐올 사태, 아니 이미 닥쳐온 사태를 보고 말하는 자의 입을 막고 그걸 듣는 자의 귀를 가리는 자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글 /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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